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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3/29 관리자 [100년 편지. 328] 대초원의 큰 바위, 제중(濟衆)과 구국(救國)의 신의(神醫), 이태준 선배님께 -박형우-
  2. 2019/03/28 관리자 [100년 편지. 327] <임꺽정>을 따라, 벽초(碧初) 선생 전(前) 상사리 -김홍신-
  3. 2019/03/27 관리자 [100년 편지. 326] 100년 전 ‘미투’의 소리, ‘근우회’ 선배님들께 ‘여성평우회’ 후배가 -김상희-
  4. 2019/03/26 관리자 [100년 편지. 325] 식민지 민중의 깃발, 전태일이 경성트로이카 선배님들께 띄웁니다. -이수호-
  5. 2019/03/25 관리자 [100년 편지. 324] 무덤도 없이 구천을 떠도는 당신, 아내 박차정이 남편 약산(若山) 김원봉에게 -박미경-
  6. 2019/03/22 관리자 [100년편지. 323] 그 모든 재산 조국에 바치고 귀천, 영석(潁石) 이석영 할아버지께 -이종찬-
  7. 2019/03/20 관리자 [100년편지. 322] 독립운동을 하며, 육아일기를 쓴 남자_소벽 양우조 선생님께 궁금한 게 많습니다.-이기연-
  8. 2019/03/19 관리자 [100년편지. 321] 윤동주, ‘십자가’“당신의 시는 바로 지금 나의 삶입니다”-박경석-
  9. 2019/03/19 관리자 [100년편지. 320] 침묵의 울림, 명진이 만해 스님에게 올립니다 -명진스님(한기중)-
  10. 2019/03/19 관리자 [100년편지. 319 ] 우리는 ‘어노행노’불굴의 노동운동가, 강주룡 열사님께 -황소라-
  11. 2019/03/18 관리자 [100년편지. 318 ]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원희복-
  12. 2019/03/15 관리자 [100년 편지. 317 ] 임시정부의 통신망, 이세창 선생님과 당신의 교통국 연통제 동지들에게 -이세윤-
  13. 2019/03/13 관리자 [100년 편지. 316 ] 안중근 의사가 천국에서 춤을 추고 계실까? -조세현-
  14. 2019/03/11 관리자 [100년 편지. 315 ] “나는 꽃이되 불꽃처럼 살겠소” 정미(丁未) 의병 여러분께 바칩니다. -심상정-
  15. 2019/03/06 관리자 [100년 편지. 314 ] 독립, 통일 그리고 진보, 역전 최익환 선생과 동지들의 영전에 바칩니다. -신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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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스물여덟번째 편지 - 2019년 4월 1일        

100년 편지

대초원의 큰 바위, 제중(濟衆)과 구국(救國)의 신의(神醫), 이태준 선배님께 -박형우-

 

이태준

대암(大岩) 이태준 선생님. 선생님은 저의 의과대학 동창 선배가 되십니다. 하지만 편하게 선배라고 부를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1980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생이니, 1911년 당시 세브란스 병원의학교를 졸업하신 선생님은 저의 69년 대선배가 되십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만났던 가장 선배가 되신 분은 1919년 졸업생으로 3·1운동 당시 세브란스 대표였던 이용설 선생님인데, 그분보다도 8년이나 더 선배이십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말년에 활동하셨던 공간 역시 교통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비행기로 3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머나먼 몽골 땅입니다. 이렇게 먼 땅에서 활동하셨고 뵌 적도 없지만,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동안 조명을 받지 못했던 독립지사들에 대한 관심이 촉구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1910년대 일제 식민지배 아래 죽어가는 민족을 살리고자 몸 바친 큰 의사(大醫)이셨던 선생님도 그런 분 중 한 분입니다.

선생님은 을사늑약으로 실의에 젖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의사라면 꼭 기억해야 할 김필순 선생님의 인도로 인술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고향 경남 함안 군북에서 상경하여 점원으로 일하며 장래를 모색하던 남대문 김형제상회. 그곳은 김윤오·김필순 형제가 운영하던 상점이었지만, 실제로는 우국지사들의 모임장이었으며, 매일 밤 도산 안창호 등이 2층에 모여 쓰러져 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190781일 통감부는 구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러 나섰고, 박승환 대대장이 자결한 가운데 한국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김형제상회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장이었던 에비슨 박사는 주위 청년들을 모았고, 이들 중에는 이태준 선생님도 있습니다. 이들은 김필순 집안의 여성들과 함께 적십자 완장, 들것 등을 만들어 부상당한 구한국 군인들을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하였습니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는 40명이 조금 넘는 환자가 입원할 수 있었는데, 이날 50명이 넘는 부상자가 복도에 누워 있는 등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이태준 선생님도 현장에서 도왔지만, 의술을 배우지 않았기에 너무도 아쉬움을 크게 느끼셨을 것입니다.

구한국 군대 해산은 통감부의 무력으로 결국 많은 한국군이 죽고 다친 슬픈 결말로 끝났지만, 선생님은 김필순 선생님과 에비슨 박사의 권유로 101일 세브란스 병원의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장래를 분명하게 정하였습니다. 2학년이 되자 김필순 선생님 등 7명이 제1회로 졸업하여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7명이 되었고, 에비슨, 허스트 및 이들 선배 겸 스승으로부터 의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세브란스는 외국인 소유 기관이었기 때문에 통감부의 일본 경찰이나 헌병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치외법권 구역이었습니다. 이런 이점을 활용하여 구내에 있던 김필순 선생님의 집에서 도산 안창호 등 우국지사들이 비밀 회합을 자주 가졌습니다. 이 두 분은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는데, 김필순 선생님이 도산보다 약 6개월 더 연장자였습니다. 선생님은 김필순 교수로부터 강의도 듣고 또 애국운동에 관해서도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병만을 고치는 단순한 소의(小醫)’가 아니라 나라를 구하는 대의(大醫)’가 되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도산 안창호와 김필순은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항일 구국운동을 펼치던 중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처단한 후 도산 안창호는 용산 헌병대에 끌러가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풀려났습니다. 도산 안창호는 곧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는데, 김필순을 도우며 병원 실습을 하던 선생님에게 신민회의 청년조직인 청년학우회의 가입을 권유하며 입회비 1엔을 직접 내어주셨습니다.

19109월 선생님이 4학년으로 진급하였을 때 일제는 총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1년만 더 교육을 받으면 의사가 되어 그동안 쌓았던 인술로 병든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게 됩니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빠져 나라를 되찾기 위해 나설 수도 있었겠지만, 먼저 의사가 되어야 경제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선생님은 19116월 세브란스 병원의학교를 제2회로 졸업하고, 모교에 남아 전문적인 의술을 연마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승이자 동지인 김필순 선생님과 구국운동 방안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주목한 것은 191110월에 일어난 신해혁명이었습니다. 혁명의 지도자 쑨원도 선교사가 세운 의학교를 졸업한 의사였습니다. 두 분이 이 혁명의 현장에 참여하여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즈음 일제는 독립운동의 씨를 말리려 광분하며, 총독 데라우치 암살미수 사건이란 걸 조작하여 이른바 ‘105인 사건을 엮어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필순 선생님도 체포 위기에 놓이자 19111231일 망명길을 떠났습니다. 선생님도 일제를 피해 다음날 신해혁명의 본거지인 난징으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난징과 상하이를 아무리 뒤져도, 미국으로 편지를 부쳐 도산 선생에게 물어도, 김필순 선생님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낙담하셨을까요. 선생님은 기독회의원의 의사로 자리를 잡고 독립운동을 모색합니다. 이 시기에 신해혁명의 지도자들과도 교분을 쌓았습니다. 또한, 많은 한국인 우국지사들도 있었는데, 그중에는 우사(尤史) 김규식이 있었습니다. 당시 김규식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유동열, 조선 최초의 항공기 조종사 서왈보 등과 함께 몽골에서 무관학교를 만들 계획을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몽골? 너무 멀다. 그리로 가면 김필순 선생님과도, 조국과도 더욱 멀어지는 건 아닐까…. 선생님은 처음에는 망설이셨지요. 그러나 독립전쟁을 준비하자는 제안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독립전쟁은 선생님이 처음으로 가담하신 신민회의 목표이기도 했으니까요.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려면 5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국내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의 연속이었고, 국경을 넘은 의병과 지사들이 만주에서 절치부심·와신상담, 때를 기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1914년 몽골 땅을 밟았습니다. 선생님이 울란바토르에서 처음 목격한 것은 몽골인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던 문화병(매독)’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의사로서 이 문화병 치료에 적극 나섰고, 몽골인들은 선생님을 살아있는 부처가 왔다!”며 활불(活佛)로 받들었습니다. 자연스레 선생님은 국왕 보그드 칸 8세의 어의(御醫)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졸업하신 세브란스가 알렌·에비슨 등 고종의 어의를 역임했던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 학교 졸업생으로서 몽골 왕의 어의를 맡았으니 그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이렇게 몽골에서 자리를 잡았을 뿐 아니라 다행히 몽골에는 일본인들이 거의 없었고, 상하이에서 모스크바를 왕래하는 많은 독립지사들이 있어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무관학교 설립은 당시 몽골의 정치 상황 때문에 진전되지 못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병원 이름을 여러 동지들이 뜻을 모아 세운 병원이라는 뜻으로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고 지었습니다.

선생님은 1914년 함께 몽골로 들어갔던 김규식의 사촌 여동생 김은식 여사와 재혼하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에는 김규식이 김필순 선생님의 여동생 김순애와 재혼하였습니다. 당시 김필순 선생님은 만주 통화현을 거쳐 북쪽의 치치하얼에서 북제의원(北濟醫院)을 열고, 독립운동에 진력하고 계셨습니다. 이제 김필순-김규식-이태준은 동지이자 가족으로 단단히 연결된 것입니다.

1919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발걸음도 빨라지셨지요. 그해 7월 몽골 국왕으로부터 에르데니-인 오치르(귀중한 금강석)’라는 국가훈장을 받으신 선생님은, 몽골인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을 발판으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나섭니다.

고륜(현재 울란바토르)은 시베리아의 입구 이르쿠츠크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길목이라, 상하이 임시정부가 러시아 혁명정부와 접촉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입니다. 레닌은 임시정부 국무총리 성재 이동휘를 만나 200만 루블의 독립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터였습니다. 192011, 1차분 40만 루블 가운데 12만 루블의 금괴 세 뭉치가 고륜에 도착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자동차 뒷좌석을 뜯어 두 뭉치를 감추고 김립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에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의열단 의백(義伯)인 약산(若山)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폭탄제조 전문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고륜으로 돌아온 선생님을 기다린 것은 고륜을 점령한 러시아의 반혁명 백위군과 우리 독립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일본군 소속 참모들이었습니다. 애통하게도 선생님은 그들의 표적이 되어 피살당해 머나먼 몽골 땅에서 순국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자동차를 운전하던 헝가리인 마자르는 천신만고 끝에 베이징으로 가서 의열단에 합류했으니, 선생님은 의열단원으로서 마지막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영화 <암살>에 나오는 폭탄제조 전문가 마자르가 바로 이 사람이지요. 그의 솜씨를 빌려 정밀한 폭약을 제조하게 됨으로써 우리 독립운동은 한 단계 수준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이태준 선생님,

우리 후배들은 선배님을 오랫동안 몰랐습니다. 그런데 1885년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받은 선교에서 주는 선교로 나서기로 하고 지역을 물색하던 중 몽골이 선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94년 연세의료원이 몽골 국립대와 의학교류 협정을 맺고, 울란바토르에 몽골-연세친선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얼마 후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반병률 교수가 선배님의 존재를 알려준 1998년까지 아무것도 몰랐으니, 실로 망극하고 송구한 심정입니다.

몽골 울란바토르의 이태준기념비(필자가 비문을 썼다)

하지만 몽골 현지에 가 있던 선생님의 후배 전의철 동창이 적극 나서 선배님의 삶과 뜻을 되새기고 기리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2000년에는 기념비 제막식을, 2001년에는 2천여 평 규모의 이태준 기념공원 준공식을, 2006년에는 기념공원 내 이태준 기념관을 차례로 마련하였습니다. 이 사업에는 몽골 정부가 적극 협력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몽골 주재 한국대사관, 현지 한인회 등이 선생님을 기념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고, 고양 함안군에서도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선생님의 숭고한 뜻을 이어가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현재 몽골을 방문하는 한국인이 많으며, 모두 자이승 전승탑 아래 이태준기념공원을 찾고 있습니다. 마치 그 옛날 독립 운동가들이 동의의국을 찾았던 것처럼….

오랫동안 선생님을 챙기지 못했던 후배들을 부디 용서해주시고, 진정한 인술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다가오는 2021년 선생님의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고향 함안에는 이태준기념관이 건립될 것이고, 선생님은 한-몽골 친선의 아이콘이 될 것입니다.

삼가 선배님의 명복을 빕니다.

2019310

까마득한 후배 박형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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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준(李泰俊, 1883~1921)

경남 함안 출생.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경, 구한국 군대 해산이 계기가 되어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에 입학해 의사면허 92호를 받았다(1911년 졸업). 그가 의사이자 독립운동가가 되는 데에는 스승이자 선배인 김필순의 영향이 절대적이었고, 안창호의 권유로 신민회(新民會)의 자매단체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1912년 난징(南京)으로 망명, 김규식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을 위한 비밀군관학교 설립을 목표로 1914년 몽골로 갔다. 그곳에서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열어 근대적 의술을 펼친 이태준은 몽골인들에게 신의(神醫)’로 추앙받고, 몽골 왕의 어의가 되었다. 몽골에 터를 잡은 이태준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의열단에 가입했다. 영화 <암살>에 나오는 헝가리인 폭탄제조 기술자 마자르를 김원봉에게 소개한 이가 바로 그다. 독립의 일념으로 헌신하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이태준. 그는 의사(醫師)이자 의사(義士)였다. 1990,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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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형 우


1956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발생학(해부학) 전공으로 의학박사를 취득했다. 1992년 미국 시애틀 워싱턴대학교 소아과학교실 방문교수(토머스 H. 쉐퍼드 박사)를 거쳐, 모교에서 해부학교실 주임교수, 의사학과 과장, 동은의학박물관 관장을 맡았다. 대한의사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의학한림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국 초기 의료 선교사와 관련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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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9 20:59 2019/03/29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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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스물일곱번째 편지 - 2019년 3월 29일        

100년 편지

<임꺽정>을 따라, 벽초(碧初) 선생 전(前) 상사리 -김홍신-

 

우리 시대의 위대한 금서(禁書)이며 근대문학의 거탑 <임꺽정>의 작가이자 독립운동의 선두에 서고 남북통일을 갈구한 민족사의 큰 어른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선생은 제가 닮고 싶은 선각자입니다.

내 아들아, 너희는 어떻게 하나 조선 사람으로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국치를 당한 1910829일에 자결한 아버지 홍범식 선생의 고결한 정신을 이어받은 그 절개는 암울한 시대의 횃불이었습니다.

홍명희

삼년상을 마치고 중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단재 신채호, 조소앙, 창강 김택영, 예관 신규식 등과 조선독립을 위해 정진하셨습니다. 그 당시 창강 선생께서 집필하신 <홍범식전>에는 외모는 비록 온순하나 내심은 실로 강개막측하였으니 이는 아마 노상에서 굶어 죽을지언정 차마 원수놈의 나라에서 밥을 먹을 수 없을 것이라고 벽초 선생을 평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다. 일생 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

그 말씀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이 글을 사뢰어 올리는 이 순간에도 선생께서는 나라 걱정에 승천하지 못하고 통일이 되기를 갈망하며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북한의 부수상이자 군사위원회 위원을 지내시던 1952113일에 병환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기적적으로 병석에서 일어나 통일을 보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었던 절박한 심정이 살아나게 한 이유라고 하셨습니다. 이 어찌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사에 큰 가르침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임꺽정을 연재한 당시 조선일보 지면

우리나라 신문학을 이끈 선구자인 삼천재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던 벽초 선생의 유일한 미완의 장편소설 <임꺽정>은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였기에 그 시대의 문학도들이 은밀히 읽고 감동받으면서, 우리 문학 초유의 걸작이며 조선말 어휘의 노다지라는 찬사를 실감했습니다. 문학도들이 남몰래 탐독하는 짜릿한 쾌감은 누가 뭐라 하든 위대한 민족유산에 대한 갈증이었습니다.

<임꺽정>19281121일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했지만, 병고와 감옥살이로 연재를 중단하는 우여곡절 끝에 햇수로 13년 동안 게재되면서 백성의 염원을 풀어주었습니다. 일제의 엄혹한 협박과 강압에도 선생의 정신은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임꺽정>과 함께 추천도서로 꼽는 <조선상고사>의 저자 신채호 선생과 상호 공경하던 모습도, 저는 부러웠습니다. 일생 동안 서로 존중했으며 단재 선생께서 옥사했을 때 쓰신 글을 읽으며 올곧은 학문과 선비정신과 뜨거운 민족애와 선각자의 정신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세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바른 길을 걸으려고 뒤뚱거릴 때마다 벽초 선생을 닮아보려고 억척스럽게 살아본 적이 있습니다. 마음에 티끌이 묻을 때마다 참회 기도를 하며 선각자의 삶에 경외심을 가졌습니다. 배움을 놓지 않으려고 안달을 했고, 마음을 곧추세우려고 정진기도를 했으며, 평화통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평화재단의 일꾼으로, 통일의병 대표로 활동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저는, 벽초 선생과 함께 조선 삼재로 평가받는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걸출한 조선의 선비들이 어찌하여 민족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는지 탄식하며 벽초 선생을 더욱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벽초 선생처럼 살고 싶은 욕심에 현대판 <임꺽정>을 집필하려고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엄혹한 감시와 검열에 맞서 <인간시장>을 썼습니다. 계엄 치하의 검열관들은 제 소설 <인간시장>을 그들의 입맛대로 손질을 했습니다. 협박과 공갈에 붓을 꺾으려고 했지만, 제 가슴 속의 벽초 정신은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쓴 <인간시장>은 출간 1달 반 만에 10만부 판매를 돌파했고 2년여 만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100만부를 돌파하여 제가 최초의 밀리언셀러 작가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비록 벽초 선생의 문필을 흉내낼 수 없었지만, 한 시대를 흔든 선생의 정신만은 이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선생의 역사 인식과 민족사적 거대담론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다졌습니다.

2004년 후반부터 3년여에 걸쳐, 잃어버린 발해 역사를 되살리기 위해 <김홍신의 대발해>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200자 원고지 12천 장을 만년필로 꾹꾹 눌러 썼습니다. 우리 문학의 최대 수확이며 조선어의 보고로 평가받은 <임꺽정>을 따라가겠습니까마는, 비재(非才)한 제 능력이나마 영육을 바쳐 벽초 선생의 정신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선생께서 191931일 기미(己未)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조선독립선언서를 만들고 18일 밤부터 등사판으로 수백 장의 유인물을 만들어 19일에 충북지역 최초로 괴산 만세시위를 주도하자 곧 충북지역 곳곳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 당시 복심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그 선언서의 내용은 대담하게도 최후의 일인까지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를 고취하는 문서였다고 했습니다.

선생은 324일 왜경에 체포되어 41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26개월 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신채호, 안재홍, 한용운 선생 등과 만든 신간회의 민중대회사건으로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2년 넘게 옥살이를 하여 소설연재 중단은 물론 지친 몸으로 고초를 겪었습니다.

선생의 진정한 민족애와 국권 회복에 대한 열정은 독립운동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선생께서 꿈꾸던 해방의 기쁨을 맛볼 때 이미 58세였고, 수많은 선비들과 동지들이 일제의 압제와 협박에 굴복해 변절하거나 친일부역자가 되었으나, 선생께선 해방의 감격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맞이한 우리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민족주의자인 벽초 선생께선 오롯이 통일 한국을 수립하자는 민족애로 여러 차례 평양을 오가며 남북협상을 주도했지만, 남한의 친일세력이 강화되어 더이상 서울로 돌아올 수 없는 지경이 되자 환갑되던 해에 북한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임꺽정>과 벽초 선생은 남북역사에서 지워지게 됩니다.

19683580세의 일기로 벽초 선생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선생께서 그리도 간절하게 바라고 기도했던 통일의 그날이 오면 민족의 문학사는 물론 독립운동사와 조선의 참 선비 정신이 반드시 새로 쓰일 것을 확신합니다. 선생의 존엄한 정신이 결코 지워지지 않고 빛을 발할 것이니, 편안히 웃으시며 천상에 오르시옵소서.

기미(己未) 만세시위 100주년

후학 김홍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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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명희(洪命憙, 1888~?)

충북 괴산 출생의 문호(文豪)이자 독립운동가. 일본 유학 뒤 오산학교와 휘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사 사장으로 활동했다. 1927년 좌우합작 민족단일조직 신간회(新幹會) 창립에 산파 역할을 맡았고, 1930년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를 집행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문화예술계의 일제 잔재 청산에 진력했으며,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북한에서 부수상 등을 지냈다. 민족?민중문학의 위대한 유산으로 평가받는 대하소설 <임꺽정>을 집필했다. 호는 벽초(碧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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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홍 신


장편 <풍객>으로 제12회 한국소설문학상(1986), 장편 <내륙풍>으로 제6회 소설문학작품상(1987), 52회 한국문학상(2015)을 수상했다. 건국대 문학박사. 15·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동아일보-경실련 공동평가 16대 국회 의정평가 전체 1위에 선정됐다. 민화협 집행위원장, 평화재단 이사, 통일의병 대표 등을 맡아 활동했다. 다수의 소설집과 수필집, 역서 <삼국지> 130여 권의 저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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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8 12:30 2019/03/2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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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스물여섯번째 편지 - 2019년 3월 28일        

100년 편지

100년 전 미투의 소리, 근우회선배님들께 여성평우회후배가 -김상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로부터 독립운동가분들께 <백년편지>를 써달라고 요청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이 근우회(槿友會)’였습니다. 혹시 근우회 선배님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네요. 9년 동안 3백 분이 넘는 수신인 중에 선배님들이 안 계시다니, 의외였습니다. 암흑 같은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을 염원하며 싸우지 않은 동포가 없지만, 가장 억눌린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대표하여 활동하신 선배님들께 누군가는 편지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근우회

근우회. 혼잣말로 조용히 불러봅니다. 1983년 저희가 여성평우회를 만들면서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을까 고민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는 독재정권의 엄혹한 탄압이 횡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선배님들의 치열한 여성운동 전통을 이어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몇몇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여성평우회라는 명칭을 제시했지요. 또 다른 몇몇은 유엔이 세계여성의 해(1975)에 정한 캐치프레이즈이자 전 세계 여성운동의 목표였던 평화·평등·발전을 이름에 쓰는 게 시대 흐름에 어울린다고 주장했지요.

제 기억에는 두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는데, 우리 역사와 정신을 계승하자는 쪽에 손을 들어줬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때부터 선배님들과 저희 후배 여성운동가들의 인연이 맺어진 게 아니었을까 합니다. 세계여성의 해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말씀 덧붙이겠습니다. 선배님들이 아직 근우회를 결성하기 이전 여러 여성운동 단체에서 각자 열심히 활동하던 1920,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시작하셨다지요?

그 후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기념행사는 꾸준히 이어졌습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조국이 해방된 1945년 이후 사라졌습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좌파 성향이 있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진행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 행사를 1985년 여성평우회가 여러 여성단체들과 함께 복원시켜 제1회 한국여성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선배님들께서 살아계셨다면,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해보게 되네요.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일층 저열하다.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 있는 그 위에 현대적 고통이 겹겹이 가해졌다.”

여성은 단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이유로 예속적이며 억압적인 삶을 강요해왔다. 오늘날 한국 여성은 가부장적 제도의 희생자요, 산업사회의 소외된 계층이고, 국토분단의 비극적 피해자이다.”

여성평우회 회보

앞선 글은 선배님들의 근우회 창립선언문이고, 다음은 후배들의 여성평우회 발기취지문입니다. 1927년과 1983. 무려 55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진단이 참 닮아있어 저도 새삼 깜짝 놀랐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여성의 지위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여, 한편으로 참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네요.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 가부장제도가 여성평우회 당시에도 여전히 여성의 삶을 짓눌렀습니다. 선배님들이 활동하던 그 시절에는 집에 갇힌 여성이 대다수였지만, 1980년대에는 여성들도 사회생활을 많이 시작했죠. 연관된 여성평우회 활동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 싶네요. 일명 이경숙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여고 졸업 후 전화교환원으로 일하던 이경숙 씨가 교통사고를 당해 회사를 그만두고 1년 동안이나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나, 후유증으로 재취업이 어렵게 되었지요.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법원은 결혼한 여자는 어차피 회사를 그만두니 당신의 정년은 딱 결혼 전까지이고, 25세 이후로는 가정주부로 살아갈 테니 일당 4천원으로 손해액을 계산한다고 판결했지요. 남성은 60세나 되어야 돌아오는 정년을 여성에게는 25세라고 규정한 기가 막힌 여성 조기정년제였습니다.

여성평우회를 중심으로 항소심을 청구했고, 그 결과 여성정년 철폐라는 쾌거를 이루어낸 바 있습니다. 선배님들께 이 이야기를 왜 해드리냐고요? 선배님들께서 만든 근우회 행동강령 제1호가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였습니다. 저희 후배들이 그 뜻을 이어받아 열심히 활동했다고 말씀드리고 칭찬받고 싶었나 봅니다. 선배님들의 근우회 창립선언문에는 이런 문구도 있습니다.

조선여성을 불리하게 하는 각종의 불합리는 그 본질에 있어 조선사회 전체를 괴롭게 하는 그것과 연결된 것이며 일보를 진하여는 전 세계의 불합리와 의존 합류된 것이니 문제의 해결은 이에 서로 관련되어 따로따로 성취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것이란 바로 일본제국주의겠지요? 근우회는 비밀조직이 아니었으니, 아마도 왜경의 사찰 때문에 그것이란 두루뭉술한 표현을 쓰실 수밖에 없던 그 마음은 독재정권 시대에 여성운동을 한 후배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성운동과 독립운동이 따로일 수 없고, 여성운동으로 조선의 독립에 기여하겠다는 선배님들의 간절한 의지를 후배들은 읽었습니다.

근우회는 신간회의 자매단체답게, 여성운동의 좌우합작으로 꺼져가는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리려 했습니다. 오른쪽에서는 이화여전의 김활란, 유길준의 조카 유각경,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로 이름을 남긴 최은희 등이, 왼쪽에서는 김마리아와 함께 정신여학교에서 항일투쟁을 시작한 유영준, 최근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로 재조명을 받은 주세죽 등이 참여했습니다.

그랬기에, 선배님들의 운동은 더욱 힘들었을 겁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선배님들을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발기회, 창립대회, 발회식 이래 행사라는 행사는 죄다 따라다니며 무장경관과 사복형사를 진 치게 했고, 축문과 축사를 압수하고 의안 토의 내용까지 사전 검열해 토의를 막았습니다. 해마다 열린 전국대회도 경찰의 탄압으로 한 번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지요.

광주 학생독립운동 진행 과정에서 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지도했다는 이유로 허정숙 선배님, 정칠성 선배님, 박차정 선배님 등이 체포·구금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선배님들의 근우회는 결국 활동기간 5년째인 1931년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말았죠.

공교롭게도 저희 여성평우회의 활동기간도 5년이었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여성민우회등 더 많은 여성단체를 탄생시켰는데, 선배님들의 해산 이후 1930년대 여성운동은 일본의 강력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제대로 자리 잡기 어려웠다 들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만일 제국주의가 아니었다면 여성평우회가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성평우회 시절로부터 다시 36년이 지난 2019년 현재, 대한민국은 미투운동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정계를 비롯해 학계·문화계·체육계 할 것 없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선배님이 활동하시던 시절, 그리고 제가 여성평우회를 만들던 시절, 온 사회가 어쩌면 너무나 당연시 여겨 그 누구도 말조차 꺼내기 어려웠을 각종 성추행·성희롱 사건을 어느덧 여성들 스스로 공론화하고 해결해나가고 있습니다. 저도 어느덧 선배세대가 되었습니다만, ‘미투운동에 나서고 있는 후배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선배로서 부끄럽기도 하지요. 하지만, 오늘의 이 모습은 90여 년 전 선배님들의 분투에서 시작되어 이루어진 결과가 아닐까요? 선배님들, 제 후배들이 자랑스럽지 않으세요? 든든하시지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2019. <백년편지>를 받으시는 분 중에 근우회 선배님들이 빠져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그 편지는 여성평우회의 후배들이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36년 전 여성평우회 창립멤버이자 여성 대표성으로 국회의원이 된 제가 그 일을 자원했습니다.

오늘은 38, 세계여성의 날입니다. 여성평우회, 이름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배님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여성의 인간화운동에 앞장서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100년 후, 200년 후에도 근우회와 함께 여성평우회도 후배들에게 멋진 선배들로 기억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선배님들.

201938일 세계여성의 날에

후배 김상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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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槿友會, 1927~1931)

19275월 창립한 독립운동 단체. 좌우합작의 정신으로 여성의 단결을 꾀하고, 이를 통해 전국적인 항일 여성운동을 전개했다. 여성을 억압하는 온갖 차별의 철폐와 지위 향상을 모토로 내걸었으며, 봉건적 가부장제 청산 및 민족해방을 지향했다. 18세 이상 여성으로서, 2명 이상 회원의 추천을 받으면, 회원 자격이 부여되었다. 창립 2년 만에 3천명 가까운 회원이 가입했고, 국내는 물론 도쿄·간도·창춘(長春) 등 국외까지 70개 넘는 지회가 설립되었다. 여성문제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하고, 전국 곳곳에 야학을 설치해 문맹 퇴치에 나섰으며, 여성노동운동을 지원했다. 일제 탄압으로 해산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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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상 희


1954년 충남 공주 출생. 이화여대 재학 중 민주화운동에 가담하고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여성평우회 창립 멤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3, 부천 소사)으로, 노무현 대통령 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 국회 민생경제특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양극화 해소에 힘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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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7 16:28 2019/03/27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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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스물다섯번째 편지 - 2019년 3월 27일        

100년 편지

식민지 민중의 깃발, 전태일이 경성트로이카 선배님들께 띄웁니다.  -이수호-

 

저는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입니다. 저도 벌써 내년이면 스스로 기름을 끼얹고 분신항거 한 지 50년이 됩니다. 박정희 군사독재와 결탁한 자본가들에 맞서 탄압받는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든 바로잡아보려던 저의 노력과 투쟁이, 거대한 벽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어머니와 친구들이 계속해서 싸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스스로 작은 촛불이 되었지요.

사실 저는 그때, 일제강점기 그 절망의 시기에 선배님들 같은 분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제가 어리고 배움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일제 침략기에는 모두 나서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의 정치투쟁만 있는 줄 알았으니까요.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하며 온 백성이 나섰던 3·1만세혁명이나, 그걸 계기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나라 안팎의 여러 곳에서 진행됐던 항일투쟁이나, 안중근·윤봉길 등 의사들의 무력투쟁을 통한 저항 등이 모두인 줄 알았는데, 선배님들처럼 노동운동을 통해 파업을 조직하고 동맹휴업을 일으키는 일로, 나라의 독립은 물론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이 저에게는 놀라움일 따름입니다.

선배님들은 노동이 존중받고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사회, 모두가 열심히 일하며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인 사회주의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저도 1960년대 중반 열일곱의 나이로 너무 배가 고파, 또 함께 고통당하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 청계천 평화시장의 봉제노동자가 되었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하루 커피 한 잔 값에 혹사당하고 있는 어린 여공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업주들은 일을 안 하면서도 돈을 벌어 떵떵거리며 기름진 음식에 집도 늘려가며 호화롭게 사는데, 평균 17~18세의 봉제노동자들은 일요일도 없이 하루에 15~16시간씩 일하면서도 쥐꼬리 급료에 건강검진도 제대로 못 받아 온몸이 병투성이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제 차비를 털어 굶주린 시다(보조공)’들에게 풀빵을 사서 나눠주기도 하고, 업주에게 시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제 스스로 재단사가 되어 그들을 보호하려 애썼지만, 혼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것을 깨닫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바보회라는 친목단체도 만들고 노동조합에 가까운 삼동회도 조직해서 실태조사도 하며 맞서 봤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여러 기관과 언론에 호소도 하면서 집회와 시위를 통해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은 이번에 선배님들께 편지를 쓰려고 선배님들의 활동을 조사하면서, 그 당시의 주장이 제가 집회를 조직하면서 내걸었던 구호나, 또 그 후 50여 년이 지난 현재 노동운동하는 후배들의 외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년 단위 계약제 반대”, “자본가적 산업합리화 반대”, “하루 7시간 노동제, 주당 40시간 노동”, “아내 있는 노동자를 기준으로 한 최저임금제 확립”, “자본가 부담의 실업·질병·재해·사망 보험 실시”, “외국인 노동에 대한 차별 금지, 동일노동 동일임금”….

1935년 선배님들이 발행한 <적기> 1호에 실려 있는 위의 구호들은 표현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 1970년 제가 분신항거 하던 날 근로기준법 화형식 집회에서 외치려고 했던 구호(결국 제 유언이 돼버렸습니다만)와 요즘 후배들이 여러 집회나 시위에서 외치는 구호와 너무도 비슷하다는 사실입니다.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반대, 노동시간 단축, 제대로 된 최저임금제 실시, 산업재해 방지, 동일노동 동일임금 실시…. 정말 안타깝고 답답할 뿐입니다.

경성트로이카

제가 노동운동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근로기준법을 만나 한자투성이의 책을 안고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으면 하며 몸부림칠 때, 이런 멋진 선배들이 있다는 걸 알고 공부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움이 밀려오네요.

이재유·이현상·김삼룡 세 선배님은 일제에 저항하다가 각각 다른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선배님들은 오히려 그 고통의 감옥에서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웠습니다. 뜻을 모으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스스로 세 마리 말이 되어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수레를 끌기로 한 것이지요. 이름하여 경성트로이카”, 정말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출옥하자마자 1933년 세 선배가 주축이 되고 노동자·농민·학생들을 주축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 중반까지 8건의 공장 파업과 5건의 동맹휴학이 모두 선배님들이 주도한 경성트로이카를 중심으로 일어났지요.

또 선배님들이 끌었던 수레에 많은 분들이 탔는데, 그 중 여성노동자 이효정·이병희 두 분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종고모와 조카 사이인 이들은 일제 시절 한 집에 살며 함께 노동운동을 했었지요. 이효정은 경성트로이카가 주도한 종연방직 파업을 지도한 죄로 1년여 감옥살이를 하는 등 수차례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치렀습니다. 역시 항일운동을 했던 박수복과 결혼했는데, 해방 후 친일파 세상이 되는 데 분노한 남편이 월북하는 바람에 친일경찰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지요. 남편의 월북으로 평생 감시를 받으며 아이들을 키워야 했던 그녀는, 99살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인천 부평의 초라한 소형 연립에서 극빈자로 살았습니다.

경성트로이카 지도자 이재유를 붙잡는 데 성공하자, 일제는 호외까지 뿌렸다.

이병희는 식민지 백성으로, 여성으로, 기생첩의 딸로 삼중의 굴레를 안고 자랐지만, 16살에 종연방직 파업을 맨 앞에서 이끌었습니다.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훈방이 되었으나, 이후에도 계속해서 노동운동에 투신해 3년 후 다시 체포되어 4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해방 후 가난에 시달리던 그녀는 90년대 말에야 이육사의 시신을 인도받은 사실이 알려져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만, 95세로 사망할 때까지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어렵게 살았답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라는 저의 유언을 안고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시며 평생을 가난하게 사신 내 어머니 이소선이 생각나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선배님들도 다 그렇게 빛도 이름도 없이 비참하게 돌아가셨고, 저 또한 그렇게 분신항거 했습니다. 그 힘으로 저와 후배인 지금의 많은 노동자들이, “산자여 따르라!”라는 무언의 말씀에 따라 노동존중의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자랑스런 선배님들 뒤를 따라 힘차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와 선배님들이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오로지 우리가 꿈꾸었던 그 세상이 반드시 실현되기 바랄 뿐이지요. 고맙고 고맙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후배 전태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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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트로이카(1933~1937)

이재유(1905~1944)가 주도한 좌익 비밀결사. 지식인 위주의 이념투쟁을 지양하고, 민중의 삶에 뿌리박은 대중투쟁으로 민족해방운동의 토대를 강화하자는 노선 아래, 경성을 무대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신간회 해체 이후 국내에서 소위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이 사실상 투항한 상황에서도, 경성트로이카는 일제에 맞서 흔들림 없이 치열하게 싸웠으며, 세 차례에 걸쳐 연인원 수백 명이 넘는 조직원들이 체포.투옥되었다. 이재 ,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김형 등이 이끌었으며, 경성제대 교수 일본인 미야케 시카노스케도 가담했다. 이재유는 옥사했다. 소설가 안재성의 <경성트로이카>(2004)로 재조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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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수 호


1949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국어교사. 전교조 창립 주역으로 해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전교조 위원장(2001), 민주노총 위원장(2004)을 역임했으며, 2006년 선린인터넷고등학교 교사로 17년 만에 교단에 복귀했다. 2015년부터 전태일재단 이사장을 맡아, 이 편지의 발신인으로 이름을 빌린 전태일 열사의 나눔과 연대정신을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자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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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6 19:57 2019/03/2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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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스물네번째 편지 - 2019년 3월 26일        

100년 편지

무덤도 없이 구천을 떠도는 당신, 아내 박차정이 남편 약산(若山) 김원봉에게  -박미경-

 

여보, 당신의 아내 차정(次貞)입니다.

박차정

당신을 두고 먼저 떠난 지 어느덧 75년이 흘렀어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참전국의 지위를 얻고자 필사적으로 대일항전을 모색하던 충칭(重慶). 자주독립은 독립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당신은 조선의용대 대원들을 이끌고 임시정부와 힘을 합쳤지요. 약산(若山)이 군무부장을 맡았다는 소식에, 좌우합작 독립운동 단일전선을 염원하던 온 동포들이 기뻐했습니다.

쑨자화위안(孫家花園), 기억나세요? 민족혁명당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던 충칭 근교 창장(長江) 남쪽 강변 작은 마을. 그곳이 우리의 유일한 쉼터였습니다. 당신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사십 중반, 저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였고요. 우리가 부부가 된 게 1931년 맞지요? 단란하고 화사한 부부생활은 바라지 않았어요. 함께 싸운 게 우리 두 사람이 누린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아주 가끔 제 볼을 어루만지며 단잠에 빠지던 당신이 생각나요.

김원봉

충칭에서도 당신은 아주 바빴어요. 저는 상한 몸을 추스르고 있었지요. 1939년 곤륜산(崑崙山)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입은 총상 후유증 때문에요. 충칭 날씨는 아픈 사람에게는 최악이었습니다. 무덥고, 눅눅하고. 어서 일어나 총을 잡아야 하는데, 그만 폐병에 걸리고 말았지요. 폐병은 잘 먹어야 낫는, 돈 먹는 병. 백지장처럼 파리해진 제 손을 쓰다듬는 당신의 눈이 보일 듯 말 듯 떨렸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만족했어요.

독립운동이 영웅이라는 단어를 허락한다면, 당신은 진정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의열단(義烈團) 의백(義伯) 약산 김원봉. 일제는 전전긍긍, 제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지금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300억원이 넘는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친일파들은 의열단 이름 석 자만 들어도 벌벌 떨었지요. 당신은 동포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저 역시 의열단에 가입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항일의 의지를 키웠으니까요.

이성우(李誠宇, 1899~1929) 의사. 1920년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 잠입했다가 발각되어 10년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직후, 감상을 묻는 기자에게 감상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잘 휴양한 것뿐입니다.”라고 답한 분. 그 말씀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만주로 가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전사합니다.

박재혁(朴載赫, 1895~1921) 의사. 중국인 고서(古書) 장수로 위장해 부산경찰서장과 마주 앉아,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트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인다.”고 일갈한 뒤, 폭탄을 터뜨렸습니다. 왜놈 서장을 처단하고 중태에 빠진 박 의사는 신문(訊問)과 치료를 일절 거부했고, 단식 아흐레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가 나가사키에서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봉함엽서에는 와담(臥膽)”이라는 서명이 적혀 있었지요.

최수봉(崔壽鳳, 1894~1921) 의사. 당신의 고향 선배입니다. 단군이 자기네 선조의 동생이라며 역사 왜곡을 일삼는 왜놈 교사에게 그자는 우리 단군의 중현손(重玄孫, 까마득한 후손)이오라고 쏘아붙여, 퇴학을 당했다는 그분입니다. 당신이 다니던 동화학교(同和學校)에 편입해 전홍표 교장의 가르침을 받았지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태연하게 교수대에 올랐습니다. 1심에서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좋소!”라고 외친 그 기백에 우리는 모두 주먹을 불끈 쥐었어요.

김익상(金益相, 1895~1925) 의사. 노동자였던 김 의사는 북경에서 심산 김창숙 선생의 주선으로 당신을 만났습니다. 첫 만남에서 당신은 이렇게 말했다지요?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소. 그러므로 우리는 선구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하오. 이것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하오.”

조선총독부 폭파 계획을 듣고, 김 의사는 그 어렵고 힘든 일을 자청합니다. “일주일 안에 돌아올 테니 술상이나 차려 놓으소.” 호언장담에 걸맞게, 그는 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유유히 돌아옵니다. 술이 식기 전에 적장 화웅의 목을 베어 온 관운장 같지요? 일제는 자기들이 누구에게 응징을 당했는지도 몰랐습니다.

김 의사는 상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사살하려다 실패하고 붙들렸습니다. 피고에게 이익되는 증거가 있거든 말하라는 판사에게, 고개를 꼿꼿이 들고 나의 이익이 되는 점은 오직 조선독립뿐이오라던 김 의사. 20년이나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지만, 왜놈 순사에게 다시 끌려가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몽골의 이태준 선생님이 보낸 헝가리인 폭탄제조 전문가, 마자르. 구사일생으로 북경에 나타난 그는 미친 사람처럼 조선인들만 만나면 김원봉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지요? 당신은 그와 상해 프랑스조계에 비밀 폭탄제조공장을 차립니다. 폭탄 실험을 지켜본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용기백배해 <조선혁명선언>을 쓰시고, 아일랜드인 조지 쇼우가 이륭양행의 배편으로 폭탄과 단총을 실어날랐습니다. 의열단은 피압박 민족의 국제연대에 바탕을 둔 조직이었어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1천 명이 넘는 왜경에 맞서 시가전을 벌이다가 자결·순국한 김상옥(金相玉, 1989~1923) 의사. 왜놈 왕궁 앞 다리(二重橋)에 폭탄을 던지고 옥중 순국한 김지섭(金祉燮, 1885~1928) 의사.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왜경들을 쏘아죽이며 분전하다 자결·순국한 나석주(羅錫疇, 1892~1926) 의사. 이름만 불러도 심장이 쾅쾅 뛰는 그분들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독립운동을 입으로 하는 사람들은 의열단을 단순하고 무식한 과격분자들이라며 고개를 돌렸지만, 민족은 알고 있었습니다. 구축왜노(驅逐倭奴)·광복조국(光復祖國)·타파계급(打破階級)·평균지권(平均地權). 의열단이 추구한 건 낡고 썩은 사회를 부수고 민중의 나라를 건설하는 대혁명이었습니다. “여자의 권리를 정치·경제·교육·사회상에서 남자와 동등으로 할 것.” 의열단 강령 제9조입니다. 누가 감히 당신들을 세상 물정 모르는 한낱 테러리스트로 깎아내린단 말입니까.

황포군관학교

당신의 목표는 독립전쟁,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927, 당신은 최림(崔林)’이라는 가명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했어요. 천하를 울리는 의열단 의백이 중국 군관학교의 일개 생도가 되려 하다니? 다들 놀라고 말렸지만, 당신은 동지들을 아우르며 군인의 길을 선택했어요. 장개석의 북벌에 참여해 남경에 선봉으로 입성하고, 민족해방의 간성(干城)을 기를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웠습니다.

당신이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을 무렵, 저는 부산 일신여학교(동래여고 전신)에서 독서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시작했어요. 옥살이를 몇 번 겪고, 좌우합작 여성민족운동단체 근우회(槿友會)에 몸담았다가, 광주학생운동 배후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받아 만신창이가 되었지요. 병보석으로 풀려난 제가 둘째 오빠의 부축을 받으며 중국으로 온 게 1930년입니다. 곧바로 저는 의열단에 가입했어요.

우리는 띠동갑, 열두 살 차이. 열정으로 돌진하는 당신이 처음엔 조금 얼떨떨했습니다. 내가 시집가려고 망명한 건 아니잖아요. 제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드니까 어린아이처럼 풀이 죽던 당신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모습이 왠지 살짝 지쳐 보였어요. 남자는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여자는 못 속이는 법이랍니다. 그게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기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라는 걸 아세요?

의열단 동지들의 축복 속에 우리는 결혼했습니다. 주례는 백범 선생이 서주셨지요. 아빠가 결혼식에 오셨으면 얼마나 흐뭇해하셨을까…. 당신의 장인어른은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이 아홉 살 때 조국의 현실에 비분강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뜨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어린 아내 이전에 한 명의 혁명가로 존중했지요. 때로는 그것이 당신을 힘들게 한 적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고맙고 미안해요, 여보.

당신의 관심은 오로지 독립전쟁과 좌우합작이었습니다. 1935년 김규식 선생 등과 함께 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의열단 등 5개 조직을 통합해 한국민족혁명당(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을 창당하고, 중일전쟁 다음 해인 1938년에는 중국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창립해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의 깃발을 올렸지요. 하지만, 대원들 가운데는 항일보다 반공을 우선하는 장개석의 노선에 동의할 수 없다는 동지들이 많았어요. 그들은 당신과 결별하고 북상해, 팔로군과 합세했습니다.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 1900~1942)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나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당신은 천군만마를 잃은 듯 낙담했지요. 위로할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현실을 직시해야 했어요. 좌우합작을 실행한 순간, 당신은 이미 정치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겁니다. 이념으로 갈라진 남의 땅에서 민족의 중심을 잡는 일은 탁류(濁流)에 몸을 담그는 걸 마다해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업입니다.

윤 동지는 대원들을 이끌고 산시성으로 이동해 팔로군 작전구역에서 일본군 토벌작전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194263,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일본군 포위망을 뚫다가 대원 일곱 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덕분에, 펑더화이(彭德懷)와 덩샤오핑(鄧小平) 동지가 탈출할 수 있었지요. 윤 동지들 대신 차라리 우리가 그곳에 뼈를 묻었더라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윤 동지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충칭에서는 정중하고 엄숙한 추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념과 노선을 달리하던 모든 정파가 다 참석했지요. 당신은 무섭도록 굳은 얼굴이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여보. 윤 동지를 끝까지 막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고 계셨나요? 아니면, 앞으로 닥칠 이념전쟁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를 맡으셨나요?

당신은 좌든 우든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걸 극도로 싫어했지요. 무슨 주의자나 무슨 파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깔끔한 사람이 당신입니다. 암계(暗計)를 성사시킬 만큼 엉큼하지도 못해요. 속셈을 숨길 줄도 몰라요. 내 남편 김원봉은 담백한 사람. 그런 당신에게 외줄 타기를 요구한 우리 역사가 원망스럽습니다.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나요?

광복군은 어느 한 정파의 군대가 아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라는 백범 선생의 간곡한 설득을, 당신은 받아들였습니다. 일본의 패전은 불을 보듯 환한 일. 대륙의 국민당과 공산당, 시베리아의 소련과 태평양의 미국 틈바구니에서 우리 민족이 상처받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좌우합작 독립군이 연합군 대열에 당당히 합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1943년 버마전선에서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펴던 우리 용사들. 그들은 당신이 길러낸 조선의용대의 정예였지요.

그러나 광복군이 왜놈들에게 결전의 총탄을 퍼붓기도 전에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갑오농민전쟁 이래, 의병과 독립군,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조 의용대와 동북항일연군이 수십 수백만의 피를 쏟고서도, 우리는 참전국의 지위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 원통하고 비참한 역사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습니까.

제 유골을 품에 안고, 당신은 고향 밀양 땅을 밟았습니다. 감격과 환대는 열렬했습니다. 경남 각지에서 20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지요. 밀양 사람들은 밀양역에서 환영식이 열린 밀양국민학교 운동장까지 당신이 걸을 길을 가마니로 덮고도 성에 안 찼든지, 교문에서 연단까지 흰 광목을 깔았어요. 그것이야말로 민족의 영웅을 맞이하는 인민의 레드카펫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불안했어요. 한반도의 정세는 우리가 마주쳐야 했던 대륙의 살얼음판과 같던 공기와 비슷했습니다. 아니, 더 위험했어요. 냉전의 사슬이 한반도를 칭칭 동여매고, 38선이 삼천리강산의 허리를 분질렀습니다. 참전국의 지위를 쟁취하지 못한 대가가 이토록 클 줄이야…. 거꾸로, 친일파에게는 분단과 미군의 진주가 부활의 복음으로 들렸겠지요. 궁지에 몰린 친일파들이 미군을 업고 죽기 살기로 독립운동가들을 죽이려 들었으니까요

왜놈도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 당신을, 해방된 조국에서 왜놈의 개 노릇을 하던 노덕술 따위가 고문하다니! 치가 떨렸어요. 여운형 선생이 비명에 가시고, 당신은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위태로운 상황에 몰렸습니다. 당신은 피눈물을 뿌리고 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는 당신에게는 민족혁명당 동지이고, 제게는 외당숙인 김두봉 선생이 계셨지요. 그 뒤 남쪽이 저지른 몸서리쳐지는 악행들…. 시동생 네 분과 시사촌동생 다섯 분을 학살하고, 시아버님을 굶겨 죽였습니다.

당신은 민족이 함께 살 길을 찾기 위해 단정에 반대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죄라면, 백범 김구 선생님과 우사 김규식 선생님도 반역자라는 말입니까. 당신은 이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당신도 예상하셨지요? 당신은 그쪽 그룹이 아니었고, 목숨을 부지하자고 고개 수그릴 분도 아니니까요. 당신의 최후,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당신이 밀양 시댁 선영에 묻어주었건만, 당신은 무덤도 없이 60년째 구천을 떠돌고 있습니다.

여보, 어디 계셔요?

아직도 눈을 못 감고 계시나요?

제 목소리를 한 번만이라도 들어주세요.

남은 짐과 해원(解?),

살아있는 이들에게 맡기고,

여보, 우리 용서하기로 해요.

당신이 몸을 일으킨 3·1운동 100주년에

아내 차정(次貞)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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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미 경


1968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마산MBC 시사고발프로그램 <아구할매> 작가,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기자로 일했으며, <박인상 회고록>, <김헌정 평전>, <김금수 회고록>, <보건의료노조 20년사>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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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5 22:22 2019/03/25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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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스물세번째 편지 - 2019년 3월 25일        

100년 편지

그 모든 재산 조국에 바치고 귀천, 영석(潁石) 이석영 할아버지께 -이종찬-

 

언젠가 저는 국사편찬위원회가 2009년에 발행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5한국국민당 I’ 편을 펼쳐본 일이 있습니다. 195쪽에 제 눈을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랄 만한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19365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된 <한민> 3호에 실린 글을 전재한 것이었습니다.

그 글은 이 부인의 별세란 제목 아래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고 이석영(李石榮)의 부인께서 상해에 있는 그의 조카 이규홍(李圭鴻)의 댁에 의탁하여 계시다가 노환으로 인하여 본월 11일에 불행히 별세하였는데, 향년 82세이시다. 그는 말년 구구한 신세로 지내시다가 종시 이역에서 돌아가셨으니 실로 유한이 많으셨으리라 한다.”

저는 한참 동안 그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제가 알기에 저의 둘째 할아버지이신 영석(潁石) 옹의 할머니는 두 분이셨습니다. 먼저 할머니는 정씨 할머니로, 시집오신 지 얼마 안 되어 돌아가시고, 그 뒤에 기사에 소개된 할머니께서 시집오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 댁은 떵떵거리는 장안의 갑부였습니다. 새색시로 시집온 할머니를 얼마나 부러워들 했겠습니까?

이석영

영석 이석영 할아버지는 1880년에 당시 가오실 대감으로 불리던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 영의정 댁에 양자로 가셨습니다. 그 댁의 재산은 <매천야록>에 보면 양주(楊州) 가오곡(嘉梧谷)에 별장이 있었는데, 서울에서 80리 떨어져 있었다. 당시 그가 왕래하는 80여 리가 다 그의 밭둑길로 다른 사람의 땅은 조금도 밟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땅을 차지했기에 이렇게 과장된 표현이 나왔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게다가 가오실 대감은 양자를 맞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으니, 둘째 할아버지로서는 뜻하지 않게 그 재산을 물려받는 상황이 된 겁니다. 속된 말로 할아버지 6형제는 이 둘째 할아버지 덕분에 호강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잘 알다시피 그 무렵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이 땅에 눈독을 들이고 넘보던 때였습니다.

이런 백척간두 상황에서 영석 할아버지가 하신 일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서울 회현동 집 앞의 정자 홍엽정(紅葉亭)’을 아우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1869~1953)과 그 친구들에게 내주고, 여기서 새로운 서양문물을 공부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때 신학문을 익히기 위해 모인 친구들이 이상설, 이동녕, 여준 등 모두 그 후 독립운동에 주역이 되신 분들입니다.

하지만 기울어진 나라가 일제의 먹잇감이 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습니다. 6형제의 친아버지이신 이유승(李裕承, 1835~1906) 공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노구를 추슬러서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을사늑약이 폐하의 재가를 거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을 의정대신 대리로 임용한 것이 부당한 인사이니 그를 당장 처단하라는 상소였습니다.

이때부터 할아버지 6형제는 항일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때 형제들을 단결시키는 일은 단연 영석 할아버지 몫이었습니다. 당신의 재력으로 동지들을 끌어모아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신민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항일계몽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등등해졌습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연거푸 승리하면서, 한국은 이제 보호국에서 병합국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제 더이상 국내에 머물면서 항일운동을 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일을 벌이는 것은 언제나 넷째 우당 할아버지였고, 그 뒷받침은 둘째 영석 할아버지, 그리고 뒷수습은 다섯째 성재 할아버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형제간에 역할 분담도 이뤄졌습니다.

우당 할아버지는 영석 할아버지께 의견을 냈습니다. “나라가 없어졌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형님 재산을 그대로 두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아마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에도 운명이 있다면 나라를 위해 투자하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말에 영석 할아버지는 선뜻 나섰습니다.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남양주에서 서울 오는 80리 길의 그 드넓은 본인 소유 토지를 일본 식민 당국의 눈에 띄지 않게 싸게 방매했다고 합니다. 그때 방매한 재산을 누군가 1969년도 쌀값과 소값 구매력으로 환산해보니 600억 원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값으로는 얼마나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돈을 감춰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따뜻한 보료 깔고 아랫목에 앉아 양반 노릇 충분히 할 수 있는 분들이 이를 포기하고 엄동설한에 떨면서 압록강 건너 낯선 땅에 가서 집 짓고, 병사들 막사 마련하고, 식량 사들이고, 젊은 장교들 훈련시키는 데 투자하는 그 넓은 마음…. 이게 영석 할아버지와 그 형제들의 기개였습니다.

영석 할아버지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들 두 형제가 모두 희생되어 절손(絶孫)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몇 해는 상하이의 롱당(弄堂, 주택가 골목길) 안에 자리 잡은 골방에서 콜록콜록 기침을 삼키며 조카들이 끓여드리는 거친 식사로 끼니 때우며 외롭게 살다 가셨습니다.

돌아가시면서도 내가 죽으면 저 사람이 걱정이야하며 할머니 걱정만 하셨습니다. 영석 할아버지가 그렇게 안타깝게 세상을 버리신 뒤 할머니는 조카댁에 얹혀서 2년 더 사시다 앞에 소개한 대로 별세하셨습니다. 아마도 영석 할아버지는 당신과 할머니의 말년의 삶에 대해서도 혁명가가 가는 길은 이런 거야!”라고 하시겠습니까?

할아버지 내외분은 상하이의 정안사로(靜安寺路)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들었습니다. 1992년 제가 다시 상하이에 갔을 때 그곳은 이름이 바뀌어 송경령공묘(宋慶齡公墓)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박은식, 노백린 선생의 묘비는 있는데 이석영 할아버지의 묘비는 없었습니다. 상하이 공동묘지에는 A?B?C 등급이 있는데 C급은 3년이면 이장하든가 화장하여 골분을 가져가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족이 챙기지 않으면 관리자가 화장해버린다고 하고요.

그렇게 보면 영석 할아버지 내외분은 80리 길의 넓은 땅이 아니라 80cm의 공간조차 이 땅에 마련하지 못해 하늘로 귀천(歸天)하셨겠습니다. 어쩌면 그런 귀천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에 바친 영석 할아버지의 삶에 더욱 걸맞은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석 할아버지 내외분께서 부디 영면하셨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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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영(李石榮, 1855~1934)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망국을 당하자 형제들과 함께 구국을 맹세하고 만주로 망명했다. 영의정까지 오른 양부(養父) 이유원(李裕元)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전부 처분해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 설립 및 운영자금으로 바쳤다. 장남 이규준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29세로 병사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 종 찬


1936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경기고등학교와 육사(16)를 졸업했다. 4선 의원. ‘국민의 정부출범의 주역이며, 대통령직인수위원장과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했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 우당기념관장, 우당장학회 이사장으로 독립정신 선양에 힘썼고, 현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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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2 16:15 2019/03/2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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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스물두번째 편지 - 2019년 3월 22일        

100년 편지

독립운동을 하며, 육아일기를 쓴 남자_소벽 양우조 선생님께 궁금한 게 많습니다.-이기연-

 

소벽 선생님, 부인 최선화 선생님과 함께 쓰신 육아일기 <제시의 일기>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며, 그것도 중일전쟁 이후 임시정부의 피난길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공습을 피해가며, 아기를 낳고 키우고, 육아일기를 8년간이나 쓰시다니요. 두 사람이 만나 한 명도 낳지 않는 시대가 된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두 분의 삶은 역사에 기록된 독립운동의 차원을 넘어 일상적 삶의 의미와 생명의 본질까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며 아이를 넷 낳았고, 네 명의 육아일기를 조금씩 썼고, 민중미술운동을 시작하고, 그 영역을 의식주까지 넓혀 민족생활문화운동을 하고, 우리옷 입기 운동을 펼치다 질경이 우리 옷이라는 회사를 만들게 되어 그 대표를 하고 있는 이기연입니다.

양우조 최선화

두 분이 쓰신 육아일기를 보며, 전 도리어 두 분에게 궁금한 게 많아졌습니다. 참 부끄럽게도 두 분과 비슷한 삶을 살아왔음에도 제가 두 분을 몰랐고, 혹시나 해서 주변의 여성운동 하는 친구와 역사학자에게 물어보았는데, 그들도 두 분을 몰랐습니다. 참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소벽 선생님, 해방 후 귀국해 양우조라는 이름을 갖기까지 선생님을 양명진·양묵·양소벽으로 심지어 1937년 결혼하실 즈음에는 중국인 이춘삼이 되기도 하셨죠. 저희 세대도 80년 광주항쟁을 겪으며, 이른바 잠수하고 다니던 수배자 시절을 통해 그 상황과 심정을 공감하고 짐작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신분증까지 만들어 가지신 걸 보면 현지인 만큼 중국어를 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미국 유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들어오신 게 1929.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하고자 영국령이었던 보르네오 정부와 교섭하고, 중국 정부 요인을 설득해 후원을 얻어 국내의 유망한 청년 수백 명의 중국 유학을 주선하고, 중국 광동성 정부의 건설청 공업관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스스로 생계를 이어가며 임시정부 일을 한 것이 1930, 그렇다면 1년 만에 이런 일을 도모할 만큼의 중국어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위기가, 의무감이 선생님을 그리 만들었나요? 과연 그 힘은 무엇일까, 어디서 나온 것일까, 계산기를 두들겨 가며 선생님의 기록 몇 장을 따라가 봅니다. “1897년생, 1915(18세 때) 친구 세 명과 상해로 감. 상해 교포사회에서 미국행 배편과 미국교포의 주소를 얻어, 단신으로 미국으로 감.” ‘단신으로 미국에? 주소 하나 밖에 가진 것이 없는데, 무얼 믿고? 교포사회의 누가 18세의 선생님에게 무슨 이유로 미국행을 주선했나요?

기록에는 선생님이 더 큰 세계를 보겠다는 꿈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만, 그럼 같이 간 세 친구들은요? 혹시 기독교의 후원이나 믿음이 있으셨나요? 선생님의 청소년기가 많이 궁금했습니다. 어떤 부모님, 어떤 환경에서 자라셨는지. 그 무모함과 돌파력은 어떻게 생성된 것인지 아마 앞으로도 계속 찾아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의지대로 선생님은 1916(19) 미국에 도착해 혈혈단신으로 초등학교부터 시작해 10년만인 1926MIT공대를 거쳐 메사추세츠 뉴벳포트공과대학, 28년 폴리버공과대학을 졸업하셨고, 개교 이후 최초의 동양인 졸업생에다가 우등졸업생까지 되셨습니다. 영어 알파벳도 모르던 아이가 미국인도 20년 걸릴 일을 10년 만에 해치우신 건가요? 말도 못하고 돈도 없는 혈혈단신 이국 청년이 항구에서, 탄광에서, 사탕수수밭에서 몸을 다쳐가며 일해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가면서 말입니다.

선생님이 공대를 가고, ‘방직 공학을 전공하시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우연이기도 했지요. 한국을 다녀온 미국인 선교사에게 비참한 조국의 얘기를 듣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으신 게지요. 동포들이 가난하고 헐벗었다’…. 그것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갔기에 선생님의 인생을 방직 공학으로 향하게 했을까요?

해방 이후에도 강원도 산간지방에서 한겨울에 삼베옷 겹쳐 입고 떠는 사람을 보았다는 얘길 민주화운동 원로분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밥은 굶어도, 물만 먹으면 얼마간 견딜 수 있지만, 옷은 못 입으면 바로 죽을 수 있지요.

지난 겨울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 뤼순 감옥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들은 얘기입니다. 노역을 나가고 들어올 때 반드시 검신을 했답니다. 그때 옷을 다 벗고 출입구에 걸쳐놓은 봉을 뛰어넘어야 한다는데, 추울 땐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얼어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검신대와 옷이 그대로 재현되어 걸려있었습니다.

그래서 --라고 하는 나라도 있는데 우리는 굳이 --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지구 온난화 때문에 겨울도 그리 춥지 않지만 제 어릴 적, 60년대만 해도 겨울이면 영하 20도가 넘어갔고, 손등이 터지고 동상이 걸리고 했으니, 일제강점기야 오죽했겠습니까.

나아가 옷은 한 민족의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일제는 우리에게 흰옷을 못 입게 했지요. 흰옷 입은 사람은 관공서 출입을 못하게 하고, 검은 물감을 뒤집어씌우기도 했고, ‘색복 입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서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이라.” 동학 농민들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서면 흰옷 입은 사람의 무리가 보이니 흰산 같고, 앉으면 죽창이 보이니 대나무산 같다는 게지요.

선생님이 뜻대로 방직공업을 제대로 일으키셨다면 과연 그 후의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국의 산업혁명이 방직공업에서 일어났고, 프랑스 파리가 전 세계 패션의 중심이 된 것도 방직공업의 발달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 통에 옷감과 군복의 생산력이 늘어나 있으니, 전쟁이 끝나면 새로운 소비처가 필요해지지요. 전쟁 산업에서 평화산업으로 탈바꿈하는 그 어디쯤에 맞춤복에서 기성복으로의 전환이 있고, 그 결과 패션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새로이 대두되고 각광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상상과 달리 초기의 명품 디자이너들은 패션 전문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파리를 대표하는 샤넬은 무학의 가난하고 불우한 모자 보조 봉제사였고, 전후 패션산업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고 평가되는 크리스챤 디올은 외교관 지망생으로 미술품 중개를 하던 사람이고, 이태리의 죠지 알마니는 의대생이었습니다. 버버리는 대영제국 군대에 군복을 납품했고, 휴고보스는 히틀러 군대에 군복을 납품했습니다.

대량생산 되는 원단에 맞는 디자인을 하고, 그것이 영화로 유행하고, 새로운 수요와 유행이 발생하고, 전문기술과 디자인을 가르칠 학교가 생기고, 전 세계에서 그 학교로 유학을 가고 유행을 선도할 잡지가 생기고, 관심을 끌 이벤트로써 패션쇼와 전 세계 장사꾼들을 모으는 패션 전시회가 생기고, 그것이 모두 전후 자본이 모이는 구조가 되는 것이죠.

소벽 선생님, 선생님은 과연 어디까지 시대를 읽으신 겁니까? 과연 어디까지 산업적 접근을 하신 겁니까? 헐벗은 내 민족을 돕는 자선사업가나 종교지도자, 정치운동가가 되지 않고, 왜 방직공업을 전공하셨는지, 유럽에서도 이런 변화가 2차대전이 끝나서야 가시화되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1920년대 초반에 거의 20여 년을 앞서 이런 생각을 하고 결단을 하셨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더구나 예사롭지 않은 건 그런 계획을 혼자서 수립한 게 아니라, ‘재미한국 학생회흥사단동료들과 의논을 거듭한 끝에 역할분담을 하고 한국에서의 실천계획까지 짰다는 것이지요. 방직공업도 세분해서, 면방직, 마방직, 공장가동을 위한 전기학, 직원 자녀들 교육을 위한 교육학까지 생각하셨다니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 준비를 위해 무역업을 해서 큰돈을 벌어 조국으로 들어오셨지요. 그러나 공장부지를 찾기 위해 전국에 인맥을 동원해 조사를 한 것이, 일제에 의해 독립운동을 하러 왔다는 의심을 사 감시를 받게 되셨다지요. 그 과정에서 선생님은 독립을 하기 전에는 산업을 일으킬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을 하시게 된 겁니까?

혹시 흥사단 활동을 하시며 이런 꿈을 꾸신 건 아닙니까? ‘전문성으로 새로운 독립운동의 장을 열고, 기업 운영을 통해 지속적이고 합법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직원 자녀교육으로 시작해 민족독립 교육까지 이루는 것, 혹시 식민지를 운영하는 그들보다 출중하면 독자적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그 어려운 시절, 모국어를 쓰는 우수한 미국 사람보다도 더 빨리, 미국의 명문대를 그것도 3개씩이나 섭렵한 선생님의 행적은 사실, 이런 상상을 해보지 않으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 꿈을 꾸며 조국에 돌아왔는데 부산지역에 감금당하고 10여 년 준비한 꿈이 일제에 의해 짓밟힌다는 절망 때문에 장티푸스를 앓으신 건 아닌지요. 그래서 장티푸스를 이겨내자, 곧바로 상하이로 떠나 임정을 통한 독립운동에 투신하시게 된 건 아닌지요. 그때가 1929, 선생님이 32세가 되셨던 때입니다.

그리곤 곧바로 재상해 한국독립당창당발기인이 되셨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또 재무부 화남 특파원으로 임시정부의 자금을 모으고, 젊은이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일들을 맡아 하십니다. 그리고 화남지역 한국유학생회 지도고문으로 임명되시고 혁신사란 출판사를 설립해 <민족주의와 기타주의>, <삼민주의>, <손문학설> 등을 번역?출판하고 월간지 <한성(韓聲)>을 발행했는데 국내 배포경로가 일경에 발각되어 본국에서 한글 활자를 구해 보내던 조카와 친형제가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 중반에도 불심검문해 인물 한 장이라도 발견되면 감옥에 갔습니다. 그런데 식민지 시대에 제작배포라니, 배후를 캐기 위해 일경이 선생님 가족을 얼마나 고문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1980년대에도 노동자 신문에 삽화를 그렸다고 국가보안법 위반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40년 뒤인 지금은 가짜뉴스가 온갖 해악을 일으키는 데도 통제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193640세 되던 해, 소벽 선생님은 26살의 최선화 선생님과 혼인을 하십니다. 그녀는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모교의 교사를 하던 신여성이었습니다. 선배의 소개로 서울에서 잠깐 본 이후 소벽 선생님과 편지로 사귀다가 혼인까지 결심하게 된 것이지요, 14살 많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위험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동경제대를 나온 수재였다는 최선화 선생님의 아버님은 중국까지 사윗감을 보러 가셨고, 일경을 피해 다니는 사윗감을 보고, ‘애국청년이라 믿음직스럽다며 혼인을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 멋지십니다. 그러나 그 당시 하셨던 그 판단의 가치는 두 분이 그 뒤에 깊고 긴 강처럼 흐르는 일상을 어떻게 살아내셨는가에 달려있고, 그것을 엿볼 수 있는 게 바로 <제시의 일기>라 생각됩니다.

두 분은 김구 선생님의 주례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셨고, 소벽 선생님은 연미복에 나비넥타이, 최선화 선생님은 장식 없는 하얀 웨딩드레스에 아주 긴 면사포, 한 다발의 부케를 드셨습니다. 조촐하지만 정성과 자부심이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청첩장은 영어와 한문으로 작성되어 유학생다운 국제적 면모가 느껴집니다.

저도 최선화 선생님과 같은 나이, 26살에 혼인을 했습니다. 제 주변에선 제가 제일 빨랐습니다. 80년 광주항쟁 이후 학생운동권은 거의 모두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거리에서는 수시로 불심검문이 행해지고 수배자 명단은 전국에 뿌려졌습니다. 감춰준 사람들도 끌려가서 매 맞고, 고문당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게 불과 40여 년 전 일입니다. 19816월쯤 되자 수배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제겐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학생운동으로 감옥에 갔던 한 남자가 수배가 풀리니 도리어 갈 곳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돌아갈 집이 없는 남자였습니다. 후배들과 새로운 미술 운동을 준비하던 저는, 순서를 바꾸어 먼저 결혼부터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남자와는 같은 길을 가니 결혼을 언제 하는가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 여겼지요.

우리는 전통 혼례를 재해석해 새로운 혼례 양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시장 바느질 집에 가서 한복을 한 벌씩 맞추어 입고, 북한산 중턱 넓은 공터를 무료로 빌렸습니다. 결혼식 날 산 밑에는 닭장차(시위진압에 동원된 전경들이 탄 버스)’ 2대와 전경들이 깔렸습니다. 노조 풍물패들이 산 밑에서부터 풍물을 치고 올라오고, 요주의 인물들이 모이기 시작하니 위장 결혼식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합니다. 식이 끝나자 가마솥 걸어놓고 국수 삶아 먹으며 막걸리 한잔에 모두 춤추고 노래하고 놀았습니다.

재건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함께 한 최선화 선생(왼쪽 끝, 1943)

그 후 이 혼례 양식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저는 절·교회·성당 등에서 혼인 못하고 사는 노동자들의 혼례식을 이렇게 매주 집전했습니다. 어느 가난한 노동자의 비 오는 혼례식 날에는 혼례 끝나고 짜장면을 시켜 먹는 기억도 나고, 제 아들이 화동(花童)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소벽 양우조·최선화 두 분 선생님은 임시정부 내에서도 보기 드문 지식인 부부셨고, 결혼을 계기로 최 선생님은 교사에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애국부인회 준비위원으로 총무로 활동을 시작하셨고, 임시정부의 가족이 되셨습니다.

제시가 3살 무렵이던 어느 여름날 일기입니다. 제시가 학질에 걸려 앓고 있었는데, 소벽 선생님이 약을 사다 다려서 아이를 달래가며 먹이고 계셨습니다. 왜일까? ‘엄마는 애국부인회 조직을 위한 준비 회의에 분주해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벽 선생님, 저는 <제시의 일기>에서 이날이 제일 인상에 남습니다. 임시정부 중요 활동가인 재무부 차장께서 아이를 돌보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또 임시정부에 아동 주일이 있고, 그날이 되면, 임시정부의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과자값을 따로 챙겨준다는 것도 참 놀라웠습니다.

그런가 하면 둘째 제니가 태어날 때, 시계를 들고 초조하게 시간을 재던 조소앙 선생님, 장차 나라를 구할 인재가 태어나기를 기다리시던 김구 선생님, 사주 보고 좋아하시다 딸이라니 실망하시던 원로 선생님들, 그 모든 것이 가부장제나 아들 선호로 느껴지기보다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아픈 아이를 돌보며 어린 아내를 내보낼 수 있는 소벽 선생님의 원칙 같은 게 그곳에 함께 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소고기 한 근이 4원인데 20원을 주고 제시 자매의 사진을 찍고, 고난의 피난길 중에도 아이의 옷을 만들고, 뜨개질을 하는 모습, 그런 것들이 좀 낯설다가도 어쩌면 삶의 여유와 품위를 유지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단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소벽 선생님, 193874일 시작된 <제시의 일기>1946429, 8년 만에 이렇게 끝내시는군요.

과거의 조국을 찾기 위한 투쟁이 아닌 새로운 조국을 만들기 위해 일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 구절이 참 슬프게 마음에 울립니다. 선생님이 분단된 조국에서 느끼셨을 그 모든 낯선 감정들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 늘 가슴에 품고 있겠습니다.

소벽 선생님,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서 반갑고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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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우조(楊宇朝, 1897~1964)

만 스물이 되기도 전에 독립전선에 가담하러 상하이로 망명했다가, 교포사회의 주선으로 미국에 유학했다. 귀국해 민족의 입을꺼리를 책임질 방직공업을 일으키려 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여의치 않게 되자, 다시 망명해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해방 후에는 실업계에서 활동했다. 호는 소벽(少碧).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이화여전을 나와 안정이 보장된 삶을 뿌리치고 14년 연상의 소벽과 결혼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온 최선화와 결혼,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에 진력했다. 이 부부가 남긴 육아일기 <제시의 일기>는 조국애와 부부애 그리고 부성과 모성이 합체된 감동의 가족드라마인 동시에, 임시정부 요인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

                                                                      
             이 기 연


 
()질경이우리옷 대표이자 생활문화원 무봉헌주인이다. 미술과 민주화운동, 우리옷과 민족전통을 하나로 잇는 일에 40년 넘게 매달리고, 여성독립군을 예술로 되살리는 작업을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100인 위원회) 위원. 침뜸의학과 건강문화 전승을 위해 노력하는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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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0 21:29 2019/03/20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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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스물한번째 편지 - 2019년 3월 21일        

100년 편지

윤동주, ‘십자가’“당신의 시는 바로 지금 나의 삶입니다”-박경석-

 

윤동주

윤동주, 조국해방의 새벽이 깊어가는 1945216. 그는 1944년 일본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스물아홉의 생을 마감하였답니다. 29. 예수님보다 더 짧은 삶을 불꽃처럼 살다 별이 되었습니다. 그는 독립투쟁의 전선에서 비록 장렬하게 산화한 투사의 삶은 아니었지만, 시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조국해방을 위해 모가지를 드리우며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렸던 분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는 지금도 여전히 내 삶의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지났습니다. 일제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74년이 되었습니다. 일제식민지에서 해방된 1945년을 맞이했지만, 그 해방은 분단의 시작이었고, 지금도 이어지는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해방과 동시에 시작된 고통으로 깊어가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노래한 십자가는 여전히 분단된 현실 앞에 걸리어있습니다.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년과 일제식민지에서의 해방과 분단의 역사는 우리 민족에게는 꽃처럼 피어나는 피의 역사였습니다. 그 피는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괴로워하는 분단된 조국에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전쟁보다 평화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원합니다.

저는 1983년 스물네 살에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다가 행글라이딩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고, 장애인이 되어버린 내 삶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스물아홉보다 더 짧은 삶을 살다가 갔을 것입니다. 걸으면서 비장애인으로 살아왔던 24년과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를 타고 구르면서 살아온 36년을 합치면 스물아홉에 요절한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삶보다 두 배나 더 오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1960년에 태어났습니다. 북에서 월남한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 사이에서 527남매 중 다섯째 쌍둥이로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부족함 없이 교육을 받았고, 5·18이 바로 지난 한 달 뒤 해병대를 지원해서 군복무를 하였습니다. 제대한 후 대학 2학년으로 복학을 하였고, 198389일 주일날 어머니의 주일날 교회 가라는 말씀을 뒤로 하고 경주 토함산에서 열리는 제1회 전국대학생행글라이딩 대회에 출전하여 행글라이딩을 타다가 추락하여 척수를 다쳐 하반신 마비의 장애인으로 일제식민지 기간과 같은 36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해병대를 제대하고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입은 스물네 살 청년은 장애를 받아들일 수 없어 죽음만을 생각하며 집구석에서 5년을 지냈습니다. 5년은 언젠간 다가올 죽음이 달콤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나의 하반신의 무감각이 내 삶을 지배하였던 세월이었습니다.

고통보다 무거운 무감각한 삶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집 근처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 나가서 컴퓨터교육 직업훈련을 받기 시작한 1988년부터였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비장애인으로 살아왔던 삶을 떠나보내야 했고, ‘장애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또 다른 고향에서 나는 살기 위한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노들장애인야학25주년개교기념식_2018.8.9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36년을 지나갑니다. 그 세월은 나에게는 여전히 계속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애해방투쟁의 시간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백골(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노래했듯이,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곳은 나에게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서 나는 개인의 비극을 넘어 장애인(Disability Person)이라는 정체성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장애해방운동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만들기 위해 지하철로를 사다리와 쇠사슬을 매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저상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를 사다리로 묶고 버텨야 했습니다.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면서 한강대교를 6시간 동안 기어야 했습니다.

70.5%의 장애인이 한 달에 다섯 번도 외출하지 못하는 현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지하철 리프트를 이용하면서 떨어져 죽어야 하는 현실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저상버스가 도입되었지만, 보편적으로 이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정부가 계획을 내놓고 있지만 거짓부렁입니다. 2005년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 제3조에 모든 교통수단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여 이동할 권리를 가진다(이동권)”는 동네 아저씨 이름인 이 동권이 아니라 권리입니다. 그렇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대놓고 무시하고 지키지 않습니다.

1993년까지 중증장애인들은 초등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제외조항의 교육법 때문에 등록장애인 중 40% 가까이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학력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최저임금법에는 지금도 중증장애인은 최저임금 지급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제외조항이 있습니다. 15세 이상의 장애인들 중 60%가 비경제활동인구로 살아갑니다. 이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입니다.

한 아버지는 중증장애인 맏아들을 수십년 동안 집에서 돌보았습니다. 자신이 늙고 병들어가자 자신이 죽고 나면 맏아들을 돌보아야 할 자신의 처와 둘째 아들이 걱정되어 새벽에 잠자고 있던 중증장애인 맏아들을 망치로 때려 죽고 자신도 자살하려 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아버지는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집행유예로 선처했습니다. 새벽에 아버지에게 맞아 죽어야 했던 중증장애인 맏아들의 존재는 폐기물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가족들에게 폐기물 처리의 부담까지 가중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중증장애인들을 폐기물 처리하는 눈물 나도록 잔혹한 조치들을 계속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전보다 많이 좋아지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나는 일제 식민지 때도 먹여주는 대로 조용히 먹고 살면 나름 좋지 않았습니까?”며 다시 물어봅니다. 중증장애인을 감옥 같은 장애인거주시설에 가두고 보호한다고 합리화하는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헌법 제31조에 따라 법 앞에 평등하며 차별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 수준이 ‘0’의 출발선이라면 2019년을 살아가는 중증장애인의 삶은 ‘-100’의 나락입니다. 장애인을 배제하고 격리하면서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권리를 빼앗는 것과 다름이 아닙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2019년의 대한민국 하늘 아래, 중증장애인들은 지역사회에서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함께 완전하게 통합되어 참여하면서 살아갈 날을 위해 장애해방 만세!”를 외칩니다. 나는 윤동주 시인이 건네준 십자가를 지고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면서,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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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尹東柱, 1917~1945)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은 일찍부터 기독교와 신문물을 받아들인 선구적인 한인마을로, 그가 졸업한 명동학교는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1941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 재학 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했다. 1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대표작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 ‘십자가’, ‘쉽게 쓰여진 시등을 남겼다. 연희전문을 졸업할 무렵 시집을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해방 후 친구와 동생이 유작시를 더해 1948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했다.

                                                                      
             박 경 석


 
196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83년 추락사고로 척수장애를 입었다. 1996년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조직국장을 시작으로 장애인차별철폐운동에 뛰어들어,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상임공동대표(2003),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2003) 등을 역임하고,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Asia-Pacific Disabled Forum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5회 들불상(2010), 17회 불교인권상(2011), 1회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상(2015) 등을 수상했다. 저서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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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19:17 2019/03/19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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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스무번째 편지 - 2019년 3월 20일        

100년 편지

침묵의 울림, 명진이 만해 스님에게 올립니다  -명진스님(한기중)-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만해 스님, 스님은 가셨지만 우리는 스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니 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시 한번 깊이 스님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올해가 임시정부를 수립한 지 꼭 백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리워해야 할 까닭은 민족의 새로운 백년을 준비하는데 스님의 정신과 발자취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난 백년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고, 나아갈 백년 또한 그리 밝지만은 않기에 등대 같은 스님이 더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

만해 스님, 스님께서는 조국의 독립과 불교의 유신을 함께 추구하셨지요. 불교의 유신과 조국의 독립이 둘이 아님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땅에서 나고 자란 만물이 그 땅을 닮듯이 이 땅의 불교 역시 이 땅의 현실을 등지고는 존재할 수 없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같습니다.

스님께서 사시던 일제시대 우리 불교는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을 따르는 어용불교였습니다. 사찰령에 따라 31본사제를 채택하고 있던 불교의 대표들이 태고사에 모여 주지회의를 한 적이 있었지요. 그때 스님께는 강연에 나서 다음 같이 물으셨다고 하지요.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도 답하는 이가 없자 스님께서는 똥이올시다. ! 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라고 하시며 재차 청중을 향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하지만 좌중에 앉아 있던 승려들은 벙어리처럼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내 경험으로는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썩은 송장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식음을 할 수 있어도 썩은 송장 옆에서는 차마 밥이 입에 들어가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하셨지요. 그리고는 그 형형한 눈빛으로 좌중을 다시 한번 쏘아 보시고는 송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사 주지 네놈들이다!”라고 벼락같은 할(喝)을 하신 뒤 바로 법당문을 열고 나가버리셨습니다.

만해 스님이 쓴 조선불교유신론

스님께서는 당시의 썩은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불교유신을 주창하셨습니다. 불교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일본 불교를 몰주체적으로 추종하고 조선총독부 사찰령에 의해 불교가 억압받고 있는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선 교학·제도·의식 전방에 걸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책까지 집필하셨지요. 그 책이 오늘에도 유의미한 <조선불교유신론>입니다.

스님, 만해 스님!

스님께서 지금의 불교 모습을 보신다면 31본사 주지들에게 내리셨던 벼락같은 할(喝)을 또 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불교의 모습은 일찍이 서산대사께서도 말씀하셨듯 법문도 못하고 시주밥만 축내면서, 닭벼슬보다 못한 중벼슬을 차지하려고 온갖 추문을 일으키는 벙어리 염소중’, ‘지옥 찌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해 스님, 스님의 발걸음은 절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맴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41세가 되던 19193·1독립운동에 불교계를 대표해 참여하셨지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는 자리에서 후일 친일로 변절했던 최남선 등의 유약한 이들과는 달리 과감한 행동을 주창하셨습니다. 그 주장은 행동강령인 공약 3장으로 우리에게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3·1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스님의 진면목은 다시 한번 빛났다고 생각합니다. 191958일 경성지법 예심의 재판 기록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피고는 금번 계획으로 필벌될 줄 알았는가?)

나는 내 나라를 세우는 데 힘을 다한 것이니 벌을 받을 리 없을 줄 안다.”

(피고는 금후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으로만으로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강건하셨던 스님께서는 민족대표들이 감옥에 수감된 후 나약해진 모습을 보면서 이 비겁한 인간들, 울기는 왜 울고 뉘우치기는 왜 뉘우치느냐! 이것이 소위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대표란 말이냐! 이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 취소해 버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지요.

어쩌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비타협적이고 꼬장꼬장하셨던 스님께서는 성북동 기슭에 총독부를 등진 집, 심우장을 짓고 사시다 끝내 해방을 보시지도 못한 채 1944629일 영면에 드셨습니다.

만해 스님, 스님이 걸으신 길은 현실에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실패일까요? 저는 역사 속을 살다 가는 우리 중생들이 현실의 짧은 순간에 이루고 못 이루고로 성공과 실패를 가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길을 가면서 현실에서 성공한다고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성공은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옳은 길을 가는 것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친일한 자들은 세속적 기준으로 보자면 당대에 성공한 삶을 살았고, 불행하게도 해방 후에도 청산되지 못하고 계속 성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 스님과 같이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은 역사의 빛을 보지 못했고 그 후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해방이 되었지만, 빛을 되찾는다는 의미의 광복(光復)’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스님이 사셨던 일제강점기와 같은 곤궁한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신념과 지조를 버리고 빛을 잃은 채 살게 됩니다. 그러한 불우한 시대에 스님과 같이 꺾이지 않는 꼿꼿한 분들이 있어 우리의 역사가 정의의 불씨를 잃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많은 지식인들 같이 변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삶이 왔다가 가는 한 줄기 바람 같은 것임을 아셨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현실의 모든 것은 변해가고 변해가는 모든 것들에 붙들려 살아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이 사(私)의 세계가 아닌 공(共)의 세계로 환하게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고 생각됩니다.

새로운 민족의 백년을 생각하는 오늘, 스님께서는 침묵하시지만, 그 침묵은 어떤 말보다 큰 울림으로 우리에게 메아리쳐 오고 있습니다.

님은 멀리 가셨지만, 우리는 님을 한 걸음도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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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충남 홍성 출생. 소년 시절 동학농민운동에 뛰어들었고, 갑오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1905년 인제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법을 받았다. 민족대표 33인의 1.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내 저항정신을 일깨웠고, 1927년 신간회에 가담해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재조직하고 불교 청년운동을 이끌었으며, 1937년 항일 불교단체 만당(卍黨) 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렀다. 소설 <흑풍(黑風)>, <박명(薄命)>을 남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명진스님(한기중)


 
1950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가야산 해인사를 거쳐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했다. 우리 불교 혁신과 통일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 <민족21> 발행인으로 활동했으며, 봉은사 주지를 맡았다. 평화의 길 이사장. 참여연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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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13:42 2019/03/19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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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열아홉번째 편지 - 2019년 3월 19일        

100년 편지

우리는 어노행노불굴의 노동운동가, 강주룡 열사님께 -황소라-

 

손말이음센터는 직접 전화가 어려운 청각언어장애인들과 비장애인이 전화통화를 할 수 있도록 수어나 문자를 음성으로, 음성을 수어나 문자로 통역을 제공해드리는 곳입니다.” 저는 항상 이렇게 시작해요. 저부터 소개하는 게 순서잖아요. 내가 하는 일을 털어놓는 것보다 내가 누구인지 더 잘 알릴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요, 전에는 없던 직업이 자꾸 생겨요. 손말이음센터, 상상이 안 가시죠?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가 엄청 빨라서요. 사람들은 손바닥 만한 스마트폰을 쥐고 산답니다. 이거 없으면 친구도 못 만나요. 아무것도 하지 못해요. 사람 사이가 광속으로 조립되고 광속으로 분해되는 것 같아요. 머리가 핑핑 돕니다. , 그러고 보니 전에는 많던 일자리가 자꾸 줄어들어요.

을밀대 지붕에 오른 강주룡

강주룡 열사님!

제가 말이 많죠? 독립운동 이야기가 나오면, 여자애들은 제일 먼저 유관순 열사님을 떠올립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독립운동하신 분이 한두 분이 아닌데, 더 공부해보자는 마음으로 책갈피를 넘기다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노동자로 싸우셨네요? 어쩜 그 시절에! 그럼 저는 선생님의 백년후배가 되는 셈이어요. 백년후배에게 <백년편지>를 받으시는 강주룡 열사님! 제가 축하드립니다!

저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더 잘 살고 싶어서 노동조합에 들었습니다.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났고, 몸도 마음도 튼튼해졌습니다. “노동조합 할라구 회사 다닌다, ?” 선배님 중에 입만 열면 이렇게 허튼소리를 하는 분이 있었지요. 그때마다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어요. 후배들 챙겨주지 못해 안달인 선배의 너그러운 심성을 알기에, 억지 타령이 밉지가 않았어요. 내가 그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요새 제가 그렇습니다. 단지, 조금이라도 일찍 들지 않은 게 아쉬울 뿐이에요.

지금은 출근길이 너무나 즐겁지만,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일에 굳이 여성이라는 문패를 달고 싶지는 않은데, 열사님은 한국 최초의 여성 노동운동가시죠? 저는 국내 최초의 사이버 성폭력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산업재해 여성 노동자입니다. 최초라는 점에서는 같아도, 선생님은 이미 노동운동가로 나아간 시점이고, 저는 아직 노동자에 머물렀다는 게 다르네요.

사이버 성폭력’, 짐작이 가시나요? 저희는 청각언어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전화통화를 돕는 중계사입니다. 이 일에는 영상통화가 필수에요. 저희 신상이 고스란히 노출됩니다. 전화를 거신 분은 중계사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아는데, 본인인증 절차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생각지도 못했어요. 누군가를 돕는 일로 사는 게 뿌듯했기 때문입니다.

5년 전 일이었어요. 어느 남성이 영상통화로 마주한 저에게 못된 짓을 했습니다. 차마 글로는 못 옮기겠어요. 회사에 알렸지만 아무런 대비책도 세워주지 않았고, 그 남성은 계속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저는 모욕과 공포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전화벨 소리가 지옥의 초대메시지처럼 들렸다면, 믿으시겠어요? 이 세상과 안녕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제 손을 잡아준 손길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선생님에게 편지를 쓰는 행운을 누리지도 못했을 거예요.

산업재해 신청을 했어요. 절차가 정말 모질었습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을 피해자가 증거를 모아서 제출하래요. 켜켜이 쌓이는 트라우마가 저를 사정없이 후벼팠습니다. 다행히 마음씨 고운 노무사님 덕분으로 무너지진 않았어요. 판정이 나오던 날, 할 말이 있으면 해보래요. 저는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산업재해 신청은 당연한 내 권리입니다. 그러나, 그 판정이 상처받은 내 영혼을 과연 어루만져 줄 수 있을까? 혹시 그 때문에 영원히 피해자 프레임에 갇혀 살아야 한다면? 피해자는 행복해서는 안 되고, 항상 눈물짓는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무의식에 가위눌린 내가 너무 가여웠고, 미웠어요. 그래서 나를 더 사랑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저를 사랑하는 것보다 아주 조금만 더요.

함께 일하는 선배, 동료, 후배, 모두가 저를 응원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뭉치기로 했어요. 할머니와 할머니의 사랑하는 동지들이 그 옛날 평원고무공장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2017611KT새노조 손말이음센터지회가 태어났어요! 저희는 당당하게 요구했고, 회사와 공동으로 TF를 꾸려 중계사를 보호할 안전한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바보 같은 황소라는 존재하지 않아요.

남편에게 사랑받았다기보다는 사랑했었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책에서 보았어요. 저도 사랑을 주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른 나이에 애통하게도 사별하셨지만,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누구보다 든든한 힘이 되어 응원해주셨겠지요? 저도 가족이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제가 선택한 걸 뭐든지 응원해주거든요. 언니는 사회복지사, 저는 중계사, 제 동생은 기술을 배웁니다. 다들 좋은 일 한다고 칭찬을 받을 때면, 흐뭇해서 서로 얼싸안아줘요.

이번엔 조금 달리 얘기해보겠습니다. 저희 언니는 격일근무제, 저는 무기계약직, 제 동생은 계약직이에요. 그러면, 주변에서는 요즘은 다 그래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청년들은 왜 불안정하게 살아야 할까요? 왜 항상 부족하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살았나요?

우리만 그런 줄 알았어요. 공부해보니, 선생님 시대도 똑같더라고요. 저랑 비슷한 나이에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고공농성, 옥중에서 76시간 단식농성을 벌이신 강주룡 열사님. 목표는 여공노동권 쟁취, 임금삭감 저지였어요. 열사님은 회사로부터 참으로 가혹하게 무시당하고 해고당하고 투옥당하고, 옥중투쟁 후유증으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러나 임금삭감 저지라는 목표만큼은 이루셨지요. 누군가는 한 사람의 희생이라고 하겠지만, 모두가 노력한 결과라고 믿습니다.

우리 청년들도 사람이 먼저인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어요. 닭장 같은 고시원이 아니라, 진짜 내 집 내 방에서 편히 누워 휴식을 취하고, 내일을 불안해하지 않고 기대하는 노동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있어요. 간접노동자였던 손말이음센터 중계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직접 고용을 이루어냈답니다. 목표 중 하나를 달성했을 뿐, 이제 시작이죠. 노동운동의 길은 기약이 없지만, 선생님께서 손뼉을 쳐주셨으면 좋겠어요. 너희들 잘하고 있다고. 너희들 선택을 존중한다고.

요즘 줄임말을 많이 쓰잖아요? ‘어덕행덕이라는 말을 아세요? ‘어차피 덕질할 거 행복하게 덕질하자!’에요. 저는 어노행노에요. 요건 짐작이 가시죠? ‘어차피 노동할 거 행복하게 노동하자!’ 저는 노동과 노동조합은 연관검색어라 생각해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을 하면 연관된 단어들이 주르륵 뜨거든요. 봄이면 꽃놀이가 겨울이면 눈썰매가 떠오르듯이요. 노동과 노동조합도 그런 사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주룡 선생님, 21세기는 백세시대라고 해요. 2의 직장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평생을 일한다고 해요. 돈을 벌 목적으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세상이 곧 온대요. 그날을 앞당기고 싶어요. 저의 직업인 중계사가 대우받고 배곯는 직업이 되지 않게 행복하게 평생 일하고 싶어요.

출근길이 소풍길보다 신나요. 지금 제 마음이에요. 회사 가면 조합 친구들이 있거든요. 사람들이 많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노동조합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요! 우리 어디서든 어노행노해요! 저 맨날 이렇게 외쳐요. 맹랑하고 당돌하지요? 저희가 이럴 수 있는 거 선생님 덕분이라는 걸 잘 알아요.

강주룡 열사님!

저희에게 노동운동을 할 권리를 물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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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룡(姜周龍, 1901~1931)

평북 강계 출신. 열네 살 때 가난에 쫓겨 가족이 서간도로 이주했고, 스무 살 때 다섯 살 어린 남편 최전빈과 결혼했다.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든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뜨자 시집에서 쫓겨나, 귀국해서 평원고무공장 노동자가 되어 친정 식구를 부양했다. 1929년 대공황이 터져 임금 삭감으로 불황의 책임을 떠넘기는 회사에 맞서, 파업을 이끌었다. 경찰이 공장에서 쫓아내자, 단신으로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라 여성해방! 노동해방!”을 외쳤고, 옥중에서도 단식으로 저항하다가 병보석 출옥 두 달 만에 눈을 감았다. 강주룡의 일생은 여성의 인간선언이자 여공의 해방선언 그 자체였다.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황 소 라


 
1988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울 때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 찾고, 요즘도 사랑한다는 전화를 잊지 않으시는 아빠가 제일 좋다는 아빠딸이고, 맛있는 반찬 있으면 엄마 오시기 전에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밥상을 지키는 엄마딸이다. 나사렛대학교에서 수화통역을 전공하고, 손말이음센터에서 중계사(수어통역사)로 일하며 노동조합 지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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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11:45 2019/03/19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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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열여덟번째 편지 - 2019년 3월 18일        

100년 편지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원희복-

 

선생님의 손녀 둘이 할아버지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두 손녀는 멀리 유럽의 오스트리아에서 왔습니다. 큰 손녀 수지, 작은 손녀 스테파니입니다. 90년 전 그때는 선생님이 프랑스 파리로 갔지만, 이번에 3·1혁명 100년을 맞아 두 손녀가 할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두 손녀는 할아버지가 일했던 그곳, 서울에 세워지는 임시정부기념관 기공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서영해 선생 특별전에 참석해 할아버지의 체취를 다시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서영해 선생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할아버지 고향을 찾은 두 손녀의 가슴은 벅찹니다. 자신의 영광스러운 핏줄을 확인하고, 최근 선생님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본격 이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이 고대하던 3·1대혁명 100년을 맞아 한반도에는 다시 평화통일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승만_서영해

선생은 1902년 부산에서 서석주 님의 8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이름은 원래 희수(羲洙)였습니다. 선생님 나이 불과 17, 분연히 3·1대혁명에 참여했습니다. 100년 전 3·1운동은 왕조시대를 끝내고, 국민이 주인인 시대를 연다는 혁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이미 국권은 일제에 강탈된 상태였고, 어린 나이의 선생님은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선생은 분연히 중국 대륙을 향해 나갔습니다. 희수라는 이름도 버리고 큰 산봉우리와 바다라는 의미의 영해(嶺海)로 바꾸었습니다. 선생은 당당히 상해 임시정부를 찾았습니다. 임정 어른들은 영해의 용기에 감탄했지만, ‘공부를 더해야 한다며 프랑스 파리로 보냈습니다. 100년 전 불어를 단 한마디도 모르는 열일곱 나이, 혈혈단신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구에 내린 선생의 황망한 심경을 어찌 필설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선생은 어학과정을 마친 후 11년 중고등학교 과정을 불과 6년 만에 마치는 대단한 노력을 보였습니다. 나중에는 고향에서 보내오는 학비도 떨어져 직접 학비를 벌며 공부해야 했습니다. 선생님이 남긴 글에 뼈에 박히는 큰 고생을 했고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려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는 대목에서 당시의 고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선생은 1929년 파리고등언론학교까지 마치고 당당히 파리에 <고려통신사>라는 언론사를 세웠습니다. 당시 파리는 국제연맹이 있던 세계외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선생은 19297월 파리에서 열린 반제국주의세계대회 등을 시작으로 일제의 조선강점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리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선생은 세계외교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외교투쟁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선생은 임시정부가 프랑스조계에 있던 점을 감안, 프랑스 외교전문을 이용해 임시정부와 연락하는 뛰어난 능력도 발휘했습니다. 임시정부가 단 두 명의 외교행서(대사)를 임명했는데, 미국의 이승만과 파리의 서영해였습니다.

선생은 외교투쟁만 한 것이 아닙니다. 선생은 한국의 역사를 축약한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어 소설을 집필했고, <심청전><흥부와 놀부> 등 한국의 민담을 불어로 번역에 서방에 알렸습니다.

선생은 또 파리에서 사랑도 했습니다. 파리에 유학 온 열세 살 아래 오스트리아 여성 엘리자베스 C. 브라우어와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1939년 오스트리아에 가서 정식 결혼을 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 스테판 칼 알로이스 솔가시 서(徐)가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서로를 갈라놨던 것입니다.

왼쪽-서영해의 아들 스테판, 가운데-손녀 수지,오른쪽-손녀 스테파니

다행히 선생님의 아들 스테판은 건축가로 잘 자랐습니다. 그리고 두 딸 수지와 스테파니를 낳았습니다. 선생의 아들 스테판은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얼굴을 매우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스테판은 자신의 아버지가 한국인 저널리스트 서라는 단서를 두 딸에게 남겼습니다. 당신의 손녀 수지는 각고의 노력과 여러 한국인의 협조 끝에 자신의 뿌리를 찾았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서영해 선생은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선생은 연세대에 불문과를 신설해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부산의 교육자 황순조 여사와 재혼했습니다. 선생은 안정된 조국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선생은 정치적으로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선생은 1948년 백범 김구의 선발대 격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유엔에 승인 얻고자 장면 등을 파견했을 때 선생은 반대편에서 프랑스로 달려가 남한만의 단독정부는 안 된다고 설파했습니다. 가깝고 친하고, 앞길이 보장된 선배 이승만을 거부하고 험한 길을 갔던 이유는 분단은 안 된다는 하나된 조국에 대한 신념이었을 겁니다.

19496월 백범이 암살되자, 선생은 정치적 위험을 느꼈을 겁니다. 부산에 있던 부인과 함께 다시 프랑스로 가려 했지만 운명은 또 선생의 가족을 갈라놓았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사라졌습니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요. 부산의 부인은 선생을 기다리다 떠났습니다. 다행히 선생이 남긴 기록은 요즘 새로이 정리되고 있습니다.

필자는 선생의 마지막 행적에 관심이 많습니다. 기자의 입장에서 기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선생의 마지막을 추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1949년 것으로 알려졌던 선생의 행적은 1956년 상해 인성학교 교사까지 찾았습니다. 1961년 민자통 고문단에 구주대표로 선생의 이름이 올라 있지만 검증이 안됩니다. 도대체 선생은 어디 계십니까. 그래서 선생에 대한 필자의 편지는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더 확인되면 선생님께 고하려 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원 희 복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현재<경향신문> 선임기자(부국장). 전국부장과 시사주간지 <주간경향> 편집장, <스포츠경향> 종합뉴스부장 등을 거쳤다. 저서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 <사랑할 때와 죽을 때-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도개손 평전>, <국가가 알려주지 않는 공무원 승진의 비밀> 등이 있다. <촛불민중혁명사>를 저술해 2018년 제12회 임종국상 언론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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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12:56 2019/03/18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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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열일곱번째 편지 - 2019년 3월 17일      

100년 편지

임시정부의 통신망

이세창 선생님과 당신의 교통국 연통제 동지들에게 -이세윤-


기미년 31, 거세게 일었던 태극기의 물결도 어언 100년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비롯하여 이 땅을 지켜주신 선조님들 덕분으로, 이 땅은 많은 것이 바뀌어서 어느덧 세계에서 손꼽히는 나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어제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어요. 선생님께서 계시던 그 시절의 우리 백성들은 어떠했는지요? 백년 전의 어른께 편지를 올리는 건 처음인지라…. 그 시절, 엄혹했던 이 땅의 선조님들에게,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부득불 안녕하시냐고 묻고 싶은 제 마음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세창 선생님께서는 신의주에서 양복점을 하셨다지요? 지금은 좀 촌스럽다는 소리를 듣겠지만, 당신 자신의 이름을 따 세창양복점”. 어떻게 장사는 잘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동지들과 비밀리에 힘을 모으고 계셨지요. 저희들이 감히 알지도 못할, 이름이 채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일본인들의 총칼과 고문 속에 쓰러져가신 독립운동가 분들을 챙기고, 그들이 어떻게든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우셨을 모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화면들로만 제 머릿속이 채워지는 건 아마도 상상력이 부족한 탓인 듯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저는 독립투사들이 안전하게 휴식하고 드나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점 역할을 수행하셨던 분들의 이야기를 종종 보곤 했습니다. 물론 그분들의 끝이 거의 예외 없이 참담했던 것 또한 제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세창 선생님도 아마 그러셨겠지요? 평소 친분이 있었던 독립운동가 분들도 계셨을 것이고, 가끔은 생판 남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을 동지라는 이름 아래 숨겨주고 재워주고 말입니다.

저는 지금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습니다. 그리고 노동조합에서는 나와 어깨 걸고 한뜻으로 함께하는 사람을 동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가끔 주변에서는 이 단어를 쓰는 우리를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다면, 선생님께서는 격분해서 화를 내실지, 어처구니가 없어 쓴웃음을 터트리실지 모르겠습니다. 참 부끄러운 모습이지요. 독립운동을 하시던 선생님들과 수많은 독립투사님들께서 동지라는 두 글자를 입에 올리던 그때에는, 참으로 피가 끓어오르고 연대감이 들었을 것이며, 애절했을 텐데…. 후손인 저희가 동지라는 의로운 단어를 부끄럽게 만든 것 같아 죄송하고 또 죄송할 뿐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저는 선생님과의 유대감을 다른 부분에서 찾고 싶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소속되어 활동하시던 곳이 임시정부 교통국 연통제라는 조직이라지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이끌던 기관이라고 들었습니다. 법령과 공문들 전파도 하시고, 독립운동 소식도 알려주고, 독립자금도 전달하고…. 지금으로 치면 우체국, 전화국, IT통신회사, 택배회사가 하는 일들을 맡으셨습니다. 선생님과 동료들이야말로 임시정부의 통신망이 아니었을까요?

, 맞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전파하시기 위해 노력하신 대목이야말로 진정한 업적이리라 생각합니다. 교통국과 연통제 비밀요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던 그 모든 소식은 단순히 정보의 전달 1-2-3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옳은 것인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누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보태야 하는지. 그것은 식민지 민중이라면 반드시 함께 나눠야 할 목숨만큼 소중한 소통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옳지 못한 세상을 바르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어 보자는, 항일과 독립의 외침이었습니다.

저 역시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오던 일개 백성 중의 하나였던 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부조리한 법에 맞서고, 누군가를 탄압하는 자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며, 약하고 힘이 없어서 당할 수밖에 없던 동료들과 함께할 싸울 수 있는 머리와 다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최소한 아무것도 아닌 내가 아니고, 무언가에 대하여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조합을 먼저 만들고 지켜오던 선배들이 힘 있고 가진 자들의 계속된 억압과 탄압을 이겨내며 해방의 목소리가 끊기지 않도록 끝까지 주변에 알리고 지켜온 덕택일 것입니다.

이세창 선생님, 선생님과 교통국 연통제의 동지들께서 지켜온 그 목소리가 이제 100년이 지난 지금 이 땅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들리십니까, 선생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당신들의 거룩한 희생으로 전달하신 목소리의 후손들이 토해내는 외침을. 때로는 깨어있는 아이 엄마의 목소리로, 때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목소리로, 때로는 민주노총의 목소리로, 때로는 양심적인 정치인의 목소리로.

나라를 잃고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는, 일제의 탐욕에 조선의 꽃과 같은 젊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참아서는 안 된다는 그 비장한 목소리들을 선생님들께서 방방곡곡에 전파해주신 덕분에, 2019년을 살아가는 저희는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항의할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세창 선생님께서 보시기엔 뿌듯하시기도 하시겠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멀었다고 꾸중을 내리시지는 않을까요. 아직도 더 큰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작게는 저희 주변 회사의 횡포부터 시작하여, 100년 전에 선생님의 가족과 이웃을 못살게 굴던 친일파의 처벌, 그리고 크게는 이 땅을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가장 죄송하게 여겨야 할 남북 분단 상황까지도요. 목소리를 더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세창 선생님께서 보여주셨잖아요?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우리 목소리를 냈던 우리 민족입니다. 불행하게도 여태껏 반쪽이지만, 그래도 독립한 우리나라에서 외치지 못할 것은 없겠지요? 그것이 바로 저희가 선생님들로부터 물려받은 자랑스러운 조국의 위대한 유산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에서 통신망을 담당하는 비정규 노동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도 통신노동자로서, 통신노동조합 조합원으로서, 그리고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선생님께서 지켜봐 주시고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01932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청년, 이세윤 올림

* 교통국(交通局)과 연통제(聯通制)

이름 없는 애국자들이 지킨 임정의 혈맥

조지 쇼우와 가족

19195, 상해임시정부는 교통부 산하에 임시교통국을 설치했다. 교통국의 근간(根幹)은 아일랜드인 조지 쇼우의 이륭양행으로, 이어서 압록강변 8개 군과 함경남도·평양·황해도·경성에 임시교통사무국 거점이 마련되었다. 교통국의 임무는 초기에는 자금조달이었으나, 19203월부터 통신 전달 및 적정탐사에 주력하게 된다.

또한, 임시정부는 국내외 동포들과 소통 및 독립에 대비한 지방자치의 전 단계로서 연통제와 거류민단제를 실시했다. 19194임시정부령 제2는 면마다 자치제를 조직하여 행정·사법 및 경찰위원을 선출해 국토 회복이 완성될 때까지 질서유지 임무를 다할 것을 지시했다(<한국독립운동사>, 역사비평).

세도가나 집권자들의 압제를 받으며 억눌려 지내오기만 했던 사람이 자신에게 해를 끼쳤다면 모를까 이렇다 할 혜택이나 은덕을 베풀어 주지 못했던 조국이 이미 숨통을 끊긴 마당에도 그 조국을 찾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일제에 항거하는 모습을 볼 `때 진정한 애국자가 따로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정정화, <장강일기> p60)

연통제는 국내 애국자들의 헌신으로 운영되었다. 수당 정정화 여사의 국내 잠입을 도운 이세창 씨가 바로 그런 분이다. 훗날 왜경에 체포돼 투옥, 끝내 종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 이세창 씨 같은 어른이야말로 독립의 진정한 주역이자, 우리 현대사가 반드시 찾아내야 할 이름 없는 영웅(Unsung Hero)이다.

             이 세 윤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티브로드에 입사했다. 통신업계 비정규 노동자들이 힘을 모은 희망연대노조에 가입, 2013년부터 케이블방송비정규직티브로드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고용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본사를 단체협상에 불러내기 위해 고공농성까지 결행한 동지들과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해하는 맑은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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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5 17:36 2019/03/15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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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열여섯번째 편지 - 2019년 3월 14일      

100년 편지

안중근 의사가 천국에서 춤을 추고 계실까? -조세현-


안중근 (토마) 의사(1879-1910)

안중근 의사님! 의병참모중장님! 순국선열님!

불러도 불러도 한없는 안타까움만이 가슴에 맺힙니다.

한국 국민이 안 의사님께 저지른 죄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안 의사님은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가시기 전날인 1910325일에도 가족의 안위는뒤로 둔 채로 오로지 조국의 앞날만을 걱정하셨습니다.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라고 하시면서, 운명직전까지도 동양평화론을 집필, 침략자 일본에 대하여 같은 황인종끼리의 침략근성을 꾸짖고,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룰 것이다라는 경고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훌륭하신 안 의사님에 대하여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죄인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해를 거듭할수록 엄습하여 오고 있습니다.

장군님 집안 8촌 이내에서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을 받으신 분들이 무려 15분이나 되신 독립유공자 가정에 우리 후손들이 해온 일이 너무나 초라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더 내가 죽거든 내 시신을 이곳 여순에 묻어 두었다가 조국이 해방되면 대한조국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신지 100년이 되어도 일본의 철저한 비협조로 안 의사님의 유해는 찾지 못한 채 안 의사님을 남달리 사랑하셨던 백범 선생님의 유방백세(遺芳百歲)」네 글자만이 효창원 장군님 허묘(虛墓)에 덩그러니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안 의사님의 유해 찾기는 기록문화가 철저한 일본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더더욱 안타까운 일은 안 의사님이 순국하신지 100년이 넘도록 안 의사님께서 그토록 존경하시는 어머니 마리아 여사님의 유해는 19277월 상해 징안스(靜安寺) 공동묘지에 묻혀 있은 후 유실되었다는 사실만 알 따름입니다.

부친 안태훈 (베드로) 진사

모친 조 마이라 여사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님은 사형을 언도받은 아들 안 의사에게 항소를 하지 말라. 구차스럽게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너의 목숨을 구걸하는 것으로 보일까보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와 같이 근엄하신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님의 기개가 새삼 떠오릅니다.

우리의 죄는 어디 그뿐입니까.

안 의사님의 부인이신 김아려(아네스) 여사 역시 1949227일 상해에서 운명하신 후 시어머니이신 조마리아 여사 인근 묘역에 안장되었으나 이분 유해 역시 유실되어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안 의사님 바로 밑의 여동생 안성녀(루시아)의 묘는 부산 용호동 천주교 묘지에 찾는 이 없이 쓸쓸하게 묻혀 있고, 장남 분도는 1911년 흑룡강성 해림시 근처 무링(穆陵)에서 일제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알려진 이후 역시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 의사님의 바로 밑 남동생 안정근(치실로) 1949317일 운명하여 상해 만국묘지에 묻힌 후 지금까지 그 소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으며, 막냇동생 안공근 역시 어느 폐광의 갱도에 암장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실종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사실 등을 볼 때 민족의 영웅 독립유공자 가족이 이렇게 비참한 대접을 받는 것인지 가슴이 메입니다. 그 밖에도 안 의사님 8촌 이내의 가족 중 그 묘소에 대한 이야기는 지면이 모자라 일일이 언급할 수 없습니다.

안 의사님은 1910310일 사형집행 전 유언을 통해 내가 죽은 뒤 하늘나라에서 대한 조국이 독립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춤을 출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안 의사님께서 가족에 대한 이러한 소식을 듣고 하늘나라에서 과연 춤을 추고 계실까?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안 의사님의 여타 가족 또한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어떤 이는 러시아에, 어떤 이는 파라과이에, 어떤 이는 북한에서 헤어져 살면서 서로 48촌끼리 얼굴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100년 동안 우리는 안 의사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단 말입니까?

참으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대한민국정부는 이제라도 그분들의 시신을 찾는 각별한 노력을 해야 하며, 만약 시신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그분들의 유품만이라도 찾아 허묘(虛墓)일망정 가족묘를 조성하고 <거룩한 묘지>로 명명하여 전 국민의 추앙과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을 간곡히 청원합니다.

또한 1992년 한국과 중국의 국교 정상화가 될 때까지 한국 국민은 공산화된 중국 땅에 입국이 자유스럽지 못하여 그분들의 시신을 찾지 못하였음을 십분 이해하나, 중국 땅에 자유스럽게 왕래하였을 북한 당국의 처사는 참으로 한심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태백은 전장에 나간 남편을 위한 아내의 시 한수를 읊었습니다.

長安一片月 장안에 조각달 떴는데

萬戶?衣聲 집집마다 다듬이 방망이 소리

秋風吹不盡 가을바람 지칠 줄 모르는데

總是玉關情 오로지 옥문관 생각뿐이네

何日平胡虜 어느 날 오랑캐 무찌르고

良人罷遠征 내 낭군 원정에서 돌아오려나

안 의사 부인 김아려(아네스)와 장남 분도(오른쪽), 차남 준생-의거 직후 하얼빈에서

목숨까지 바치신 의사님과 같은 분들에 대한 우리 후손들의 예우가 그러하다면, 향후 국가가 외적으로부터 침략을 받았을 때 어느 누가 목숨을 걸고 이에 대항하여 싸우겠습니까?

이 기회에 순국 열네 글자를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됩니다. 「순국(殉國)」의 순(殉)자는 뼈알(?)변에 가득할 순(旬)으로 이를 합하면 구할 순(殉) 즉 뼈가 가득할 정도로 나라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목숨을 바쳤다는 의미입니다. 순국이란 의미가 그러할 진대 오늘날 순국이라는 용어를 남용하거나 파렴치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위선자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분도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멀지 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靈福)의 땅에서 영원(靈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 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께 바치어 후세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많고 많은 말은 후일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년 경술 214

장부 안도마 드림

안의사님은 1910년 나라가 망한 것을 목격하고 30세가 되던 1908년 만주 땅에서 김두성을 의병 총대장으로 하고, 스스로는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기도 하였으나 실패로 끝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 의사님!

이제 안 의사님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뒤늦게나마 우리 국민 많은 사람이 그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어느 날에는 안 의사님 가족(후손)들의 유해를 한 곳에 모셔놓고 우리 국민 모두가 위로하여 드릴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후손들은 안 의사님을 비롯하여 독립투쟁에 전 가족이 희생되신 왕산 허위 선열님, 우당 이회영 선생님, 석주 이상룡 선생님, 동농 김가진 선생님 가족 등 독립유공자 묘역을 따로 조성하여 사후에 가족의 영혼만이라도 상면하시게 될 날을 고대 합니다.

안 의사님과 그 가족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로서 안의사는 19세에 천주교에 입문하여 세례를 받고 곧이어 복사(服事)로서 신부님의 시중을 들었으며, 그의 부친 안태훈 진사 역시 베드로라는 세례명과 모친 조 마리아 세례명과 안의사 큰아들 분도를 천주교 신부로 삼아 달라고 그의 부인 김아려(아네스)에게 보낸 간절한 유언장을 보거나, 사형집행 전 종부성사(천주교인이 임종 시에 신부로부터 받게 되는 성사)를 위하여 세 차례 간청 끝에 찾아온 빌렘 신부를 보자 땅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하였으며, 감옥 안에서도 매일 성호를 긋고 기도를 드리며 동양평화를 기원했다고 합니다.

한국 천주교가 2014816124위 시복식을 가진 데 이어서 132위의 시복식을 추가로 준비 중이라고 하니 안 의사님께도 복자로서 시복하여 주길 바라며, 이로써 안중근 토마를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유린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했다는 이유로 살인자로 매도하여 온 천주교의 그동안의 과오를 씻어야 할 것입니다. 천주교 차원의 상응하는 조치를 하여야 할 것으로 봅니다. 그 한 예로서 한국 천주교가 안 의사 가족묘 조성에 앞장서는 것도 그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후손들이 하여야 할 일은 이것 뿐입니다.

안 의사님! 하늘나라에서 이 나라를 굽어 살피소서.

             조 세 현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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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3 15:50 2019/03/1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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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열다섯번째 편지 - 2019년 3월 12일      

100년 편지

나는 꽃이되 불꽃처럼 살겠소

정미(丁未) 의병 여러분께 바칩니다. -심상정-


작년 절찬리에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마지막 회, 고애신의 부탁으로 영국 기자가 찍은 의병들의 사진이 112년 전 여러분 열두 분의 모습과 겹쳐지던 그 장면…. 처음에는 번개를 맞은 듯 소름이 끼쳤고, 이내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오늘날의 저희에게는 역사 교과서 한 귀퉁이에 실린 사진으로 익숙한 여러분의 모습이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온 의병 사진

어느 시대를 살아가던 이였건 간에 저마다의 꿈이 있었을 겁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랬겠지요. 제가 드라마 한 편을 보면서 그토록 가슴이 아팠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바라던 것이 명예와 돈이었든 아니면 속마음 깊숙이 숨겨진 연정이었든, 굳이 파헤칠 필요는 없습니다. 최후의 순간, 그들의 선택은 조국이었습니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욕망은 제멋대로 엇갈렸으나, 망해가는 나라의 단말마를 외면하지 못하고 끝내 한곳에 모인 젊은이들.

독립운동은 어느 특별한 사람만의 이념이나 사상이 아닌, 모두의 대의(大義)였습니다. 누구나 출발은 다른 법이고 때로는 너무 멀리 빗나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만나게 되는 지점 말입니다. 못되고 못난 무리를 제외하면, 열정의 밀도에 차이는 있을망정 시대를 거역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독립운동의 격랑이 지난 후로도 한반도는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위해 뜨겁게 싸우는 사람들의 땅이었습니다. 저도 제 시대를 나름 치열히 살아가는 중입니다.

나는 꽃이되 불꽃처럼 살겠소.” 고애신(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의 주인공)의 결연한 한 마디가 잊고 지냈던 제 청춘의 한 장면을 불러내었습니다. 스물한 살에 위장취업해 솜털 같은 어린 여공들이 밤낮없이 착취당하던 구로공단에서 노조를 결성하다 쫓겨났던 때, 노동자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는 막무가내 기업주들에 맞서 핏발선 눈으로 파업 계획을 짤 때, 손톱만큼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기득권층이 판치는 국회에서 뱀의 지혜라도 빌리고픈 심정이었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원한 동지들이 우리 곁을 떠나던 그 참담한 순간….

철의 여인, 인민무력부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노동운동가이자 진보정치인인 제게도 소박한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꽃피는 봄, 연애를 실컷 해보고 싶고 수험서 아닌 소설과 역사책을 마음껏 읽는 것이 목표였던 시절 말입니다. 재수 생활이 너무 힘들었기에 대학에 들어가면 캠퍼스의 지성과 낭만을 만끽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신 독재정권의 시퍼런 서슬 아래에서도 운동권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교육을 통해 사회에 도움이 되어 보겠다는 소신이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성과 낭만의 캠퍼스에는 이미 사복경찰이 쫙 깔려있었습니다. 여행을 가려고 해도 불심검문에 번번이 가로막히고, 책이라도 마음 편히 읽으려고 하면 금서(禁書)로 지정되곤 했습니다. 마음에 든 남자친구와 사귀어보려고 해도, 그가 깊이 빠져있는 운동권에 발을 디뎌야 했습니다.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독재정권과 맞서 싸워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매킨지, 신복룡 역, 대한제국의 비극 표지

지금 제 손에는 F. A. 매켄지의 <대한제국의 비극>이 들려 있습니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여러분을 찾아왔던 영국인이 쓴 책입니다. 기억하시지요? 한민족의 운명을 안타까워해주던 파란 눈의 친구를. 그가 찍은 여러분의 사진이 이 책에 실려 오늘날 대한민국에 전해졌고, 그 덕분에 저희는 여러분의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알고 있습니다. 유생·해산군인·평민·천민의병장·농민…. 입성만큼이나 다양한 배경의 민초들이 조국을 위해 굳은 입매와 단호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그 얼굴들이요. 여러분 중에는 열네 살, 열다섯 살 소년도 있었습니다. 어린 투사의 앞날을 걱정하는 매켄지에게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지요.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는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여러분께서 그때 그 자리에 서 계셨기에, 여러분께서 자유민으로 죽기를 결심하셨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원점(原點)입니다. 여러분의 삶이야말로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역사의 진실입니다. 차라리 자유민으로 죽고자 항일투쟁에 나서는 이름 없는 의병의 목소리. 사람답게 살겠다며 독재정권에 맞서는 맨주먹. 정미의병의 뜨거운 피는 1919년 만세운동으로 이어졌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양반도 황실도 아닌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어떤 이념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의 뿌리는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정미 의병

중국 상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있습니다. 광복 이후 관광지가 되었는데, 상해 시정부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곳을 세 번 방문했습니다. 건물을 다 돌아보고 나올 즈음이면, 청사 건물의 유지보수를 위해 관람객에게 후원을 부탁하는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그 방송을 들을 때마다 저는 내 삶의 일부를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헌법에 임시정부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해놓고, 우리는 이리도 무심했습니다. 임시정부 청사 방명록에 박힌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서명을 보기가 민망하기만 합니다.

여러분께 부끄럽고 망극한 고백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희는 도둑처럼 다가온 해방과 해일처럼 밀려든 산업화에 떠밀려 책임과 단죄의 시기를 여러 번 놓쳤습니다. 올바른 역사는 진실로만 채워져야 합니다. 진실을 건너뛴 화해나 타협은 왜곡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진실을 물려줄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 책임을 확인하는 ‘100주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국회 정문 앞에서는 분단과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는 유가족들이 매일같이 1인 시위를 하고 계십니다. 그분들을 매일 지나치고 있는 저는 죄인입니다. 소수정당의 설움도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시절 조선 어딘가에서 자유를 향한 불꽃을 태웠을 수천수만의 이름 없는 영웅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담아 <백년편지>를 바칩니다. 태백산과 백두산을 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독립의 수호신이 되신 정미의병 숭고한 넋에게, 마지막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청껏 불러드리고 싶습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20193월 심상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