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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여섯번째 편지 - 2019년 1월 22일      

100년 편지

그리운 증조부님 오석 김혁(金赫)장군님께 -김성태-


2019년1월16일 자정 넘어 증조부님과 저의 인연을 100년 편지 공간을 빌려 기록하려고 합니다.

정확히 한 시간 전,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모스크바 부기끄 영화대학의 영화미술교수 세르게이 도카레프가 그린 목탄화 김혁 장군!

저는 장군님의 증손자입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저에게 와 주신 것인지, 제가 달려간 것인지……. 증조부님을 뵈는 순간, 증조부님의 눈을 마주 대하는 순간, 저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증조부님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독대하였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얼굴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강렬한 눈빛, 이마와 코, 꼭 다무신 입과 머리 스타일까지……. 증조부님께서 피체되셨을 때, 동아일보 신문기사에 실린 모습은 저의 가슴을 늘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립습니다.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증조부님의 실제 모습을 떠올리며 살았습니다.

한없이 미치도록 암울한 1928년 1월 25일! 압록강 건너 그 먼 만주에서 신의주 감옥이라니요? 평양 감옥에 증조부님을 가두다니요?

증조부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얼마나 추우셨습니까? 얼마나 편찮으셨습니까? 서대문형무소에서 본 사방을 가득 채운 수감자의 수형 표는 저에게 심장이 터질 듯 한 고통이었습니다. 증조부님의 존함을 또 찾고 또 찾았습니다. 김 혁, 김 학소, 김 오석!

증조부님! 지난 2019년 1월 7일 경기도 박물관에서 발굴된 증조부님의 유묵은 광채가 났습니다. 나 오, 돌 석(吾石)이란 호를 쓰신 뒤, 낙관을 찍으셨을 증조부님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천광운영(天光雲影)

오석 김혁 장군 글

하늘빛과 구름 빛이 함께 어울려 노니는 맑은 연못! 그러기 위해서는 한없이 맑아야지요. 증조부님의 서체는 매우 힘차 보여 혼탁한 이 나라를 꾸짖는 듯하면서도 맑은 연못이기를 신신당부하시는 듯하다. 육군사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위국진충(爲國盡忠) 서체와 완전 일치되어 그 감동은 이루 표현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먼 만주 북로군정서의 사관 양성소에서 1920년 1기 졸업생들을 향해 축사의 핵심어는 위국진충(爲國盡忠)이겠지요……. 축사를 받은 군사들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그 이후 대한 광복군의 산파들이 되었지요.

증조부님, 작년 2018년 8월 15일에는 의식 있는 젊은 윤종훈 청년이 ‘이름 없는 역사’라는 책을 냈습니다. 본인이 독립운동가 9인을 힘들게 뽑았는데, 증조부님에 대하여 써 내려가고 싶었다고 합니다. 김혁 장군 증조부님에 대하여 피력하였습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의 영원한 역사에 살고, 시대에 복무한 ‘대한 제국의 마지막 무관 김혁 장군’이라고 적었습니다.

오석 김혁 장군

증조부님은 대한민국의 독립된 조국을 꿈꾸셨지요. 압록강을 건너시어 그 먼 만주 땅에서 흥업단, 대종교 의식 고취, 대한 의용군, 북로군정서, 대한독립 군정서, 고려혁명군단을 이끄시고,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에 피선되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셨지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대리이셨던 몽호 황학수 장군께서 만주로 향하시게 된 이유와 목적을 증조부님과의 만남으로 두고 있습니다. 몽호 황학수 장군께서 그토록 만나기를 염원한 김혁 장군! 무력 투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무찌르고 우리민족의 독립을 되찾겠다는 증조부님의 조국을 떠나실 때 다짐이 몽호 장군께도 다가가는 것이지요. 자랑스럽습니다.

만주 항일 투쟁 선두의 위치에서 쟁두(爭頭)하지 아니하시고 쟁족(爭足)하셨던 증조부님은 청사 조성환, 철기 이범석, 백산 지청천. 백야 김좌진 등의 수많은 군사부장, 참모들을 이끄셨지요. 한국광복군 국내 사령관이셨던 오광선 지사에게는 취송, 육삼정 의거를 시도하신 이강훈 지사에게는 청뢰라는 호를 직접 주셨지요? 혼돈의 시대에 늘 경계에 서서 세상을 이끄시며, 시대가 부르는 소리를 거부하지 않고, 그 소리를 따라 민족의 나침반이셨습니다. 증조부님께서 교장 선생님이셨던 성동사관학교의 졸업생 500명은 조국 독립의 든든한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증조부님! 1936년 병환으로 가석방되시어 용인 자택으로 돌아가셨지요? 1919년 5월에 만주로 떠나실 때는 이렇게 지치고 힘든 여정 끝에 옥고를 치루고, 편찮으신 모습으로 돌아오실 것이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1937년 3월 서울 심우장(尋牛莊)에서 일송 김동삼 지사님의 시신을 붙잡고, 얼마나 우셨겠습니까? 만해 한용운 선생님과 함께 얼마나 절규하셨습니까? 김동삼 동지의 유해를 한강에 흩날리는 그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지요? 증조부님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39년 4월 23일, 쓸쓸히 숨을 거두셨지요. 조국 광복을 보시지 못한 채, 숨을 거두시어 한없이 마음 저려옵니다.

증조부님! 순국 80주기가 2019년 4월 23일입니다. 증조부님께 향한 절실한 그리움은 위국진충(爲國盡忠)이라는 뜨거운 애국심으로 커 갑니다. 증조부님께서 그토록 바라셨던 조국의 독립, 후대가 떳떳하게 행복하기를 바라셨던 그 마음 오롯이 느끼면서 감사함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증조부님께서 구하고자 사투한 이 땅에서 단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삶, 어떻게 살아야 사람다운 인생일까요?

제가 내일 아침에도 출근하면서 차 안에서 부르는 독립군가, 증조부님 귓가에 힘차게 울릴 것입니다. 다시 또 증조부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립습니다. 존경합니다.

김혁장군 증손자 김성태 올림

             김 성 태

현 이천항일민족운동기념사업회 회원

현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원

   영화로 보는 근현대사, 다큐로 읽는 근현대사 수료

   여주지원 사랑 나눔 봉사단원

   청년 백범 11기 회원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1/21 18:59 2019/01/2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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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다섯번째 편지 - 2019년 1월 8일      

100년 편지

몽양 여운형 선생께 -서중석-


  외람된 말씀을 드리지만, 저는 1929년 7월 10일  상해경마장에서 베이스볼  게임을 구경하다가 선생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것은 정말 우리에게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강의시간에도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무슨 망발이냐고 화를 낼 분들이 많겠습니다만, 제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긍을 할 것입니다.

  무릇 어느 지역이고 독립운동은 자기 나라 민중들과 함께 살면서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간디나 네루가 이란이나 이집트에서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잖아요. 우리는 워낙 강포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억압 통치에 놓이다보니까 국내에서 지속적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가 어려웠지요. 또 북간도건 서간도건 조선인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와 살았기 때문에 국외로 망명해 그들을 기반으로 독립군을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벌일 수 있었지요. 초대 상해교민회장을 한 분이 바로 선생입니다만, 상해는 교통이 편리하고 프랑스 조계처럼 일본 경찰이 들어오기가 어려운 조계가 있었고, 교민도 약간은 있어서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었지요.    

몽양 여운형

  선생이 체포된 것이 우리 민족에게 행운이었다는 것은 민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선생은 민중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탁월한 지도자여서 민중과 더불어 함께 활동하는 것이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타력에 의해서지만 선생이 국내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은 일찍이 이만규도 잘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만규는 <여운형투쟁사>에서 “몽양의 투옥은 혁명운동면에 있어서 커다란 과제를 만든 것이다. ‘몽양이 끝끝내 해외에 있어야 할 것인가? 국내에 있어야 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습니다. “사막이 된 이 땅에 샘물을 파내고 국혼國魂이 고목 같이 말라가는 그때에 생기生氣를 올리는 일은 오직 몽양이 아니고는 지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입국의 전제로 일어난 투옥 사건은 얼른 보아 불행한 듯하나 진정한 의미에서 꼭 필요하고 중대한 사실이었다.”

  선생은 약 3년 감옥 생활을 하고 출옥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되어 계몽 활동과 함께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지요. 일제의 통치가 워낙 지독해서 전국적인 대중적 활동은 신문을 통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교회 활동도 대중과 함께하는 좋은 기회였지요. 선생은 예수의 참된 정신을 이 땅에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진보 신학, 해방신학을 그 당시에 펼친 것이네요. 뜻있는 일을 할 만한 동량들의 주례를 선 것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선남선녀들이 선생의 주례사를 들으며 가슴에 깊은 뜻을 새길 수 있었지요.

  선생은 야구 구경을 하다 잡혀왔습니다만, 체육을 아주 즐겼는데, 국내에서는 체육 활동을 하면서 젊은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지요. 북간도에 가서도 체육을 통해 젊은이들을 격려했는데, 그곳에서 강원룡이란 젊은이를 만난 것은 뒷날 그 젊은이의 행보를 돌아볼 때 아주 잘 된 일이었습니다. 그는 해방 후 서울로 와 선생을 따르면서 진보적 활동에 평생을 바쳤잖아요.

  선생의 체육 활동으로 잊을 수 없는 것이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일입니다. 최초의 일장기 말소사건이었고, 그래서 조선중앙일보는 문을 닫았지요. 선생은 1934년부터 해산된 1937년까지 조선체육회장이었고, 손기정은 선생의 아들 홍구와 양정고보 동창이어서도 손기정과 여러 젊은이들이 베를린 올림픽에 나가는 것에 마음을 썼습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선수단 환영식에서 “여러분들은 비록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나서지만 등과 머리에는 조선반도를 짊어지고 나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격려했습니다.

  제가 역사학도여서 염치없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선생이 체포된 것은 풍부한 재판 기록을 남기게 했다는 점에서도 우리 역사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선생은 어디에서나 당당하였습니다. 재판을 받을 때도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주저하지 않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선생의 사상과 활동을 연구하는데도 더 없이 좋은 자료가 되었고, 1910년대 후반기나 1920년대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를 연구하는데도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되었지요. 이만규의 <여운형투쟁사> 등과 또 다르게 귀한 자료가 된 것이지요. 그러니 선생이 잡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귀중한 기록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일제도 선생과 도산 안창호처럼 한국인에게 영향력이 있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피력한 재판 기록은 귀중하다고 판단해 그것을 모아 <조선사상운동자료>로 내고 그랬지요.

  선생이 체포된 것은 정말 잘 된 일이다,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큰 행운이 되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1945년 8·15해방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이 동남아를 지배했던 것과 다르게 일제의 통치는 훨씬 악랄했습니다.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기본권에서 동남아와 많이 달랐지 않습니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독립운동이 국외에서 많이 벌어진 것도 일제의 탄압이 영국 등보다 훨씬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이 만주 연해주·시베리아, 중국 관내 등 여러 곳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일제가 패망했을 때 국외 독립운동세력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도 조국으로 빨리 달려올 수 없었습니다만, 연합국이 빨리 고국으로 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도 해방된 지 한참 후에야 환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제1진은 11월 23일에야 들어왔고, 연안 독립동맹 지도자들도 북에 12월이 되어서야 들어왔습니다. 해방 직전 직후에 미국은 우리나라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려고 했습니다. 만일 선생이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될 뻔 했습니까.

  선생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바빠졌고, 1941년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자 구체적으로 건국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YMCA 유도사범 장권으로 하여금 치안대를 조직하게 하는 등 여러 조직에 착수했고, 1944년에는 건국동맹을 조직하면서 국외 독립운동과 연락을 취했습니다. 일제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이틀후인 8월 11일 이만규 이여성 등으로 하여금 국기 국호 독립선언서 문제를 구체화하도록 했고, 8월 14일 아침 엔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만나 정치범을 석방하게 하고 치안을 우리가 맡겠다고 확언했습니다. 그날에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에 들어갔고, 16일에는 장권을 위원장으로 한 건준 중앙 치안대가 뜨면서 전국 각지에서 치안대 등이 조직돼 해방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맞았습니다. 일부 학자는 언론의 자유, 정치의 자유 등 자유를 미군이 준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이것도 해방된 날부터 우리가 쟁취했고, 미군은 나중에 들어와 확인을 했을 뿐입니다. 이러니 선생이 체포된 것은 우리의 민족적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서 중 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1/07 13:53 2019/01/07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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