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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번째 편지 - 2018년 10월 16일      

100년 편지

오석 김혁(吾石 金爀, 1875~1939) 장군님께 -김학민-


1950년대 중반,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삼일절이나 광복절 즈음이면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도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계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때는 너무 어려 그분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셨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묻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제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우리 역사와 사회의 현실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어릴 적 기억이 떠올라 아버지에게 그분에 대해 여쭈어 보았습니다.

오석 김혁 장군

그분이 바로 당신, 김혁 장군님이십니다. 아버지는, 김혁 장군께서는 병자호란 때 의병장이신 능주목사 김원립(金元立)을 중시조로 하는 우리 집안의 근친으로, 대한제국의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정위(正尉)로 근무하다가 일제에 의해 국권이 찬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지도한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북만주 지역의 임시정부 격인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독립투쟁을 총지휘하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0년여의 옥살이 끝에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경주김씨갈천공파 집안은, 법부(法部) 참서관(參書官)을 지내신 장군님의 아버지 김태식(金泰植) 선생처럼 대대로 문신으로 출사하였지만, 장군님께서는 무관이셨습니다. 세도정치와 당파싸움으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인을 택하신 것입니다. 장군님은 1900년 한국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참위로 임관되어 고종황제 직속의 시위연대에서 근무하다가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됨으로써 군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관이 되었지만 자기가 몸담은 군대 자체가 해산되어버렸으니, 당시 장군님의 그 비통한 심정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군님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고 큰 뜻을 세우셨습니다. 장군님께서는 1909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찬탈되자 곧바로 압록강 연안의 안동현과 북만주지역을 순방하며 독립운동의 근거지들을 찾아보셨습니다. 그리고는 귀국하여 1912년 대종교에 입교하셨습니다.

대종교 입교는 장군님의 무장독립활동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대종교는 단군과 그 홍익인간 정신을 믿고 모시는 신앙공동체였기 때문에 자연 민족의식이 뚜렷한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장군님은 대종교 조직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무장투쟁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셨습니다. 그것은 대종교 쪽의 자료에서도 확인됩니다. 태극도의 경전인 <진경>에는 ‘용인 사람 김혁’이 찾아와 여러 사정을 이야기하여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이 여러 군데에 나옵니다.

1919년 3월 28일, 당시 기거하시던 용인군 기흥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장군님은 이에 참여한 후 그해 5월 만주 무송현으로 망명하셨습니다. 장군님께서는, 1919년 8월 흥업단의 부단장으로, 1920년 안도현 삼인방에서 홍범도, 이청천 등과 조직한 의용군의 부단장으로, 1921년 밀산현에서 출범한 대한독립군의 군사부장으로, 1922년 만주의 통의부 군사부감으로, 1923년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의 국민위원으로, 1925년 영안현 영고탑에서 결성된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 겸 성동사관학교 교장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아아, 그러나 1928년 1월 25일, 장군님의 조국독립을 위한 큰 뜻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날 오전 8시경 중동선 석두하자에서 신민부 총회를 주재하던 중 일제 경찰의 습격을 받아 유정근 등 신민부 중앙 간부 10여 명과 함께 체포된 것입니다. 장군님은 일제의 신의주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신의주감옥과 평양감옥에서 7년, 서대문감옥에서 1년의 옥살이를 하던 중 병환이 위독하여 1935년 5월 26일 가출옥하였으나, 강원도에서 요양하다가 1939년 4월 23일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장군은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의 야산 기슭에 초라하게 묻히셨다가, 해방된 지 30여년만인 1974년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셨습니다. 1985년, 신민부 시절 장군의 부하였던 이강훈(李康勳) 전 광복회장이 건립추진위원장을 맡고 저의 아버지가 실무를 맡으셔서 용인에 ‘오석 김혁 장군 독립운동기념비’를 세우려 했으나, 전두환 정권의 압력으로 만들어진 비석조차도 1987년 6월항쟁이 있고나서야 세우게 되었으니, 일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장군님을 대한 대접이 이렇게도 모질었습니다.

100년 전 암울한 마음으로 피폐해진 조국을 뒤로하고 압록강을 건너셨을 김혁 장군님과 같은 수많은 독립지사들과, 역대 독재정권들의 폭압에 맞서 끈질기게 싸워온 민주화운동가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그 100년 후인 오늘 삼천리강산에는 자주독립의, 민족평화의 꽃망울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천상에 계신 장군님도 이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짓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오석 김혁 장군님, 모든 걱정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히 쉬십시오.

             김 학 민

 

이한열 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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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15:04 2018/10/1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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