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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이백 이른 여덟번째 편지 - 2017년 12월 5일      

100년 편지

일송 김동삼 선생님께 -권용우-


  선생님께 삼가 문안올립니다. 오랫동안 문후드리지 못했습니다.

  올해가 선생님께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신지 80주기(週忌)가 되는 해입니다. 그 날이 1937년 4월 13일이었지요. 그 때,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사가 선생님의 유해를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으로 모시고 가서 장례절차를 밟았다고 했지요. 선생님을 추모하는 행렬이 이 곳으로 구름처럼 몰려왔다고 들었습니다.

천안 독립기념관(왼쪽)과 안동에 세워진 일송 김동삼 어록비(오른쪽)

  선생님의 59년이란 짧은 삶은 참으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878년 음력 6월 23일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 의성김씨(義城金氏) 가문에서 출생하셔서 대유학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으시면서 세상에 눈떠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은 러시아.프랑스.미국.영국.독일 등 세계열강들이 우리 조정(朝廷)에 대하여통상(通商)을 요구해왔으며,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출범하면서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정치적.사회적으로 급진적인 내정개혁(內政改革)을 추진하면서 민중들과 마찰을 빚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1895년 음력 8월 20일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날,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우리나라 주재(駐在) 일본공사(日本公使) 미우라 고오로(三浦梧樓)가 지휘한 일본군에 의해서 시해(弑害)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하는데, 이는 갑오변란(甲午變亂) 이후 명성황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였다고 판단한 일본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을미사변으로 인하여 대일(對日) 감정이 크게 악화되었으며, 이로써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義兵抗爭)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을미사변의 여파는 이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고종(高宗) 임금은 자신과 왕실(王室)의 안위(安慰)에 대한 불안을 느껴 러시아 공사(公使) 웨베르(Weber, K. I.)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공사관(公使館)으로 파천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왕(國王)이 신변의 보호를 위하여 왕궁을 떠나 외국의 공사관에 머물고 있는 것은 국가의 자주성을 훼손한다는 비판이 잇따랐습니다.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날이 높아지자 고종 임금은 1897년 음력 2월 20일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德壽宮)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고종 임금은 환궁 후 통치체제(統治體制)를 정비하고, 자주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국호(國號)를 조선에서 ‘대한’(大韓)으로 바꾸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여전히 세계열강들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일본의 침략의 손길은 나날이 거칠어져갔습니다.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고, 내정간섭(內政干涉)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의정서에는 한국의 독립과 영토의 보전을 확보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명분뿐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에 일본의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통감(統監)에 의한 내정간섭이 노골화되었으며 우리나라는 외교권(外交權)마저 박탈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통감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부에 자리잡고 앉아서 온 나라의 살림을 감시.간섭하고 있으니, 국왕이 대궐 안에 있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대신(大臣)들도 통감의 표신(標信)이 없으면 대궐 출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병(倭兵)들이 대궐 문을 지키고 있었으니, 나라가 있었으나 나라가 없는 터였습니다.

  이러한 나라의 사정을 지켜보신 선생님의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때로는 서울을 오가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시기도 하고, 또 때로는 민족문제를 고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첫 결실로 선생님께서는 1907년 이상룡(李相龍).류인식(柳寅植). 김후병(金厚秉) 등과 향리인 내앞마을에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신민회(新民會)가 추진하던 교육구국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특히 1906년 3월에 공포된 흥학조칙(興學詔勅)에 고무된 바 컸습니다.

  그런데, 이를 어찌한단 말입니까. 선생님의 이러한 신교육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나라가 일본에 병탄되면서 우리 2천만 겨레가 일제(日帝)의 잔혹한 질곡(桎梏)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抗日義兵)이 불길처럼 일어나 척왜(斥倭)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뼈에 사무친 아픔을 달래면서 중국으로, 또 어떤 이는 미국으로 망명(亡命)의 길에 올랐습니다. 이 무렵, 안동(安東)에서도 독립을 위한 망명의 길이 이어졌습니다. 그 앞자리에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 있는 김동삼에게 보내기 위해 가족들이 사진을 찍었다. 뒷줄 왼쪽 큰아들 정묵, 오른쪽 둘째 아들 용묵, 앞줄 왼쪽부터 큰손자 장생, 큰며느리 이해동과 둘째 손자 중생, 손녀 덕축, 아내 박순부와 용묵의 딸 귀생, 딸 영애, 둘째 며느리.

  선생님은 독립운동기지(獨立運動基地)를 건설하고자 만주로 고난의 길을 떠나셨습니다. 1911년 1월, 얼어붙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만주로 발길을 옮겨 정착한 곳이 류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였습니다. 이 곳에서 선생님은 이상룡.이동녕(李東寧).주진수(朱鎭洙).이회영(李會榮) 등과 뜻을 모아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이를 통해 만주에 이주한 한국청년들에게 농업을 장려하여 그들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조국독립의 씨앗을 뿌려나갔습니다. 때는 1911년 4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경학사 설립을 마친 후 이상룡.이동녕.이석영(李石榮).이철영(李哲榮) 등과 함께 군사훈련을 위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뒷날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온힘을 쏟았습니다. 이 때가 1911년 6월이었습니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7월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로 옮겨 신흥무관학교로 다시 태어났는데, 여기서 배출된 졸업생들이 봉오동(鳳梧洞) 전투와 청산리(靑山里)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대파하는 큰 전과(戰果)를 올렸다고 들었습니다.  이 모두가 선생님을 비롯한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의 피끓는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소규모의 한인촌(韓人村)에 소학교나 노동강습소를 세우고, 한인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며 계몽운동을 펴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훗날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을 조직하여 만주지방의 독립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또, 1914년에는 신흥학우단이 중심이 되어 백두산(白頭山) 서쪽에 비밀병영인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설하고, 단원들은 군사조직의 일원으로서 최후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지요. 이 때, 선생님께서는 백서농장의 최고책임자인 장주(庄主)를 맡아서 온힘을 기울리셨는데, 이것이 조국광복(祖國光復)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렇게도 바라셨던 조국의 광복을 보시지 못하고 차디찬 감옥에서 영면(永眠)의 길에 드셨습니다. 선생님, 이제 무거운 짐 모두 내려놓으시고, 천상(天上)에서 부디 평안을 누리시옵소서!

             권 용 우

단국대학교 법학과 졸업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 명예법학박사

단국대학교 교수(1974~2007)

현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주요 저서 : 불법행위론, 민법학논고, 민법학의 쟁점, 민사판례연구1(공저), 의료과오의 민사책임(공저), 북한민법연구(공저), 나의 삶 나의 꿈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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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13:35 2017/12/0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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