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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열두번째 편지 - 2019년 3월 1일      

100년 편지

왜적을 두려움에 떨게 하셨던 당신의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며

대한민국 해군 신돌석함 초대함장이 신돌석 장군에게 드리는 편지 -이준호-


의병장님! 저는 해군 신돌석함의 초대함장 이준호 대령입니다. 나라가 위태로웠던 시기에 백성들의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하나로 결집시켜 조국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지신 의병장님의 용맹함과 애국심을 이어받기 위해 신돌석함의 초대함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낍니다. 신돌석함은 올해 전반기 해군으로 인도하기 위해 인수 시운전을 진행 중이며, 아직 쇳덩이에 불과한 잠수함이지만 의병장님의 혼을 불어넣어 최고의 잠수함으로 인수하겠다는 결의를 다짐하면서 이렇게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신돌석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그 시절, 19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조국을 위해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의지로 의병운동을 주도하신 의병장님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항일정신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고, 이것이 조국의 독립에 큰 디딤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발전된 대한민국에 사는 한 사람의 국민이자 군인으로서, 의병장님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잠수함 함장으로서 많은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의병장님의 정신을 계승한 신돌석함의 함장이라는 각오와 자부심으로 이를 극복하고 있습니다.

신돌석함

100여 년 전, 장군께서는 울진에서 일본 선박 9척을 격침하고 강원도에서 경상도까지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신출귀몰 대활약하셨지만, 부족한 자원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의병장님 본인은 물론 부하들의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하셔야 했기에, 그 이면에는 남모를 어려움과 고뇌가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 심경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불확실한 수중환경 속에서 승조원들의 생사를 책임지는 잠수함 함장으로서 저 역시 항상 안전한 함 운용과 임무 완수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할 때마다 저보다 더 어려운 상황을 어린 나이에 감내하고 극복하신 의병장님에게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되고, 저 역시 해낼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의병장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상황에 있었던 대한제국은 의병장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권 피탈의 수모를 겪었지만, 의병장님의 애국정신이 백성들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결국 광복이라는 염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심했던 신분의 벽을 애국심으로 뛰어넘어 지역 양반과 평민, 노비 등 각기 계층의 사람들을 오직 구국의 신념이라는 하나의 힘으로 단결시킨 의병장님의 업적은 100여 년의 시간 동안 6.25전쟁, 경제재건, IMF 위기 등 수많은 국난을 국민들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한 대한민국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으로 성장하여 세계 어느 나라도 쉽게 넘볼 수 없는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분의 귀천 없이 모든 국민들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국군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었으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굳건히 수호할 뿐만 아니라 국제평화 유지에 기여할 정도의 역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해군의 전략무기체계를 운용하고 있는 잠수함사령부는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보이지 않는 심해에서 조국 해양 수호의 의지를 다지고자 독립운동가 분들의 존함으로 함명을 제정하였습니다. 우리나라와 국군의 이러한 괄목할만한 성장은 수많은 외침과 국난을 극복하신 의병장님을 비롯한 많은 선조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이를 본받아 후세들에게 더욱 강하고 발전된 대한민국을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신돌석함 역시 대한민국 해군의 전략 비수(匕首)로써 능력을 갖추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한편, 요즘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주변국들과의 이해관계 등으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안보위기에 대해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군사강국에 둘러싸여 있고 3면이 바다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비록 강력한 국력과 국방력을 갖추었더라도 국가안보를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확고한 대비태세와 강인한 정신무장이 없다면 안보위기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늘날 우리들에게 의병장님의 용기, 헌신 그리고 애국심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신돌석 장군 생가

의병장님의 정신을 이어받은 우리 신돌석함이 조국 해양 수호의 최일선에서 이를 선도해 나가겠습니다. 신돌석함의 승조원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두려움 없이 심해를 누비고 주어진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여 우리 바다를 굳건히 수호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함장으로서 승조원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최대의 전투력을 창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후에도 의병장님의 정신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초대함장으로서 신돌석함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겠습니다.

오직 국가와 국민만을 위해 숭고한 목숨을 바치신 구국의 영웅, 신돌석 의병장님!당신께서는 조국의 위태로운 모습만을 기억하시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셨지만, 그 용기와 애국심이 초석이 되어 지금의 강성한 대한민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더욱 발전하고 나아갈 것입니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고 편히 잠드십시오. 그 짐은 저와 신돌석함,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들이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태백산을 누비며 적을 두려움에 떨게 하셨던 당신의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며 언제, 어디서든 적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 최고의 잠수함, 신출귀몰 돌진하는 신돌석함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201931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사령부 신돌석함 함장 대령 이준호 올림

             이 준 호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사령부 유관순함 함장 대령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2/28 14:41 2019/02/2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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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백 열한번째 편지 - 2019년 3월 1일      

100년 편지

저희 왼팔에는 열사님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해군 유관순함 함장이 유관순 열사에게 드리는 편지 -유주현-


저희 왼팔에는 열사님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해군 유관순함 함장이 유관순 열사에게 드리는 편지

열사님! 저는 대한민국 해군 유관순함의 함장 유주현 대령입니다. 100년 전, 일제강점기 하 한반도 전역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치던 모든 분들의 간절한 염원과 고귀한 희생으로 지켜낸 우리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조국의 바다에서 당신을 떠올려 봅니다.

유관순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이 얼마나 조국애가 넘치는 말씀인지요! 제게는 망국의 한 소녀가 말한 유언이 아니라, 결사항전을 위한 각오를 다지는 제독의 강인한 외침이고, 조국을 위한 숭고한 희생정신의 표본입니다. 열사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유관순함의 정신이 되어 승조원 모두가 가슴에 새기고 조국의 바다를 지켜나가는 데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열사님의 뜨거운 애국의 혼은 조국 수호를 위한 맹렬한 투지가 되어 모든 국민들의 가슴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열사님! 한 명의 인간이자 부모의 소중한 딸로서, 어린 소녀이자 학생으로서 어떤 심정이셨습니까? 혹한의 그 시절, 일제에 맞서는 민족혁명운동의 주도자로서 17세의 당신은 얼마나 두려웠습니까? 옥중에서 이어진 지독한 고문과 갖은 고초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습니까?

하지만 열사님께서는 숨지도 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만세운동을 위해 학교 담을 넘고, 일제가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 천안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저항을 지속하셨습니다. 고향에서도 조국의 딸로서 당당하게 만세운동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법정에서는 민족적 기개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였고, 옥중에서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며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셨습니다. 열사님께서 겪었을 고난과 역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낸 의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다시금 대한민국의 조국 해양 수호라는 제 임무를 되새기게 됩니다.

열사님! 저는 이제 다시는 이 조국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쳐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시는 이 땅에 나라 잃은 한이 없어야 하겠으며, 제 모든 것을 바쳐 이 나라를 지키겠습니다. 열사님의 피와 땀으로 이뤄낸 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을 우리 후손들이 누릴 수 있도록, 두 번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아 독립운동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열사님의 불굴의 용기를 받들어 조국을 지켜나가겠습니다. 또한, 대한민국의 군인 모두가 열사님의 희생정신으로 지켜낸 우리 대한민국을 더욱 강하게 만들 수 있도록 저와 유관순함 승조원 모두가 앞장서겠습니다.

유관순함

열사님! 올해는 2019년입니다. 100년 전, 열사님의 혼신이 담긴 태극기와 만세의 외침으로 밝힌 독립이라는 촛불은 오늘날 평화와 번영이라는 불길이 되어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국민의 자유로운 활동과 의사 표현이 가능한 민주주의 국가이며, 강력한 국방력을 보유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입니다. 또한, 대한민국 고유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후손들에게 가르치며, 애국선열로부터 이어온 애국심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열사님이 구하고자 한 나라, 열사님이 사랑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서 당당히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주국가가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현재 한반도는 두 나라로 분단되어 있습니다. 비록, 외세의 통치는 벗어났지만, 그동안 남과 북이 서로 반목해 왔기에 열사님이 바라던 한반도는 아닐 것입니다. 이에, 저는 대한민국을 지켜냄과 더불어 남과 북이 통일된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견고한 안보태세 구축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열사님께 약속드립니다.

열사님! 저희 유관순함은 대한민국 해군에서 최초로 여성의 이름을 함명으로 제정한 함정으로 승조원들의 근무복 오른팔에는 열사님이 흔들던 태극기가, 왼팔에는 열사님이 그려진 유관순함의 표식이 새겨져 있으며, 저와 유관순함 승조원 모두는 열사님의 구국정신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의 조국을 지키는 명예로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조국 수호의 상징이 되신 유관순 열사님! 앞으로는 우리가 열사님의 화신으로서 혼신을 다해 언제 어디서나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군인으로서의 자랑스러운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201931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사령부 유관순함 함장 대령 유주현 올림

             유 주 현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사령부 유관순함 함장 대령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2/28 14:23 2019/02/28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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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열번째 편지 - 2019년 3월 1일      

100년 편지

숭고한 항일독립정신을 이어받아 맹호가 달립니다

대한민국 육군 수기사단장이 광복군 선배 권준 대령님에게 드리는 편지  -유기종-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의열단 ‘공약 10조’의 첫 조항처럼 “천하의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는데 바치신 권준 대령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과 조국을 위한 권 대령님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은 우리 맹호부대의 창설 7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백년편지를 올립니다.

권 준

당신의 거룩했던 생애를 돌이켜보면, 후손들이 나라 없는 설움과 고통을 겪지 않고 살 수 있도록 1917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광복회 활동을 시작으로, 1919년 3.1운동 직후 만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셨습니다. 독립운동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신 후에는 김원봉, 윤세주 선생 등과 함께 일제 침략기관과 침략 원흉들을 응징하기 위해 의열단을 결성하셨고,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 ‘동양척식회사 투탄 의거’ 등 수많은 의거들을 행하셨습니다.

황포군관학교

또한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 항일독립활동에 필요한 정치.군사 분야의 능력을 갖추기 위해 중국국민당 지도자 쑨원이 설립한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이후 중국군 장교가 되어 당시 의열단, 중국국민당 그리고 중국군 간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 속에서 정확한 정세 분석과 뛰어난 판단력으로 이들의 중개 역할을 하며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의거들을 전방위로 지원하셨습니다.

1932년에는 한중연합 항일활동을 위해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관이 되어 조국 독립의 사명을 짊어질 청년 투사와 간부 양성에 진력하셨습니다. 1944년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차장으로 활동하시다 우리 민족의 염원이었던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셨습니다.

1946년 드디어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귀국 후 육군 대령으로 특채되어 대한민국 건군(建軍)의 주축으로서 국군의 기반을 굳건히 마련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맹호부대(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초대 지휘관으로 부임하시어 조국을 위한 권 대령님의 숭고한 정신과 헌신적인 자세를 우리 후배 전우들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시키시며, 부대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조국 수호라는 우리 군의 숭고한 사명을 다시 한번 확고히 되새기게 하셨습니다.

올해 2019년은 우리 맹호부대가 창설 7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우리 맹호부대는 1949년 6월 20일 서울 용산에서 권 대령님을 초대 지휘관으로 하여 ‘수도경비사령부’라는 명칭으로 창설된, 무엇보다 권 대령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애국애족의 정신을 계승한 역사와 전통이 빛나는 부대입니다.

6.25전쟁 시에는 우리 국군 최선봉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는 부대로 위엄을 떨쳤으며, 1965년에는 베트남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대한민국 전투부대 최초로 해외파병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당시 우리 맹호부대의 용맹함은 북베트남군 호치민 총사령관이 ‘맹호를 만나면 모든 작전을 취소하고 병력과 장비를 보존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매우 유명했습니다. 이 소식은 우리 국민들에게 그동안 다른 나라에게 도움만 받던 존재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전해 주었으며, 이러한 자신감과 희망은 우리 대한민국 발전의 큰 원동력 중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1973년 3월 21일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되어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과 싸워 반드시 승리하는 최강의 전투력을 갖춘 ‘전천후 공세기동 기계화부대’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2016년에는 최초의 미래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거듭나며 명실공히 우리 군 최강의 전투력을 지닌 부대로 성장하였습니다.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 102번에 잠드신 권준 선생

권 대령님! 우리 맹호부대는 이렇게 권 대령님의 조국을 위한 숭고한 항일독립운동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이 위험에 처했을 때나 필요로 할 때면 언제든 주저 없이 달려 나가 오로지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용맹스럽게 싸웠고 굳건히 지켜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국민들에게 어려웠던 시절 용기와 희망을 준 부대로, 또한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최강의 기계화부대로 인정받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도 “조국이 부르면 맹호는 간다”는 부대정신 아래 ‘맹호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단 창설 7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의 맹호부대 지휘관으로서 감히 약속드립니다. 우리 맹호인 모두는 조국을 위해 걸어온 권준 대령님의 고귀했던 그 길과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조국,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더 나아가 ‘평화와 번영’을 이루기 위한 길이라면 결코 망설임 없이 그 길을 굳건히 걸어 나가겠습니다. 권 대령님의 숭고한 정신과 업적들에 대해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 우리 조국과 맹호부대가 발전해 가는 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2019년 3월 1일

대한민국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유기종 올림

             유 기 종

 

대한민국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2/28 13:55 2019/02/2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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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아홉번째 편지 - 2019년 3월 1일      

100년 편지

“‘독수리 작전’을 잊지 않겠습니다”

대한민국 육군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광복군 OSS대원 선배님들에게 드리는 편지 -오영대-


존경하는 광복군 선배 전우 여러분!

저는 대한민국 육군 제1공수특전여단장 오영대 준장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고국을 떠나서 얼마나 힘든 고초를 겪으셨습니까. 독립운동가 심훈 시인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처럼 머나먼 중국 땅에서 조국 통일의 그 날을 위해 독립운동에 목숨 바치신 광복군 선배 전우님들의 희생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선배님들은 일제 치하에서 탄압으로 인해 고국에서는 도저히 독립운동을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오로지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무장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만주로, 이후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나서는 상해에서,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가 옮기고 또 옮기면서 고국에서 까마득하게 먼 충칭까지 가시게 되었습니다.

광복군 훈련 (1942)

1920년대 초에는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독립운동가 분들에 의해 봉오동,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서 큰 승리를 거두는 등의 성과가 있었지만,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로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었습니다. 이후 자유시 참변으로 큰 피해를 당하면서 활동 여건이 어려워졌고, 일제의 세력은 나날이 커져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은 정말 독립운동가분들께서 절망적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1932년부터는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8년간이나 임시정부가 옮겨 다녀야 했으며, 더욱이 중일전쟁 발발 이후로는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중국도 일제와 힘겹게 싸우던 상황이었으니 충칭에서 고국 방향을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1940년에 광복군이 창설되기는 하였지만, 고국에서 너무 멀어진 곳에 임시정부가 위치하다 보니 광복군의 인원을 모집하는 것 자체도 어려웠고, 여러모로 열악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일본과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돌입한 지 이틀 뒤인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추축국인 일본과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광복군 선배님들 중 일부가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동남아시아의 인도?버마 전선에 파견되어 영국군과 함께 정보수집, 번역, 심리전 등으로 참전하였습니다. 어려운 정세 속에서 광복군의 위상과 활동영역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인 것입니다.

광복군 3지대 OSS 훈련

임시정부의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어 광복군이 미국 전략첩보국(OSS)와 함께 합동작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의 독립, 그것에 초석이 될 ‘독수리 작전’을 준비하시면서 광복군 선배님들은 작전이 실행될 그 날만을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연합국의 승전국의 일원으로서 우리 민족의 힘으로 작전에 기여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이룰 수 있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원자폭탄 개발이 작전 시행보다 빨리 이루어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면서 일제가 작전 시행 전에 항복하여 광복군 선배님들이 준비한 작전을 시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광복군의 활약이 연합군에게 크게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서 김구 주석님께서는 한탄하셨던 것입니다.

이후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7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면서 군사대국으로도 우뚝 서 있습니다. 6.25전쟁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지만, 이후 우리는 세계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고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의 바탕에는 선배님들께서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치신 헌신이 있었음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단장으로서 우리 부대를 잘 훈련시켜 빈틈없는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여, 편안히 생업에 전념토록 만들겠습니다.

육군_1공수여단

선배님들께서 OSS로부터 훈련받으신 낙하산 침투 훈련, 파괴훈련, 시설 탐지보고 등은 이제는 우리 특전요원들이 훈련하는 것입니다. 6.25전쟁 때 美 8240유격부대를 거쳐 우리 군도 제1전투단을 창설하여 특수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가 되었고, 그 이후에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1공수특전여단 전 장병은 광복군 선배님들께서 미처 시행에 옮기시지 못한 ‘독수리 작전(국내진공작전)’을 잊지 않겠습니다. 선배님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이 신뢰하는 부대’가 되도록 불철주야 강한 훈련에 매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단결!

2019년 3월 1일

대한민국 육군 제1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오영대 올림

             오 영 대

 

대한민국 육군 제1공수특전여단장 준장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2/28 10:44 2019/02/2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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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여덟번째 편지 - 2019년 2월 26일      

100년 편지

안녕하십니까. 도산선생님 -김부겸-


안녕하십니까. 도산 선생님.

2019년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장관 김부겸 인사드립니다.

제가 맡고 있는 소임은 도산 선생님과 희미할지언정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1919년,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도산 선생님이 초대 내무총장(국무총리 겸직)을 맡으셨고 ‘내무부’는 곧 행정안전부의 전신이기 때문입니다. 외람되이 칭한다면 저는 도산 선생님의 까마득한 후배가 되겠습니다.

도산 안창호

역사 속에서 100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니나 보통 사람의 일생을 훌쩍 뛰어넘는 아득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 지난 100년은 되돌아보기가 어지러울 만큼 구절양장(九折羊腸)의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온 나날이었습니다. 나라를 잃었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으며 둘로 갈라져 동족상잔의 비극을 수백만의 희생으로 치렀고 독재와 가난과 싸우며 나라를 일으켜 세워 힘겨움 속에서도 한 발 한 발 전진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겨우 여기까지 밖에 오지 못했는가 하는 탄식과 선생님 이하 선열들이 꿈꾸던 나라를 여직 만들지 못하였다는 송구함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러한 ‘오늘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난 100년의 봉화(烽火)였으며 초석(礎石)이자 효시(嚆矢)였던 선배들의 발자취를 돌아봄은 단순한 과거의 반추가 아니라, 오늘을 넘어 내일로 이어지는 길 찾기의 일환일 터입니다.

경술국치 직전이었던 1910년 4월, 선생님이 망명을 떠나시면서 읊었던 거국가(去國歌)를 새삼 되뇌어 봅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일로부터 여러 해를 /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 동안에 나는 오직 /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설워마라 / 나의 사랑 한반도야

뱃전에 서서 멀어져 가는, 또 실제로 그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조국을 바라보며 눈시울 적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그린 듯 눈에 선합니다.

4절까지 이어지는 <거국가>를 다시 읊으면서 불현듯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 모든 구절구절에 나라 생각하는 마음은 넘쳐 흐르나,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거나, 무엇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통탄하는 대목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진은 선배를 원망하고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에다 돌리려고 하니 대관절 당신은 왜 못하고 남만 책망하려 하는가?”고 외치시던 선생님이시기 때문일까요. 그 어떤 분노 충만한 출정가보다도, 격정에 찬 투쟁의 노래보다도 <거국가>는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3.1항쟁의 우렁찬 독립만세 소리가 조선을, 나아가 세계를 뒤흔든 이후 임시정부가 구성됐을 때 선생님은 누가 보아도 임시정부 수반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과 역량을 지니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직위를 굳이 마다하고 내무총장을 고수하셨지요. 이는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서 모였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격렬하게 펼쳐졌던 파벌 싸움, 그 중에서도 평안도 출신의 서북파를 각별히 경계하던 기호파 인사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였음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1919년 5월 26일, 그러니까 미국을 떠나 중국 상하이로 들어오신 다음 날, 북경로 예배당에서 선생님이 “나는 여러분의 머리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러 왔습니다.”라고 밝히신 까닭이기도 하겠습니다. 어쩌면 연설의 마지막 순간 선생님은 피 한 움큼 토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동포가 이만큼 피를 흘린 뒤에 저주하고 머뭇거림은 죄악이외다. 다만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여 대한 사람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같이 일할 뿐이올시다. 온 대한 사람이 거꾸러지더라도 나는 홀로 서서 나아가겠다고 맹세하십시오.”

선생님은 그 후 임시정부 내에서, 독립운동진영 내에서 지역간, 파벌간 갈등이 있을 때마다 그를 중재하고 조율하느라 진력하셨습니다.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과 이동휘 국무총리가 대립했을 때,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맞붙어 으르렁거릴 때 선생님은 무던히도 위태로운 중심을 잡으시느라 온 힘을 다 쓰셨지요.

그러나 그런 선생님께마저 엄청난 오해와 거짓이 들씌워지곤 했습니다. 윤치호의 일기에는 여러 차례 선생님에 대해 ‘들었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안창호 씨가 지역감정의 소유자여서, 기호인들의 노력으로 독립을 얻을 것 같으면 차라리 독립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1920년 8월 30일) “서북파의 지도자인 안창호 씨가 이런 말을 했단다. ‘먼저 기호 사람들을 제거하고 난 후에 독립해야 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다.”(1931년 1월 8일) 모두 직접 들은 얘기가 아니라 그랬다 ‘카더라’는 정보인 셈입니다. 저런 중상모략을 당할 때 선생님의 가슴은 어떠하였을지 감히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3.1운동의 만세 소리로부터 100년을 맞은 오늘,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 성큼 나아간 후로 1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오늘의 저희는 100년 전 선생님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변화와 성취를 이루었습니다만, 아직도 이 나라 안에서는 심각한 지역 갈등이 존재하며, 여전히 많은 이들이 왜곡된 편견에 사로잡힌 가해자로, 또 오해와 차별의 피해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 지나치게 비대해져 버린 중앙과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방간의 갈등 또한 심각해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또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역사를 할퀴고 지나간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문신처럼 간직한 분들의 고통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 김부겸은 100년 전의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를 송두리째 본뜨고 그 깊고도 선명한 발자취를 충실히 따르고자 합니다. 서두르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겠습니다. “오늘에 일하여 이루지 못하면 내일에, 금년에 일하여 이루지 못하면 내년에…… 언제든지 독립을 완성하는 날까지 쉬지 않고 일하자 함이외다.”(l921년 5월 시국강연)라고 하신 것처럼 제 앞에, 우리 국민 앞에 놓인 난맥들의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더 풀어 가겠습니다.

가끔 어찌 손을 쓸 수 없다 싶을 정도로 완고한 고집과 관성의 벽 앞에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싶은 막막한 무력감에 부딪칠 때도 있으나 이 나라의 초대 ‘내무’ 책임자이셨던 선생의 말씀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나는 사람을 가리켜서 개조하는 동물이라 하오. 이에서 우리가 금수와 다른 점이 있소. 만일 누구든지 개조의 사업을 할 수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거나 사람이라도 죽은 사람일 것이오.”1919년 상하이 연설). 부디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김 부 겸

1958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경북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옥고를 치렀으며, 1987년 6월항쟁 당시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경기도 군포에서 3선 의원을 지낸 후, 대구에서 세 번의 도전 끝에 4선에 성공했다. 문재인정부 출범과 함께 행정안전부장관으로 일하고 있다.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2/25 11:20 2019/02/2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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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일곱번째 편지 - 2019년 2월 12일      

100년 편지

'주보따리' 주시경 선생님께 -이건범-


오늘은 선생님 보따리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한글문화연대 대표 이건범이 주시경 선생님께 올립니다. ‘주보따리’ 주시경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글문화연대라는 시민단체의 대표 이건범입니다.

‘한글’, 선생님께서 지으신 이름이죠? 1908년에 만든 <국어연구학회>의 이름을 1911년에 <배달말글몯음>으로, 1913년에 <한글모>로 바꾸셨던 걸로 압니다. 1910년 경술국치 뒤로 ‘국어’란 곧 일본어였으니 ‘국어’라는 말을 더 이상 사용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때 처음 사용하신 ‘한글’이라는 말이 세종대왕께서 만든 훈민정음의 새 이름으로 자리를 잡은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주시경 선생

선생님 돌아가신 뒤 제자들이 꾸려간 <조선어학회>에서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안하고 ‘조선말 큰 사전’ 편찬에 적용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1920년대 이래 ‘한글’이라는 이름은 학계와 민간에서 두루 쓰였습니다. 1926년에 처음 기린 한글날은 그 이름이 ‘가갸날’이었지만,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바뀌었고, 조선어학회의 동인지 이름도 <한글>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지금 저희가 쓰고 있답니다.

얼마 전엔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말모이>라는 영화가 나와 국민들의 눈시울을 붉히고, 가슴에 우리말과 한글 사랑의 불을 지폈습니다. 얼핏 들으면 당근이나 건초처럼 말이 먹는 모이를 말하는 건가 오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말모이’란 말을 모아 놓았다는, 즉 우리말 사전을 가리키는 말이죠. 역시 선생님께서 지으신. ‘사전’이라는 한자말 대신 이렇게 우리 토박이말로 새로운 이름을 지으려면 용기와 지식이 필요하다는 걸 요즘 자주 느낍니다. 사람들이 낯설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벗어던지는 용기, 우리말을 새로 만드는 방법에 관한 지식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렇게 큰 사건이 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셨겠죠? 선생님 제자 33명이 일본 경찰에 끌려가 모질게 고문당하고, 그 가운데 이윤재, 한징 두 분은 고문 후유증으로 옥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치가 떨립니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등 여섯 분은 해방될 때까지 3년 넘게 감옥살이를 했고요. 우리말 사전 만든 게 민족의식을 고취한 일이라고 일본 경찰이 몰아갔던 1942년의 ‘조선어학회 사건’은 고문 조작으로 시작되었지만, 사건의 전개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악랄한 식민지 통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말과 한글을 못 쓰게 하고 기어이 말살하려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죠. 어쩌면 그러기 위해 이 사건을 키웠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식민지에서 제 말을 지키고 가꾸겠다는 생각은 언제든 탄압받을 위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말은 곧 그 나라 그 민족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1910년에 ‘한나라말’이라는 글에서 말씀하신 민족 독립의 사상이 제국주의자에겐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불온한사상 아니었겠습니까? 그 글은 이렇게 시작했죠.“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주므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지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라. 그러하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말이 민족의 정체성이요, 독립 번영의 연장이라는 통찰이 번뜩이는 글입니다.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이 대목을 쓰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강제 병합되었으니, 나라가 주저앉는 시점에서 말을 올려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셨겠지요. 저는 한때 이 글을 다 읽지 못한 상태에서 한두 문장만 보고 선생님 뜻을 곡해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아래 대목입니다.

“말이 거칠면 그 말을 적는 글도 거칠어지고, 글이 거칠면 그 글로 쓰는 말도 거칠어지나니라. 말과 글이 거칠면 그 나라 사람들의 뜻과 일이 다 거칠어지고, 말과 글이 다스리어지면 그 나라 사람들의 뜻과 일도 다스리어지나니라.”

이 글을 읽고는 ‘아, 고운 말을 써야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말이로구나’라고 생각했던 거죠. ‘거칠다’와 ‘다스리다’의 말뜻을 잘 몰라서 일으킨 오해였습니다. ‘거칠다’를 ‘막되다, 사납다’ 등의 뜻으로만 이해했고, ‘다스리다’ 역시 정치 행위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청소년 욕설이 날로 늘어나고 인터넷에는 혐오표현이 흘러 넘쳐서, 이른바 ‘거친 말’을 이와 같은 욕설이나 혐오표현으로 지레 짐작했죠. 그러니 반대로 ‘말을 다스린다’는 문장도 아름다운 말을 쓰도록 이끈다는 식으로 오해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날인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사전을 찾아보고서 무릎을 탁 쳤답니다. ‘거칠다’에는 ‘일을 하는 태도나 솜씨가 찬찬하거나 야무지지 못하다. 음식이 맛과 영양이 적고 부드럽지 아니하여 험하다.’라는 뜻이 있고, ‘다스리다’에는 ‘사물을 일정한 목적에 따라 잘 다듬어 정리하거나 처리하다.’라는 뜻이 있더군요. 말이 지역마다 계층마다 달라 서로 통하기 어렵고 말의 뿌리와 줄기와 가지, 잎이 정리되지 않은 채 엉망진창인 상태를 ‘거칠다’라고 표현하였던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말과 글을 표준화하고 정보화하고 고급화하느냐 그렇게 못하느냐의 문제였던 것이죠.

그 시절에 말과 글을 다스리는 첫걸음이 아마도 문법을 정리하고 맞춤법을 정하고 표준어를 정하여 국어사전을 만드는 일 아니었겠나 싶더군요. 그래야 더 이상 말이 헝클어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제 몫을 하여 나라가 발전하는 데에 훤하고 탄탄한 길 구실을 하겠죠. 조선어학회 제자들이 바로 우리말과 글을 다스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말과 글이야말로 독립의 가장 중요한 힘이라는 점을 이 글 마지막에 밝히셨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나중에 조선어학회 제자들이 조선말 큰 사전 작업에 목숨까지 걸게 된 말글 민족주의의 뿌리가 아니었을까 헤아려봅니다.

“또 그 나라 말과 그 나라 글은 그 나라, 곧 그 사람들이 무리진 덩이가 천연으로 이 땅덩이 위에 홀로 서는 나라가 됨의 특별한 빛이라. 이 빛을 밝히면 그 나라의 홀로 서는 일도 밝아지고, 이 빛을 어둡게 하면 그 나라의 홀로 서는 일도 어두워 가나니라. 우리나라의 뜻있는 이들이여, 우리나라 말과 글을 다스리어 주시기를 바라노라.”

그래서 선생님께선 우리말 말본(문법)을 연구하시는 한편으로 국어강습소를 차려 청소년들을 가르치셨죠.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틈도 없이 책 보따리 싸들고 바쁘게 이 학교 저 학교 돌아다니며 국어와 역사, 지리를 가르치신 덕에 선생님 별명이 ‘주보따리’가 된 거고요.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뒤로는 말모이 편찬까지 시작하셨으니, 서른일곱이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게 참으로 안타깝고 한스럽습니다.

우리 민족 모두가 선생님의 뜻을 잘 받든 덕에 조국 광복을 맞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선어학회 제자들처럼 우리말과 글을 다스리고자 애쓴 분들이 있었기에 해방 뒤 국어를 정비하는 일이 그나마 수월했습니다. 일본에게 빼앗겼던 우리말을 도로 찾으려는 운동을 벌이고, 한글을 배우려는 열광적인 요구에 발맞춰 문맹 퇴치에 나섰으며, 교과서와 공문서에 한글을 전용하려는 노력도 빼먹지 않았습니다. 전쟁통에 늦어지긴 했지만 1957년에는 ‘큰 사전’ 마지막 권인 제6권을 내서 우리말 정비 작업의 첫걸음을 마무리했습니다. 문맹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산업화와 민주화에도 한글은 큰 몫을 했습니다.

물론 모든 일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닙니다. 대개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이 나라 지식인 1세대와 그 제자들은 한글전용에 반대하면서 국한문혼용을 고집하였습니다. 모든 일간신문에서 한글전용을 도입한 1990년대 말에서야 국민 주도의 문자혁명이 마무리되었죠. 글자 표기는 그렇다치고, 일본에서 번역한 근대 서구 학문과 문물을 수입하여 쓴 탓에 새로운 개념과 현상의 이름은 대개 일본식 한자어 차지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위장된 국가주의를 내건 박정희 정권이 민족주의를 내세우고자 교과서에 한글전용을 확립하고 일본어 찌꺼기를 쓸어내며 외국어 남용을 줄인 시절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는 정치적인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국가가 제멋대로 펼친 국어순화정책 또한 권위주의의 한 자락이라고 지목했던 것이죠. 충분히 그럴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권위주의적 언어 정책에 대한 반발은 ‘내 멋대로 말하면 어떠냐’는, 이른바 ‘언어 자유화’의 태도로 이어졌고, 이것은 1990년대에 세계를 휩쓸고 간 무한경쟁, 약육강식 풍조와 어울려 사회적으로 경쟁에 이긴 강자에게만 표현의 자유를 허락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세계의 강자 언어인 영어를 떠받드는 세태가 강해지고, 차별과 배제를 서슴지 않는 갑질 언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회 전반에 스며듭니다. 민족 국가를 세웠고 언어 주권도 확립한 이 나라에서 새로운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스튜어드십 코드, 커뮤니티 케어, 배리어 프리, 제로페이, 규제 샌드 박스, AI 알고리즘……. 이런 말이 최근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용하는 정책 용어입니다. 방송에선 비주얼, 뷰, 콜라보, 레시피, 워라벨, 워킹맘, 리액션 등 우리 삶의 모습을 외국어로 표현해 조금이라도 더 튀려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저는 ‘된장녀, 깽깽이, 맘충’과 같이 국민들 사이에서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말에도 맞서고 있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정부와 언론에서 주로 퍼뜨리는 어려운 공공언어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대개 영어 낱말입니다.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영어 좀 사용하는 게 무어 그리 큰 문제냐고 시답잖게 여기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게 우리 생활에는 없었던 ‘컴퓨터, 인터넷, 디지털’과 같은 말이라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우리말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것을 영어로 표현하려는 심리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있어 보이려는, 튀어 보이려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런 마음이 일반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욕구에서 비롯한다고 봅니다. 나날이 천박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그리고 정부 공무원의 외국어 남용은 쓸데없는 민원을 일으켜 정책의 효율을 떨어뜨릴뿐더러, 외국어 능력에 따라 국민의 알 권리를 차별할 위험이 높습니다.

선생님~ 민족국가를 세우고 민족의 언어를 국어로 정비해야 했던 선생님 시대의 과제는 해결되었지만, 지금은 새로운 문제가 우리 언어 환경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정부 공무원과 정치인들의 어려운 말 때문에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를 위협받는 일반 국민, 존엄하고 서로 균등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 혐오 표현과 차별어 때문에 상처받는 시대. 그래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언어 문제는 인권의 문제요, 민주주의의 문제입니다.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가장 밑바닥에 두고 국어 정책을 펼쳐야 국민의 우리말 사랑이 다시 불붙을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행복한 세상을 꾸려갈 힘이라고 믿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총칼에 무릎꿇지 않고 만세를 불렀던 기미만세운동 1백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백주년인 오늘, 제가 나라의 안위보다도 국민의 인권을 내걸고 국어 문제를 걱정하는 까닭을 선생님께서도 이해하시겠지요? 살아 돌아오신다면 오늘 선생님의 보따리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헤아려봅니다.

선생님, 어이없는 일이지만, 옛날처럼 나라와 말을 빼앗기고 말살당할 상황이 아니다보니 아무래도 우리말과 한글에 쏠리는 사람들의 관심은 약한 편입니다. 할 일은 많은데 일손은 딸립니다. 좀 괜찮다 싶은 사람들 입에서 어이없는 말이 나와 실망하는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국어운동 밀고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힘이 빠질 때마다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제가 겪는 어려움이 어찌 선생님께서 느끼셨던 어려움에 비할 바가 있겠습니까? 분수에 넘친 투정이라고 받아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이 건 범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작가로 활동중

(사) 한글문화연대 대표. 서울고법 시민사법위원, 서울시 국어바르게쓰기 위원,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반대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등 역임.

저서:  <내 청춘의 감옥> <언어는 인권이다>, <한자 신기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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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1 15:40 2019/02/1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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