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열 네 번째 편지 - 2010년 7월 13일        

100년 편지

맵고 당찬 조선여인의 혼 -원영애-

[연극인 원영애씨가 정정화 여사에게 쓰는 편지]

   하늘에 계시는 정정화 할머니.

   어느덧 할머니께서 가신 지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할머니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에 뜨거움이 차오릅니다. 할머니를 생전에 뵌 적도 없고 아무런 개인적 연고도 없지만, 마치 혈연으로 이어진 가까운 어른처럼 느껴집니다.

   할머니의 삶은 여러 부분에서 모자란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가치 판단이 혼란스러울 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시는 스승으로,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는 절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극기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 정정화 여사

   충남 예산에서 할머니가 태어나신 해가 1900년이니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때는 나이 열한 살이었겠지요.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시아버지 김가진 선생님과 남편 김의한 선생님이 있는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가 그 때부터 해방 이후까지 25년 동안 어려운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아 ‘임정의 며느리’ 역할을 하셨지요.

   폭탄을 던지고, 총칼로 적을 죽이는 것만이 독립투쟁이 아니라 제 2선에서 활동자금을 마련하고 안전한 잠자리와 식사를 뒷바라지하는 일 역시 투쟁일진대, 할머님은 그 어려운 일을 성심성의껏 다 해 내셨습니다.

   길고도 험난한 망명과 유랑생활에서 한 치의 흔들림이 없이 임시정부의 어른들을 모시고 끼니도 잇기 어려운 임정의 살림을 챙기는 모습에서는 ‘조선여인의 심성’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여섯차례나 국내에 잠입하여 왜경과 밀정의 눈을 피해가며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모금한 뒤 이를 상해 임시정부에 전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할머니의 모습에서는 맵고 당차게 절망과 맞서는 ‘조 여인의 혼’을 느끼게 됩니다.

   너나없이 궁핍한 망명객들로 채워진 임정의 어려운 살림을 알뜰히 돌보는 맏며느리인가 하면,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여섯 차례나 목숨을 걸고 국내에 잠입해 자금을 모금하러 다닌 투쟁가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사람은 이런저런 고통을 겪고 힘겨운 노력을 쏟게 마련이겠지요. 그러나 온 국민이 망국의 노예로 전락한 일제 36년의 암흑기에 비하면,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혼란이나 어려움은 훨씬 이겨내기 쉬운 것들일 것입니다. 할머님은 생애를 일관한 독립운동의 업적만으로도 길이 추앙받아 마땅하지만, 버거운 역사의 짐을 지고도 늘 온화하고 올곧은 자세를 유지하신 점이 더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할머니..

   인연이란 꼭 혈연이나 직접적인 만남으로 이뤄지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분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알게 되고 삶의 진정한 방향을 찾게 되는 것, 이것이 시공을 초월하는 더 깊은 인연이 아닐까 싶습니다. 할머니와 독립극장의 인연도 그러합니다. 할머니의 삶이 녹아있는 녹두꽃(장강일기)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던 그날, 할머니의 삶을 무대공연으로 올려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으로 할머니께서 그렇게 아끼시던 김자동선생님과 1997년11월 임시정부의 흔적을 따라 상해,가흥,중경으로 비애와 비감을 느끼며 다녔던 기억, 상해근처에 할머니께서 잠시 거쳐하셨던 애인리에도 가보았답니다. 그곳을 보면서 어떻게 여기서 지내셨을까! 가슴만 아려왔었지요.

   중국에서 돌아온 후 1998년에 아!정정화, 2001년엔 치마로 2002년 일본 동경,오사카 공연에 이여 2005년 세미뮤지컬‘장강일기’로 할머니와 인연은 깊어만 갑니다. 이 소중한 인연을 얼마나 잘 살렸는지 두렵기도 하였지만, 할머니의 넋이 많은 관객들의 가슴에 들어가 불이 되고 꽃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었지요.

   할머니..

   이제 일경의 눈을 피해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너던 때로부터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의 역사는 많은 걸 바꿔 놓았지요. 지금 우리는 자신을 지킬 힘을 지니고 경제적으로도 썩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토를 빼앗기고 백성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 백성의 절반 이상이 문맹이던 시절에 비하면 오늘 세상은 상전벽해나 다름없습니다.

   이차대전 이후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한 1백40여 국가 가운데, 대한민국만큼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가 없다고들 합니다. 가슴 뿌듯한 일이지요. 왜정시대의 궁핍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해방 후에도, 한국전쟁 후에도, 외국의 원조물자에 의존하여 겨우겨우 생활을 지탱하던 나라가 이제는 거꾸로 아프리카,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를 원조하고 산업화의 경험을 전수해주는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오늘의 성취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저희들의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저희는 오늘의 편안한 삶을 향유하고 있지만 정작 오늘을 있게 만든 분들은 어려운 시대를 힘들게 살다가 노년에 이르고 하늘나라로 가신 전 세대, 그리고 전전 세대 들입니다.

▲ 중국 가흥시절 임시정부 요인들.(아랫줄 왼쪽 두 번째가 정정화 여사)

임시정부요인이라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중국식 의복을 입고 있다.


   할머니.

   저희 세대에게도 저희가 마땅히 해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분단의 벽을 해소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큰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복지를 실현하는 일도 큰 과제입니다. 품격 있는 문화를 향유하고 아름다운 국토, 깨끗한 환경을 지키는 일도 과제이겠지요.

   이처럼 할 일이 많기에 우리에게 책임이 있고 살맛이 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일이면 목숨을 돌보지 않고 나섰던 선열들의 삶을 교범으로 삼는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에 있을까 싶습니다. 하늘에서 지켜보시다가 저희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따끔히 회초리를 내려주십시오. 엎드려 존경과 사모의 마음을 올리며 늘 편안하시길 두손 모아 간절히 빕니다.

   원영애 올림.

연극인. 현 독립극장 대표      

수당 정정화(鄭靖和 : 1900~1991)

   여성독립운동가로 시아버지 동농 김가진 선생과 남편 김의한 선생을 따라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았다. 1932년 윤봉길 의사 폭탄 투척 사건으로 임정요인들과 함께 상해를 떠나 망명정부를 10년 동안 뒷바라지 했으며, 중경에서 광복을 맞이 했다. 광복 후 미군정의 홀대 속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남편 김의한 선생이 납북됐고, 가족이 흐트러지는 와중에 부역죄로 투옥됐다. 그녀의 생을 <장강일기>에 정리하고 1991년 생을 마감했다.

 

정정화 여사는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여섯차례 국경을 넘나들었다. 한편으로는 26년간 임정의 이런저런 살림을 도맡았다. 조국 독립을 위해 궂은 일 마다하지 않은 '모두의 어머니'였다. 글쓴이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정정화 여사를 두고 "마치 혈연으로 이어진 어른 같다."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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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5 14:31 2010/07/1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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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한 번째 편지 - 2010년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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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4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선생님께  -박정기-

[극작가 박정기 선생이 '석호필' 선생님께 띄우는 편지]

 

  석호필(石虎弼) 선생님, 어제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96호 선생님께서 영면하신 곳을 찾아 뵈웠습니다.

▲ 만년의 스코필드박사
(사진제공:스코필드박사사이버기념관)

   1919년 이 땅의 백성이 일제의 강제 병탄에 반대하여 고종황제의 인산일인 3월 1일에 맞추어 온 겨레가 독립만세를 부르던 날, 선생님께서는 그 현장 하나하나를 촬영하고 우리의 독립의지를 영자신문에 발표해 전 세계에 우리의 3 1운동을 알리는 고마운 일을 하셨습니다.

   특히 일제의 의한 수원 제암리 양민집단살해사건의 현장을 방문해 촬영을 해서 세계에 알리신, 선생님의 위험을 무릅쓴 용기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사장될 번한 사건이었습니다.

   일제치하당시 선교사겸 세브란스 병원의 수의사로 일하시며, 윌슨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원칙을 우리 겨레에게 상세히 알리시고, 우리에게 독립심을 고취시키고 독립의지를 만방에 떨치게 하셨던 선생님의 가르치심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감동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를 감옥으로까지 찾아가 격려하셨고, 일제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역시 우리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떨친 강우규 의사의 공판정을 매회 방문하여 강우규 의사께서 사형선고를 받기까지의 소식을 세계에 알리시어 일제로부터 미움을 사신 일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 1919년 제암리 사건
왜경과 이야기하는 선교사 뒤에서 몰래찍은사진
(사진제공:스코필드박사사이버기념관)


   영국태생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고장이기도 한 워릭셔에서 태어나시고, 젊은 시절 캐나나로 유학을 가 수의학을 공부하셨고, 졸업을 하시자마자 동양의 동쪽 끝에 있는 우리나라로 찾아와 대학에서 젊은이에게 수의학을 가르치시며 독립심을 고취시키고 평생을 이 땅에 서 선교사업을 하시다가 영면하신 프랭크 윌리암 스코필드 선생님,

   금년이 상해 대한임시정부수립 91년이 되는 해입니다.

   대한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선열들께 편지쓰기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제 마음을 담아 선생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감사의 편지를 올립니다.

▲ 봉사와 후학양성에 헌신한 스코필드 박사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린 스코필드박사의 한국명은 ‘석호필’이다. 그는 3.1운동이후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제암리 사건의 현장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58년부터 한국에 영구정착하여 1970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묻힐 때까지 보육원 후원과 젊은 지도자들의 양성에 힘썼다. (사진제공:스코필드박사사이버기념관)


2010년 한국희곡문학상 심사위원장 극작가/연출가 박정기(朴精機)

   

박정기 극작가

황해도 출신으로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였다. 극단 희로무대, 가교, 실험극장, 동인극장, 성좌 공연에 출연하였으며, 각종 작품을 연출하였다.
고교때부터 연극을 한 그는 젊어서도, 늙어서도 그리고 죽어서도 연극을 하는 연극인이라고 자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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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 선생의 이름, '石'은 종교적인 굳은 의지를,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의지를 이름을 통해 표현했다.
선생의 이름을 보면서 선생께서 대한민국을 위해 걸어오신 길과 우리의 역사가 이름에 선명하고 고스란히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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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2 18:52 2010/06/22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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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편지 - 2010년 6월 15일        

100년 편지

우당 이회영 딸 이규숙 고모님께 올리는 글 -이종걸-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했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냐며 우당 이회영, 이시영 할아버지 6형제는 모든 가산을 팔아 항일독립전쟁을 위해 만주로 떠나셨습니다. 당시 갓난아이였던 규숙 고모님은 만주로 향한 항일대장정에 참여한 최연소자였으며, 1945년 해방이후 귀환한 몇 안되는 생존자중의 한 분이셨지요.

   태어나자마자 격랑의 민족사 한가운데로 던져진 고모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 우당 이회영의 손자

18대 국회의원 이종걸

   9대째 정승을 배출한 소론의 대표적인 양반가도 그의 안일이 되어 주지 못했으며, 강보에서 잠시 머물 틈도 없이 차가운 압록강을 넘는 그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난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었음을 어린 이규숙은 알고 있었을까? 빼앗긴 조국을 찾는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오는 고난을 합한 아픔의 크기는 상상을 넘는 그것이었을 것 입니다.

   다양한 한국역사의 장면 중에서도 1910년 식민지 비극이 시작되던 해에 태어남으로써 고모님의 역할은 숙명적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도 응모를 원치 않았을 100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묵묵히, 기꺼이 해 내셨습니다.

   고모님은 가장 어린 시절부터 중국의 문화를 체득하여 중국에서 영어 교사까지 할 정도로 언어에 영특했던 고모님은 북경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우월한 중국인으로의 변장이 가능하셨지요. 이런 능력은 철저히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쓰셨습니다.

   항일독립단의 유명한 무기 운반책으로 러시아가 독립운동집단을 무장해제 시킬때 작디 작은 작은 여아의 몸에 무기를 즐비하게 붙여 운반하셨습니다.

   어린 소녀였지만 그 기개는 누구보다 대장부였습니다.

   역사속의 고모님을 생각해 봅니다.

   항일운동을 하다 변절한자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비밀결사조직인 다물단은 큰 할아버지 이석영의 큰아들인 이규준이 이끌었습니다. 다물단을 이끈 이규준 아저씨를 인도한 분이 고모였습니다. 고모는 이규준 아저씨를 인도하여 당시에 일제 앞잡이로 변절했다고 소문난 김달하를 암살했다고 하여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1년간 고초를겪기도 하셨지요. 또한 고모는 할아버지 이회영이 이상설 등과 교류를 하면서 남겼던 서신의 비밀보관책으로 활동도 하셨습니다. 마적으로 추정되는 일단으로부터 이회영 할아버지 거처가 습격을 받아 집이 불타올랐을 때 다락방에 몰래 모아놓았던 할아버지의 편지뭉치를 찾기 위하여 고모님은 망설임없이 불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자신의 불찰로 할아버님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저작물을 태워버렸다면서 자책까지 하셨을 정도로 마지막까지 책임감있는 삶을 사셨지요.

   고모님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문한군관학교 졸업 후 중국군 소위로 제11로군에 근무한 바 있는 장해평과 결혼한 뒤 고모부는 김구 선생 밑에서 상해임시정부를 위하여 일본은행 등을 습격, 군자금 모집을 하면서 일본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으며, 고모님은 남편의 위창책으로 활동하셨습니다. 당시 거물 항일독립운동가의 면회하는 일도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규숙고모님은 일본 경찰에 체포된 할아버지를 대련감옥에 수차례 면회하였고 이회영 할아버지가 고문으로 순국하시자 시신을 처음 수습하여 찾아온 장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1945년 해방의 기쁜그날, 간난신고 끝에 귀국한 고국땅에서도 환영과 영광은 고모님을 비껴갔습니다.

   양반집 규수의 우아한 처우는커녕 모든 것을 버리고 항일의 대열에 섰던 젊음, 오로지 조국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걸었던 순간들도 그 횟수를 셀 수 없었던 일생이었건만 고모의 영웅적 역할은 여성의 운명으로 대표됩니다.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은 몇몇 저명한 남성의 몫이었고 고모님과 같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아버지와 남편들을 뒷바라지 하였던’것으로 역사에 기록될 뿐 그 영웅적 역할은 조명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고모님은 이후 계속되는 가난 속에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일, 정직하게 자식들을 키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모님은 만주에서, 상하이에서 적군을 호령하면서 군자금을 탈취하던 장수의 기상이 통하지 않는 남한의 현실을 한탄하기까지 했던 남편 장해평을 동정하고 이해했지만, 고모님은 고모부 장해평을 사회부적응증으로 자기 몸마저 지키지 못한 사람이라고 호되게 질책하셨습니다. 이처럼 규숙고모님은 독립후에도 삶 그 자체가 독립운동가로곧은 분이셨습니다.

   규숙 고모님은 한국 근대사에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를 여성으로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장렬한 방법으로 채워나간 자랑스런 주인공이셨습니다. 대한독립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목숨을 바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명예를 폄하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는 뉴라이트들에게 당신들은 국가의 근본을 뿌리째 뒤흔들 수 있는 반국가적, 반역사적인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가르쳐 준 분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제 이름을 부르시며 걸어오실 것 같이 아직 고모님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2010년 이종걸 올림.


이종걸 국회의원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의 16대, 17대, 18대 국회의원으로 재임중이고, 소속 정당은 민주당이다. 이종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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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이 깨지면 특정부분이 웃자라듯, 이는 나머지 부분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고모님에게 쓴 편지에서 대한민국의 씁쓸한 현대사가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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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6 10:36 2010/06/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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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첫 번째 편지 - 2010년 4월 13일        

100년 편지

4.13일에 첫편지를 쓰는 까닭은

이날은 대한민국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달포 남짓 지나서 애국지사들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습니다. 1919년 4월 13일 이었습니다. 나라(대한제국)를 잃은 뒤 이날로 우리 겨레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대한민국 100년을 맞으러 가기로는 4월 13일이 맞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할머니의 이야기,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되어 -김선현-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에게 손녀가 띄우는 편지]

 여느 아이들이 할머니의 품에서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저는 임시정부와 그 어르신들의 크고 작은 옛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다들 책에서 배우던 걸 직접 할머니 말씀으로 들을 수 있었으니 커다란 행운이었지요. 할머니는 저를 품에 안고 34년을 보듬어 주셨지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한없이 아늑한 할머니 냄새를 느낄 수 있어요.

김의한, 정정화 선생과 아들 자동

 할머니, 오늘은 임정 생일이에요. 할머니가 늘 말씀하시던 그날이에요. 그래서 4월이면 넉넉하고 따뜻하던 할머니 품이 더욱 그립고 임정과 독립운동 이야기들이 어제 들은 양 새록새록 떠올라요. 스무 살 때 증조부님이 계신 상해까지 홀로 찾아 나선 일이며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경을 넘나들던 그 아슬아슬한 고비들, 그리고 안살림을 맡으며 임정과 함께한 만리장정... 그 숱한 이야기 속에 할아버지만은 나오지 않았지요. 왜 그런지 그때는 정말 알지 못했어요.

 네 해 전 재북 애국지사 후손 성묘단의 일원으로 북쪽에 계신 할아버지 묘소에 분단 이후 첫 성묘를 갈 수 있었어요. 평양으로 향하는 제 호주머니에는 할머니 묘소에서 떠온 한줌 흙이 들어 있었어요. 온 가족이 함께 재북 인사 묘역에 누워 계시는 할아버지께 절을 올린 뒤 할머니 영정을 할아버지 사진이 담긴 비석 옆에 나란히 세우고 흙을 뿌렸어요. 남과 북의 흙이 합쳐지고 두 분의 한 맺힌 세월이 만나는 순간이었지요. 우리 모두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어요.

 열한 살에 혼인해서 소꿉동무로 연인으로 동지로 40년을 함께 하셨던 할아버지와 분단으로 헤어지고, 홀로 지내신 40년 세월이 어떠했을지 저는 할머니 곁에 있던 34년 동안 미처 헤아리지 못했어요. 그 긴 세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얼마나 그립고 애가 탔을지, 얼마나 많은 날을 문풍지 스치는 바람에도 가슴을 쓸어내렸을지 그때는 정말 몰랐어요.

 할머니, 해방된 조국에서 홀로 감당해야 했던 오히려 더 모질었던 그 세월을 할아버지와 겨우 한 줌 흙으로라도 만나 위로를 나누셨을까요. 할머니 평소대로라면 평양에서 할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를 저에게 또 조근조근 들려주셨겠지요. 40년간 차마 말할 수 없던 이야기를...

 평양을 다녀온 후로 내내 제 마음 한 켠을 떠나지 않는 건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에요. ‘아이가 태어나 첫 울음을 울 때 그 아이의 일생을 누가 알겠는가.’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되었지요. 귀한 집 딸로 태어나 부귀영화는커녕 독립운동자금 품어 안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기를 몇 번이었던가요. 가끔씩 제가 그 일기장을 꺼내 보곤 했다는 걸 할머니는 모르셨지요. 어느 봄날 할머니가 오래도록 써온 일기장을 태우시는 걸 본 제가 깜짝 놀라 말리던 걸 기억하실 거에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이런 것을 남긴들 뭘 하겠느냐. 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굳이 다 태워버리셨죠. 연기가 되어 날아가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저는 그저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어요. 고작 열다섯 살 어린아이였던 제가 할머니의 신산스런 마음 한 자락이라도 어찌 헤아릴 수 있었겠어요.

 할머니는 말씀하셨죠. ‘요즈음 세상에서 원칙이 없다’고, 할머니가 반평생을 바쳐 그토록 갈망하던 해방된 조국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믿고 있어요. 강물은 절대로 거꾸로 흐르는 법이 없듯이 언젠가는 임시정부가 꿈꾸던, 할머니가 꿈꾸던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아니 만들어야 한다고...

 할머니, 오늘 임정 생일을 맞아 할머니께서 남긴 책 “장강일기”를 펼쳐 들어요. 다시금 읽어도 할머니 품에 안겨 처음 만났던 생동하는 독립운동 이야기들이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어요,. 할머니의 이야기는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가슴속에 오랫동안 그치지 않는 젖줄로 흐를 것이라고 저는 믿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이 되기 전에 꼭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을 한자리에 모시고 싶어요.

 그날까지 평안하세요.

 

끝없는 그리움과 존경을 담아 손녀딸 선현이 보냅니다.


         김 선 현

 

  김의한, 정정화 선생의 손녀

  현 OTO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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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3 11:05 2010/05/1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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