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에 해당되는 글 22건

  1. 2019/04/30 관리자 [100년 편지. 350] 민족과 민중은 하나다. 진보적 민족주의자 운암(雲岩) 김성숙 선생께 -김재명-
  2. 2019/04/30 관리자 [100년 편지. 349] 오선지 위에 독립을 쓰다, 음악으로 한중(韓中)에 다리를 놓으신 정율성 선생님께 -김형석-
  3. 2019/04/29 관리자 [100년 편지. 348]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님께 -전원배-
  4. 2019/04/29 관리자 [100년 편지. 347]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전봉준 녹두 장군님께 드립니다 -강기갑-
  5. 2019/04/25 관리자 [100년 편지. 346] 3·1운동 총감독, 의암(義菴) 손병희 선생님께 -황인성-
  6. 2019/04/25 관리자 [100년 편지. 345] 올곧게 사시다 외롭게 가신 어른, 임시정부 국무령 만오(晩悟) 홍진 선생님께 -채현국-
  7. 2019/04/22 관리자 [100년 편지. 344] 독립의 지주인 김창숙 선생님께 -최진영-
  8. 2019/04/22 관리자 [100년 편지. 343] 보물 세 상자, 활자를 지킨 대한민국임시정부 청년들에게 -홍동원-
  9. 2019/04/19 관리자 [100년 편지. 342] 광복군 총사령 외할아버지 지청천 장군께 드리는 편지 -이준식-
  10. 2019/04/17 관리자 [100년 편지. 341] 후대가 꼭 기억해야 할 그 시대 그 사람 장건상 선생, 그리고 혁신정당의 추억 -남재희-
  11. 2019/04/16 관리자 [100년 편지. 340] 익산 4.4만세항쟁의 주역 문용기 열사님! -김유나-
  12. 2019/04/15 관리자 [100년 편지. 339] 소년 노동자에서 불멸의 독립운동가로 - 金相玉할아버지께 -김세원-
  13. 2019/04/15 관리자 [100년 편지. 338] 융화와 상생 그리고 통합, 몽양(夢陽) 여운형 선생님의 길을 걷겠습니다.-박용진-
  14. 2019/04/11 관리자 [100년 편지. 337] 검은 눈의 볼셰비키 김알렉산드라 님에게 드리는 편지 -김혜진-
  15. 2019/04/10 관리자 [100년 편지. 336] 건국의 아버지,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 영전에 올립니다. -이종억-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쉰번째 편지 - 2019년 5월 1일      

100년 편지

민족과 민중은 하나다. 진보적 민족주의자 운암(雲岩) 김성숙 선생께 -김재명-


운암 김성숙 선생님께서 70년 평생 그려갔던 궤적은 고난에 찼던 우리 한민족의 궤적이나 다름없지요. 멀리 이역 땅 중국에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서 독립운동에 온갖 정열을 쏟았고, 일제의 억압 사슬에서 벗어났지만 남북으로 좌우로 갈려 극한 대립을 거듭하며 동강난 이 땅에선 민족통일을 위해 힘썼고, 1950~60년대엔 혁신계의 중진으로 활동하셨지요. 그렇게 한평생을 민족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애쓰다 숨을 거두실 때까지 선생이 남긴 발자국은 그 폭이 넓고 굵었지만, 오늘날 선생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요.

운암(雲岩) 김성숙

적지 않은 애국지사들 가운데 우리가 선생을 특별히 눈 여겨봐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해봅니다. 선생은 20세기의 약소민족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다른 무엇보다 민중의 편에 서서 고민했고, 치열한 투쟁으로 자신의 삶을 희생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는 선생을 우러러봅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 최남선이나 이광수 같은 일부 지식인들은 입으로는 민족과 국가를 위한다고 말하다가, 힘들다 싶으면 일신의 편안함을 찾아 변절을 하면서 한때 그를 따랐던 사람들에게 구차스런 궤변을 늘어놓았던 것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좌우 이념논쟁이 지금도 끊이지 않는 한반도에선 선생을 바라보는 눈길이 마냥 곱지만은 않다는 걸 선생도 잘 아시겠지요. 일부 보수적인 학자들은 선생을 ‘공산주의자’였다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로는 지난날 중국의 급진적 변혁운동의 하나인 광동꼬뮨(1927년)에 참여했다거나, 월북한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열단과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다거나, 8·15 해방 뒤 몽양 여운형을 비롯한 이른바 민족주의 좌파 인사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전력을 꼽곤 하지요.

하지만 이런 전력들이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선생이 중국에서 활동한 20세기 전반기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이론과 실제의 양면에서 뚜렷한 선을 긋기가 어려웠지요.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이 전세계 약소민족과 빈민층에게 희망을 불빛을 비추던 상황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민족해방 운동의 한 방편으로 삼는 일은 전 세계적인 흐름으로 여겨지던 때이기도 했으니까요. 또한, 강도 일본에 맞서 싸운다는, 반일 투쟁이라는 공동의 이념 아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손을 잡고 함께 투쟁전선을 펴는 일들도 많았지요.

8·15 뒤 선생이 몽양 여운형의 정당인 근로인민당에 참여할 당시만 해도 국내 정치세력은 좌와 우로 이분법적으로 뚜렷이 나뉘지 못한 일종의 교착상태였지요. 만일 선생이 공산주의자였다면 박헌영의 남로당에 반대하지 않았을 테고, 6·25 당시 월북이나 이른바 ‘부역’도 서슴지 않았겠지요.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선생을 공산주의자라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반공’을 외쳐댔던 지난날의 친일파들이 종종 그러했듯이, 혹시라도 어떤 숨은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이 글을 쓰기 딱 한 달 전에 저는 중동 팔레스타인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1948년 유대인들이 그때까지만 해도 지도상에 없던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세우면서, 많은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의 땅과 집을 빼앗고 대량 난민을 만든 곳이죠. 이스라엘의 군사적 억압 통치는 일제시대의 그것과 빼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하마스(Hamas)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꿈을 지닌 투쟁단체들을 이스라엘은 ‘테러조직’이라 낙인을 찍어왔지요. 하지만 많은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하마스 대원을 독립투사로 여깁니다. 누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그가 어느 쪽에 서 있는가에 따라 달리 보이듯이,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여기는 사람을 설득한다고 보는 눈이 달라지겠습니까. 그냥 내버려 둬야죠.

한마디로 선생이 칠십 평생 한결같이 걸어갔던 길은 이데올로기의 편향성과는 얼마간 거리를 둔 것이었습니다. 극단적인 좌우익을 반대하고 온건 우파 민족주의세력과 온건 좌파 사회주의 세력의 합작으로 우리 민족의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신념이었지요. 굳이 선생을 특정 사회과학 용어로 규정한다면 ‘민족사회주의자’가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선생은 다른 무엇보다 민족의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 외쳤던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고 봅니다. 이는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오늘날 여러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참 아쉬운 대목을 쓰지 않을 수 없군요. 망명지 중국에서 일찍이 선생은 활동가이면서도 진보적 이론가이자 문필가로서 이름을 떨쳤지요. 하지만 오늘날 선생이 남긴 문건들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언젠가 선생의 부인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요, 내리는 비나 겨우 피할만한 비좁은 판잣집 한구석에 놓여있던 큰 가방 안의 서류 꾸러미들을 선생이 돌아가신 얼마 뒤 지나가는 고물상에게 처분했다고 하는군요. 멀리 중국에서부터 들고 들어온 서류 꾸러미들을 그냥 무게를 달아 팔고 받은 몇 푼으로 하루 저녁거리 마련에 썼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안 된 이 땅에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들을 합니다. 오래전에 만났던 어느 의병장의 손자는 집안이 기울어 초등학교조차 간신히 마쳤다고 했지요. 그런 탓일까요, 선비로 이름 높던 할아버지의 존함 석 자를 한문(漢文)으로 쓸 줄 모르더군요.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친일파 악질 경찰관의 아들은 외국 유학에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고관대작이 돼 부귀영화를 대물림해 누려왔지만,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저학력과 가난을 대물림하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중국에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선생님도 돈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이리저리 셋집을 옮겨 다니셨지요. 세상을 뜨기 3년 전에야 동지·후배들이 ‘비나 피하도록’ 한다는 뜻을 지닌 피우정(避雨停)이라 이름 지은 작은 오두막을 마련해줘 그곳에서 지내셨지요. 기관지염으로 건강이 좋질 못했으나, 형편이 그러하니 병원에 갈 엄두는 못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가끔 약국을 이용할 뿐이었으나, 그 약값 마련도 쉽지가 않았기에 참고 지내다가 끝내 눈을 감으셨지요. 선생께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이틀 뒤 국회에서는 혁신계 출신의 박기출 의원이 보사부장관을 상대로 선생을 비롯한 독립유공자의 무료진료 문제를 따지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임정 국무위원을 지냈던 선생에게는 생전에 국가로부터 아무런 혜택이나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지요. 오히려 혁신계 인사라 하여 선생은 늘 권력기관에서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걸핏하면 붙잡혀가 몇 달씩 감옥에서 고역을 치르곤 했지요. 말년에 병마에 시달리는 선생을 보면서 친지들이 “그토록 독립운동을 하며 고생했는데 고작 이렇게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약도 제대로 못쓴 채 돌아가셔야 되겠느냐”고 푸념하면, 선생은 이렇게 나무라곤 했지요. “무슨 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니야.”

민족해방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생에게 늦었지만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주어진 것은 1982년 전두환 군사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습니다. 5·18 광주의 피를 손에 묻히고 출범한 전두환 정권이 임정 요인을 우대함으로써 없는 정통성도 더하고 민심을 달래려고 선생에게 훈장을 준 것이란 일부의 지적에 대해 무덤 속 선생은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선생의 가족들이 그야말로 ‘됫박질’로 어렵사리 입에 풀칠을 했으니, 쌀밥에 고깃국은 딴 세상 이야기였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선생께서 부귀영화를 바라고 민족해방운동이나 민족통일운동을 하신 것은 아니실 테니, 궁핍하게 지냈던 당신의 삶에 대해선 서운함이 없으시겠지요. 언젠가 선생의 친필 원고가 어디선가 발굴돼, 민족통일과 평등세상을 향한 선생의 드높은 뜻을 다시금 새겨보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

*김성숙(金星淑, 1898-1969)

평북 철산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조국독립과 민중해방에 몸을 바친 진보적 민족주의자. 불교 승려로 1919년 3·1운동에 참여, 경기도 양주에서 만세시위를 이끈 뒤 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23년 중국으로 망명, 의열단을 비롯한 여러 투쟁조직에서 항일운동을 펼치고, 혁명 의지를 담은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민족진영 좌우파가 대동단결을 꾀하던 무렵인 1942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백범 김구와 함께 조국광복을 위해 분투했다. 1945년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뒤 몽양 여운형 등과 손을 잡고 극우와 극좌 양쪽을 비판하며 좌우합작과 통일운동에 힘썼고, 민주혁신당·통일사회당 등 혁신계 중진으로 평등사회를 꿈꾸며 이승만-박정희 독재에 맞서다 여러 차례 투옥됐다. 호는 운암(雲岩). 1982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김 재 명

 

국제분쟁 전문가. 팔레스타인, 이라크를 비롯한 분쟁지역들을 취재 보도해왔다. 서울대 철학과, 뉴욕시립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을 거쳐 국민대에서 정치학박사를 받았다. 경향신문,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 국제분쟁전문기자로 일하면서, 성공회대 겸임교수로 ‘국제분쟁과 국제기구’ 등의 과목을 맡고 있다. 김성숙을 비롯한 통일운동가들의 삶을 분석한 <한국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과 <오늘의 세계분쟁>,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을 썼다.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30 19:40 2019/04/30 19:40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409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마흔아홉번째 편지 - 2019년 4월 30일      

100년 편지

오선지 위에 독립을 쓰다, 음악으로 한중(韓中)에 다리를 놓으신 정율성 선생님께 -김형석-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고향 빛고을에서 자란 김형석이라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왜군과 전투에 임하시며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즉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고 쓰신 충절의 땅.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맞서 끝까지 싸운 항일의병의 본산. 그리고 5·18민중항쟁으로 군사독재에 항거한 이 나라 민주주의의 성지(聖地). 선생님처럼 저도 남도(南道)의 아들입니다.

정율성

소리의 고장에서 태어나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된 제가 정작 고향의 대선배이신 선생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심했던 저를 꾸짖어주세요. 단절의 벽이 아무리 높다 한들 그 역시 사람이 쌓은 것이니, 허물지 못한 책임은 저희에게 있습니다. 재갈과 채찍이 아무리 모질다 한들 가락과 장단만큼은 가둘 수 없는 법이거늘, 한 명의 음악가로서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

그날이 20171214일이었습니다. 북경 인민대회당 소예당에서 한중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한중문화교류의 밤공연이 열렸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관람하셨어요. 제가 한국 측 예술감독으로 총연출을 맡았습니다. 제가 편곡한 중국 민요 모리화(末利華)가 연주되었고요. 그 공연에서 중국 측은 인민해방군가를 들려주었습니다. 사실상의 중국 국가로, 수십 년 동안 수억 명의 중국 인민이 애창한 노래라고 하더군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작곡한 분이 한국인이라는 거에요. 한국인이 중국 국가를? 우리로 치면 애국가를 외국인이 작곡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깜짝 놀랐어요. 대체 어떤 분이기에, 자존심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중국인들이 군말 않고 따라 불렀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그분은 무엇 때문에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을까? 뭐든지 물음표에서 시작하는 거잖아요. 파고 들어갔습니다. 독립운동, 망명, 의열단, 한국과 중국의 항일연대, 타이항산(太行山) 전투, 팔로군(八路軍)…. 우리가 잊고 지냈던 역사의 실마리가 풀려나왔고, 그렇게 저는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악은 지식보다는 지혜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거니까요. 하지만 배경과 맥락을 접하면 감동이 더 울린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확인하자 선생님의 음악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진짜 마음이 움직였어요. 아리랑을 듣고 자란 선생님이 머나먼 낯선 땅에서 조국의 해방을 꿈꾸며 이국의 형제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노래를 지으실 때 어떤 심정이셨을까? 무엇보다 애국가를 먼저 쓰고 싶으셨을 텐데….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랐어요.

요즘 세대가 들으면 더 깜짝 놀랄 사연도 찾았습니다. 선생님을 가르쳤던 스승님께서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라고 권하셨다면서요? 너는 재능이 있다, 모든 비용은 내가 다 대겠다고 말이지요. 음악가로서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제안인지 저는 압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선택은 망명이었습니다. 오로지 독립을 위해…. 어쩌면 음악가로서의 재능과 성공을 깡그리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그 험한 가시밭길을 자청하셨습니다. 가슴이 아렸어요.

선생님이 걸으신 길을 뒤쫓으면서, 과연 내가 작가로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게 무엇일까 곰곰이 되짚어보았습니다. 감성일까? 재능일까? 그것을 키워서 내가 음악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목적이란 단어가 예술을 수단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는 교훈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되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에게 음악이란 무엇이었나요? 일제와 대결하기 위한 무기였다고 단정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선생님의 음악을 무한한 이타심의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그 자세를 배우고 싶고, 그 뜻을 잊지 않고 싶어요.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한순간도 음악이라는 끈을 놓지 않은 정율성 선생님. ‘한류(韓流)’라는 말 못 들어보셨지요? 우리 젊은이들이 즐겨 듣는 한국의 가요들이 중국이나 동남아로 퍼져나가, 그쪽 젊은이들도 열광한답니다. 저도 한중문화교류사업에 몰두하면서, 한 달에 절반은 중국에서 지냅니다. 제가 정율성 선생님 고향 후배가 된다니까, 중국 친구들이 엄지를 척 내밀어요. 자기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마오쩌둥 주석이 정말 좋아했던 음악가라고요. 중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3대 작곡가 중 한 분이 선생님이랍니다.

어깨가 으쓱했어요. 선생님이야말로 한류의 개척자이셨네요. 따지고 보면, 광활한 대륙을 누비며 항일전의 선봉에 섰던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그러셨던 것 아닌가요. 선생님께서 팔로군과 함께 싸운 타이항산의 산골짝 마을에도 가보았습니다. 세상에, 이빨이 다 빠진 중국 할머니들께서 우리 독립군가를 기억하고 부르시는 거예요. 그 모습에서 진짜 인류애를 보았습니다. 그 어떤 이념으로도 문화교류는 막을 수 없어요. 그게 바로 평범한 개인들이 일상의 감정을 나누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분들에게 해방 후의 역사는 너무나 슬프고 비참했습니다. 조국에 돌아왔더니 친일파가 판을 치고, 분단을 막자고 했더니 빨갱이로 몰렸어요. 다른 분도 아닌 백범 김구 선생께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흉탄에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이 역사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아직도 선생님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돈은 중국에서 벌면서 중국이 한마음으로 존경하는 선생님을 손가락질하는 한국인을 중국인들이 친구라고 대접하겠습니까?

정율성 선생님, 제가 일을 하나 만들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고 해요. 전 세계 어디에 이런 드라마가 있겠어요. 영화의 무대는 선생님이 태어나신 광주와 중국이에요. 선생님의 삶이 한국과 중국을 잇는 단단한 다리가 되어주시기를, 선생님의 음악이 아시아에 평화를 선물하는 소통과 화합의 메시지로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시나리오 작업에 이미 들어갔고, 중국 친구들과도 힘을 합치고 있으니까, 조만간 기쁜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형석이 자신이 작곡한 원 드림 원 코리아를 소개하고 있다.

선생님, 지금 한반도에는 평화의 기운이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안팎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선생님께서 믿으시듯이, 우리 민족은 잘 해낼 것이라고 저도 믿어요. 지난번 남북정상회담 때 제가 작곡한 ‘One Dream One Korea’라는 곡을 우리 ‘K-pop’ 스타들이 합창했어요. 가사 첫 줄이 이거에요. “우린 다른 것이 없어요. , 남 다른 것이 없어요.” 최근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의 마음을 담아 ‘Korean Dream’이라는 노래를 만들었어요.

선생님 덕분입니다. 독립을 위해 애쓰시며 갖은 고초를 당하시면서도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 동포를 위해 당신이 가진 재능을 오선지 위에 남김없이 쏟아부으신 선생님.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저의 음악이 지향해야 할 게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서로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사람 사는 세상. 정의가 왜 필요할까요. 억울하고 헐벗은 사람이 없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겠어요? 선생님의 시대에는 독립이 그것이었겠지요.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광주항쟁을 목격했습니다. 어린 저는 몰랐습니다. 형들과 삼촌이 왜 목숨을 버려야 했는지…. 그저 몸서리만 쳤어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오랫동안 정치랑은 담을 쌓고 살았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비명에 가시고, 그 충격에 김대중 대통령마저 눈을 감으시고 나서, 분노가 일었어요. 두 분의 서거(逝去)는 망각의 저편에서 놓쳤던 저의 뿌리를 호출했습니다. 5월의 기억은 희석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은 율성(律成). 선율을 완성한다는 뜻이지요? 선율의 극치인 하모니란 나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상대를 빛나게 해줄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 조상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화이부동(和而不同)’처럼요. 음악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더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음악을 아름답게 듣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음악만으로도 서로의 진심을 알아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놀랍고 뭉클한 일인지요. 선생님께서는 그 고귀한 진리를 제게 가르쳐주셨어요.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

*정율성(鄭律成, 1918~1976)

전남 광주 출신. 형제들이 모두 독립운동가로 항일전선에 투신했다. 1933년 셋째형과 누나를 따라 중국 남경으로 망명, 의열단이 세운 조선혁명간부학교를 2기로 졸업하고 민족혁명당에 가담했다. 1937년 팔로군의 근거지 연안(延安)으로 가서, 노신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에서 음악을 전공한 뒤, 타이항산에서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 소속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3·1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등의 작품을 썼으며, 연안에 있을 때 작곡한 팔로군행진곡은 중국 정부가 인민해방군가로 공식지정했으며, 사실상의 중국 국가로 15억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 형 석

196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랐다. 대한민국의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대표적 작곡가. 신승훈, 김건모, 조성모, 박진영, 엄정화 등의 히트곡을 작곡했으며,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곡만 무려 1천 곡이 넘는다. 한국예술원 실용음악예술학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쓰고, MBC <나는 가수다>, <복면가왕>의 패널로도 활동했다. 키위미디어그룹 회장, 케이노트 대표. 케이팝 아카데미를 중국에 설립하고, 양국간 문화교류에 앞장서고 있다.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30 14:33 2019/04/30 14:33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408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마흔여덟번째 편지 - 2019년 4월 29일      

100년 편지

역사는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단재(丹齋) 신채호 선생님께 -전원배-


선생님. 인사 여쭙겠습니다. 전원배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덕분에 선생님께 편지를 올릴 귀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 앞에 편지 쓴 분들이 300명 넘더군요. 뭉클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일파 후손이 독립운동가에게 편지를 썼다면 어땠을까. 진심이 담긴다면, 그 편지도 뭉클하겠지요. 그러나 과문(寡聞)한 탓인지, 그런 편지는 이날 이때껏 본 적이 없습니다.

신채호

독립운동이 약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럼 그 독립운동을 약하게 만든 자들이 누굽니까. 우리 혼자 일본과 싸우는 게 아니라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삼천만 동포가 한마음이었어도, 연합국이 우리를 무시했겠습니까. 참전국 지위를 누리지 못해 38선이 그어졌고, 분단이 일제 잔재 청산을 가로막았습니다. 독립전쟁을 훼방 놓는 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친일파가 살아남을 유일한 꾀였고, 그 수작에 호의호식한 자식들은 독립운동이 약해서 한 일이 없다고 손가락질하고 있으니, 이런 적반하장이 있겠습니까.

을사(乙巳) 경술(庚戌) 이래 민족이란 단어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만, 예전부터 익숙했던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한자(漢字) (民)의 어원은 전쟁포로로 잡힌 노예입니다. 세월이 흘러 민(民)의 처지가 나아졌어도, ‘아랫것이라는 낙인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위민(爲民)·여민(與民)에서 민(民)은 어디까지나 객체일 뿐. 반면, (族)은 배타적인 권위의 표현입니다. <조선왕조실록>“家”45,508번이나 나오지만, “家族”38번밖에 안 나옵니다. 그나마 마지막 황제순종(純宗) 3번을 제외하면, 종친과 사대부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같은 관계였던 민(民)과 족(族)이 만나 민족(民族)을 이루었습니다. 백성은 어안이 벙벙하고 양반은 낯을 찌푸렸겠으나,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도 아니고, 신민(臣民) 즉 신하와 백성으로 층층시하 누르고 눌려서 제국주의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민족이란 단어는 동등을 암시했고, 그 개념이 창작이든 모방이든, 이 땅에서 평등의식의 출발이었습니다.

역사의 갈림길에서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법입니다. 갑오농민전쟁 때 반군(叛軍)과 관군(官軍)으로 갈렸던 농민과 유생들이 손을 잡았습니다. 당연히 갈등과 대립이 생겼지만, 흘린 피는 색깔도 성분도 농도도 똑같았습니다. 함께 어깨 걸고 싸우면서 동족애(同族愛)가 싹튼 겁니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은 이름 없는 의병의 무덤에서 태어났고, 이리하여 고종 44(光武 11, 1907) 76일자 실록에 “民族”이라는 두 글자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래도 민족에 내용을 채우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습니다. 말이 통하려면 맥락이 맞아야 합니다. 500년 넘게 사대(事大)의 동아줄을 움켜쥐고 백성을 호령하던 나라에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하나라고 외친들 쉽사리 먹히겠습니까. 대국을 섬기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찌든 조선의 유학자들은 을파소를, 을지문덕을, 양만춘을 기억에서 지워버렸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일제가 그 빈틈을 놓칠 리 없습니다. 어용학자들을 동원해 조선은 옛날부터 중국의 식민지였다며, 침략이 정당하다는 해괴한 논리를 폈습니다. 저항의 혼을 말살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저는 역사 왜곡의 범죄는 일제가 저지른 것이지만, 조선왕조가 길을 열어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태종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들 맹목파의 선봉이 되어 조선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들을 공자의 도에 위배된다고 해서 불태워버렸다. …… 지나간 고대 역사를 개인이 쓰지 못하게 하거나 개인이 보는 것까지 금지한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일이다. 그리하여 역사를 읽는 이가 없게 된 것이다.

(신채호,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p32, p44)

역사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양반의 자손으로 태어나, 문과급제한 조부 밑에서 한학(漢學)을 배우고, 성균관에 입학해 박사가 되신 선생님. 대대로 왕조의 녹을 먹고, 뼛속까지 사대부였을 당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민족의 개념을 구성하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에 실린 여섯 번째 논문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 민족사학(民族史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나라가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변곡점을 서경전역(西京戰役) - 즉 묘청(妙淸)이 김부식(金富軾)에게 패함에서 찾았습니다. 사대당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사대는 중국의 압력으로부터 백성을 지키기 위한 안전보장책이었다고 변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게 진실이라면, 국방비를 민생에 썼어야지 황구첨정(黃口簽丁) 백골징포(白骨徵布)가 왜 나옵니까. 외침(外侵) 걱정 덜어내어 백성 쥐어짤 궁리만 했고, 가렴주구에 시달린 민초(民草)는 생산 의욕마저 잃었습니다.

사대는 사회로부터 활기를 빼앗아, 시간이 흐를수록 모난 돌이 정 맞는 게 상식이 되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인지상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선생님이 성균관에 다니며 독립협회에 가담할 무렵, 조선을 방문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쓴 비숍(I. B. Bishop) 여사의 첫인상은 무기력하고 비참한나라였습니다. “허가받은 흡혈귀양반과 최악의 무관심과 타성과 무기력의 늪에 가라앉은백성.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가 어찌 이렇게 되었냐며, 그녀는 슬퍼합니다. 하지만 연해주에서 만난 한인들은 비숍 여사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습니다. “솔직함”, “독립심”, “민첩함”, “신뢰”….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쓰는 같은 민족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표정부터 달랐습니다. 이들이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일궈냈습니다.

혹자는 중세 유럽이나 중국에서는 전쟁과 흑사병으로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다고 강변합니다. <징비록(懲毖錄)>도 안 읽었고, 현종 때 백만이 죽었다는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 1670·1671)도 모르나 봅니다. 죽고 사는 것보다, 왜 죽었고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농민전쟁-종교전쟁-영토전쟁-혁명전쟁을 치르며, 서양은 민족의 개념을 채웁니다. 그런데 조선은? 국가가 목숨값을 지급할 의무조차 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는 소리가 나오지요.

선생님이 나당연합군을 비판한 걸 두고, 그땐 민족이란 의식도 없었다는 반박이 있습니다. 그럼 김춘추보다 138년 늦게 출생한 샤를마뉴 때 서양에는 민족 개념이 존재했나요? 게르만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것으로 만들었지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원래 프랑스어입니다만, 영어 “independence”“dependence”에 접두어 “in”이 붙어 생긴 단어입니다. 독립은 예속(?屬)을 거부하는 오랜 전통만이 물려줄 수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문명의 법칙은 교차(交叉)였습니다. 그 기나긴 과정에서 삼투압(?透壓)을 견뎌낸 공동체가 민족의 지위를 차지해 사회통합을 이루고, 민족국가를 수립해 근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자립(自立)과 자강(自彊)의 열쇠를 나당연합군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고려는 왕조 개창의 정통성을 고구려에서 가져왔습니다. 민심은 천심이라 했거늘, 통일신라가 한반도에 둥지를 튼 남녀노소의 자랑이었다면, 감히 이럴 수는 없었을 겁니다. 고려는 대륙의 압박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막대한 기회비용을 치러야 했겠지요. 김부식의 무리는 그게 욕심났던 겁니다. 무릎만 꿇으면, 그 돈은 내 것이라고 군침을 흘렸겠지요. 자원봉사로 사대할 어리숙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친일파도 마찬가지지요. 영혼을 팔아 가로챈 국부(國富)는 생산에 투자되지 않습니다. 이게 사대의 정치경제학입니다.

김부식 이후 경자유전(耕者有田)의 국법은 깨어지고, 자주(自主)의 국체는 망가졌습니다. 그 악조건에서, 대몽항전을 70년이나 지속한 이 땅의 주인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고려보다 더 퇴보한 조선에서 신음하던 백성들도 국난 때마다 떨쳐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같은 하늘 아래,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는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이 있었던 겁니다.

사대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할 토양을 제공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선생님께서 설파하신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의 진정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합심하려면 민족의식이 요청되었고, 잃어버린 자주의 역사에서 조선인의 뿌리를 캐내야 했습니다. 그것이 선생님께서 외세에 항거한 빛나는 전통을 추적하다가, 상고사(上古史)까지 올라가신 이유입니다.

과거는 찬란했다따위의 자위(自慰)나 최면(催眠)은 선생님이 바라신 바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我)”가 역사적인 (我)”가 되려면, “시간적으로 끊어지지 않는 상속성(相續性)과 공간적으로 영향이 파급되는 보편성(普遍性)을 가져야 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최초라는 프레임은 선생님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맹자의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이 루소의 사회계약론보다 2천년 앞섰다고, 민주주의의 기원이 중국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문사회과학의 모든 개념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벼려질 때만 그 참된 의미를 획득합니다. 자유(自由)를 남이 선물할 수 있겠습니까. 주권(主權)을 돈 주고 살 수 있겠습니까. 발명발견도 똑같습니다. 자유는 기술을 낳고, 기술은 더 큰 자유를 낳았습니다.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전함과 기관총은 프랑스대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이 빚어낸 축적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시기를 놓쳤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매달릴까요? 구걸할까요?

선생님의 답은 혁명”, 우리 안의 몹쓸 구석을 숙성시켰던 낡은 항아리를 부수고, 용기와 희망을 담을 새 항아리를 구워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향한 중단없는 항전(抗戰) 속에서, 민족사는 오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해방의 깃발을 움켜쥘 것이라 선생님은 믿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망명하신 게 1910. 독립전쟁의 방략을 설계하고 기지 건설을 도모하는 한편, 어마어마한 분량의 역사서와 역사교재, 논설들을 집필했습니다. 19231, <조 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의열단의 대일 선전포고문이자 혁명강령. 선생님은 지금 당장 독립전쟁에 나서길 회피하는 자들을 맹렬히 꾸짖었습니다.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평화’, ‘한국독립보전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야 삼천리 강토를 집어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또한, 선생님은 일본 강도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 누구이냐?”고 물으면서, 일제의 문화통치에 편승하려는 자들에게 현혹되지 말라고 동포에게 촉구했습니다. 왜놈이 허가한 문화운동은, “그 문화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이 될 거라는 경고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3·1운동이 일어났기에 일제도 문화통치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세운동 때 선동만 하고 정작 자신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자들이 문화로 민족을 구하겠다고 나섰다? 김부식이 원조인, 예의 가로채기수법입니다.

혹자는 조선사를 연구하려면 우선 조선과 만주 등지의 땅속을 발굴하여 허다한 발견이 있어야 하고, 금석학 고전학 지리학 미술학 계보학 등의 학자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그러하지만 현재로서는 우선 급한 대로 존재하고 있는 사책(史冊)들을 가지고 그 득실을 평가하고 진위를 가려내어 조선사의 앞길을 개척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한다.

(신채호,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p34)

선생님의 사론(史論)을 한낱 장광설로 치부하는 연구자들이 꽤 많습니다. 명분은 실증주의입니다. 쉽게 말해서, ‘팩트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사람들은 선생님께서 쓰신 “(역사는)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지우지하거나 덧보태거나 혹은 바꾸고 고치라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은 쏙 빼놓습니다. 게다가 더 꼴사나운 건, 선생님을 우습게 여기는 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결정적인 팩트를 여태껏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가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전제인 실증(實證)을 무슨 주의로까지 격상시키는 태도에서, 저는 수상한 냄새를 맡습니다. 실증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고, 더러는 국가가 나서야 풀리는 일입니다. 실증해놓고 나서 입을 열어라? 이렇게 금을 그어놓으면, 자본과 권력에서 소외된 민중은 가위와 풀의 역사에 대항할 방법이 없습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책임은 누구에게 묻겠습니까. 통념과 상식에 의문부호를 달지 말라는 소린데, 이건 과학이 아니지요.

선생님에게 금석학 고전학 지리학 미술학 계보학 등의 학자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자못 걱정하는 투로 충고하던 사람들. 아마도 책상 앞에 앉아 기껏해야 문화운동론이나 끄적였을 이 사람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 역사학계를 장악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70년이 지난 지금, 금석학 고전학은 대학에서 씨가 말랐습니다. 잘못 꿴 단추는 무섭습니다. 사관(史觀)이 구부러졌는데, 사학(史學)이 곧게 뻗을 수 있겠습니까.

……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필적

너무나도 유명한, 선생님께서 19251<동아일보>에 발표한 낭객의 신년만필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이 글을 처음 읽고 받은 충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번역서 몇 권 읽고 우쭐대는 얼치기 지식분자가 바로 저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옆길로 빠지는 듯합니다만, 저는 <동아일보>가 선생님의 글을 실었다는 사실도 놀라웠습니다. 선생님께서 <동아일보>를 얼마나 통박하셨는데…. 이런 게 민족일까요?

해방 후라면 어림도 없었을 겁니다. 요즘에는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고요. 세상은 점점 더 강퍅해지고 있습니다. 재벌이 곳간에 쌓아놓은 사내유보금이 몇백조라면서,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들이 이삭 줍느라 아귀다툼입니다. 역사는 비극과 희극으로 반복된다지만, 이 나라에서는 첫 번째는 비극으로 동일하되, 두 번째부터는 부조리극으로 되돌이표를 찍습니다.

단재 선생님. 선생님의 삶은 혹독하리만치 엄격한 수양과 자기 부정 그리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연속이었습니다. 3·1운동 이후 유산계급의 투항으로 민족 안에 균열이 일어나자, 민족사학을 제창하셨던 선생님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으로 민족 개념의 확장을 시도합니다. 유생으로부터 아나키즘까지, 당신의 사상 변천 궤적은 제국주의를 뛰어넘으려던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사 전개 과정과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단재는 한 곳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단재는 어느 한 주의(主義)나 사조(思潮)의 아이콘으로 쓰이기에는 너무나 크고 깊은 그릇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고립된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봐서는 한 나라의 미래를 밝힐 수 없음을 통찰하셨습니다. 조선인의 역사는 조선사가 되어야 하고, 그 바탕 위에서 조선사는 동아시아사, 나아가 세계사와 부분과 전체로 통합돼야 합니다. <용과 용의 대격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하신 이 책(오늘날에도 어린이도서로 분류되어 있습니다)에서, 선생님은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제국주의와 피압박민족의 대결을 일목요연하게 그려내셨습니다.

선생님은 철저하게 자기화를 추구하셨습니다. 그 강직함으로 선생님께서는 민족사학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고갱이는 상실되었고, 민족이란 단어는 민족반역자들을 사해주는 면죄부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국민이라고 다 같은 국민이 아니요, 시민이라고 다 같은 시민이 아닌 시대. 갈래갈래 찢긴 사회. 이렇게 될 줄 아시고,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경구(警句)를 남기셨나요? 되새기겠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자유로운 정신의 불꽃.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님 영전에 올립니다.

------------------------------------------------------------------------------------

*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나이 스물이 되기도 전에 독립협회에 가담해 애국계몽운동에 나섰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로 활약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저술에 힘썼다. 신민회(新民會) 결성취지문, 의열단의 <조 혁명선언>을 기초했으며, 이광수나 최남선과 달리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표적 문사(文士)이자 혁명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창조파의 이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박은식과 함께 사대주의를 거부하고 민족사관의 기틀을 세운 사학자로서, <조선사통론>, <조선상고사> 등의 역작을 펴내, 우리 민족의 뿌리를 밝혔다. 1929년 왜경에 체포, 1936년 뤼순감옥 독방에서 순국했다. 호는 단재(丹齋).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전 원 배

 

1962년 부여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다. 대학 재학 중 민주화운동으로 옥살이를 겪고 경남으로 가서, 울산과 창원의 노동자들과 함께 20년 동안 노동운동에 복무했다. 서강민주동우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으며,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뒤늦은 공부에 땀 흘리고 있다.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29 13:27 2019/04/29 13:27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407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마흔일곱번째 편지 - 2019년 4월 26일      

100년 편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전봉준 녹두 장군님께 드립니다 -강기갑-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녹두장군님! 잘 계시옵니까? 잘 계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편치 못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이곳 우리 농민들과 민중들의 삶이 장군님께서 사셨던 120여 년 전과 비교해도, 절대적 빈곤은 편리함이나 풍요로움 면에서는 천국 같은 세상이지만, 장군님께서 그렇게 간절하게 온몸으로 외치셨던 척양척왜’, ‘평등사상의 차원에서 보면 120여 년 전이나 여전합니다.

전봉준

보국안민! 척양척왜! 국민의 안녕을 위하여 나라를 보하고, 자주와 자유를 억압당하지 않기 위하여 외국을 몰아내자는 장군님의 혁명 깃발이 조선의 방방곡곡으로 들불 되어 일어서던 100여 년이 훨씬 넘은 지금에도 여전함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장군님의 마음이 얼마나 애타고 안타깝겠습니까?

녹두장군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자유와 자주를 외치며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산화해 가신 선열께 후예들이 올리는 편지글 운동에 동참하여 녹두장군님께 글을 올리려니 가슴이 미어지고 통탄함이 바늘처럼 찌릅니다.

사람의 평등과 자유는 존재 자체의 권리이며 자주란 나라의 권리임을 천명하시고, 탐관오리들이 가렴주구로 민초들을 수탈함에 항거하시며 일어서신 작은 거인 전봉준 녹두장군님! 장군님께서 치켜드신 갑오농민군의 4대 강령을 다시 한번 외워봅니다.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셋째, 일본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넷째,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신귀족을 모두 제거한다.

장군님께서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시어 기선을 장악하고 판세를 바꾸셨지만, 척양척왜의 절박감 때문에 정부와 타협하여 봉기의 불꽃을 멈추셨지만, 결국은 청과 왜를 불러들인 정부는 동학농민군을 배반하고 탄압으로 나섰으니 왜군의 소총과 무진장한 화력 앞에 농민군은 처절하게 쓰러지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그때 정부와 타협하지 않으시고 청과 왜를 막는 길이 동학농민혁명군이 승리하는 길임에 확신하여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렙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녹두장군님!

님은 가셨지만 지금도 갑오동학농민전쟁의 혁명사상과 정신은 실천사상의 주된 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3·1독립운동의 처절하고 애통하고 고귀하신 선열들의 피 흘리심이 조국광복을 이루어 내셨으며,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의 탐욕 앞에 청년학생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서 4·19혁명을 완성하여 자유당 정권이 막을 내렸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20년을 부마항쟁과 6·10항쟁으로 독재타도 민주쟁취의 함성으로 끝장냈습니다.

그후 미군 장갑차여중생 사망 사건, 미국소 광우병 통상압박, 백남기 농민투쟁 사망에서부터 박근혜 국정농단까지, 전봉준 녹두장군님의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사상과 정신은 대한민국 역사 속에 살아 움직이며 민중의 얼과 혼으로 끝없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녹두장군님! 너무 상심 마시고 마음 편히 가지십시오. 비록 조선인 대한민국의 역사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중의 바람과 달리 통탄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동학혁명의 굴하지 않는 정신은 영원할 것입니다. 동학혁명의 역사 후에 거듭된 외침과 식민지 독재와 폭압, 권력의 부패에 민중은 어김없이 항쟁으로 일어섰습니다.

36년 식민치하의 역사를 끝내는 순간 민족분단의 철조망을 허리에 두르게 되었고, 자유당 부패정권, 박정희 군사쿠데타 정권, 전두환 군사독재, 박근혜 국정농단으로 이어지는 통탄의 역사 속에서도 전봉준 녹두장군께서 뿌리신 혁명의 정신과 불굴의 항쟁 의지는 끝없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본의 독식 구조와 외세의 압박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외세의 압박에 식량주권을 침탈당하여 식탁의 안전이 무너지고 대한민국 국민건강 지수가 경제개발기구국가 최하위로 추락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정신과 얼 속에 뿌려진 녹두장군님의 갑오동학농민항쟁의 맥이 살아 움직이는 한, 우리 민중은 결코 좌시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국민의 행복기본권인 식량주권, 평등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 떨쳐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동학농민전사들께서 왜군의 첨단무기 소총과 무진장한 화력 앞에 처절하게 쓰러져 가신 역사 앞에 통탄의 가슴을 치며, 남북의 허리에 쳐진 철조망을 걷어내고 진정한 해방과 자주,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평등과 상생의 세상을 위하여 저도 다짐합니다. 녹두장군님 가신 뒤에도, 장군님 가신 그 길에 오랫동안 우리 민초들이 불러온 농민 민초들의 애타고 슬픈 노래를 바칩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농사꾼 강기갑 올림

------------------------------------------------------------------------------

* 전봉준(全琫準, 1855~1895)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 농사를 지으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맞서 사발통문을 돌리고 1894년 정월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인솔해 봉기했다. 조정이 농민과 동학교도에게 책임을 돌리자, 그해 3월 재차 봉기, 전주성을 점령했다. 겁에 질린 민씨 정권은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이 상륙해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깃발을 올리고 손병희의 북접(南接) 동학군 10만과 합세, 공주성을 공격했다. 우금치에서 관군을 길라잡이로 내세운 일본군의 압도적 화력에 밀려 패퇴하고, 부하의 밀고로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졌다. 갑오농민전쟁은 외세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 민국(民國)을 이룩하려 한 민족민중혁명의 효시였으며, 그 정신은 의병과 독립군으로 이어졌다.

             강 기 갑

1953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사천농고를 졸업했다. 1976년 가톨릭농민회에서 농민운동을 시작,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턱수염과 두루마기에 고무신 차림의 농민의원으로 주목을 받았고,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 이방호를 꺾고 당선, 민주노동당 당대표로 이명박 정권의 전횡에 맞서 싸우며 강달프라는 애칭을 얻었다. 고향 경남 사천에서 매실농장을 경영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29 13:05 2019/04/29 13:05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406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마흔여섯번째 편지 - 2019년 4월 25일      

100년 편지

3·1운동 총감독, 의암(義菴) 손병희 선생님께 -황인성-


선생님, 저는 사단법인 의암손병희 생기념사업회 장학생 고교 2학년 황인성입니다.

올해는 선생님께서 준비하고, 주도하신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또한, 그토록 염원하시던 광복이 된 지도 어느덧 74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오늘이 있기에 너무나 기쁘고 고맙습니다. 하지만 후손들은 선생님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편으로는 너무나 안타깝고 죄송합니다.

요즈음 시중에는 <극한직업>이라는 영화가 흥행하고 있습니다. 주연배우들은 잘 알고 있어도 감독은 잘 모르듯이, 3·1독립만세운동으로 헌신하신 순국 열들은 잘 알고 있어도 총감독하신 선생님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용서해주십시오. 한평생 자신보다는 대의를 우선하시던 선생님은 분명히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선생님을 영영 잊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 앞섭니다.

손병희

솔직히 저도 선생님을 잘 몰랐습니다. 지금도 손병희 선생님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기념사업회 손윤 이사장님이 해마다 개최하는 손병희글짓기대회에 참여하면서 <긴급명령, 국부 손병희를 살려내라>, <천도교에서 민족지도자의 길을 간 손병희> 등의 전기를 읽고서야 비로소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작성했던 글짓기 원고로 편지를 대신해 올리며, 조금이나마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손병희 선생님을 알면 알수록 지도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진정한 지도자가 무엇인지 일깨워주신 손병희 선생님 삶을 본받고 싶고 널리 알리고 싶어, 선생님의 일생에 관한 글을 읽고 지도자에 대해 글을 지어 봅니다.

지도자의 처음과 끝은 오직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자만이 가능합니다. 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항상 약자를 위하고 늘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그 마음은 한평생 변하지 않고 오히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커져만 갔습니다. 신분사회에서 고통받던 백성들을 위해 사람이 하늘이라는 평등사상의 동학 지도자가 되셨고, 주권을 빼앗기고 핍박받던 나라를 위해 3·1운동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가 되셨습니다. 오직 내가 아닌 남을 위하는 마음은 지도자의 전부입니다.

두 번째 지도자의 조건은 멀리 보는 눈입니다. 그 당시를 색깔로 표현하자면 온통 검은색일 것입니다. 한 치 앞도 안 보였습니다. 차라리 임진왜란 때처럼 바람 앞의 촛불이었으면 오히려 낫겠습니다. 서서히 끓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꺼져만 가는 나라의 운명도 모른 채 자기만, 자기 가문만 잘되겠다는 부패한 권력층이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나라 밖의 강대국들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우리 땅에 와서 호시탐탐 노리는 암흑의 시대에 선생님은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겠다라는 동학혁명의 북접통령으로 분연히 일어나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무력적인 힘의 열세에 좌절되고 일제에 쫓기는 몸이 되셨지만, 낙심하지 않고 이상헌 이라는 가명으로 원수 같던 일본에 가서 근대화된 모습을 보고 더 큰 계획을 세우는 멀리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3·1운동을 기획하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의 정신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도자의 세 번째 조건은 유연한 생각입니다. 생님의 영정을 보고 동상을 보고 있노라면 엄하시고 완고하실 것 같은 선입감이 들지만, 선생님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유교적 시대에 걸맞지 않게 유연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동학의 무력투쟁의 한계를 인정하셨습니다. 오히려 한계의 원인을 찾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셨습니다. 단발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전 동학교도들에게 단발을 권장하셨습니다. 그만큼 앞선 제도나 문물은 받아들이는 유연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 원수 같던 일본이지만 농촌이 잘사는 모습을 보고 갑진개혁 운동도 전개하였습니다. 교단의 친일파를 몰아내고 민족종교로 정비하고 천도교로 개명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큰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 당시 신자가 300만 명으로 교세가 가장 크고 재정이 튼튼한 천도교이었지만, 민족적인 운동인 삼일운동을 앞두고 불교와 기독교를 설득하여 같이 하셨습니다. 유학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완용한테까지도 같이할 기회를 주려고 하신 분입니다. 고비마다 유연한 생각으로 앞장 섰지만 나라를 위하는 담대한 마음만 있을 뿐 자신은 부각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단독대표가 아닌 33인 민족 공동대표가 되셨습니다.

네 번째는 준비하는 마음입니다. 생님은 희망을 가지고 늘 차근차근 준비하였습니다. 신자가 가장 많았던 천도교의 성미를 헛되이 쓰지 않고 민족의 앞날을 위해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경영에 어려움에 처한 보성전문학교를 살리고, 동덕의숙을 도와주셨고 많은 학교들을 후원하셨습니다. 그때의 인재들이 전국에 퍼져 삼일운동을 주도하였고 독립운동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또한 봉황각을 건립하여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고 하시며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보성사판 기미독립선언서

그렇게 삼일운동은 차근차근 준비되었습니다. 보성사라는 출판사까지도 철저하게 준비하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온 나라에 알리게 하였습니다. 삼일운동 후까지도 미리 대비하셨습니다. 원래는 민족대표가 49인이었지만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33인만이 서명하셨습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듯이, 삼일운동도 191931일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손병희 선생님이 10년 이상의 냉철한 전략과 준비 끝에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마지막으로 씨앗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자기는 결실을 못 보더라도 후손을 위해 씨앗을 준비하고 심는 마음입니다. 상해 임시정부 김구 선생님이 해방 후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손병희 선생님 산소를 참배하셨다 합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삼일운동이 있었는지 한 달 후에 만들어진 상해임시정부도 아무 준비 없이 생겼을까요?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자금이 필요합니다. 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 당시 삼일운동 자금을 기독교까지도 지원할 정도로 자금력이 가장 막강했던 천도교와 손병희 선생님의 결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손병희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삼일운동 전에 이미 독립의 씨앗을 준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삼일운동 거사 전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미 선생님은 앞날에 수난이 닥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삼일운동을 통해 겨레의 가슴에 독립의 씨앗을 뿌리고자 했습니다.

삼일운동 전과 후의 우리 민족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꺼졌던 민족의 정신이 되살아났고 그런 불굴의 정신으로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하여 광복을 맞게 되고, 광복 후 힘든 시기에도 그 불굴의 정신으로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여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뿌린 그 씨앗의 결실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맛보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일생에 대한 책을 읽고 자료를 조사할수록 선생님께 빠져듭니다. 선생님은 진정한 우리나라의 지도자이며 국부이십니다. 호시탐탐 주변 국가들은 우리가 약해질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사를 모르면 암흑의 역사는 반복됩니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도 있는 삼일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준비하고 만드신 진정한 지도자를 모른다면 역사를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올해도 3·1절을 앞두고 순국열사의 기사로 장식된 신문을 보았습니다. 이젠 삼일절 기사만 보면 눈이 동그래집니다. 참으로 고마운 기사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아쉬움은 남습니다. 이젠 3·1운동을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하고 실행으로 옮기신,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신을 만드신 손병희 선생님의 기사가 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본받는 진정한 지도자가 많아서 정신이 살아있는 부강한 나라가 되어, 다시는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소원하며, 열거하기도 힘든 선생님의 업적으로 진정한 지도자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황 인 성

 

2002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2013년 사단법인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초대 장학생으로 뽑혔고(창원 용남초 5학년), 손병희글짓기대회 대상을 2014년과 2015년 연달아 수상했다. 현재 창원 중앙고 2학년 재학 중이다.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25 09:59 2019/04/25 09:59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405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마흔다섯번째 편지 - 2019년 4월 24일      

100년 편지

올곧게 사시다 외롭게 가신 어른, 임시정부 국무령 만오(晩悟) 홍진 선생님께 -채현국-


만오 선생님, 인사부터 먼저 여쭙겠습니다. 채현국이올습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선생님이 임정 요인들과 도착한 상하이에서, 학병들 숙식을 도맡고 귀국을 주선하느라 분주하던 채기엽의 아들입니다. 선생님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만든 이상정(李相定, 1897~1947) 장군을 따라 찾아뵈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이상정 장군의 부인이자, 전투기 조종사로 이름을 날린 여성독립운동가 권기옥(權基玉, 1901~1988) 여사의 집을 아버지가 마련해드렸으니까요. 그때 아버지는 채종기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아버지는 교남학원(嶠南學院, 현 대륜고등학교) 1회 졸업생입니다. 이상정 장군의 동생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가 교사로 있었고, 이육사 선생이 다닌 학교입니다. 아버지는 소싯적부터 사업을 만드는 재주가 비상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백성으로 치부(致富)하고 산다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요. 조부가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원한을 어찌 잊겠습니까. 아버지는 왜놈과 싸우겠다고 무작정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이상정 장군은 만날 길이 없고, 전쟁터를 넘나들며 장사를 해 번 돈을 독립운동하는 분들에게 뒤로 드렸답니다.

홍진

선생님이 194512월 환국하시고, 아버지는 다음 해 여름 배편으로 부산에 내려 가족이 살던 대구로 돌아왔습니다. 굳은 얼굴이었습니다. 해방은 되었으되 38선이 그어졌고, 남쪽에서는 친일파들이 뱀대가리를 내미는 형국이라 표정이 밝을 리가 없지요. 제가 태어난 게 1935, 아버지가 대구경찰서 폭파 미수사건에 연루돼 중국에 간 게 1937. 안 그래도 아버지가 낯선데, 어린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풀이 죽었습니다.

해방 후 대구는 좌익의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저보다 여덟 살 위인 형도 그쪽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서둘러 아들 둘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대구에서 미군정에 반대하는 큰 데모가 일어나 사람들이 떼로 죽고 다친 게 두 달 뒤였으니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나 봅니다. 낙원동 입구에 살았는데, 아버지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중국에서 빈털터리가 되어 귀국한 터라, 사업 구상하러 밤낮없었겠지요.

어느 날,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습니다. 매달리고 싶어 뛰쳐나갔더니, 웬걸 대구 때보다 더 굳은 얼굴이었습니다.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곁으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겁에 질린 아들은 아랑곳없이, 아버지는 땅이 꺼질 듯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만오 홍진 선생께서 외롭게 돌아가셨다니. 그 어른이 어떤 분인데, 해방된 조국이 이래 대접해도 되는가. 나라 꼴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가…. 그때가 1946년 가을. 70년이 더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아버지의 장탄식이 눈에 선합니다.

만오 선생님. 선생님은 약관(弱冠)의 나이에 대한제국 판사와 검사를 지냈습니다. ‘소년급제를 하신 셈입니다. 출세한 자들이란 대개 자기나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치사한 위인들이거늘, 선생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내 손으로 어찌 의병을 벌준단 말인가! 선생님은 법복을 벗어 던지고, 독립지사들 변론에 나섰습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을 변호하던 양심적인 변호사들이 있었는데, 제 친구 강신옥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분들의 비조(鼻祖)가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은 더 나아가셨습니다. 3·1운동 연락 책임을 맡고, 민족대표 33인이 일제에 몸을 맡기자, 4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대표자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세 임시정부 중에서 유일하게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임시정부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법제위원장,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통합에 힘쓰셨습니다.

우리 독립운동이 지역·종교·이념으로 갈려 서로 반목하는 상황이 닥칠 때마다, 선생님은 일제에 맞서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준열하게 질타하셨습니다. 1926, 선생님이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한 직후 내놓으신 3대 시정 강령을 기억합니다. “비타협적 자주독립운동 진작·전민족대정당 창당·피압박민족과 연맹 체결.” 그것은 해방과 건설을 진정으로 바라는 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아니 누구든 동의해야만 하는 독립운동의 원칙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비타협적 자주독립운동에 주목합니다. 당시 이승만이나 김성수가 외치던 외교론이니 준비론이니 하는 구호들이 민족을 얼마나 현혹했습니까. 열강의 비위나 맞추고 일제의 눈치나 살펴서 해방이 되겠습니까. 설령 독립이 된다 한들, 우리 민족 손으로 새나라를 건설할 수 있겠습니까. 동포들이 항일에 목숨 바칠 때, 유학 가고 연줄 만들어서 독립의 열매를 가로채겠다는 야비한 수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일제가 항복하고 미군이 들어오자, 실제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만오 선생님. 어르신께 올리는 편지 글월에 이렇듯 울분을 마구 쏟아내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민족의 반역자들, 역사의 배신자들에 대해서는 선생님께서 더 통분하셨을 겁니다. 후인(後人)이 모자라서 여태껏 청산을 마치지 못했으니, 그것이 죄스럽고 원통하여 춘치자명(春雉自鳴)의 독설을 적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주독립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와 함께 우리 독립전쟁의 3대 대첩인 대전자령(大甸子嶺)전투. 임시정부의 분열상을 극복하고자 선생님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만주로 가서, 신숙(申肅, 1885~1967) 선생, 지청천(池靑天, 1888~1957) 장군 등과 함께 한국독립군을 창설했습니다. 이 한국독립군이 19336월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 전투가 바로 대전자령전투입니다.

충칭에서 개최된 자유한인대회에서 연설하는 홍진 선생(1943.5.10)

선생님은 항일구국전선에 투신한 이래 변함없이 민족대단결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한국독립당으로 통합하는 물꼬를 터주셨고, 그 한국독립당의 독단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19452월 충칭(重慶)에서 신한민주당을 만들어 일체 사심을 버리고 화합하자고 호소했습니다.

본 당은 전민(全民)이 공동으로 마땅히 앞으로 하여야 할 임무의 집단행동을 수행하는 데 있으며, 같은 사상이나 같은 주의, 혹은 어떠한 계급의 정치단체는 결코 아니며 정권을 욕망하는 정당도 아니며, 민족을 구하고 맹국(盟國)을 광복하고 민주를 실천하는 애국주의의 결사(結社).”

선생님은 참으로 올곧게 사셨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선생님께서 애쓰신 대로 굴러가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주도권을 잡은 세력은 미군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친일지주들의 한민당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환국하시어 정국이 돌아가는 꼴에 통탄하며 가난과 병마에 시달릴 때, 그들은 친일부역 정상배들로부터 거둔 정치자금을 물 쓰듯이 뿌리면서 분단을 영구화하는 모략을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정 정치담당 버치(L. Bertsch) 중위의 문서에 나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서울에 올라와서 선생님께서 고생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약간의 돈과 양식을 전해드렸다고 합니다. 상하이 때였다면 집도 구해드렸겠지요. 하지만 수중에 돈이 마른 형편이라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답니다. 쌀 몇 말을 어렵게 구해 들고 갔는데, 아뿔싸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니, 이런 망극한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원체 말이 없는 분이라, 자세한 저간의 사정은 나중에 소설가 이병주 씨에게 들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는 일화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대성학교 출신 김성일 선생으로부터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나서, 아버지는 경운동에 작은 연탄공장을 차렸는데, 김 선생이 가끔 들르셨습니다. 아주 점잖은 신사였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다니면서 거기서 일했습니다. 하루는 김 선생이 저를 곁으로 부르시더니 거의 귓속말로 이러시는 겁니다.

내가 말이오. 상하이에서 리 박사를 가까이 모셨소. 우러러보는 양반이었으니까. 그런데 리 박사가 우리 둘이서만 있을 때면, 자꾸 도산을 비난하는 거요. 도산은 우리 독립운동에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말이오. 내가 도산의 제자나 마찬가지인데도, 없애야만 할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주듯이 그러는 거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평생 이 얘기를 입 바깥에 내지 않고 살았는데, 누군가에게는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요.”

도산 선생이 누굽니까. 평생 선공후사(先公後私)·무실역행(務實力行)을 실천하신 분 아닙니까? 그런데 도산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저주를 하다니요? 임시정부 평지풍파는 자기가 다 일으키고, 도산은 뒷수습하느라 골병이 들었는데 말입니다. 몰래 제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우리 국민은 백범이 왜 쓰러지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러니, 아버지가 만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걸 알고 나라 꼴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가땅을 칠 수밖에요.

만오 선생님. 선생님께서 돌아가실 적에 제 나이 열두 살. 해방을 맞았을 때 저는 대한제국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사람들이 왜 좋아하나, 어리둥절했을 정도입니다. 소학교에서 황국신민으로 철저히 세뇌당했던 겁니다. 그 모습은 권력이 조련한, 파블로프의 개가 보이는 반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이 땅에 남아 있습니다. 양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쥐고 흔들며 악을 씁니다.

제가 완전히 속아서 살았다는 걸 깨닫고, 저는 그때부터 교과서는 절대로 믿지 않으리라 독하게 마음먹었습니다. 모든 권위는 남을 이용하고 짓누르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안다고 믿는 건 실은 권력이 너를 길들인 결과다. 네 머리로 생각하는 법을 스스로 깨쳐라. 그렇게 좌충우돌 살았습니다. 그래서 여든다섯 살 먹은 할배가 되어서도 늙은이 믿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다닙니다.

일제가 원수의 나라인 줄도 모르고 제 나란 줄 알았다고 고백했더니, 젊은이들은 딱하다는 반응입니다. 양극화로 골병을 앓으면서도 민주화를 의심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제 눈에는 더 딱한데 말씀입니다. 아이고, 선생님. 독립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만오 선생님께서 한성임시정부를 세우신 100주년에

경남 양산에서 한창 피어나는 학생들과

주책없이 어울려 신나게 지내는 채현국이 올립니다

               채 현 국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철학과를 다니며 연극반을 만들어 배우를 지망했으나, 얼굴이 받쳐주지 않아 포기하고, 중앙방송국(KBS) PD로 입사했다. 박정희 찬양 프로그램을 만들라는 상사의 지시에 사표를 내던지고, 부친의 탄광을 맡아 일약 거부가 되었다. 유신독재 밑에서 재벌로 사는 게 싫어 광부들에게 재산을 다 나눠준 뒤, 민주화운동 하는 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지냈다. 정곡을 찌르는 거침없는 언표로 건달할배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경남 양산의 효암학원(개운중?효암고) 이사장.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25 09:53 2019/04/25 09:53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404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마흔네번째 편지 - 2019년 4월 23일      

100년 편지

독립의 지주인 김창숙 선생님께 -최진영-


선생님은 선비로서 대의명분론을 평생 실천하며 나라에 헌신하셨습니다. 나라를 위해 하신 일들은 국운을 일으키고 민족혼을 불어넣으며 대한민국 역사를 만들었지요. 독립항쟁은 실력양성, 독립청원, 무력투쟁 등으로 이뤄졌습니다. 다양한 항쟁은 독립을 성취하겠다는 열의가 솟구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심산 김창숙

1905년 을사5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며 독립을 일구기 시작하셨습니다. 1909년엔 한일병합을 제창한 일진회를 규탄하라는 건의서를 중추원과 신문사에 보내셨지요. 일진회 성토 때문에 2번째로 체포되었고 헌병대와 경찰서에 10여 차례 연행되셨습니다. 8개월 동안 옥중생활 하셨으며 석방 뒤엔 헌병과 형사의 감시를 받으셨습니다. 건의서를 취소하라는 헌병대와 경찰서의 협박도 우국충정을 꺾지 못했지요.

1910년에는 성명학교를 설립해 신식교육을 실시하며 인재를 양성하셨습니다. 성명학교 설립에는 단연회 활동으로 모은 국채보상자금이 사용되었지요. 국채를 갚기엔 자금이 부족했습니다. 그 돈을 정부에 전달하더라도 매국노들에게 들어갈 것이라 판단하셨지요. 매국노들의 동향까지 신경 쓰셨을 정도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바다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근대국가 발전에 사용된 자금은 국권 수호 결의를 뜻했습니다.

1919년 유림들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한민족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리셨습니다. 처음엔 유림들의 서명을 올린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제출하려고 하셨지요. 파리를 가기 위해선 상하이를 거쳐야했기 때문에 상하이로 가셨습니다. 하지만 김규식 박사가 파리강화회의로 떠난 뒤여서 독립청원서를 우편으로 보내셨습니다. 중국정부, 각국 공사관, 교포들에게 도 발송하셨지요.

파리장서

유림들의 독립청원서 발표로 유림 500여명이 체포된 일은 1차 유림단사건이 되었습니다. 유림들이 항쟁에 투신함으로써 독립항쟁은 참여계층이 확대되어 범민족적으로 발전했지요. 선생님은 독립청원서를 발송한 뒤 중국에 남아 투쟁을 계속하셨습니다.

1920년대 들어 항쟁이 사그라지자 선생님은 무장독립투쟁을 펼치셨습니다. 폭탄 투척 의거를 일으켜 일제의 심장을 흔들고 투혼을 싹틔우셨지요. 파괴 대상은 수탈의 상징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였습니다. 당초 만주에 독립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와 모금한 뒤 중국으로 가셨습니다. 8개월 동안 모금하셨지만 모인 돈은 목표 개간 자금에 못 미쳤지요. 기지 건설에서 청년결사대 지원으로 계획을 변경하고 모은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셨습니다.

1926년 의열단원인 나석주 의사에게 권총과 폭탄, 자금을 주며 폭파를 지시하셨습니다. 나석주 의사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과 일경을 사살하며 용맹을 떨쳤습니다. 선생님의 지원이 힘이 되어 나석주 의사가 더욱 사력을 다해 싸웠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석주 의사의 의거는 국내 동포들에게 일제와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1927년 좌우합작단체 신간회가 결성되고 1929년 학생독립투쟁이 일어나 전선이 이어졌지요.

일제는 선생님이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선생님을 도운 유림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해 600여명의 유림을 체포했지요. 이것이 제2차 유림단 사건이었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이던 19275, 선생님도 일본 형사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대구경찰서에 도착한 뒤 고문을 받으셨지만 애국심은 더 일어섰습니다.

옥중에서 투쟁을 이어가셨던 것이지요. 192810월 변호사 없는 재판을 통해 식민통치는 불법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 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자청했지만 본인은 죄수가 아닌 포로라며 변호를 거절하셨지요. 포로가 적의 법률을 따르는 변호사를 선임하는 건 모순이라는 까닭도 덧붙이셨습니다. 불리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조국이 독립국임을 밝히셨던 행동은 전율을 일으켰습니다. 불멸의 국혼을 온몸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지요. 192812월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으셨습니다. 항소하라는 지인들의 말도 안 들으셨다는 사실에서 하늘을 달군 절개를 다시 느꼈습니다. 일본인 고등계 과장과 일본인 판사가 감탄했을 정도로 선생님의 절개는 티 한 점 없었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어도 일제에 순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수감자들이 으레 하던 소장에게의 목례를 하지 않으며 애국자의 기개를 떨치셨지요. 소장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독립항쟁 정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자세 하나하나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며 나라의 생명을 피우셨기에 울컥했습니다. 일제가 회유와 협박으로 절할 것을 여러 번 강요할수록 불복종을 거듭하셨습니다. 말을 잘 들으면 가출옥할 수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도 선생님은 절개로 응하셨지요. 창씨개명도 거절하며 그 무엇도 충심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일제에 다시 각인시키셨습니다.

1934년 가석방된 뒤 일제의 감시 속에서 살면서도 대일항쟁을 모색하셨습니다. 여운형 선생님의 건국동맹 참여 부탁을 수락해 1944년 건국동맹 남쪽지역 책임자가 되셨지요. 나라 건설을 미리 준비해 조국이 해방되었을 때 자주적인 나라로 서도록 하고자 하셨습니다. 194587일 건국동맹 참여가 발각되어 수감되었지만 10여일 뒤 석방되었습니다. 조국이 해방되었기 때문이지요.

인동초 같은 충심이 독립을 맺은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충을 저버린 선비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유림연합회 등 부일유림단체나 일제가 성균관을 격하한 경학원에서 활동했지요. 선생님은 그들과 달리 국권이 피탈되자 충절을 한층 다지며 독립을 일궈나가셨습니다. 참선비의 모습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던 조국에 빛이 되었습니다. 조국은 36년 동안 터널을 지난 끝에 양지에 다다랐고 1948년 정식정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선생님의 독립항쟁은 해방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애족정신 계승을 주도하며 민족정신을 고양시키셨지요. 정신도 바로서야 독립이 완성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그해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하며 유교를 되살리셨습니다. 19465월에는 유도회 총본부를 조직한 뒤 위원장에 취임해 부일유림들을 몰아내셨지요. 9월엔 성균관을 계승한 성균관대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하셨습니다. 후세들이 유교의 충의 사상을 이으며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서도록 가르치신 것이었지요.

선생님은 19605월 허정 과도내각에 부일배들을 축출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허정 과도내각이 들어선 해는 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11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부일배 처벌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을 시기에 민족혼의 불씨를 살리신 것입니다.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겠다는 의지가 한반도에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민족반역자 처단 의지가 후대에 전해져 현재도 부일배 청산이 이뤄지는 것이라 믿습니다. 부일배 기념물 철거와 부일배 서적 발간 등 여러 가지로 부일배 청산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끝없는 지조가 구국활동으로 발화하고 민족정기의 싹으로까지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애국으로 일관하며 국맥을 이으신 선생님은 독립의 지주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문화관광해설사가 되고자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화관광해설사가 되어 독립항쟁 유적지를 안내할 때 선생님을 같이 소개할 것입니다. 관광객들이 선생님을 배우며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고 애국심을 기르도록 이끌 것입니다.

대한민국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선생님의 애국심은 대한민국의 횃불로 승화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충절을 받들어 역사가 올곧게 흐르도록 함으로써 횃불에 생명을 더하겠습니다.

               최 진 영

 

전북대학교 간호학과 졸업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22 19:42 2019/04/22 19:42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403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마흔세번째 편지 - 2019년 4월 22일      

100년 편지

보물 세 상자, 활자를 지킨 대한민국임시정부 청년들에게 -홍동원-


인사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막막합니다. 이 편지 수신인이 한 분이 아닌데, 정확히 몇 분인지조차 모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선생님들이 한글 활자를 필사적으로

남경 한구 무한 장사 광동 광서 귀주 경유 사천 중경까지 수만 리를 목선으로 윤선(輪船)으로 공로(公路)로 기차로 수 만리 길을 헤쳐 생명의 길을 헤매다 …… 우리 청년들은 그동안에도 장도에 거듭거듭 차로 배로 기차로 그 보배 귀중품으로 생명같이 하는 활자 세 상자를 목숨을 걸고 끌고 다니니, 급할 때는 혼자서 냉큼냉큼 주위를 살피며 올리고 내리는 모습을 볼 때 사람이 급하고 막다른 골목에 부닥치면 기운이 절로 나는 이치가 이런 것을 보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 보물 세 상자를 이 배에 같이 실어 올려 생사를 같이하는 바이다.”

(김효숙,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나>, 1996년 탈고, 미출간)

활자는 납으로 만듭니다. 보통 무거운 게 아닙니다. 개당 100g이 넘습니다. 요즘 한글 확장형 글자수가 11,172자인데, KS완성자도 2,350자나 됩니다. 선생님들 시대와 맞춤법은 다르지만 모아쓰기라는 한글 구조는 같으므로, 상용글자 수는 비슷할 겁니다. 이게 기본 한 벌인데, 실제 인쇄를 하자면 활자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합니다. 책 한 페이지에 자만 수십 번 쓰이지 않습니까? 대한, 독립, 조국, 광복, 이런 단어는 또 얼마나 많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니 선생님들이 실어나른 활자를 적게 잡아 5천 개라고 쳐도, 활자 무게만 500kg, 세 상자에 나눴다면, 상자당 160kg 이상. 쌀 두 가마니 무겝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난징(南京)을 떠나 충칭(重慶)에 도착하기까지, 공간으로는 만 리가 넘고 시간으로는 거의 2년이 걸린 임시정부의 피난길. 이걸 끌고 가셨다니, 정말 아득합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는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자는 한글이고요. 그러나 조선은 거꾸로 갔습니다. 어득강(魚得江)이라는 신하가 서점을 열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더니, 조정은 뭉개버립니다. 이게 중종 때 일인데, 1907년 기독교 서적을 주로 취급하는 예수교서회(종로서적의 전신)’가 생길 때까지, 이 나라에는 자유롭게 책을 사고파는 서점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상과 출판의 자유를 꽁꽁 묶어놓은 사회에서, 인쇄술이 발달할 리가 없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이라는 한성순보(漢城旬報, 1883). 순한문 신문임에도, 활자를 일본 요코하마에서 들여왔습니다. 모리자와라는 회사가 만들었습니다. 근대식 인쇄기에 맞는 활자 제작기술 이 부족했으니까요. 비슷한 시기에, 만주 봉천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성경을 인쇄하기 위해 한글 활자가 제작됩니다. 완판본(完板本, 전주에서 찍은 목각판본) 열녀춘향수절가에 쓰인 서체가 바탕인데,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 목각판본 기술자를 신의주에서 찾아내 데려가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서체가 바로 독립신문(1896)의 서체입니다. 아마도 우리말 성서에 쓰인 활자를 수공업적으로 복제했겠지요. 그러니까, 독립신문만큼은 일본인이 만든 활자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근대식 활자 개발은 이제 시작인데,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대한제국은 활자가 백성의 힘을 키울까 두려워했습니다. 보부상에게 만민공동회를 습격하라는 밀명을 내린 사람이 고종 아닙니까?

지금 시대는 변해서, 활자 대신 폰트라는 걸 써서 컴퓨터로 제판 작업을 합니다. 이 폰트는 손에 잡히는 물건이 아니라서 활자보다는 싸지만, 그래도 개발비로 수억이 들어갑니다. 폰트 한 벌 만드는 예산을 집 한 채 짓는 값에 비교한다면, 활자는 성 하나 쌓는 비용과 맞먹습니다. 매관매직에 날이 새는 줄 모르던 왕실에 바란다는 게 딱하지만, 이런 일은 나라가 할 일입니다.

대한제국은 망했고, 일제가 이 일을 해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럼 부자들이라도 맡아줘야 하는데, 이 당시 부자들은 독립운동에 투신한 몇몇 집안을 제외하면 모조리 친일파가 되어 재산 불리는 데 혈안이 되었고, ‘활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왜놈의 때가 묻지 않은 한글 활자가 아직 남아 있었나 봅니다. 천도교가 운영하던 인쇄소 보성사(普成社)가 인쇄한 <기미독립선언서>의 서체는 얼마 뒤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개발에 나서는 한글 활자의 서체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일제가 문화통치를 내세우자, 그들의 활자가 시장을 장악합니다. 일제(日製)를 사다 쓰면 되는데, 친일파들이 뭐하러 자기 돈 써가며 활자를 개발하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지금 사업을 한다면, ‘경쟁력이란 논리 뒤에 숨겠지요. 공교롭게도 일제(日製)와 일제(日帝)는 발음이 같습니다. 그 무렵, 이광수가 변절한 게 우연이 아닙니다. 이리하여,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42행 성서>를 찍어내기 200년 전에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1234)>을 인쇄한 나라에서, 활자의 명맥은 완전히 끊겨버렸습니다.

독립신문사에서 발간한 '독립' 창간호(1919.8.21)

1919411,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한성과 노령과 상해 임시정부가 합쳤습니다. 그리고 821, 기관지 <獨立>이 창간됩니다. <獨立>은 제22(19191025)부터 <獨立新聞>이라 제호를 바꾸었고, 169(192411)부터는 <독립신문>이라고 한글 제호를 썼습니다. 활자는 어디에서 났을까요?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자기 몸 하나 빼내기도 쉽지 않은 터에, 몇 상자가 될지도 모를 활자를 국내로부터 반출한다는 건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이 시기 상해 교포의 수가 2천 명에 불과했다니, 잇속에 밝은 중국인들이 한글 활자를 개발할 이유도 없고요.

만주 봉천에서 우리말 성서를 인쇄했던 활자, 서간도에서든 북간도에서든 우리 책을 찍어내던 활자 외에, 한글 활자를 달리 구할 방도가 있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이천만 동포에게 항일을 호소하던 수많은 성명서와 포고문을 인쇄했던 그 활자야말로, 우리 민족의 손에 남겨진, 일제 식민지배의 저주(咀呪)를 벗어난 마지막 활자였습니다.

선생님들이 실어나른 활자가 바로 그 활자였습니다. 선생님들은 왜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그 무거운 활자 세 상자를 지키려 했을까요? 동포의 손에 전달해야 할 인쇄물이 태산이니까요. 최종 목적지인 충칭에서 한글 활자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태평하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허리가 휘고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견디면서, 선생님들은 이 활자를 잃으면 민족혼마저 잃게 된다고 이를 악무셨겠지요. 후배가 건네준 김효숙 선생님의 원고를 받아든 순간, 저는 정말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독립지사들이 만주 어딘가에서 구해와 상해에 둥지를 틀고 <독립신문>을 인쇄했던 활자, 선생님들의 천신만고로 충칭에 닿은 그 활자의 기구한 운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몇 년 뒤 닥칠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예고라도 하듯이. 해방의 새벽을 맞았는데, 활자가 사라진 겁니다. 김효숙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쓰셨습니다.

남경에서 젊은이들이 그 무거운 활자 세 상자를 중경까지 끌고 간 것은 확실히 아는데, 중경에서는 어찌 되었는가, 모르겠네요. 아깝고 아쉬우네요. 하기는 한국에는 그 이상의 활자가 많으니 잊어버려야겠지요.”

긴장이 풀렸던 까닭이지요. 이제 조국으로 돌아가 새나라를 건설할 마당에 활자 따위야 놓고 간들 어떠리. 청년들이 고생하는 게 너무 안쓰러워, 임시정부 요인들께서 이리 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천려일실(千慮一失). 활자는 활자 따위로 가볍게 여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한강의 기적전까지는 가난해서 못 만들었다고 치죠. 그럼 그 뒤에는요? 못 만든 게 아니라 안 만든 겁니다. 투기할 돈은 있어도 개발할 돈은 없다는 식이죠.

미군정 3, 이승만정권 12, 민주당정권 1, 박정희정권 18. 전두환정권 8. 장장 40년 동안, 이 나라는 끝내 제 손으로 제 활자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조한 활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일제가 비싸니까 복제해서 싸구려 활자를 만든 다음에, 쉬쉬하고 썼지요. 해방 후 50년 가까이 대한민국의 출판인쇄시장은 일제 활자가 지배했습니다. 활자 주권을 내던졌는데, 사상과 지식의 주권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인이 쓰고 번역한 걸 베끼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으니, 식민지시대로 도로 돌아간 겁니다.

그러다가 사진식자-폰트의 순서로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사진식자 기술이 들어왔을 때도,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예전 활자에 해당하는 글자판을 일본에서 수입해다 썼습니다. 이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1987년 대한민국이 유네스코 세계저작권협약에 가입하자, 일본이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서체를 개발한 건 자기들이니, 한글 저작권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겁니다. 88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고 떠들었잖습니까. 꼼작 못하고 당하게 생겼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디지털 시대의 전파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면서, 한글 저작권은 묘한(?) 해결 방법을 얻습니다. 서체의 디지털 저작권이 그것이지요. 글자의 모양이 같은데 디지털로 만들었으니 괜찮다는 겁니다. 한글을 지배하겠다고 야욕을 품던 일본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만, 어이없게도 그 후폭풍은 우리에게 불었습니다. 디지털 서체, 즉 한글 폰트 개발자들이 설 땅을 빼앗은 겁니다. 문제가 그것뿐일까요.

한글을 할퀸 상처는 21세기에 와서도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명조체라고 불리는 서체가 있습니다. 저는 이게 밝을 명(明) 자에 흐를 조(潮) 자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겁니다. 명조의 짝은 암조(暗潮)가 돼야 하는데, ‘청조체였거든요. 혹시나 해서 자료를 뒤져보니 이런, 명조(明朝)와 청조(淸朝)였습니다. 명나라가 관용(官用) 해서(楷書) 활자의 서체를 정하면서 명조체라고 명명했고, 일본이 저네들 히라카나 서체를 개발할 때 그 이름을 빌리면서 한글 활자 서체에도 갖다 붙인 겁니다. 사대의 굴레, 식민의 잔재란 이렇듯 지독합니다.

선생님들께서 애쓰신 지 벌써 80년이 지났습니다. 이 편지를 읽으시는 내내 가슴을 치셨지요? 죄송합니다. 힘이 달리고, 능력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조금 놓으셔도 됩니다. 뜻 있는 이들의 손으로 우리 서체가 속속 개발되고 있습니다. 정말로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려고한글 서체에 관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많은 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의 뜻을 잊지 않고,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3·1운동 100주년에

글씨 만드는 홍동원 드림

--------------------------------------------------------------------------------------------

*활자 나른 청년들

이름도, 생몰연대도 전해지지 않고, 몇 명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남경을 떠나 충칭까지 만 리가 넘는 피난길에 오를 때, 한글 활자를 놓고 갈 수 없다며 지고 나른 청년들의 이야기는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위원을 역임한 당헌(棠軒) 김붕준(金朋濬) 선생의 따님 김효숙 여사의 회고록에 유일하게 실려있다. 이 청년들이 바로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조국 해방 하나만 바라며 구슬땀을 흘린 독립의 일꾼들이다..

               홍 동 원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독일에 유학 가서 눈 똑바로 뜨는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북디자인에 뛰어들어 그동안 만든 책이 천 권이 넘지만, 세어보지는 않았다. 한글 서체 개발을 평생의 사업으로 여긴다. 한겨레신문 서체를 만들었고, <백년편지> 각 부 시작하는 면의 독립운동가 어록과 각 편지 말미 발신자 이름 서체도 그의 솜씨다. 글씨미디어 대표.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오밤중 삼거리 작업실> 등을 썼다.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22 16:34 2019/04/22 16:34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402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마흔두번째 편지 - 2019년 4월 19일      

100년 편지

광복군 총사령 외할아버지 지청천 장군께 드리는 편지 -이준식-


할아버지, 저 준식이에요.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혼기를 놓치고 해방 이후에는 만학과 직장생활로 나이 서른이 넘어 늦게 결혼한 딸이 우리 나이로 서른여덟에 낳은 아들, 그것도 할아버지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길 때 본 손주라고 각별하게 예뻐하셨던 외손자 준식입니다. 기억하시죠?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일본육군 중위로 복무하면서도 나중에 일기에 쓰셨듯이 혁명의 길을 찾느라 고심참담하다가 결국 목숨을 걸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된 게 바로 3·1운동 발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올해는 할아버지께서 망명하신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저로서는 개인적으로도 올해가 더 남다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이청천 장군

사람들이 할아버지에 관해 가장 많이 물어보는 게 지청천 장군이 맞나, 이청천 장군이 맞나 하는 겁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만주로의 망명을 19196월 결행에 옮기셨습니다. 발각되면 잘못되면 죽을지도 모르는 고난의 길을 선택할 때 이제 서른 살이 된 부인과 갓 태어난 막내딸을 비롯해 세 자녀의 모습이 눈에 밟히셨겠죠? 망명에 성공하더라도 남은 가족이 걱정되셨을 겁니다. 그래서 망명 사실을 될 수 있는 한 감추기 위해 지대형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청천이라는 가명을 쓰셨다고 하더군요.

성은 할아버지의 어머니 성을 따라 이씨로 바꾸고, 이름은 일제 식민지배와 항일독립운동의 경계선인 압록강을 건너면서 지은 “昔日隋唐乙破泉 何處隱在宗下魂 我慾碁年滅倭賊 只有靑天寫綠寒(지난날 을지문덕 장군이 수와 당의 군대를 대파했음이어/어느 곳에 그 뜻이 스며 있는가/이제 왜적을 멸하고자 결심 더욱 굳히니/푸른 하늘이 압록강물에 비추었도다)”라는 한시에서 따와 청천으로 바꾸셨다죠. 그러나 저는 청천이라는 이름에는 푸른 하늘 곧 독립을 되찾기 전에는 다시는 조국을 찾지 않겠다는 큰 뜻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죠? 할아버지 제 말이 맞죠? 할아버지께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할아버지께서 망명 이후 걸은 길은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 서로군정서 사령관, 대한의용군 부사령관, 대한독립군단 여단장, 대한의용군 총사령부 총교관, 고려혁명군사관학교 교장, 국민대표회의 군사위원, 국민위원회 군무위원장,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겸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등 무장투쟁과 독립전쟁의 외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부장과 한국광복군 총사령도 지내셨습니다.

만주에서는 1920년 청산리전투를 비롯해 여러 차례의 전투를 이끄셨습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있을 때 지으신 시조(백두산 천지변에 칼을 짚고 우뚝 서서/조국강산 바라보니 기쁨보다 눈물겨워/언제나 천병만나 거느리고 짓쳐볼까 하노라)에서 노래한 것처럼 천병만마를 이끌고 조국강산을 되찾기 위해 일제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것이 할아버지의 소망이었습니다.

물론 그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주든 연해주든 남의 땅에서 무장 독립군을 꾸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탄압은 물론이고 만주와 소련 당국도 독립군의 활동을 방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몇 차례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와 동지들의 뜻은 결코 꺾이지 않았던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할아버지께서는 나중에 만주에서 힘들게 독립군을 이끌고 무장투쟁을 벌이던 때가 당신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하고는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할아버지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는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일제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인 1932년부터 1933년까지의 2년 동안이었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1932년 초부터 한국독립군을 이끌고 북만주와 동만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때로는 일본군에 밀리기도 했지만 일면파, 쌍성(), 경박호, 동경성 등지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한국독립군이 거둔 가장 큰 승리는 간도임시파견대를 상대로 벌인 19336월의 대전자령전투였습니다. 간도임시파견대는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던 일본육군 보병 제19사단 제75연대를 중심으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그리고 동만주 일대에서 반만·항일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런 일본군 부대와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니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뿌듯하셨을지 충분히 짐작됩니다.

실제로 대전자령전투는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와 함께 무장독립운동의 3대 대첩으로 일컬어집니다. 논자에 따라서는, 전과라는 측면에서 대전자령전투가 최대 대첩이라고도 합니다.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서 정확한 내용은 알기 어렵지만, 노획물의 규모로는 독립군이 치른 전투 가운데 전례가 없는 전과를 거둔 것만은 분명합니다. 대전자령전투 승전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께서는 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려는 구상에 따라 1933년 말 만주에서 중국 관내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대 창설 움직임과 연계되어 한국광복군 창군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1940917일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이 출범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총사령을 맡았습니다. 영광스럽지만 책임감의 무게도 남다른 직책이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중국국민당 정부는 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된 중국군대로 간주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께서는 김구 주석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중국정부를 상대로 맹렬한 외교전을 벌여, 결국에는 한국광복군이 한국독립을 위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비록 남의 땅에서 출범했지만, 자주적인 군대였습니다.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지금의 대한민국 국군에도 많은 것을 시사하는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총사령을 맡으면서 할아버지가 밝힌 한국광복군의 대일항전 구상은 중국 관내에서 만주로 세력을 확대한 뒤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해 일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한국광복군은 병력을 확대하고 중국, 영국,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임을 자임했습니다. 중국과 군사협정을 맺고 있었고,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합동작전을 펼쳤습니다. 해방 직전에는 CIA의 전신인 미육군 전략첩보국(OSS)과 함께 한반도 침투를 위한 독수리작전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김구 선생과 이청천 장군

한국광복군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국이 카이로선언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공인하게 된 배경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대일항전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할아버지와 독립운동가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해 외삼촌, 이모부, 어머니가 모두 독립운동을 하신 게 제 삶에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것부터가 그렇습니다. 저는 중학교 다닐 때부터 역사를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당시만 해도 학계에서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가진 것 자체가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만주, 연해주, 중국에서의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행적과 결코 무관할 수 없겠죠. 제 주위의 사람들은 제가 단순히 연구자의 길을 걷는 데만 그치지 않고 친일청산 등을 둘러싼 역사운동에 적극 나선 것도 제 몸속에 독립운동가 후손의 피가 흐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거리의 역사학자로 활동하면서 제가 하는 일이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이야기를 하고는 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고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려는 한 가지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했듯이, 저도 할아버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품고 있던 꿈, 아직은 다 이루어지지 않은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게 지청천 장군의 후손으로서의 할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저는 지금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은 말 그대로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공공기관입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중심으로 국난극복사와 민족발전사를 연구하고 국민에게 알리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독립기념관장으로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의 역사를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60년도 더 지났지만 걱정하시던 바가 제대로 해결되었는지 생각하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할아버지와 동지분들이 꿈꾸던 민족통합, 자유와 평등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완성하는 것은 저희 후손들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라는 다짐을 드립니다. 2019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대한국민으로서 독립정신을 물려준 할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할아버지께서 망명하신 100주년에

외손자 이준식 올림

--------------------------------------------------------------------------------------------

*이청천(李靑天, 1888~1957)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광복군 총사령. 일본육사를 26기로 졸업하고, 중위 때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진력했으며, 김좌진(金左鎭) 장군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에 임명됐다. 본성(本姓)은 지(池) 씨였고, 일본육사 재학 시절에는 석규(錫奎)라는 이름을 썼으며, 청천은 그가 망명하면서 지은 가명이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해 군사위원장을 맡았고, 1940년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자 총사령으로 취임했다. 해방되고 나서 귀국해 대동청년단 단장으로 활약했으며, 대한민국 수립 후에는, 제헌국회의원, 무임소장관 등을 역임했다. 호는 백산(白山).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 준 식

 

1956,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청천 장군의 따님으로 여성광복군으로 싸운 지복영(池復榮) 여사의 아들이다.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소 연구교수,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근현대사기념관 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독립기념관장을 맡고 있다. 2012년 황조근정훈장 수상.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19 12:17 2019/04/19 12:17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401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마흔한번째 편지 - 2019년 4월 18일      

100년 편지

후대가 꼭 기억해야 할 그 시대 그 사람 장건상 선생, 그리고 혁신정당의 추억 -남재희-


60년쯤 전의 일이라 대강의 이야기는 맞지만, 세부사항은 부정확할지 모르겠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1953년도 입학생들은 민병태 교수의 영국 정치학자 해롤드 라스키 교수의 페비안사회주의에 관한 강의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래서 그들은 연구동아리인 신진회(新進會)’를 결성했다. 그 신진회는 후배기에도 오래 계속되어 4·19 때는 남북대화촉진학생연맹을 결성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같은 학번인 서울법대의 여러 명의 학생들도 신진회를 본받아 신조회(新潮會)’를 결성했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는 협진회(協進會)’라는 동아리가 있었는데 그 동아리는 순수한 친목모임이었으나, 그 가운데 임진강을 건너 평양을 다녀온 김낙중 군(서울대에서 전학)이 있어 얼마간 정치성향을 띄기도 했다. 이 세 대학의 동아리들이 모임을 갖고 공동으로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4·19학생혁명 후에는 이 세 동아리의 출신들이 모여 통합하기로 결정하고 명칭을 신조회라고 통일했으며, 동인지도 몇 차례 발행하였다.

모임 장소는 을지로 입구 삼각동에 있던 주석균 선생의 농업문제연구소였는데, 그 연구소의 직원들이 퇴근하고 난 후에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따금 나중에 유명해진 경제학자 박현채 씨가 퇴근하는 것을 마주치기도 했다. 그 모임에서 임시정부 요인인 장건상 선생,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선구자인 전진한 선생,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서 필명을 날리다가 혁신정치에 참여한 고정훈 씨 등을 초청하여 간담을 가졌었다.

장건상

장건상 선생은 체구가 작은편이었다. 미국 유학도 한 것으로 알려진, 임정 요인 가운데는 학력이 높은 분 같은데, 중국에서의 활동에 관해 설명한 것으로 기억한다. 내용은 다 잊어버렸고, 하나 뚜렷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중국에서 여행을 할 때 당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것이다. 당나귀를 타고 서안(西安)도 가고 연안(延安)도 갔다는 이야기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연안 부분은 불확실하다.

4·19 후 혁신세력은 폭발적이라고 할 정도로 들고 일어섰다. 지금은 진보파라 하지만, 그때는 혁신계라 했다. (革)’ 자는 가죽을 뜻하는 것이기에 익살꾼들은 혁신계를 가죽신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4·19 후 혁신계의 주류는 사회대중당으로 뭉쳤다. 그리고 일부가 혁신자주연맹을 결성했다.

참의원과 민의원의 총선거가 치러진 후 다시 이들은 이합집산하였는데, 통일사회당이 주류 정당이었다. 거기에 민의원에 당선된 혁신계 5~6명 전원이 참여했다. 그 중 민의원 한 사람은 당성이 매우 희박하여 당원으로 간주되기가 어려운 정도였다. 통일사회당의 실질적인 당대표는 서상일 씨이지만 그는 고문으로 뒤로 물러앉고, 이동화 씨를 정치위원장으로 임명하여 당대표로 하였다.

그 다음으로 세력이 있는 당이 사회당인데, 당대표는 이름있는 최근우 씨였다. 그 정당을 정계에서는 근로인민당계라 했다. 5·16 군사쿠데타 후 가장 혹독하게 당한 정당으로 최백근 조직부장은 사형되고 최근우 당대표는 옥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 번째 정당이 혁신당이다. 당대표는 장건상 씨였지만 드물게 당사에 가보면 권대복 정책위원장이 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권대복 씨에 관해 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나의 오랜 친구인데 국학대학을 나오고 진보당의 청년학생조직인 여명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래서 진보당 사건 때 재판정에 선 두드러진 인물이 되었다. 진보당에 가입한 사람 가운데는 사립대학 출신들이 많은 것 같다. 서울대학 등 공립대학에서는 서울대 수학과를 나오고 동양통신 기자를 하여 진보당의 비밀당원이 되어 유명해진 정태영 씨가 있기는 하나, 예외적이다.

권대복 씨는 영등포학우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그 회장이 되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영등포는 같은 서울이면서 한강 북쪽의 서울과는 동떨어진 어떤 면에서는 시골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여 영등포학우회가 가능했던 것 같다. 국학대학의 친구들과 이 영등포학우회의 친구들이 여명회의 주류가 된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진보당의 조직은 수적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이승만 정권의 실정에 반발하여 표가 쏟아지다시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대중당 고수파 이야기를 해야겠다. 검사 출신인 김달호 씨는 성격이 매우 강직하고 고집스러워 사대당의 법통을 계속 고집하여 혼자 당사를 지키다시피 했다.

4·19 후의 혁신계를 말함에 있어서 정당들보다 중요했던 것이 민족자주통일연맹(민자통)이었다 할 것이다. 이 민자통에는 모든 혁신정당과 진보적인 사회단체, 인사들이 참여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민자통이 내세운 남북협상론에 반대하여 통일사회당이 이탈, 중립화통일연맹(중통련)을 결성하는 분열을 보였다. 그러나 통일운동의 대중적 주체는 민자통이었다. 그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벌인 2대 악법 반대 군중집회와 그 뒤에 이어진 혜화동 장면 총리 사저 쪽으로의 횃불 데모는 군사쿠데타 세력에 구실을 주었을 뿐 일대 실책이었다는 것이 사후의 평가이다.

나의 장건상 선생에 관한 인상은 그가 대중정치가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지식 수준이 높은 인테리 정치인이라는 막연한 것이다. 혁신당의 주요활동은 권대복 씨가 맡아 했었다. 그는 소해 장 선생, 소해 장 선생을 입에 달고 살았다. 또한 곽순모라는 인사가 있었는데, 그는 학력은 별로 없으나 진보사상 연구에 힘을 써서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를 내기도 하였다.

법정에 끌려온 민족일보 관계자들(왼쪽이 조용수, 그 옆이 송지영)

한 가지 꼭 추가할 얘기가 있다. 5·16 군사쿠데타가 난 다음 날인 17일 권대복 군이 내가 근무하던 민국일보로 찾아와 앞으로 혁신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상의했다. 나는 무조건 잠적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신숙 씨 등 지도적인 혁신계 인사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서 혼란스럽다고 했다. 그는 잠적하지 않아 혁신계의 일망타진에 걸려들어 오랜 형무소 생활을 했다. 새로이 창간되어 관심을 끌었던 진보적인 언론 <민족일보>의 인사들도 거의 모두 구속되어 그 사장인 조용수 씨는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조용수 사장은 오랜 후의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민국일보의 정치부 기자로 혁신계 취재를 담당했던 나에게도 수사관이 들이닥쳤으나 요행히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이석제 법사위원장이 미국 측이 박정희 씨의 공산당원 전력을 의심하고 있으니 혁신계를 일망타진하여 그 의심을 풀도록 하자고 건의하여, 그와 같은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

*장건상(張建相, 1883~1974)

경북 칠곡 출신으로, 유년 시절 한학을 하고, 신학문에 입문해 게일(J. Gale) 목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독립군 투신을 모색하며 미공사관 무관에게 군사훈련을 받다 발각되어 퇴학당하고, 게일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에 유학했다. 대학 졸업 뒤 1917년 상해로 가서, 신규식이 설립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으며, 임시정부 외무차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대회에 참석해 정치부위원으로 선출되어,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3인터내셔널 3차대회에 참석, 레닌과 만났다. 코민테른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사이의 연락업무를 담당했고, 의열단으로 활동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해방 후 여운형과 노선을 함께 했고, 1950년 총선에서는 옥중출마로 전국 2위 최다득표로 당선되었다. 이승만-박정희 정권 기간 혁신당 운동을 이끌며, 수차 투옥되었다. 호는 소해(宵海). 198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남 재 희

1933년 충북 청주 출생. 서울 법대를 나와 한국일보에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민국일보를 거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78년 제10대 총선에서 정계에 입문해 네 차례 당선되었고, 민정당 정책위의장, 노동부장관(문민정부)을 맡았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좌우 모두에게 존경받는 우리 시대 대표적 문사(文士)이자, ‘진보파에 애정 어린 고언을 아끼지 않는 정치원로다. 저서로 <양파와 연꽃>, <정치인을 위한 변명>, <진보열전> 등이 있다.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17 19:34 2019/04/17 19:34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400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마흔번째 편지 - 2019년 4월 17일      

100년 편지

익산 4.4만세항쟁의 주역 문용기 열사님! -김유나-


1919년 익산시민들의 고통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익산에서 주인으로 행세하며 시민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었지요. 농부들에게서 빼앗은 땅 위에 농장을 지은 뒤 농부들의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익산은 호남평야 한 가운데에 있어 시민들은 농산물이 수탈되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지요. 농장 운영자들은 상점 주인들과 민간 경찰 격인 자경단을 조직해 총과 칼로 무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수탈도 모자라 무력으로 위협까지 해서 시민들의 분노는 치솟아 있었습니다.

익산은 독립항쟁을 일으키기에 불리한 조건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이 천지인 도시여서 일본의 시선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인구의 약 60%가 일본사람이었고 일본 거류민을 위한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었지요. 19193월 초부터 전북에서 만세항쟁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만세항쟁을 막고자 경찰과 군대의 수를 늘리고 익산에 병력 1개 중대를 파견했습니다. 일본의 감시와 경계가 강화되었지요.

문용기 열사

투쟁 발발이 힘든 곳에서 억눌려 있던 적개심을 저항으로 끌어내신 분이 열사님이었습니다. 열사님은 교사 시절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구국 활동에 몸담기 시작하셨습니다. 1911년 광산회사로 이직한 뒤에는 월급을 모아 중국에 있는 독립지사들에게 헌납하셨지요. 19193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항쟁에 자극받고 익산으로 귀향하셨습니다. 남전교회 장로였던 열사님은 동 교회 목사 및 교인들과 만세항쟁을 준비하셨지요. 시위대가 3개로 나뉘어 서로 다른 장소에서 만세를 부르며 모이기로 계획하셨습니다. 3월에 익산에서 2번의 만세시위가 바로 진압되었기에 보안에도 심혈을 기울이셨던 것이지요. 만세시위 장소는 대교농장 앞에 있는 장터로 정하셨습니다. 익산에는 20여개의 농장이 있었는데 대교농장이 농장 가운데 가장 크고 유명했습니다. 수탈의 상징을 향해 민족정기를 발산하면 일본의 심장을 누를 것이라 판단하셨겠지요.

44, 열사님은 남전교회에서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나눠주셨습니다. 한복을 입고 온 150여명의 사람들은 옷 속에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숨기고 장터로 향했지요. 장터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시위 참가자는 천여 명이 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이 집결하자 열사님은 독립선언서를 읽으셨습니다. 낭독이 끝난 뒤 독립을 외치는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세소리는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여서 참가자는 만 명으로 늘어났지요. 전국에서 유례없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되었습니다.

익산을 진동시키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일본경찰과 군인들은 총과 칼을 겨누었습니다. 같이 출동한 소방대원과 일본인 농장원들도 곤봉과 손도끼를 휘둘렀지요.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을 때 열사님이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앞으로 가셨습니다. 열사님이 당당하게 걸어가셨을 모습이 떠오릅니다.

열사님은 독립의 필요성과 식민지배로 받는 고통을 연설하셨습니다. 연설이 끝난 뒤 만세를 부르며 함성이 다시 일렁이도록 하셨지요. 열사님의 등장은 사람들에게 다시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투혼은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열사님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쳐 독립의 열기를 익산 전역으로 확산시키셨습니다.

문용기열사 혈의(저고리)

일본군의 칼은 열사님을 겨냥했습니다. 하얀 한복이 붉게 물들어갈수록 투혼을 불태우셨지요. 오른팔을 잃었어도 만세를 외쳤고 왼팔마저 잃으신 뒤에도 만세소리는 이어졌습니다. 입으로 태극기를 물고 시위하며 어떤 것도 애국심을 꺾을 수 없다는 걸 보여주셨습니다. 일본군은 열사님의 가슴과 배를 난자했고 열사님은 순국하며 충혼을 꽃피우셨습니다. 피로 대한의 신정부를 도와 여러분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다고 외친 뒤 돌아가셨지요.

여러 군데를 난자당하셨어도 독립만세를 외치셨다는 사실이 아련했습니다. 만세시위현장에서 즉사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열사님의 순절은 마음을 더욱 울렸습니다. 유해가 장터에서 자택으로 옮겨지는 동안 유해에서 피가 쏟아졌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피는 일본이 열사님을 쓰러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걸 보여주었습니다.

현장에서 총 6명의 순국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4.4만세항쟁은 일본의 잔학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의거가 되었지요. 한국독립운동사에는 “44일 익산에서 큰 희생의 만세시위로 발전했다. 이 항쟁은 항쟁을 전개하는 측이나 그를 제지 진압하려는 일군이 모두 극단의 경우에까지 대립투쟁 했으므로 참혹한 양상이 타 지역보다 두드러진 감이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던 30명은 따로 모여 만세를 불렀습니다. 곤봉과 칼을 가지고 일본인 상점이나 군인들을 공격하기도 했지요. 산상 횃불만세시위가 다시 전개되었습니다. 45일에는 함열읍에서 익산과 이웃한 충남 논산시 강경읍까지 횃불이 파도를 이루었습니다. 48일 용안면에서도 수차례 일어나 일본을 놀라게 했습니다. 열사님이 흘리신 피가 독립의 길로 만들어져 항일의지를 지폈던 것입니다. 일본은 열사님의 정신까지 쓰러뜨리지 못했습니다.

대한의 신정부도 수립되었습니다. 열사님이 순국하신 그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 세워졌습니다. 중국 내 독립지사들에게 보내신 돈이 임시정부 수립에 사용되었지요. 일본을 뒤덮었던 열사님의 기개가 임시정부의 뼈대가 되어서 임시정부는 더욱 빛났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국의 주권이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며 민족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만세항쟁은 19195월 말까지 국내외에서 일어나며 독립에 대한 자신감을 심었습니다. 항쟁은 전투, 폭탄투척, 파업, 소작쟁의 등으로 다양해졌습니다. 19266.10 만세시위, 1929년 학생독립항쟁이 일어나 만세 함성이 다시 요동쳤지요. 익산에서도 독립항쟁들이 일어났습니다. 익산지역 학생들은 동맹휴학, 독서회 활동, 차별철폐운동으로 한국인 차별에 저항했습니다. 1927년 신간회 익산지회는 신간회 운동은 독립운동의 수확이다.’라는 격문을 살포했지요. 열사님이 갈고 닦으신 독립의 길 위에 독립항쟁이 가지로 뻗어갔습니다.

19454월 이리농림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항일결사회인 화랑회의 전원이 체포되었습니다. 화랑회를 조직한 학생은 고문 받은 뒤에도 일본에 저항하다 717일 옥중에서 순국했지요. 열사님의 용맹이 해방 직전까지 구국전선이 펼쳐지도록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815일 조국은 해방되었고 3년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으로 더 성장했습니다.

일본의 감시가 촘촘했던 도시에서 만세항쟁을 이끄셨던 열사님은 식민통치보다 강했습니다. 혈의는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어 열사님의 조국애를 전하고 있습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유해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2010년대 들어 열사님을 기리는 기념물이 늘어났습니다. 2015, 만세항쟁 현장이었던 장터 자리에 3.1독립운동 4.4만세기념공원이 만들어졌습니다. 공원에는 열사님 동상과 4.4만세항쟁을 형상화한 조형물, 순국열사비가 있습니다. 그해 813일엔 익산중앙체육공원에 항일 독립.민주화 운동 추념탑이 건립되었지요. 올해 331일에는 익산시 오산면 일원에 문용기 열사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열사님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 같아 기쁩니다. 열사님의 삶은 애국심 위에 나라가 있다는 걸 일깨우며 나라에 헌신하도록 이끌 것입니다.

목숨을 잃으면서도 조국 해방을 외치셨던 열사님은 애국의 본보기입니다. 민족혼을 밝히며 나라를 지키고 계십니다. 444.4만세항쟁 재현행사에 참여할 것입니다. 열사님의 항거정신을 호국의지로 계승하고 있다는 걸 알리며 나라의 기상을 드높이겠습니다.

             김 유 나


군산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졸업. 포토에세이 작가. 2016년 한국관광공사 주최 대한민국 여름여행 사진 공모전 1,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가을여행주간 여행기 공모전 3,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봄여행주간 한국관광 100&한국관광의별 소문내기 공모전 5,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베니키아 봄봄봄 사진전 3등 외 글 및 사진 공모전 64회 수상.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16 18:40 2019/04/16 18:40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399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서른아홉번째 편지 - 2019년 4월 16일        

100년 편지

소년 노동자에서 불멸의 독립운동가로 - 金相玉할아버지께 -김세원-

 

외할아버지께서도 독립만세를 외치신 3.1절 독립운동 그 날이 벌써 100년 전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 날의 감동이 할아버지의 인생을 전업 독립운동가로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지요.

34년의 생애 중 한 개인으로서 서울을 중심으로 삼남지방을 포함한 국내와 중국 상해 등지에서 일제에 강점당한 국권회복을 위해 다양한 독립항쟁 방략을 폭넓게 지속적으로 실천하신 할아버지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김상옥 의사

할아버지는 무인의 후손답게 소년 시절부터 정의감과 모험심이 강하고 용맹 과감하여 석전(石戰)의 용사로 불렸고, 호협·대범한 성격으로 강한 실천력을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피난지 충남 한산에 살고 있을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할아버지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역사를 보고 배운 기억이 떠오릅니다. 비록 생전에 뵐 수는 없었지만, 그때 교과서를 통해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 저는 할머님(정진주鄭眞珠), 어머님(의정,義正), 형님(효기孝起)과 함께 자랑스러운 할아버지를 더욱 추회(追懷)할 수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제작자가 만든 암살”, “밀정이라는 영화에서 쌍권총 명사수이셨던 할아버지를 모델로 하는 배우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화 암살에서 여성 명사수의 이름 안옥윤(安玉尹)’의 경우, 성씨(姓氏) ’(安)‘은 안중근 의사를, 가운데 (玉)’자는 김상옥 의사의 끝 함자를, 마지막 (尹)’자는 윤봉길 의사의 성씨를, 각각 인용하였으며, “밀정에서 쌍권총의 투사 김장옥(金長玉)은 할아버지(金相玉 義士)를 모델로 했답니다.

1923315일자 동아일보

1923315일 동아일보는 계해벽두의 대사건 진상을 양면 호외로 보도했습니다.

달포 전 12월 초 상해에서 서울에 잠입하신 할아버지께서 19231월에 결행하신 세 차례 서울 한복판 시가전”, 조선 천지를 진동케 했던 일당 천의 독립전쟁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112 총독부 폭파의 절대적인 성공을 위한 폭탄 성능 실험을 겸하여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셨습니다. 117 삼판통 매부의 집서울 한당(韓黨) 혁명사령부로 삼고, ‘사이토총독을 서울역에서 처단코자 때를 기다리며 은신 중, 당일 새벽 5시 은신처를 기습한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4명을 처단하며 대설 덮힌 남산의 정복순사 천여 명 포위망을 뚫고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탈출에 성공, 일본 경찰에게는 충격과 공포를, 일반 경성부민들에게는 엄청난 경탄과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122 효제동에서 일본 군경 천여 명이 채소밭으로 둘러싸인 효제동 73번지 일대 5가옥을 4중으로 포위하자 양손에 권총을 쥐고 5가옥을 넘나들며 3시간여 단신 대항하는 시가전을 벌여 일제(日帝)를 쩔쩔매게 했고, 적 16여명을 사상케하면서도 끝까지 항복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제에게 민족적 자존심과 기개를 유감없이 표출하셨습니다.

상해를 떠나오실 때 할아버지께서는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고 다짐하셨지요.

결코 일본제국주의의 불의한 힘에 정복당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신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절망에 무릎 꿇기를 거부한 채, 두 손에 권총을 움켜쥐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두 눈을 부릅뜬 채로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김상옥 할아버지께서 실행하신 단병대첩 ‘서울 시가전’ 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한편, 우리 겨레의 기백을 떨친 승리의 표상으로서, 전 세계에 우리 겨레의 뜨거운 독립의지를 전파하고, 3.1독립운동 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어 쇠잔해가던 우리민족의 독립항쟁에 연속적 의열투쟁을 촉발시키는 충격적인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장부차세(丈夫此世) 안사구구(安事區區)- 남자가 세상에 나와서 어찌 구구하게 살랴! 한번 세상에 나온 보람이 있게 살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8살부터 소년 노동자로서 험한 노동으로 생계를 담당하던 십대 중반, 철이 나면서 자신의 장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 길을 찾아 이웃들처럼 동대문교회에 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지식과 문명을 배우게 됩니다. 낮에는 가족을 위해 노동을 해야 하기에, 교회에 야학을 세워 자신처럼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해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자신도 함께 공부합니다. 사정상 문을 닫게 되어 동흥야학을 세우고 함께 배움의 길을 계속했습니다. 191021살 되던 해 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학관 영어반에 입학하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청년학관 학생이 된 그는 서울의 전문학교 학생,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사귀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하면서 청년학관 청년부장으로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만난 청년 학생들은 3.1독립운동 직후 혁신단과 암살단을 꾸리는 데 큰 자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정 형편 때문에 할아버지께서는 1년도 안되어 공부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며 권서인 겸 매약 행상을 하는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 여행을 5개월간 다녀왔습니다. 기독교 서적 보급, 기독교 전파, 매약 후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연설을 하였고, 일제(日帝)에 수탈당하는 실상도 목격했습니다. 생각보다 상당한 수입을 얻었으며, 귀한

만남도 있어 훗날 의병 출신을 주축으로 대한광복단을 채기중 선생 등과 결성, 19165월 한훈 등과 전남 조성의 일본헌병분대를 습격, 민족반역자 숙청 및 무기를 탈취하였습니다.

서울로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영덕철물점을 개업하여 말총모자 창안, 양말, 장갑, 농기구 등을 생산 판매하며 직공 50여 명과 함께하는 번창하는 기업의 20대 경영주가 되었습니다. 그중 말총모자는 동포들로부터 크게 환영받는 히트상품으로 일본 상품배척과 국산품 애용운동의 가장 성공적인 상징물이었습니다. 영덕 철물점은 일제하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의 몇 년 앞선 원조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직공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공인조합(工人組合)을 만들고, 일제의 경제 침탈에 공동 대응하는 동업조합(同業組合)을 만들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노조와 경총의 효시라고 사료됩니다.

사회 공헌을 위해 손정도 목사(후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등과 백영사(白英社)를 조직, 사회계몽과 인재 양성사업을 하였으며, 직공들과 일어사용 금지, 금주, 금연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을 지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계발하면서, 경제적 성공도 이루는 한편, 그 시대의 과제를 외면하지 않고, 생업을 바탕으로 공익과 사회적 책임의식을 발휘했습니다.

할아버지는 3.1독립운동이 계기가 되어 생업을 제쳐두고 독립운동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191931직공들에게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주어 탑골공원의 독립 선언식과 시내 만세 시위에 자신과 함께 참여했으며, 오후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 근처에서 여학생을 장검으로 위협하는 일제 경찰을 제압하고 장검(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을 탈취했습니다.

3.1독립운동을 지속, 확산하기 위해 청년학생 동지들과 혁신단을 조직, <혁신공보>를 비밀리에 6개월 이상 계속 발간 배포하던 중, 김 의사는 경찰에 피체되어 40여 일간의 극악한 고문,고초를 받고, 증거부족으로 풀려났으나, 자금 등의 한계로 계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평화적인 독립운동의 한계를 깨닫게 된 할아버지는 동지들과 혁신단을 암살단으로 전환하고, 이때부터 줄기차게 일제 지배의 총본산 조선총독부의 총독을 비롯한 일제 식민지 수뇌부의 전면적 타도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김동순을 파견한 만주 김좌진 부대와 연계, 한훈의 결사대를 합류시켜 암살단을 조직, 서울에서 무장특공대를 양성하여 총독 등 고위 지도층을 숙청하고, 일제기관을 파괴하여 일대혁명을 일으키기로 하고, 만주 길림군정서에 군자금 5천원을 지원하였습니다. 1920. 8. 24. 미국 의원단 42명의 서울 방문을 계기로 총독처단, 총독부 폭파, 종로시가전을 추진, 무기 및 탄약 준비, 자동차 3대 및 자금의 확보 등 거사 준비 완료했으나, 일경의 예비검속에 걸려 동지들이 모두 체포, 구금되자 김 의사는 피신, 동지 유득신 등의 도움을 받아 10월 말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망명지 중국에서 의열단 재조직에 참여하고, 배중세, 고인덕 등과 밀양 한봉인 집에서 폭탄 제조, 같은 해 12월 최경학이 밀양서에 투탄했고, (2차 망명).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과 협의하여 임시정부 독립자금 모금차 국내로 들어와 서울, 충청, 전라 등지에서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일제 경찰에게 고문을 받아 병중에 있었던 여성동지 장규동을 대동, 상해로 탈출했습니다.(3차 망명).

상해에서 19224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에 피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했으며,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유하며, 많은 책을 읽어 지식을 넓혔고, 중국인등 외국인과도 교유하며 국제적인 안목을 키웠습니다.

192211월 중순, 김 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등 임정요인 및 김원봉 등과 협의, 식민통치 심장부인 서울에 무장 독립운동의 비밀기지인 한당(韓黨) 서울혁명사령부를 두고, 총독을 비롯한 일제 고관 및 친일파 처단, 총독부 폭파 및 시가전 등 거사를 전개하기 위해, 무기를 지원 받고 동지 안홍한을 대동, 12월 초 국내에 잠입하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스스로 생명을 내려놓으신 1923.1.22. 그 날까지 혁신단, 광복단, 암살단, 의열단 그리고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으로서 마지막까지 소임을 다하셨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고락을 함께 하셨던 임정 요인 동지들과 여러 중국인 지인들이 사후(死後) 할아버지께 추모의 글을 이렇게 들려 주셨습니다.

-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이었던 이시영(李始榮) 선생은 「추도문」에서 “김상옥 선생은 동서고금에 비할 데 없이 거룩하시고 독특무이한 상품(上品)의 한 분이시므로 비호장군(飛虎將軍)의 칭호를 받으시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임시정부 외교총장 조소앙(趙素昻) 선생“…… 일개 군관의 아들로 소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굶주림과 추위가 뼈에 사무치는데도 애국심을 길러…… 조국의 장엄한 존재를 위하여 민족의 탁월한 권위를 찾아오기에 바빠하는 김 열사 상옥선생도 있더라 …… 김 선생은 호걸이었다. 일개 노동자였다. 일개 애국자였다. 일개 장군, 일개 의협사, 일개 혁명가, 일개 신자, 일개 영웅이었다. …… 마침내 피바다 속에 자기를 장사 지내고 조국 승리를 부르고 비장한 최후를 밟으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중국인 지인, 장제스 총통의 고위 비서관 천거푸(陳果夫)“求國之仁”(나라를 구한 덕망있는 인물)이라는 휘호를, 문인 동유화는 만장(輓章) 중에 “萬馬軍中舊虎勇, 叱咤-聲天地寬(일만군사 달리는 속에서 범 같은 용맹 날리고 노호하는 한마디 소리에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 라고 칭송했습니다.

** 당시 김 의사는 신출귀몰한 동대문 철물점 홍길동으로 전국에 알려졌는데, 충남 홍성 출신 방경한 애국지사는 어린 시절 부친으로부터 전해 듣고 결심한대로 훗날 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 평전 저자 이정은 박사의 말 : 김 의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분출한 사회 특권층이 아닌 보통사람들인 비노블레스의 오블리주의 대표적 사례이다. 김상옥은 식민지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적절한 처신을 하였으면 편안하고 풍족한 삶을 누리며 가족들과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삶을 박차고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서 재산과 가족의 안전과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죽지 못해 살지요..’ 바느질 하시던 할머님(鄭眞珠) 아들(泰用), (義正), 큰외손자(孝起)도 먼저 하늘로 보내시고 모진 세월 아픈 마음을 고통으로 삭히셨지요. 할머님은 피에 푹 젖고 11발 총탄 자국이 선명한 할아버지의 옷을 빨아서 이불 속에 넣고 꿰매어 감추셨던 그 옷을 6.25동란으로 피난 갈 때 잃어버리신 것을 못내 아쉬어 하셨습니다. 비록 육신은 떠나셨으나, 사부(思夫)의 정이라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유품이었는데 ....

치열했던 독립항쟁의 터, 효제동 !! 태어났고, 살았고, 최후를 맞이한 효제동에 대한 미흡한 관심과 결여된 역사 보존 인식의 현실이 너무 아쉽습니다.

기념조형물은 그날의 치열한 독립운동 현장으로 국민들을 인도하고 당해 독립운동 사적은 당시의 실체를 보여줌으로 대한의 얼, 우리의 민족정기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후대인 우리는 외세의 식민폭압정치에 고통과 희생으로 점철되었던, 불행했던 역사의 현실을 피부로 느껴보며,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진 번영하는 나라를 만들고, 국가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어리석음과 고통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나라를 삼키고, 폭압과 수탈의 식민지 정책으로 이 땅을 유린했던 일제의 후대들은 이 현장을 통해 선대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만행의 역사를 바르게 인식, 인정하며 역사 왜곡을 멈추고, 진정한 이웃나라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역사 증언의 현장으로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후손이 힘이 있으면 조상의 키가 한 뼘 더 커진다는데 ….

그렇지 못해 할아버지께 정말 죄송합니다.

큰 호떡 하나에 중국돈 1각을 했으나, 그것 조차 사먹을 돈이 없어 두끼 세끼 굶기를 밥먹듯이 했다는 독립운동 선열들은 그런 상황을 초연하며 국권을 회복하고자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셨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모든 동지 어른들께 엎드려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 천상에서 함께 영생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김 세 원

 

김상옥 의사 외손자

김상옥의사 기념사업회 () 총무이사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15 22:55 2019/04/15 22:55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398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서른여덟번째 편지 - 2019년 4월 15일        

100년 편지

융화와 상생 그리고 통합, 몽양(夢陽) 여운형 선생님의 길을 걷겠습니다.-박용진-

 

몽양 선생님, 선생님은 1947년 정부 수립 직전 암살로 돌아가셨고, 저는 1971년생이니, 저는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24년 뒤에 한반도에 태어났습니다.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72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 그동안 변화한 세상 이야기를 짧은 편지에서 어찌 설명하고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제 소개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저는 현재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역구는 선생님께서 영면해 계신 강북구에 있습니다. 제가 다닌 대학교 근처에 선생님께서 암살당한 혜화동 로터리가 있고, 제가 사는 곳인 강북구에 선생님의 묘소가 있어 가끔 선생님의 사진 속 얼굴을 떠올리고는 합니다만, 저는 늘 선생님이 궁금했습니다. 어떤 분이라고 한마디로 말씀드리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공산당 활동을 했고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는가 하면, 일본 수상 초청으로 제국주의 심장 도쿄에서 일제 고위 관리들과 회담을 하고 조선독립의 사자후를 토하는 연설로 이름을 날리셨지요. 그런가 하면 조선 스포츠계의 개척자이십니다. 영화로 제작되어 유명한 <YMCA야구단>, 상해 푸단(復旦)대학의 조선인 축구단 결성과 동남아시아 원정경기, 해방 직후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런던올림픽 참가를 끌어냈는가 하면, 선생님 자신도 권투선수, 체조선수 등 만능 스포츠맨이셨습니다. 참으로 폭도 넓고 다양한 정열의 소유자이십니다.

몽양(夢陽) 여운형

그래서인지 선생님은 어느 한 주의나 주장에 얽매이는 일을 싫어하셨고, 통합적인 사고와 구상을 주장하셨습니다. -소의 대립,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진영 대립, 남과 북의 지역적 대립 등으로 갈등과 분단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선생님의 주장은 좌우합작이었습니다. 우파 민족주의와 좌파 사회주의와는 다른 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습니다.

몽양은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진정 민중과 민족의 안위를 생각하는 정치인이라면 전쟁과 파국으로 상황이 몰려가는 것을 알면서도 편협한 진영논리를 펼칠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은 그 뒤 한국전쟁의 비극과 대한민국 안에 끊이지 않는 좌우대립과 진영갈등의 현실이 증명합니다.

해방 직후 좌우합작 노선의 길을 걸으면서 우파로부터 공산주의자’, ‘친소주의자로 배척받고, 좌파로부터는 기회주의자’, ‘친미주의자로 비판받았던 선생님의 정치적 행보는 극단주의적 세력들에게 그만큼 위협적인 존재였다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패배한 노선이고 실패한 노선이라고 할지라도, 그 선택을 단순히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모하고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바꾸려 노력했던 선생님의 발걸음을 지금도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오늘 정치상황도 극단적인 주장, 과격한 요구, 이념적 편향에 휩싸여 미래지향적인 사고와 주장이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남북의 대립과 갈등은 계속되고 있고, 여당과 야당의 대립은 투쟁의 양상으로 격화되고 있습니다. 각 당의 내부에서도 파벌의 좁은 칸막이 안에서 자기들끼리만의 논리로 정치가 해야 할 역할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많은 고민을 합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고, 진보정당 창당멤버였고, 격정적인 주장과 투쟁의 결과 감옥생활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만으로 대한민국의 복잡한 현실을 풀어나갈 수 없고, 미래지향적인 구상을 만들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진보의 말은 날카롭고 시선은 매서웠으며, 행동은 단호했습니다. 진보의 이름으로 세상의 문제를 고발하고 부딪혀 가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에너지가 분명하지만, 그 틀 안에 갇혀서는 제대로 된 변화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보수의 이름으로 사회의 안정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기득권의 벽 안으로 사회의 역동성을 가두는 것이고, 많은 이들을 좌절하고 분노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때 혁명의 열정에 들떠 있던 청년이자, 진보정당 창당과 세력화에 헌신했던 현실 정치인으로서 선생님께서 꿈꾸었던 융화와 중도의 길을 오늘 통합과 상생의 정치로 현실화 하고자 합니다. 어쩌면 왼쪽에서 도모하는 융화와 협치와 공존의 모색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국민에게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민생복지를 위해 일할 역할을 위임받은 현실 정치의 오른쪽 세력들과 협력해 협치가 가능한 정치시스템의 도입, 개헌을 통한 제도적 혁명의 길을 꿈꾸고 있습니다.

1919년 11월 15일,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적십자회 총회(오른쪽 끝이 여운형 선생)

벨기에처럼 인종과 언어, 종교, 문화가 다른 국민들이 하나의 국가체계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나가는 많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각자 주장하는 것을 앞세우고, 각자 다른 의견을 배격하게 된다면 국가는 하나로 통합될 수 없고, 사회는 최대다수의 최대이익을 실현하는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분열의 벽을 부수고, 융화와 통합의 큰 울타리를 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정치의 소명이라고 봅니다. 비록 실패하고 좌절되었지만, 한반도의 분단을 막고 전쟁과 살육의 비극을 막기 위해 고독하고 고단한 좌우합작의 길을 걷고자 하신 선생님의 노력이 오늘에도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 길이 얼마나 험하고 어려운 일인지는 선생님을 봐서도 알거니와, 저 역시 겪고 있는 일입니다. 제게도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는 진영논리의 편안함과 손쉬움을 하나씩 내려놓고자 할 때마다 제게 던져진 기회주의’, ‘배신의 비판은 힘들고 아픕니다. 어쩌면 해방 이후 좌익처럼 혹은 우익처럼, 상대를 욕하고 테러하고 증오를 발산할 선동을 앞세우는 일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편 가르고 대립하는 일이 더 편한 길을 걷는 것일 수도 있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 결과 민족의 운명과 국민의 삶은 얼마나 비참해 졌습니까? 오늘날에도 정치인이 자기 편익의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국민의 평안을 도모해야 할 정치가 국민의 분열과 파멸의 미래를 가져오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도 저도 아닌 중립으로서의 중도가 아닌 공동체의 복원과 미래지향적 통합을 위한 융화와 상생의 정치를 이루겠습니다. 이 다짐이 그저 화려한 말의 성찬에 그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늘 스스로 점검하면서 매일 매일 자기 역할을 해나가겠습니다.

영면해 계신 강북구의 작은 동산에서 어리석은 후배의 뒤를 지켜봐 주시고, 하늘나라에서는 대한민국의 건승과 한반도의 평화를 응원해주십시오.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박용진 드림

---------------------------------------------------------------------

* 여운형(呂運亨, 1886~1947)

경기 양평에서 태어났다. 호는 몽양(夢陽). 1918년 신한청년당 결성을 주도하고, 총무간사로 활동했다.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을 조직하고 3·1운동에 참여했으며,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애쓰고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했다. 고려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쑨원(孫文)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했다. 19448월 일제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해 해방조국 건설에 나섰고,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과 인공 부주석을 맡았다. 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1947년 서울에서 암살당했다.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박 용 진

1971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1998년 국민승리21 언론부장을 시작으로 진보정당운동에 뛰어들었다. 민주노동당 창당멤버로, 대변인 등으로 활동하며 당내 정파 대립을 극복하려 애썼다. 2012년 민주통합당 대변인, 2015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 부의장을 거쳐 현재 제20대 국회의원(서울 강북을)으로 일하고 있다.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15 09:43 2019/04/15 09:43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397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서른일곱번째 편지 - 2019년 4월 12일        

100년 편지

검은 눈의 볼셰비키 김알렉산드라 님에게 드리는 편지 -김혜진-

 

19189월 러시아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을 서른세 살의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 님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은 곧 러시아혁명을 무너뜨리려는 백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아무르강에 던져질 운명이겠지요. 1917년 러시아 반혁명 백군이 기세등등하던 하바로프스크시를 탈출하는 마지막 배에서 백군에게 발각되던 순간부터 죽음을 각오했을 것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당신을 스쳐지나간 기억들은 어떤 것일까요? 볼셰비키 당원으로서 1917년 세계의 역사를 바꾼 러시아혁명을 경험하고, 볼셰비키 하바로프스크시당 비서,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장이며,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이력까지···. 어찌 보면 매우 화려해보이기도 하고 매우 치열하기도 했던 삶일 텐데, 아무래도 당신의 마지막에 떠오른 것은 당신과 함께 싸웠던 우랄산맥의 벌목공들, ‘우랄노동자동맹의 동지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당신이 만난 우랄산맥의 노동자들을 생각해봅니다. 생존을 위해 조선을 떠나 그 먼 곳까지 일하러 가야 했던 조선의 백성들 말입니다. 일제의 수탈 때문에도 고통을 받았겠지만, 지주의 횡포 때문에 혹은 농토를 잃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이들이 그 먼 곳까지 일하러 왔겠지요. 그런데 그곳 벌목장은 심한 감시와 매질이 일상이고, 임금도 체불되던 현장이었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알렉산드라

그곳에서 김알렉산드라 님이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우리 5천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은 더 이상 제정러시아의 노예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함께 일어서서 대중 집회를 조직하고 불공정한 계약의 이행을 거부하며 싸우는 수천의 노동자들을 만난 것이 당신에게 정말로 큰 기쁨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지만, 그분들이 바라는 세상의 모습은 모두 달랐겠지요. 누군가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주적인 나라가 되면 좋은 세상이라고 믿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서방 세계처럼 산업이 발전하고 민주주의 제도가 만들어진 나라를 꿈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김알렉산드라 님은 일관되게 조선의 인민이 러시아의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진정한 독립이다라고 이야기를 하셨더군요.

아마도 조선시대 무너져가는 농민의 삶, 새롭게 형성되는 노동자들의 고된 삶을 보며 일본에서 벗어나더라도 그것만으로 조선인들의 삶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주적인 나라의 주인이 되는 그런 독립을 원했던 것이겠지요. 그런 바람을 가진 당신이 그 뜻을 더 잘 펴지 못한 채 내전의 와중에 희생된 것이 아쉽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랄산맥에서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 일본인이 나뉘고 위계화되어 있던 것처럼, 지금 한국의 노동자들도 위계화되어 어떤 노동자들은 심각한 차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사회 절반에 가까운 비정규직 노동자 이야기입니다. 우랄산맥의 벌목공들처럼 매질과 살해 위협을 받지는 않지만,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용이 불안하고 일터괴롭힘에 시달리며,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해고의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노동조합을 만들기가 어렵다 보니 비정규직의 노조 조직률은 2%밖에 되지 않고 비정규직의 목소리는 사회적으로도 매우 약합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조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면서 굴뚝에 올라가 1년을 넘는 시간을 보내고,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면서 40일 가까운 날들을 굶으며, 복직을 요구하며 겨울 거리에서 오체투지를 합니다. 꿈을 꾸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위해서 온몸을 바쳐야 하는 퇴행의 시대입니다.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라고 하고,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넘어섰다고 하는데, 그 화려한 수사 뒤에 감춰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한국은 독립했으되, 비정규직 노자들은 아직 주인으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니 진정으로 독립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더욱 기억하고 싶습니다.

잠시 후면 반혁명 백군이 당신의 머리에 총을 쏘겠지요. 그 당시 조선의 많은 노동자들에게는 희망이고 용기였을 김알렉산드라, 아마도 많은 이들이 당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 뜻을 기억하고자 하겠지요. 그런데 100년 후 우리에게는 당신의 뜻과 의지가 잘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하듯이 당신의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낯섭니다. 지금 우리는 당신의 부재를 아쉬워할 만큼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절망은 그런 단절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죽지 않고 그 의지와 실천이 계속 이어졌다면, 단지 일본의 식민지에서 주권을 되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와 농민들이 스스로 주인임을 선언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새로운 사회체제의 가능성을 열었다면 지금 노동자들의 삶은 조금은 달라졌겠지요.

김알렉산드라가 처형당한 아무르강변에 세워진 추모비

그런데 당신이 꿈꾸던 사회주의는 이상만 남긴 채 현실에서는 스러져버렸습니다. 볼셰비키들이 죽음으로 지킨 사회주의는 관료들의 국가가 되었고, 자본주의에 굴복했습니다. 노인들의 옛 기억처럼 낡은 풍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습니다. 돈의 노예가 된 지금의 삶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대체 어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지 알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꿈꾸던 세상은 단지 사회주의라고 이름붙인 어떤 붙박이 사상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수동적이고 무기력했던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어서서 자신을 주체로 선언하며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힘을 믿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계속 꿈을 꾸려고 합니다. 100년 전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당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꿈은 오랫동안 아무르강 속에 잠겨있었을지 모르겠지만, 100년 후 이곳 한국 땅에서 돈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주인으로 선언하며, 지금의 체제가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 이들의 꿈으로 다시 나타나리라 믿습니다. 지금은 비록 해고를 하지 말아라”, “최저임금을 올려라”, “약속을 지켜라라고 요구하지만, 이것이 체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이들과 함께하는 꿈, 각자도생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함께 살기를 선택하며 단결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꿈으로 말입니다. 그 이름도 낯선 김알렉산드라, 당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저는 다시 당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

* 김알렉산드라(金─, 1885~1918)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약 110km 위에 있는 우스리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두서는 함북 북청이 고향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친구인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했다. 이때 스탄케비치라는 성을 얻었으나 1914년 이혼하고, 1915년부터 우랄산맥 벌목장에서 조선인 통역으로 일했다. 1917년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하바로프스크시당 비서,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장을 맡았다. 한인 최초의 볼셰비키로서, 1918년 이동휘 등이 결성한 한인사회동맹에 가담했다. 내전 와중에 반혁명 백군에게 처형당했다.

---------------------------------------------------------------------

                                                                      
            김 혜 진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전국노동단체연합 편집실장을 거쳐, 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 정책팀장으로 일했다.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노동권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비정규사회>, <비정규직 없는 세상>(공저), <모든 노동에 바칩니다>(공저)를 썼다.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11 14:30 2019/04/11 14:30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396






Facebook Twitter More... More...
100년 편지

삼백 서른여섯번째 편지 - 2019년 4월 11일        

100년 편지

건국의 아버지,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 영전에 올립니다. -이종억-

 

선생께서는 186992(양력 106) 새벽 충남 목천(木川)에서, 문과급제하고 예문관(藝文館) 응교(應敎)를 지낸 연안이씨(延安李氏)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24(世) 범오(範五) 이병옥(李炳?) 공과 광주 안씨의 이남일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11대조 해고(海皐) 이광정(李光庭, 1552~1629) 공은 문과급제하고, 대사헌·이조판서를 거쳐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조대왕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마테오 리치가 펴낸 세계지도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조선에 최초로 들여온 분입니다. 또한, 정조대왕 치세(治世) 명신(名臣)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선생의 7대조 증(贈) 이조판서 이만성(李萬成) 공의 외손이 되십니다.

이렇게 가계를 적어 올리는 까닭은 선생이 쌓은 광복의 공훈이 양반의 자손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거니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가문의 사업으로 환치(換置)하려는 것도 아니올시다. 돌이켜보면, 한말(韓末) 명문거족의 후예 가운데 백성과 손을 잡고 풍전등화(風前燈火)의 국운을 일으켜 세우려 애쓴 선각자가 몇이나 되겠으며, 경술국치 이후 나라를 되찾으려 누대의 기득권을 초개같이 내던진 집안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석오 이동녕

선생은 당신의 자아(自我)를 흔하지만 단단하기 이를 데 없고 변치 않는 돌에 견주었습니다. 선생의 아호(雅號) 석오(石吾)는 왕조사회의 특권을 배격하고 공화(共和)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다짐이자, 일제의 그 어떤 감언이설이나 억압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독립정신의 선언이었습니다. 선생이 쓰신 광무 2(1898) 1029일자 <제국신문> 사설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밤낮 힘쓰고 할 사업은 고작해야 저희들 조상을 위해 서로 잡아먹고 헐뜯어가며 조정에 원수를 심어놓으니, 이 나라 일은 모두 잡칠 뿐이다. 여지껏 정부에 이런 괴이한 병균이 없어지지 아니하니, 이것은 자신이 먼저 이롭다고 나라 일을 돌보지 않은 데 있다.

팔도 백성을 대접하는 데 귀천을 달리하여 어느 도는 더하고 어느 도는 덜하여 동서남북 분간하기를 남의 나라 같이 하니, 어찌 백성들의 마음이 합심할 수가 있으리요. 이는 양반이 저의 이(利)만을 생각하고 국세(國勢)를 돌아보지 아니하여 백성들까지도 합심이 못되게 하는 근원이라 할 것이다.

우리 말을 곧이들은 이들은 어서 사사로움을 내다버리고 내가 힘을 들여 남의 이(利) 본 일을 생각들 하시오. 편당이 아무리 많고 명색이 암만 달라지든 하는 일이 다같이 나라를 이롭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아무리 위험이 있고 속한 곳이 다르다 해도 그것이 나라를 돕고 나라를 보호하는 일이 될 것이요.

조선의 국시(國是)였던 사대(事大)는 진취(進取)의 기상을 앗아갔습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사회는 안으로 곪기 마련이라, 권세를 잡은 사대부들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군자행(君子行)을 따르기는커녕 동이불화(同而不和)를 다투는 소인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조선의 첫 번째 병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생께서 목놓아 부르짖은 선공후사(先公後私)와 불편부당(不偏不黨)의 금도(襟度)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첩경(捷徑)이라 할 것이니, 선생이야말로 선비 중의 선비요, 선비를 뛰어넘은 선비셨던 것입니다.

후인(後人)은 선생의 삶을 기리어, “석오(石吾) 선생이 무궁한 세월을 통해 후손에게 주는 값비싼 교훈이 있다면 비록 나라가 외침(外侵)을 당해 국권(國權)을 잃었을망정 그것이 곧 민족(民族)의 종언(終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썼습니다. 과연, 선생께서는 국망(國亡)의 기로에서 출사(出仕)의 뜻을 접고, 독립협회에 가담해 개화와 민권의 기수로 나서 구국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것은 환로(宦路)가 열어주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탄탄대로가 아닌, 형극(荊棘)의 길이었습니다. 만민공동회의 선두에 섰다가 훗날 헤이그에서 순국하시는 이준(李儁) 열사와 함께 옥고를 치렀고, <제국신문> 사설을 통해 독립의 정론을 폈습니다. 을사늑약 때는 결사대를 조직해 덕수궁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연좌시위를 감행, 조약 파기를 외치다가 왜놈 헌병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1906년 만주로 망명, 이상설·여준 선생과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해 독립의 씨앗을 길렀고, 1907년 국내로 돌아와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했습니다. 대성학교(大成學校)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을 도왔으며, 상동학교(尙洞學校)를 세워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고, <대한매일신보> 발행을 지원했습니다.

이처럼 선생은 언론인으로서 교육자로서 자강운동을 이끈 선각자였습니다. 선생은 7대조 이만성 공의 종손으로, 가문의 선조들이 나라로부터 하사받은 근기(近畿) 일대의 막대한 토지를 처분해 독립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평생 단 한 번도 이를 내색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선생의 부친 이병옥 공은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고초를 겪었고, 1924년에는 일제의 회유를 일축(一蹴)하다 옥고를 치렀습니다.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선생 장례식(1940.3.17, 쓰촨 치장)

또한, 선생은 독립전쟁을 준비한 군략가(軍略家)요 혁명가였습니다. 1910년 만주로 다시 망명한 선생은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新興學校) 설립과 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신흥학교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으로서, 독립군 정예(精銳)를 벼리는 자주독립의 풀무였습니다. 그랬기에, 임시정부는 선생에게 군무총장의 중책을 맡겼던 것입니다.

3·1운동 직전까지, 선생은 만주·연해주·상해를 오가며 동포사회의 생업 안정과 신분 보장을 도모하면서, 해외독립기지 건설에 진력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최재형 선생, 홍범도 장군과 권업회를 꾸리고, 민족종교 대종교를 민족 대동단결과 독립정신 고취의 발판으로 삼은 게 이 무렵이었으며, 1918년 선생과 대종교의 김교헌, 조소앙·조완구·김좌진·여준 등 민족대표 39인이 연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3·1운동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마침내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어 민국(民國)의 출발을 주관하고, 임시의정원 의장 세 차례, 국무총리 세 차례, 내무·법무·군무총장의 중임을 잇달아 수행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임시정부가 내부 파벌 싸움과 열강(列强)의 홀대(忽待)로 이름뿐인 신세가 되었을 때, 대통령 직무대행·국무령을 맡아 민족대동단결을 호소했으며, 가장 어려운 시기에 주석(主席)에 네 차례나 추대되었습니다.

선생의 생애 전반이 3·1운동의 에너지를 응축하는 데 쓰였다면, 생애 후반은 오로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키고 가꾸는 데 바쳐졌습니다. 선생은 독립의 방략을 설계하고 실천한 건국(建國)의 아버지이자, 영원히 변치 않는 불멸의 민족혼(民族魂)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후인은 가장 어려운 때 태어나서 가장 용기(勇氣) 있게 싸우다 간 위대(偉大)한 겨레의 파수병(把守兵)이라고 추앙했던 것입니다.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기던 도중인 1940313, 선생께서 치장(?江)에서 급성폐렴으로 서거(逝去)하신 지 어느덧 7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유언은 오직 하나 민족의 대동단결과 독립정당의 통합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국장으로 선생의 가시는 길을 모셨으며, 광복 후 유해를 봉환해 사회장을 거행했고, 대한민국 국회는 1996년 의사당 로텐더홀에 흉상을 세워 선생의 유지(遺志)를 따르기로 약속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선생께서 구해내신 이 나라는 여태껏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반쪽조차도 갈등과 정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이 나라 지도자들의 용렬(庸劣)한 국량(局量)과 갈대만도 못한 세태(世態)를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통탄(痛嘆)하실 선생님을 생각하면, 실로 모골이 송연한 지경입니다. 부디 후학들에게 평화와 번영으로 달려갈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20194월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 탄신 150주년을 다섯 달 앞두고,

후손 이종억(李鍾億) 올림

---------------------------------------------------------------------

* 이동녕(李東寧, 1869~1940)

“同胞! 우리나라가 온전한 자유(自由)를 누리며 굳건한 獨立을 되찾는 데는 하나는 내 同志들의 團結이요, 둘은 우리 同胞들의 團結이며, 셋은 모든 大韓民族大同團結함에 있으니, 오로지 뭉치면 살고 길이 열릴 것이요, 흩어지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民國 2(1920) 3·1,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

                                                                      
            이 종 억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안이씨 태자첨사공파 보학(譜學)연구소 소장, 연안이씨대종회 편집위원을 맡아, 종중에서 석오 선생 추모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석오(石吾) 선생은 필자의 5대조 이국녕(李國寧) 선생과 같은 항렬의 족친으로, 필자의 조모 청주 한씨와는 외사촌 간이다.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9/04/10 21:46 2019/04/10 21:46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