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마흔 아홉 번째 편지 - 2011년 3월 15일        

100년 편지
 

현하의 웅변으로 민족혼을 일깨운 여운형(呂運亨) 선생 -강대욱-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마을 생가터에서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걸었고 격동의 해방정국에서는 민족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소용돌이치는 격랑에 몸을 던져 통일된 한국을 실현하려했던 근대역사 인물, 몽양 여운형 선생의 생애를 조명하는 국토기행의 여정이다.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앞에는 기나긴 민족사의 여울목마다 도도한 대서사시를 노래했던 한강의 푸른 줄기가 시원하게 펼쳐졌고 뒤에는 청화산의 지맥이 서쪽으로 흐르다가 불끈 한 봉우리를 만들어 한강을 굽어보는 부용산을 만든 곳. 이곳이 몽양 여운형 선생이 태어난 묘골마을이다. 묘골마을, 생활권내에 필자의 초등학교 양서 초등학교가 있다. 1950년 13세에 졸업을 한 노병이다. 기행문으로 편지에 대신한다.


▲ 묘골마을 여운형선생 기념관 건립현장

   여운형 선생은 이곳에서 1886년 4월 22일 여정현(呂鼎鉉)의 아들로 태어난다. 임신 중 꿈에 해를 안았다는 며느리의 말에 조부는 손자의 아호를 몽양(夢陽)으로 지어준다.

   태어난 무렵은 안팎으로 도전에 직면해 있던 시기다. 봉건체제의 내부 모순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직면하였음에도 이를 주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지 못한 채 풍전등화의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있었던 이른바 한말의 격동기였다.

   여운형 선생의 조부 여규신(呂圭信)은 한학과 수리(數理)에 밝은 청렴 강직한 야인이었다. 여운형의 소년시절은 강개지사로 이름이 나있던 조부의 감화로 자라면서 호방 담대한 기상을 익혔지 싶다.

   묘골의 집은 동대문 밖 영동방면 국도에서 손님을 잘 치르기로 이름 난 집이기도 했다. 가계는 넉넉하지 않았으나 손님 접대는 잘해야 하는 것이 당대 양반대가의 풍습이기도 했던 시기. 이러한 가풍에서 남다른 금도(襟度)를 키운 몽양선생은 청운의 뜻을 펼치고자 서울로 올라와 배제학당에 입학했다가 민영환(閔泳煥)이 설립한 흥화학교(興化學校)에 전학한다. 이것이 1901년인 16세 때다.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상실한 때인 1907년 여운형 선생은 고향의 사랑방에 인근 청년들을 모아놓고 역사, 지리, 산술 등 이른바 신학문을 가르치다가 정식으로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 근대 신학문학교의 효시를 이룬다.

   이 무렵 여운형 선생은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 높았던 이강년(李康年)과 긴밀한 왕래를 하면서 기독교계의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주축으로 하여 우국지사와 애국청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 때는 이들과 항일구국 투쟁을 전개하였고, 비밀결사 조직체인 신민회(新民會)를 통해 애국계몽운동에 열정을 기울이기도 한다.

   여운형 선생의 청년시절은 일제 강점으로 인한 암흑기, 1913년 서간도 각지와 신흥무관학교를 순방하면서 조국광복의 웅지를 키운다. 29세에 중국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 수업을 쌓은 후 33세 상해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 당수에 취임함으로서 독립운동의 거보를 내디디게 된다.

   여운형 생이 혜성과 같이 동아정국의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독립지사로 동경제국 호텔에서의 사자후에 있었던 것.


     ▲  몽양 여운형

 “지난 3월 1일 우리는 독립만세를 절규하여 대한민족이 전부 각성하였다.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은 한국인의 긍정하는 바이요, 한민족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한 바이다. 일본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이 세계는 약소 민족해방, 여성해방, 노동자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이하 생략>”


   1919년 11월 27일 저녁 일본정부 초청으로 동경제국호텔에서 세계 각국 특파원 기자와 각계각층 저명인사 5백여 명 앞에서 행한 여운형 선생의 명쾌한 조선독립 당위성 개진 요지다. 

   다음날 각 신문에 경시청 특별 승낙으로 요약된 연설내용이 번역되어 사진과 함께 보도되자 일본 조야(朝野)는 발칵 뒤집힌다. 일본의회인 귀족원(貴族院)과 중의원(衆議院) 의원들은 여운형 선생에게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독립을 부르짖게 한 책임문제로 정부에 대한 논란과 물의가 일어나 수일간 일대공방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세기의 사자후에서 민족의 호담, 명쾌, 응변, 제압의 웅대한 기상을 내외에 유감없이 선양했던 몽양 여운형선생의 헌걸찬 인간상을 본다.

   험난했던 근대사의 역사무대에서 타고난 역량으로 종횡무진 활약했던 독립지사의 생애는 일제에 의한 투옥과 회유로 점철, 파란으로 이어지지만 그의 족적은 여명기의 어둠을 헤치는 고독한 발걸음이기도 했다.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세계제패를 조선, 중앙일보는 “이 위대한 환희의 폭풍은 적막한 삼천리강산을 범람하고 진감(震?)시킴에 충분하였다”라고 써 민족의 울분을 말끔히 씻어주었고 끝내는 손기정 선수 사진의 일장기를 말살하여 폐간되는 비운을 겪음으로서 그의 중앙일보 사장시절은 신문의 운명과 함께 종말을 고한다.

   어쨌든 어두운 시기에 국내에서 또는 해외에서 국권회복과 민족통일을 위해 노심초사 뛰어난 활동을 펼침으로써 시대가 요구하는 혁명가, 정치가, 언론인으로서 일신을 희생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생애는 이 땅의 역사,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늘 푸르게 살아있는 헌앙한 기상이다.

    해방직후 급박한 전환기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민족통일의 경륜을 펼치려던 조국애에서 수난의 역사를 희망의 역사로 만들어 가려고 노력한 열정과 실천의 지도자상을 본다. 당당한 풍모, 탁월한 식견, 현하(懸河)의 웅변을 겸비한 합리주의 민족운동가가 걸어온 근대역사의 장(章)에서 통일의 염원이 강물 되어 흐르고 있다.



  강대욱


   전 경기도박물관장.
   저서인 <이화우 흩날릴제>, <발길에 세월을 묻고>에 수록된 내용을
   ‘100년편지’로 정리해 주셨다.



여운형 [呂運亨, 1886.5.25 ~ 1947.7.19]
 
  1886년 경기도 양평(楊平)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집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우고, 강릉에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국권이 피탈되고 학교가 폐쇄되자,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8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발기하여 김규식(金奎植)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이 되었는데, 일본정부는 이를 자치운동(自治運動)으로 회유하고자 그 해 11월 그를 도쿄[東京]로 초청하였으나 오히려 장덕수(張德秀)를 통역관으로 삼아 일본의 조야(朝野) 인사들에게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1920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하였고, 1929년 제령(制令)위반죄로 3년간 복역하고, 1933년 출옥,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1936년 신문이 일제에 의하여 정간되자 사임한 후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8·15광복을 맞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년 암살되었다.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된 데 이어 2008년 2월 2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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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15:42 2011/03/1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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