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마흔 여덟 번째 편지 - 2011년 3월 8일        

100년 편지
 

'독립'과 '민주'의 공간에서 다시 만난 강우규 의사 -강성구-


   제가 선생님 성함을 처음 들은 것은 학교 다닐 때, 역사교과서를 통해서였습니다. '60대 백발 성성한 노인이 새로 부임하는 일본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다. 거사는 실패했지만, 교수형을 당하는 순간 까지도 당당하고 떳떳했다.' 이런 정도의 내용이 기억이 납니다. 머릿 속에 각인된 선생님의 형형한 눈빛이 선합니다.

▲ 강우규 의사

   선생님을 좀 더 자세히 알고자 자료를 검색해보니 의외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자료가 적음에 놀랐습니다. 다행히 기념사업회(www.1919kang.or.kr)도 발족하고, 평전도 두 권이 출판되었더군요. 기념사업회에 적힌 선생님께 대한 소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의사께서는 1859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하시어 (중략) 근대화 요구에 부응하여 개화사상을 수용, 기독교에 입교한 근대 지성이셨다. (중략) 1910년 경술국치가 있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1915년부터는 길림성 요하현에 한인 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신한촌을 건설하고 이곳에 동광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시기에는 신흥동에서 만세시위를 펼치었고 (중략) 그러던 중 일제가 3.1운동으로 고조된 조선 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회술책으로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워 총독을 교체할 때, 새 총독인 사이토가 부임하는 날 서울에 잠입한 의사는 6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행사장인 서울역에서 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시었다. 의사께서는 비록 현장에서 총독 폭살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곳에 모인 일제관리 등 37명을 사상케 하여 3.1운동 이후 희망을 잃은 국내외 민중들에게 무장투쟁이라는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한인 순사에게 잡힌 의사께서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형, 순국하시었고, 정부에서 1962년 의사의 위업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선생님의 의거에 대해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로 의의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선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진영에서 독립투쟁의 한 방략으로 정립된 의열(義烈)투쟁 노선을 실천하셨다는 점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뒤를 이어 처음부터 목표를 조선총독으로 삼아 거사를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선생님의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사상 최고령자의 폭탄투척의거로 이후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의 여러 청년애국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셨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제 가슴을 먹먹하게 한 것은 선생님의 청년사랑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순국하시기 직전인 11월 대한의 청년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 앞에 선하다."

   선생님께서 순국하신지 60년이 흘러 1970~80년대 조국이 군사독재의 폭압 앞에 신음할 때, 이에 맞서 싸운 젊은 청년학생들이 있었고 저 역시 그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갇혀 들어간 서대문형무소의 감방 안 마룻 바닥에 이곳 어딘가에 계셨을 선생님을 생각하며 '姜宇奎'라는 성함과 돌아가신 날짜 '1920. 11. 29.'를 작은 유리조각으로 새겨 넣어보았습니다. 선생님께는 '독립'의 공간이었던 곳이 후배들에겐 '민주'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지난해는 선생님의 순국 90주년이었습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순간까지 그토록 걱정하셨던 청년들은, 전태일에서 이한열까지 수많은 청년열사의 이름으로, 4.19에서 6.10까지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서, 감옥에서 치열하게 살아 우리 역사를 열어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어려움도 새로운 시대의 청년들이 기꺼이 극복해내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입니다.

   부디 편히 영면하소서.



  강성구(姜聖求)


  (사)사회책임투자포럼 이사
  국민권익위원회 청렴전문강사

강우규 [姜宇奎, 1859~1920 ]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호 왈우(曰愚). 30세 때 함경남도 홍원(洪原)으로 이사하여, 한의술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었고,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만주로 건너가 지린성[吉林省] 라오허현[饒河縣]에 정착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 광동중학을 세워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현지에서 만세운동을 하였고, 이 후 조국으로 돌아가 거사(擧事)할 뜻을 품고 영국제 폭탄을 가지고 서울에 잠입하였다.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폭살하기로 결심하고,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사이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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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7 16:08 2011/03/0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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