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마흔 여섯 번째 편지 - 2011년 2월 22일        

100년 편지
 

조명하 의사님, 의열투쟁 장소를 왜 타이완으로 선택하셨나요?-김형목-


   조명하(趙明河)의사를 대면한 지도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만남은 작년 8월 하순 동남아시아지역 항일운동유적지 실태조사를 접하면서 시작되었다. 타이페이 한인학교 교정에 우뚝선 동상은 24세라는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간 기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타이완과 단교(斷交)로 80년 전에 당신이 꿈꾼 이상도 많이 빛을 잃어지요. 그저 허전하고 안타깝고 아쉬움만이 남는군요.

▲ 조명하 의사

   이와 더불어 가장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는 왜 의열투쟁 장소로 타이완을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바처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기 위한 ‘중간지’로서 이곳을 선택하였나요. 그런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지만 상식적인 관점에서 이는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당시 뱃길은 상하이나 따렌보다 그곳으로 가는 여정은 결코 녹녹한 코스가 아니였습니다. 물론 당신은 일본인으로 변성명할 정도로 일본어에 능통하였기 가능할 수 있었겠지만 대부분 항일운동가 망명지는 중국 대륙이나 만주, 연해주와 멀리 미주 등지였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이주한인이 정착하여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었고, 이들은 항일단체를 조직하여 치열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타이완은 이러한 ‘울타리’가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곳은 일제의 직접적인 식민통치하에 있었고, 그런 만큼 활동영역은 상당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인에 대한 탄압과 감시도 만만치 않았으며, 저들은 한국인과 타이완인의 국제적인 연대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이곳에 온 지 반년만에 ‘구니노미야(久邇宮邦彦)척살’을 감행하였습니다. 누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은 채 단독으로 말입니다. ‘조명하 의거’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치열한 현실인식과 현지 상황에 정치한 분석에 따른 판단은 의거를 감행하는 원천적인 에너지원이었겠죠. 물론 앞으로 다가올 파장과 함께 무수한 번뇌와 고민도 당연히 수반되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역사적인 소명’으로서 인식과 실천은 잠자는 타이완인의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기폭제였지요. 1930-40년대 在中 한국인과 타이완인의 ‘동병상련’적인 연대는 이를 반증하지요.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얼마나 힘들었어요. 당신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대한 남아로서 기개를 만천하에 알렸지요. 얼마나 조국독립을 염원하였는지. 그리고 자연법에 기초한 호혜평등을 널리 파급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생각됩니다.

   타이중에서 ‘구니노미야척살’은 단순한 의열투쟁이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단순한 개인에 대한 울분이 아니라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그대로 실천하였답니다. 타이완인의 항일적개심을 일깨우려는 한 알의 밀알이었지요. 국제적인 연대를 도모하는 방편이 바로 타이완으로 이주가 아닌가요. 나아가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거듭나기 위한 몸부림이었겠지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당신의 이상이 더욱 그리워지는 요즈음입니다. 타이완과 더욱 우호적인 밑거름으로 당신의 영원히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선임연구원

조명하[趙明河, 1905. 4. 8~1928. 10. 10]

   황해 송화(松禾)에서 태어났다. 풍천(豊川)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송화(松禾)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했다. 그는 독학으로 1926년 군청서기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신천군청에서 근무하였다. 가을 독립운동을 위해 도일(渡日)하여 명하풍웅(明河豊雄)으로 위장하여 정세를 관망하던 중 이듬해 11월경 타이완으로 활동지를 옮겼다. 타이중시 부귀원(富貴園)이란 차포의 농장에서 고원으로 일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928년 5월 일왕 히로히토(裕仁) 장인이자 군사참의관을 역임한 구니노미야 대장이 육군특별검열사로 온다는 사실이 알았다. 5월 14일 9시 55분 그는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커브길을 도는 순간 차에 뛰어올라 구이궁을 심장을 겨누어 힘껏 찔렸다. 보검도는 왼쪽 어깨 위를 스치고빗나가 운전사의 오른 손등에 꽂혔다. 다시 칼을 뽑아 구니노미야 목을 치려는 순간 호위군경이 달려들어 그를 차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현장에서 피체되어 2개월간 신문을 거쳐 특별공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28년 10월 10일에 순국했다. 1963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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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1 17:07 2011/02/21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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