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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첫 번째 편지 - 2010년 4월 13일        

100년 편지

할머니의 이야기,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되어 -김선현-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께 손녀가 띄우는 편지]

여느 아이들이 할머니의 품에서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저는 임시정부와 그 어르신들의 크고 작은 옛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다들 책에서 배우던 걸 직접 할머니 말씀으로 들을 수 있었으니 커다란 행운이었지요. 할머니는 저를 품에 안고 34년을 보듬어 주셨지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한없이 아늑한 할머니 냄새를 느낄 수 있어요.

▲ 김의한, 정정화 선생과 아들 자동

할머니, 오늘은 임정 생일이에요. 할머니가 늘 말씀하시던 그날이 에요. 그래서 4월이면 넉넉하고 따뜻하던 할머니 품이 더욱 그립고 임정과 독립운동 이야기들이 어제 들은 양 새록새록 떠올라요. 스무 살 때 증조부님이 계신 상해까지 홀로 찾아 나선 일이며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경을 넘나들던 그 아슬아슬한 고비들, 그리고 안살림을 맡으며 임정과 함께한 만리장정... 그 숱한 이야기 속에 할아버지만은 나오지 않았지요. 왜 그런지 그때는 정말 알지 못했어요.

네 해 전 재북 애국지사 후손 성묘단의 일원으로 북쪽에 계신 할아버지 묘소에 분단 이후 첫 성묘를 갈 수 있었어요. 평양으로 향하는 제 호주머니에는 할머니 묘소에서 떠온 한줌 흙이 들어 있었어요. 온가족이 함께 재북 인사 묘역에 누워 계시는 할아버지께 절을 올린 뒤 할머니 영정을 할아버지 사진이 담긴 비석 옆에 나란히 세우고 흙을 뿌렸어요. 남과 북의 흙이 합쳐지고 두 분의 한 맺힌 세월이 만나는 순간이었지요. 우리 모두 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어요.

열한 살에 혼인해서 소꿉동무로 연인으로 동지로 40년을 함께 하셨던 할아버지와 분단으로 헤어지고, 홀로 지내신 40년 세월이 어떠했을지 저는 할머니 곁에 있던 34년 동안 미처 헤아리지 못했어요. 그 긴 세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얼마나 그립고 애가 탔을지, 얼마나 많은 날을 문풍지 스치는 바람에도 가슴을 쓸어 내렸을 지 그때는 정말 몰랐어요.

할머니, 해방된 조국에서 홀로 감당해야 했던 오히려 더 모질었던 그 세월을 할아버지와 겨우 한 줌 흙으로라도 만나 위로를 나누셨을까요. 할머니 평소대로라면 평양에서 할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를 저에게 또 조근조근 들려 주셨겠지요. 40년간 차마 말 할 수 없던 이야기를...

평양을 다녀온 후로 내내 제 마음 한켠을 떠나지 않는 건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에요. ‘아이가 태어나 첫울음을 울 때 그 아이의 일생을 누가 알겠는가.’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되었지요. 귀한 집 딸로 태어나 부귀영화는커녕 독립운동 자금 품어 안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기를 몇 번이었던가요. 가끔씩 제가 그 일기장을 꺼내 보곤 했다는 걸 할머니는 모르셨지요. 어느 봄날 할머니가 오래도록 써온 일기장을 태우시는 걸 본 제가 깜짝 놀라 말리던 걸 기억하실 거예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이런 것을 남긴들 뭘 하겠느냐. 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굳이 다 태워버리셨죠. 연기가 되어 날아가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저는 그저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어요. 고작 열다섯 살 어린아이였던 제가 할머니의 신산스런 마음 한 자락이라도 어찌 헤아릴 수 있었겠어요.

할머니는 말씀하셨죠. ‘요즈음 세상에는 원칙이 없다’고. 할머니가 반평생을 바쳐 그토록 갈망하던 해방된 조국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믿고 있어요. 강물은 절대로 거꾸로 흐르는 법이 없듯이 언젠가는 임시정부가 꿈꾸던, 할머니가 꿈꾸던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아니 만들어야 한다고....

할머니, 오늘, 임정 생일을 맞아 할머니께서 남긴 책 “장강일기”를 펼쳐 들어요. 다시금 읽어도 할머니 품에 안겨 처음 만났던 생동하는 독립운동 이야기들이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어요. 할머니의 이야기는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오랫동안 그치지 않는 젖줄로 흐를 것이라고 저는 믿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이 되기 전에 꼭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을 한 자리에 모시고 싶어요.그날까지 평안하세요.

끝없는 그리움과 존경을 담아 손녀 선현이 보냅니다.

             김선현

  독립유공자 김의한, 정정화 선생의 손녀

  現 OTO 대표이사

양쯔강의 다른 이름은 장강(長江)입니다. 그 이름처럼 아시아에서 제일 긴 강이기도 하지요. 장강은 중국 땅 동서를 흐릅니다. 그 긴 강줄기의 역사는 우리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멀리 중국에 망명정부를 세우면서 그 강줄기를 따라 임시정부의 역사도 같이 흘렀으니까요. 그리고 그 역사의 흐름에 정정화 선생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강 이야기를 늘 들려주셨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살아 숨쉬고 있었지요. 손녀는 지금도 할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할머니 이야기 속에는 이름도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살아있습니다.


4월 13일에 첫 편지를 쓰는 까닭은?


이 날이 대한민국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달포 남짓 지나서 애국지사들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습니다. 1919년 4월 13일이었습니다.

나라(대한제국)를 잃은 뒤 이 날로 우리 겨레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대한민국 100년을 맞으러 가기로는 4월 13일이 맞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 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copyright src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3/08/26 16:09 2013/08/2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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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번째 편지 - 2011년 5월 31일        

100년 편지

독립운동 우국지사님께 -이용범-


   지난 겨울에 우크라이나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미국에 온지 15년입니다만, 제 친구중에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아주 어렸을 때 미국에 온 친구와 함께 그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추운 나라의 겨울은 이곳 미국, 그중에서도 남가주 엘에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많은 분위기였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찬 침엽수림의 나무들이 차디찬 동토의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를 이겨내고자 이를 악물고 버티는 모습들이었습니다.

▲ 무장한 독립군의 모습

   수도 키에브에서 오뎃사로 가는 길을 찾다가 야간열차를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좁고,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불편한 밤 기차. 갑자기 제 친구가 조용히 이렇게 말하더군요. “예전에 우리조상 독립군들이 광복운동을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벌판을 오갈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 이 추운 겨울날에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겟다고 아는 이도 없고 맞는 음식도 없는 이 외국땅에서,

2011/06/01 11:36 2011/06/0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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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아홉 번째 편지 - 2011년 5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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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항쟁에서 민족해방운동까지  -박천우-



   1923년 전라남도 신안군(당시 무안군) 암태도에서 일어난 ‘암태도 농민항쟁’은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과 고리의 소작료를 착취하던 지주들에게 정면으로 저항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암태도 농민항쟁의 성공은 서해 남부의 자은?도초?지도 등지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일제하 농민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 암태도 농민항쟁을 이끈 주역이 바로 서태석 선생이다.

   서태석은(1884-1943)은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시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소년으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농민항쟁 당시 그의 집안은 3정보 이상을 소유한 자작상농층으로 소작농이 아니면서 농민운동에 앞장섰던 것은 일찍부터 일제 치하의 민족적 모순에 눈을 떠 농민운동을 통해 구국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서태석은 1910년대를 전후하여 암태면장으로 일하였다. 면장 재임 중 구황작물로 무상분배 된 메밀씨앗을 팔아먹은 관리를 고발하는 등 부정척결에 앞장섰다.

   서태석은 1920년 2월 29일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일을 기하여 ‘대한독립 1주년 기념 축하경고문’(이동욱 집필)과 태극기를 자은도 소작회회장 표성천과 함께 목포부 송도공원과 철도정거장 앞 광장에 부착, 배포하여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때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1922년부터 서울을 왕래하는 한편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여 그곳의 한인 독립투사들과 만나 민족해방투쟁 방략의 일환으로 사회주의사상의 형세를 관찰하고 받아들였다.


   1923년 3월 암태도로 귀향하여 높은 소작료로 고통 받는 농민들을 보면서 경제적 약자들의 집단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해 12월 ‘암태소작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미 암태도에서는 1920년부터 의식개혁 및 교육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1921년 암태면 청년회가 여자강습원을 개설하고, 1922년에는 암태사립 3.1학사를 설립하여 조직적인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다. 또한 민중극단을 조직하여 인근 각 면을 순회공연하면서 각 섬끼리의 연대 투쟁의식을 고취시켰다. 암태소작회 창립 후 야학부를 운영하여 문맹퇴치는 물론 민족과 계급의 모순을 일깨워주는 의식개혁 교육을 하였다.

▲ 1981년 서태석묘소 옆에 세워진 추모비(사진출처:신안문화원), 묘는 2008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됨.

   1923년 지주들이 소작료로 무려 7, 8할을 요구하자 서태석의 지휘 아래 문지주가를 상대로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시위와 항쟁이 벌어졌다. 1924년 서태석이 조선노농총동맹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뽑히면서 암태도 농민항쟁은 활발한 외부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 해 4월 경찰은 노농대회에 참석한 서태석을 대전에서 검속하고 소작회 간부 12명을 마구잡이로 구금하였다. 이때 암태도 농민 600여 명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목포에 집결하여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사회여론이 확산되자 당국은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태도를 바꾸었고 지주들도 머리를 숙였다. 항쟁의 승리로 지주 대 소작인의 몫이 논의 경우 4 : 5가 되었다. 그리고 종래 마름들이 소작인 개개인의 집에서 소작료를 집행하던 방식이 한 마을의 모든 수확물을 한 장소에 모아 소작료를 한꺼번에 지주에게 주는 합복(合卜)제도로 바뀌었다.

   1926년 암태소작회는 서태석의 권유에 따라 농민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 1927년 3월 암태농민조합 제1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농민운동의 방향 전환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 결과 기존의 농민항쟁이 대 지주투쟁에서 독립투쟁으로 발전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서태석은 1927년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제3차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으로서 민족해방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다가 신의주에서 일경에 붙잡혀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30년 대 이후 서태석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말년에는 수차례 옥고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앓으며 신안군 압해면 여동생 집에서 지내다가 들녘에서 벼 포기를 움켜쥔 채 삶을 마감했다.

   서태석이 1928년 8월경에 지은 시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민족해방투쟁을 향한 서태석의 마음이 담겨 있으며 그가 암울한 식민지시기에 살았던 옹골찬 독립투사임을 알 수 있다.


울어볼까 우서볼까

산을 넘고 또 넘어도 앞에는 더 큰 산이오

물을 건너고 또 건너도 앞에는 더 큰 물이다.

이 산 이 물 또 건너도 또 산 또 물이 있으려니

갈까보나 말까보나 험한 산 험한 물길을

가고 가고 또 가오면

진리가 말하는 그 유토피아는 응당 있는 줄은 알지마는

피곤한 팔다리 더 갈 줄 바이 없다.


오냐 동무야

가자 가자 또 가보자

무쇠다리 돌팔뚝에 풀린 힘을 다시 너허

칼산 넘고 칼물 건너 쉬지 말고 또 가보자

이 팔과 이 다리 부서져

일점육일지골(一點肉一支骨)이

다 없어질 때까지.



 박천우
 

 
1953년 전남 신안 암태도 출생. 장안대학교 한국사교수로 재직 중. 수원시민들을 대상으로 ‘수원의 역사와 문화’ 강의를 17년째 계속하고 있다. 수원문화유산답사회 지도교수로서 우리나라 문화유산 답사 80회 이상 진행 중. 경기문화연대 대표로 용주사?융건릉 주변 아파트 건립 반대 시민운동 추진 중.

서태석[徐邰晳, 1885~1943]

항일농민운동가. 암태도소작인회,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조선공산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에서 소작쟁의를 주도하였으며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copyright src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1/05/23 11:53 2011/05/23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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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쉰 여덟 번째 편지 - 2011년 5월 17일        

100년 편지

두 여인의 책을 읽고 -조영숙-


   한국에 있는 독립운동관계 동지이자 선배인 리학효씨로부터 두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와 ‘장강일기’이다. 일본에서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며 많이도 울었고 고국생각을 많이도 했다. 100년 전 내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우리민족의 수난을 짊어진 그 고생 앞에 눈물 외에는 말이 없었다. 이럴 수 있느냐고, 말 좀 하시라고 땅을 치고 하늘을 쳐다보며 펑펑 울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인내와 투쟁으로 극복해야할 현실을 생각하며 넘쳐나는 울음을 삼키고 삼키면서, 다지고 다지면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며 이렇게 밑줄 친 책들도 없다.

   책 전체가 눈물덩어리지만 지면관계상 몇 부분을 추려 다시 새겨보고 싶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독립투사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 회고록)

▲ 허 은 여사

   “신의주 역사를 빠져나오니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앞으로의 험난한 여정을 미리 일러주는 듯 낯선 국경 역에서 비바람만이 우리를 맞이했다.”, “어떤 때는 일이 죽나 내가 죽나 둘 중에 하나란 생각으로 날을 보낸다.”, “우리 때문에 어린네가 이렇게 고생한다 하셨다. 손이 시릴 때라 마주 쥐어주시는 손길이 무척 따뜻하고도 고마웠다.”, “심지어는 석주어른 3년 상에 제문까지 검열하며 자기네 마음대로 지우기도 했다. 그때 그 짓했던 일본 놈 앞잡이 형사가 나중에 참의원선거에 후보로 나왔다 . 참 한심한 일이다.”, “학령기에 아이들 하나도 학교에 못 보내고 또 여러 가지가 뜻대로 되지 않아 울적해하던 남편은 늘 속병을 앓았다. 속이 답답하고 거북하다면서 괴로워했다. 내가 헝겊으로 주머니를 기워갖고 소금을 볶아서 뜨겁게 해주면 그걸 늘 배에 안고 살았다.”, “그놈 좀 뚝 잘라서 우리 애 좀 나눠 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형제분 아버지 보니까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어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강단으로는 전 조선과 전 만주에서 제일간다던 아버님의 눈에서도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장강일기 (양자강 푸른 물결 위에 실린 한 여성독립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 정정화 여사

   “저라도 아버님 뒷바라지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 허락도 없이 찾아뵈었습니다. 아버님”, “별로 배운 것도 없고 나라가 망하기 전에 세도가나 집권자들의 압제를 받으며 억눌려 지내오기만 했던 사람이 자신에게 해를 끼쳤다면 모를까 이렇다 할 혜택이나 은덕을 베풀어주지 못했던 조국이 이미 숨통이 끈긴 마당에도 그 조국을 찾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일제에 항거하는 모습을 볼 때 진정한 애국자가 따로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아주머니 레더구나. 귀골로 곱게 산 사람이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했시다. 독립 운동하는 유명한 사람들이레 하나같이 다 이런 험악한 일을 하는 건 아니디요. 기렇디요. 나 같은 놈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거든”, “백범 같은 분은 여기저기 다니기를 잘하니까 그 헝겁신의 바닥이 남아날 날이 없다. 바닥은 다 닳아 너덜거리니 명색만 신발바닥이고 신발목부분만 성한채로 매달려 있는 꼴이었다.”, “내가 만약 국내에 있다가 독립 운동을 한다는 상해의 독립 운동지사를 찾아갔다고 치자. 내가 아무개입니다 하고 내 소개를 했을 때 그들도 나를 보고 누구시더라 하고 나설 것인가 아니다.”, “서신 연락조차 닿지 못했던 중원대륙에 흙바람이 휘몰아칠 때 손가락같이 굵은 빗줄기가 천형인 듯 쏟아져 내려와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을 때 그래서 서글프고 그래서 쓸쓸할 때마다 늘 생각이 사무치던 곳 그곳이 내 나라였다 내 조국이었다.”, “중원대륙을 헤매며 20여년을 보냈어도 그 사흘만큼 지루하고 딱한 신세는 아니었다. 그렇다 비록 제나라 잃고 남의 나라에 가서 유랑생활을 했을망정 부산 앞바다의 사흘만큼 딱한 신세는 결코 아니었다.”, “우리 집은 셋방살이나마 다행으로 여기며 살아야 했다.”


   이 두 책의 저자는 다 여성이다. 독립운동의 제일 밑바닥에서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살아왔던 그 심경이 읽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사로잡았다. 두 분께서 공통으로 말씀하시고 계신 것은 서간도에서 중원대륙에서 가시밭길을 걸은 그 아픔보다 더 참기 어려운 고통은 고국의 배신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외세와 친일파가 장악한 고국이었다. 그 거꾸로 된 고국에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가슴을 앓았고 그 아내와 어머니들은 자식의 교육과 먹을거리를 걱정하는 세월을 보내야했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은 이들에게 얼토당토않은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 아직도 우리사회에 남아있는 ‘빨갱이’라는 분탕질이다.

   나는 일본에서 역사문화운동을 한답시고 때론 힘에 버거워서, 때론 외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많다. 그러나 두 분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힘을 얻었다. 두 선배님처럼 나 역시 내 아이들(재일 3세들)에게 우리 민족문화와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갖도록 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눈물과 생명을 바쳐 서간도를 개척하듯, 또는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의 ‘거지같은’ 살림을 목숨 바쳐 꾸려나갔듯이, 나도 열심히 우리네 살림살이를 꾸려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또 통일을 소원한 선열님들 뜻을 이어 미력이라도 통일에 기여해 나가겠다고 그분들의 뼈아픈 고생 앞에 내 외로움과 눈물을 제물로 올리고 다짐을 드린다.

   100년 편지가 끝나는 2019년엔 우리국민들 모두가 큰 함성으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싶다. 그리고 하루라도 속히 우리민족 남·북·해외 전 구성원이 진정으로 선열님들께 큰 위령제를 올려드리고 싶다.




 조영숙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남. 재일동포 2세와 결혼하여 도일.
  1995년 오오타구 국제교류단체 아리랑회(뒤에 무지개회로 개칭) 설립.
  일본역사왜곡교과서 반대운동. 민문연 도쿄지회 창립 등 역사문화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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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6 16:01 2011/05/1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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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쉰 일곱 번째 편지 - 2011년  5월 10일        

100년 편지

곽태영 선생 의거비에 쓰인 ‘아드흐’를 아십니까? -김영조-



▲ 곽태영 선생 의거비

   백범 김구 살해범 안두희를 응징한 곽태영 선생의 의거비를 찾은 것은 4342년(2009) 10월 18일이었다. 이날 양구의 시민단체 대표들과 함께 했던 효창원을 사랑하는 사람들 김용삼(63살) 회장은 “곽 선생이 안두희를 응징한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김구 선생을 암살하고도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춤추듯 행동하던 자를 응징한 일이며, 해방 후 최초로 민족반역자를 응징함으로써 교훈을 남긴 큰 사건이다.”라고 강조했다. 당시 안두희를 응징했던 상황을 직접 곽태영 선생에게 들었던 김용삼 회장을 통해 들어보자.

   “1965년 12월 중순, 선생은 안두희 실물 사진을 품은 채 혼자 행상차림을 하고 강원도 양구로 향했다. 안두희가 운영하는 군납공장을 살필 수 있는 민가에 장사하러 온 사람이라고 속이고 하숙을 얻었다. 실제 장사꾼처럼 보이려고 민가에 물건을 팔면서, 안두희 공장에도 들러 노동자들에게 양말 장갑 등을 살 것을 권하는 척하면서 군납공장을 비롯하여 살고 있는 집 등의 정보를 얻어냈다.

   그렇게 여러 날 동태를 살피던 중 운명의 1965년 12월 22일 오전, 하숙집에서 군납공장을 내려다보니 안두희가 타고 온 것이 분명한 지프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온몸이 떨렸다. 동네 청년처럼 보이도록 흰 와이셔츠 차림을 하고, 주머니에 칼과 자백 받을 필기도구를 넣고 두부 공장으로 향했다.

   문 앞마당을 들어서서 우물가에 세수하러 나와 있던 안두희에게 ‘김구 선생님을 살해한 민족의 원수야!’라고 소리쳤고, 이내 격투가 벌어졌다. 엎치락뒤치락하던 중 선생은 그의 배에 올라타고 돌을 집어 얼굴을 내려치고 칼로 찔렀다. 마당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공장 직공들이 몰려 와 나를 사정없이 때리기에 ‘너희 사장이 누구인지 아느냐, 김구 선생을 살해한 민족의 원수다. 나를 때리지 말고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였다.”

   이때는 선생의 나이 29살, 백범 선생 묘소에서 암살자 응징을 약속한 10년의 마지막 해였다고 한다. 이 사건은 온 나라에서 60만 명이 넘는 국민이 곽태영 애국 청년을 석방하라는 서명에 참여하는 등 폭발적인 반향이 일었고 선생의 아버지는 아들이 장한 일을 했다는 1만여 통의 격려편지를 받았으며, 아들의 자랑스러운 일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하며 기뻐했다.

   이러한 국민의 열화와 같은 노력으로 선생은 사건 8달 만인 1966년 7월 3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다.

   당시 아무도 응징하지 않던 김구 저격범을 처단하는 민족혼을 보여준 곽태영 선생을 추모해 남궁경(76살, 원주 거주)이란 분이 의거비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 의거비를 세울 무렵엔 전두환 군사정권의 살벌한 분위기 탓에 남궁경 선생은 큰 결심을 해야만 했다.

▲ 곽태영 선생 의거비에는 안두희의 이름을 원래 ‘아드흐’라고 새겨 놓았었다. 그것을 어떤 이가 잘못 쓴 것인줄 알고 ‘안두희’로 고쳤다.

▲ 곽태영 선생 의거비를 세운 남궁경 씨는 비석 옆에 백범 선생 서거 33돌에 33자의 글씨로 3월 3일 21시에 세웠다고 새겼다.(왼쪽) 또 다른 쪽 옆에는 남궁경 선생의 이름 아래 받침 ‘???’과 세울 립(立)자의 받침 ‘?’이 새겨져 있다.(오른쪽)


   곽태영 선생을 기리는 양구 의거 비석에는 음각으로 ‘아드흐’라는 글씨가 새겨 있다. 무슨 뜻일까? 알아본즉 의거비를 세운 남궁경 선생이 안두희가 천추에 씻지 못할 대역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이름을 제대로 써줄 수 없다며, 일부러 받침을 뺐다고 한다. 그 뒤 어떤 이가 안두희 이름을 잘못 썼다며 받침을 새겨서 지금은 서툰 글씨의 안두희로 바뀌어 보인다.

   또 비석 옆면에는 첩보전 암호 같은 ‘33-33-3. 3-21’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지 33년(1982) 되는 해에 글자 33자로 3월 3일 21시에 비석을 세웠다는 뜻이다. 반대편 옆에는 또 다른 암호 같은 글자 ‘ㅁㅇㅇㅂ’가 새겨 있는데 이것은 남궁경 선생의 이름 아래 받침 ‘ㅁ ㅇ ㅇ’과 세울 립(立) 자의 받침 ‘ㅂ’을 새긴 것이다.

   여기 곽태영 선생 양구 의거비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날 모임에 함께 한 이들로 김영진(65) 전 양구주민연대 대표를 중심으로 김창현(76, 농업) 양구주민연대 회원, 조인선(37) 공무원노조 양구비상대책위원장, 한명희(43) 양구여성농업인센터 대표가 그들이다. 그들을 중심으로 해마다 8월 15일 20여 명이 의거비에 모여 김구, 곽태영 선생을 기리며 민족에 대해 생각을 한다. 여기에는 양구주민연대와 양구공무원노조를 중심으로 양구농민회, 전교조 양구지회가 힘을 보태고 있다고 전한다.

▲ 양구군청은 박정희가 제5사단장 시절 관사로 썼다는 집을 전시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 박정희 관사 전시장 앞에 세운 비석


   의거비를 둘러 본 후 의거비 가까이에 관광 상품화되어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제5사단장 시절 관사로 쓰던 집을 둘러보았는데 김영진, 김창현 씨 등은 귀한 양구군 예산을 ‘박정희 세우기’에 쓰고 있다며 개탄하기도 했다. 또 이 자리엔 '곽태영 선생' 의거비를 세울 때 땅을 내주었던 홍주범(98살) 선생이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자리를 함께해 참석한 이들의 마음을 다잡게 해주었다.

   김구 선생은 남의 땅 중국에서 온몸을 불살라 조국독립을 실현하고자 몸부림을 쳤다. 무려 27년간이나 일본군의 눈을 피해가며, 이봉창 열사 등을 통해 일본을 응징해왔고 겨레의 숨결을 보듬으려고 몸부림쳤다. 그런 우리 겨레의 위대한 지도자를 암살한 안두희를 응징했던 곽태영 선생을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를 기념하는 의거비는 우리가 소중히 아껴야 할 유산이다.


 김영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날마다 쓰는 인터넷 한국문화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를 집필하고 있으며 (2,084회, www.koya.kr) 그간 어렵고 딱딱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는 글쓰기를 통해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김영조의 민족문화 바로알기>를 오마이뉴스에 800여 편 연재한 바 있으며 KBS, 국악방송 등 언론매체와 서울시립대, 상명대, 서울시지원 “다시 쓰는 서울문화” 강좌 등을 통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한국문화의 아름다운 속살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곽태영[1936 ~ 2008]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고려대

2011/05/09 14:59 2011/05/0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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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쉰 여섯 번째 편지 - 2011년 5월 2일        

100년 편지

존경하옵는 항일의사 구천 할아버지께   - 김석두 -


2010년 올해,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열리는 미주한인 역사대회 행사의 하나인 여러 독립운동 선조에게 드리는 역사편지 쓰기대회에서 손자인 저는 자랑스러운 할아버님에게 편지를 쓰게 되어 너무나 가슴 벅차오름을 느낍니다.

1905년 일제의 을사늑약 체결 후 24세 청년이셨던 할아버지님께서는 우국일념으로 항일투쟁 모의운동을 시작하여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호남 의병대장 정재 이석용 장군과 의기투합하여 군수 조달책을 맡아 전 재산을 독립운동 기금으로 쾌척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1973년 4월 23일 아버지와 장손인 큰집 형님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할아버님의 항일 독립운동사인 ‘항일 의사 구천 공 행장록’을 읽고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기억을 되새기며 뜨거운 감동을 받았던 때가 언제나 떠오릅니다.

그 책 권두언을 쓰신 노산 이은상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의 글 가운데 "의병대장인 정재 공은 전선에서, 구천 선생은 후방에서 군수물자를 조달하다가 다 같이 체포되어 옥고를 수차례 치렀으며, 마지막 동지인 정재 공이 옥중에서 사망하게 되자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하여 장사를 지냈으니 두 사람의 인연은 남달리 두터웠다.

구천 선생은 평생소원인 민족의 광복을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여한이 없을 것이요. 다만 우리는 선생이 한결같은 지조를 지키며 한평생을 살다 가신 것을 본받고, 나아가 그 뜻과 행적을 기리 후생들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읽어보면 볼수록 이 손자 얼마나 가슴 뿌듯해지는지 할아버님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구천 김형돈 행장록

할아버님! 돌아가신 지 60년이 지나도록 한문으로 된 할아버님의 ‘행장록’을 한글판으로 번역하여 제 후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수년 전에 번역만 마치고 출판을 미루어온 불효를 참회합니다. 아버님의 음덕을 기억하시는 형구 할아버님께서 번역해 주신 할아버님의 이 고귀한 항일투쟁의 유산을 충효의 덕목으로 삼고자 내년 2011년 아버님 탄생 100주년, 할아버님 탄생 130주년을 맞아 후손들이 대가족 모임을 가지면서 출판하여 봉정하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시골 거지들이 아침저녁 식사 때가 되면 밥 달라고 동냥 오면 할아버님은 한술도 드시지 않고 그 밥상 찬까지 그냥 그대로 거지에게 주시곤 하셨다는 이야기를 생전에 어머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들은 기억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게 울리곤 합니다. 또한 1912년 12월 수감되셨다가 1913년 10월 전주 감옥에서 출옥하신 후 정재 공이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 감옥으로 이송 후 1914년 옥사하시자 수백리 길을 걸어서 시신을 상여에 메고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 금당리 할아버님 처소에 은신해 있던 가족들에게 신면 시켜 드리고, 고인의 선산인 전라북도 임실에 안장하도록 동지애를 보여주셨던 할아버님이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바로 벗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는 참된 우정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정재 이석용의 '옥중 마지막 서한'과 구천 김형돈의 '봉곡 조사의 글'과 묘소 전경사진 - 김형돈 의사는 생전에 왜놈들 사진기로 촬영하는 것을 거부하여 영정사진이 없어, 필자의 부친께서 이 액자를 영정 대신 걸어 놓으셨다고 한다.    
- 아크로폴리스타임스(http://www.acropolistimes.com)에 게재.

할아버님! 제가 미국에 이민 온 지 30년이 훌쩍 넘어 이제 이민선조가 되었으니 중시조의 막중한 사명감을 느낍니다. 저에게는 미주이민 후손들의 미국문화 적응과 동화에 대한 문제를 잘 가르쳐야 할 책무가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와서 오래 살아도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예절과 미풍양속,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부모의 지나친 보호와 사랑과 물질만능, 성의 자유와 문란 등 인터넷 시대의 문명 중독 심화로 도덕이 상실 되어가는 후손들의 초상화가 그려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에 아버지께서 저를 100리길 읍내 중학교에 진학 시키려는 것을 아시고, 그해 여름방학 동안 할아버님께서 직접 ‘추구(推句)’라는 한문 시집을 소리 내 가르쳐 주셨던 글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녹죽군자절(綠竹君子節)이요/ 청송장부심(靑松丈夫心)이라/ 인심조석변(人心朝夕變)이요/ 산색고금동(山色古今同)이라"는 글이 아직도 저의 뇌리에 그대로 꽂혀 있습니다. 산은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에 그대로인데 사람의 마음은 왜 조석으로 변하는 것일까? 어릴 적 그 의구심이 이제 70 세 할아버님의 나이와 똑같아진 제가 할아버지가 되어 손자를 데리고 산을 찾아 오르고 또 오르면서 가르침을 깨우쳐가고 있습니다.

할아버님! 정말 고맙습니다. 할머님과 함께 천상에서 아버님과 어머님의 효도 받으시며 영원한 삶을 누리시길 간구 드립니다.

2010 년 10월 미주한인 역사대회를 맞이하여

손자 석두 올림

(2010년 10월 미국 LA에서 열린 미주한인역사대회 행사 중 '독립운동 선조에게 드리는 역사편지 쓰기대회'에서 쓴 글을 100년 편지로 보내주셨습니다.)


       
       김석두

  산악인 및 자유기고가

  구천 김형돈 의사 손

  현재 미국 LA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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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2 16:29 2011/05/0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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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쉰 다섯 번째 편지 - 2011년 4월 26일        

100년 편지

강우규(姜宇奎)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 -방영혁-



   한반도 전체가 만세를 외친 3·1운동 발발 후 불과 반년 만에 바뀌게 된 조선총독. 하지만 그 신임 총독 사이토가 서울에 도착해서 맞게 된 것은 선생님이 던진 폭탄이었습니다. 국내는 물론이고 외신 언론들까지도 주목했던 이 엄청난 사건. 하지만 그 대담한 의거의 주인공이 고령의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고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놀랬을까요.


   최초로 조선총독을 겨냥, 의거의 방법이 폭탄투척이라는 점, 65세라는 고령의 나이...


▲ LA TIMES에 실린 강우규 의사 의거 기사

   하나 같이 놀라운 사실들이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의거를 가슴 깊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사의 길을 가려는 제게 선생님의 삶은 또 다른 가르침으로 마음 깊이 와 닿아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어려웠던 시절, 한의학을 배워 환자를 돌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습니다. 또한 만주에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하셨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당신께서 결코 과격하다거나, 한때의 울분으로 폭탄을 던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날의 의거를 있게 한 것입니까. 저는 선생님의 마지막 유언에서 교육자로서 가진 고뇌와 결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왈우(曰愚) 강우규 의사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1920년 11월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


   어쩌면 당시 선생님께 중요한 것은 사이토라는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본인의 목숨과도 바꿔서 이루고 싶어 했던 그것. 저는 그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청년들의 깨우침이라고 느꼈습니다. 식민지라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가슴이 울리는 신선한 충격과 감회를 전해주고 싶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제게 선생님은 노인단의 일원으로 의열투쟁을 한 의사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평생을 걸어오신 길이, 마지막으로 택하신 의거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지도, 모두 훌륭한 교육자십니다.


   선생님!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아직 배울 것 많은 청년인 저에게 선생님의 삶은 커다란 사표가 됩니다. 아마 제가 목숨을 걸어가며 교육과 청년들을 위해 헌신할 일도 없을지 모릅니다. 다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미래의 주인공인 청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교육에 대한 열정은 가슴 깊이 새기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떤 가치관을 가진 교사로서 학생들 앞에 설 것인가 고민할 때면 선생님의 의거를 떠올리게 됩니다. 교사가 된 뒤에도 현실에 안주하거나 게을러지게 되면 선생님을 생각한 오늘의 이 편지를, 그리고 지금의 이 마음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하고 또 존경합니다, 선생님.




 방영혁
 

  명지대학교 사학과 졸업

  역사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인 예비선생님이다.

강우규[姜宇奎, 1859 ~ 1920]

   1859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 어려서는 한학과 한방의술을 익혔고 근대화 요구에 부응하여 개화사상을 수용,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885년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한 뒤에는 한방의술을 바탕으로 인술을 베풀고 재산을 모아 사립학교를 설립,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가 있자 만주로 건너가 1915년부터는 길림성 요하현에 한인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신한촌을 건설하고 이곳에 동광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가 3.1운동으로 고조된 조선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회유술책으로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워 총독을 교체할 때 새 총독인 사이토가 부임하는 날 서울에 잠입한 의사는 6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행사장인 서울역에서 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다. 비록 현장에서 총독 폭살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곳에 모인 일제관리 등 37명을 사상케 하여 3.1운동 이후 희망을 잃은 국내외 민중들에게 무장투쟁이라는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한인 순사 김태석에게 잡혀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형, 순국하시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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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6:25 2011/04/2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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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쉰 네 번째 편지 - 2011년 4월 19일        

100년 편지

아저씨, 아저씨, 용헌식 아저씨께...  -용환신-



   모습은 전혀 알 수 없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서만 살아 만나 뵙는, 그래서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아저씨, 그런 당신께 편지를 띄운다는 것이 얼마나 송구스러운 짓인지, 그 죄스런 마음이 이 편지 쓰기를 작정할 때부터 가위눌리듯 한시도 떠남 없이 저를 옥죄고 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도 아닌,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할 이야기들을 그 동안 쉬쉬하며 엿들어야만 했던 아저씨 생전의 짧은 삶에 대해 확인하듯 하나하나 짚어야 된다는 것 또한 얼마나 슬픈 일인지 생각할수록 아무 저항 없이 심연의 늪으로 빠져드는 그 자괴감을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저씨, 먼저 고백할게 있습니다. 그래야 편지 쓰는 동안 조금이나마 마음 편할 것 같아서입니다. 아직도 아저씨에 대한 붉은 편견이 집안 내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조작되기도 하고 과대포장 되기도 한 그 몹쓸 병에 갇혀 가슴 닫은 채 지금도 소통하려 하지 않는 집안 내 아저씨에 대한 그 고질적 편견을 말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아저씨를 비호하거나, 그 편견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 이념, 그 무엇보다도 소중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 아저씨의 짧은 삶, 그것도 어둡고 어둡던 시절, 자신을 버리고 단 하나의 꿈을 위해 깜깜한 절망의 언덕에 홀로 서 계셨던 당신의 외로움, 그 막막함에서도 빛을 찾았을 당신의 칼 빛 의로움의 희망을 지금, 조금이나마 공유하고픈 저의 갈증 때문에 그 낙차 큰 생각들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세상을 뜨셨는지 아무도 모르는 아저씨의 최후, 중간 중간 동강난 삶보다 더한 아저씨의 마지막 길에 대해 아무도 알려 하지 않는 이 비겁한 현실에서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요?
   슬픈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로는 당신께서는 해방된 뒤 한 동안 고향땅, 지금은 수원실내체육관자리 대유평 그늘진 언덕 아래 움막 짓고 한 무산아동의 시중을 받으며 사셨다지요.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처럼. 그러다가 6.25 그 비극의 전쟁 중에 영원히 사라지셨고.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사셨더라면, 아주 평범한 가정의 가장으로 그 누구보다 편안한 삶을 누리셨을 텐데, 모든 호조건들을 다 포기하고 오로지 해방된 조국, 공평한 세상을 위해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하셨던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지 않으셨습니까, 아저씨!

   아저씨는 1915년 11월 초하루, 경기도 화성군 일왕면 송죽리 408번지(지금은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408번지)에서 꽤나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느 집 어느 가정보다 더한 행복함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뒤, 아저씨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서울 경복중학교로 유학 가십니다.
   졸업 뒤 오랫동안 교원생활을 하셨다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갑자기가 아니라 오랜 기간 생각의 생각 끝이겠지만) 중국 천진으로 건너가 노동계에 투신하십니다. 그 때가 1940년 봄이었으니까, 일제의 폭압이 극으로 치닫고 있을 때지요. 그러나 병을 얻어 그곳에서의 짧은 활동을 접고 맙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뒷일로 짐작하건대 빈부귀천의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셨던 그 꿈의 첫발을 그곳에서 실천해 옮기기 위해 가신 길이 아니었나 보입니다.

   어쨌든 그해 겨울 고향땅으로 돌아오신 아저씨는 다음해인 1941년 최용범 선생님 등과 함께 양축업을 공동경영하며 무산아동들을 수용해, 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펼치는 동시에 수원 팔달산, 연무대, 그리고 멀리 함안, 당진 등지에서 국내 및 만주와 동경의 독립운동단체와 연계해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실현을 위한 회합과 비밀결사운동을 하셨던 것으로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이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에게 올리는 보고문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집안 내에서의 그 붉은 편견은 바로 이즈음 공산화의 실천에 관한 혐의로 자주 체포, 조사받은 사실에 의한 것이 아니었는지요. 더구나 그 무렵부터 아저씨의 부모님은 물론 형제들, 그리고 친척들까지도 아저씨를 버린 자식으로, 완전 기피인물로 취급했다니까, 남 다른 그 고초를 어떻게 감내하셨습니까? 

   앞서 언급했듯이 1941년 경기도 경찰부장이 경성지방법원에 올린 문서에는 「조선독립을 기도하는 불온계획사건」 외에 용헌식, 최용범, 차준철, 김길준, 맹승재, 강성문, 홍순철 선생님이 함께 참여하신 「불경죄와 조언비어(造言蜚語)사건」 및 「조선인차별대우 및 치안유지법위반」등의 죄목이 나열되어 있는데, 결국 1942년 7월 27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치안유지법위반」죄를 적용받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셨지요.
   출감하신 뒤, 수원지역을 중심으로 벽보(대자보)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시다 해방을 맞이하는데, 그 후 말년의 삶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기록에 의한 것보다 풍문에 의한 것이 대부분으로 비참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저씨, 지금 어디에 말없이 누워계십니까? 그 한 많은 삶을 간직하신 채.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우신 그 뜻이 반쪽짜리 조국, 불공평한 세상이 아닌 것을 알면서 걱정 말고 편히 쉬시라고 쉽게 말씀드릴 수 없음을 용서 하십시오! 아저씨, 슬퍼하지 마십시오. 뒤따르는 발길들이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끝으로, 반가우면서도 한편 안타까운 소식 전해드리면서 부끄러운 이 편지 쓰기를 끝내야겠습니다. 아저씨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던 일곱 동지들 중 맹승재(1923~1969) 선생님께 2006년 독립유공자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2011년 4월 13일

   못난 조카 용환신 올림




 용환신
 

 
  1949년 수원에서 태어남. 서울대 농과대학 졸업
  한국작가회의, 한국문학평화포럼 이사
  시집으로 「우리 다시 시작해 가자」, 「겨울꽃」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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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8 19:20 2011/04/1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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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쉰 두 번째 편지 - 2011년 4월 5일        

100년 편지

오광심 선생님께      -박지희-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연천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이제 막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새내기 교사 박지희입니다. 우연히 글을 통해 선생님을 뵙고,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어 이렇게 짧은 편지글을 올립니다.

▲ 오광심, 김학규 부부

   어려운 시기에 여자의 몸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선생님은 같은 여자이자 교사인 저에게 큰 감동을 주셨습니다. 불과 20세의 나이에 민족교육에 전념하시다 독립운동에 투신하신 선생님의 숭고한 결심은 지금의 저를 한없이 작아지게 합니다. 조국의 소중함을 잊은 채, 일상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제가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오광심 선생님께서 아이들이 가득한 허름한 교실 한 편에서 아이들에게 민족과 헌신, 그리고 바른 역사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또렷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씀 하나 하나에 귀 기울이며 조국 광복의 꿈을 키워갔겠지요.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길은 아마 아이들의 꿈이자, 동시에 모두의 소망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내 아이들에게 민족 교육을 하는 '나'를 상상해 봅니다. 선생님께서 감내하셔야했던 그 시대 속으로 잠시 돌아가 생각해보면, 과연 나는 내 아이들에게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라고 가르칠 수 있을 까 고민이 됩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것과 자신의 신체를 보전하는 것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하는 것을 가르쳐야한다면, 저는 선뜻 내 아이들에게 조국의 광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 아이들만은 잘 살기 바라는 어쩔 수 없는 욕심 때문이겠지요. 민족을 위한 길은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이들의 평안과 민족의 해방이라는 큰 갈림길에서 선생님께서는 수많은 밤을 얼마나 하얗게 지새워야 했을까요. 하지만 결국 선생님의 결심은 아이들의 평안과 민족의 해방이 결코 분리된 길이 아닌 '한 길'이었음을 간파하신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천안함 용사들이 산화한지 1주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대한의 젊은이들이 조국수호의 사명을 다하다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단순히 조국을 지킨 용사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민족에 대한 우리의 특별한 정신 - 즉, 잊혀져가는 민족정신을 다시 일깨우는 고귀한 희생이었습니다. 혼탁하고 각박한 세상이지만, 선생님 시절의 독립운동의 명맥이 후손들의 마음속에서도 ‘희생’과 ‘민족정신’으로 남아 혈관 속 깊이 흐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행사 차 국립현충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무명용사의 묘비 앞에 묵념을 하며,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이 있었기에, 지금의 평안(平安)이 있는 것이라고...

   짧은 묵념이 끝나고, 제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사로 서서, 앞으로 아이들에게 바른 역사와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겠습니다. 민족의 얼을 생각하게 하겠습니다. 시대의 정치 파벌에 따라 잦게 변하는 교육과정으로 연표식 역사 교육도 이제는 쉽지가 않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겠습니다.

   민족교육을 위해 힘쓰셨던 오광심 선생님!

   이제는 이 후배가 미약하나마 선생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먼 곳에서 든든하게 응원해 주세요.

   존경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연천의 작은 학교에서 박지희 올림



 박지희
 

 
제6기 독립정신답사단원
  現 궁평초등학교 교사

  오광심(吳光心 1910~1976)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던 해인 1910년 3월 15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신부면(新府面) 용건동(龍建洞)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선생은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이주하였다. 남만주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에 있는 화흥중학(化興中學) 부설 사범과에 입학하였다. 화흥학교는 1927년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 의해 설립된 학교로 학생들에게 철저한 민족주의교육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 학교에서 남다른 민족의식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남만주에서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혁명사령부에서 근무했다. 김학규가 유동열(柳東說)·최동오(崔東旿)와 함께 조선혁명당 대표로 난징[南京]에 갈 때 동행했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5당 통일로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립되자 부녀부차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김정숙(金貞淑)·조순옥(趙順玉) 등과 함께 여군으로 한국광복군 창립식에 참여했으며, 11월에 시안[西安]에 본부가 설치되자 총사령부에 소속되어 복무했다. 그 뒤 광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와 함께 광복군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1944년 광복군 초모공작이 전개되자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을 통해 여성들의 광복군 참여를 촉구했다.

   8·15해방 후에도 중국에 머물면서 1947년 선양[瀋陽]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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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4 17:11 2011/04/0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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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쉰 번째 편지 - 2011년 3월 22일        

100년 편지
 

나의 소원을 언제 이루려나? -박인배-


기자 : 안녕하세요, 백범선생님. 인터넷 블로그 기자 박인배입니다.

백범 : 반갑소. 블로그 기자 인터뷰는 처음이외다.

▲ 김구 선생과 나의 소원

기자 : 그동안 언론 환경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누구나 기사를 쓸 수 있고, 그 글을 읽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면 곧 바로 널리 퍼지게 됩니다.

백범 : 내가 바라마지 않았던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백 퍼센트)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가 하루 빨리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가 생깁니다.


기자
: 요즈음 우리나라 정치에 가장 바라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백범 : 나의 소원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기자 : 어떤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에 대한 주장은 지금과 같은 세계화의 시대에 별로 설득력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백범 : 근래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고 하니,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 할밖에.


기자 : 세계무역이 공정하지 못하게 이루어지는 사례들이 많기는 하지만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국경을 넘어서 확대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백범 :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요.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 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자 : 그 완전한 자주독립에는 예전에 주장하신 바와 마찬가지로 통일된 민족국가가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까?

백범 : 예전이나 지금이나. 철학도 변하고 정치 ?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지만 민족의 혈통은 영구합니다. 일찍이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서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게 됩니다.


기자 : 쏘련이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학설로 여러 민족이 합친 나라를 만들었지만 백 년도 못가서 각기 원래의 민족국가로 돌아갈 것을 예견하셨다고도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남북분단도 위와 같이 전망할 수 있겠습니까?

백범 :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기자 : 마지막 질문 하나 드리고 끝맺겠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셨으니 전직 대통령님에 해당하시는데요, 차기 대통령 후보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은요?

백범 :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는 것이외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의 국민을 움직여야 합니다.



  박인배

   공연연출가.
   1999년 백범서거 50주기 특별공연 "못다한 사랑 - 백범김구" 연출.

   김구(金九, 1876. 8. 29. ~ 1949. 6. 26.)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백범일지〉가 있다.

※ 위 글에서 백범의 대사는 『백범일지』하권 마지막 장 「나의 소원」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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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17:50 2011/03/2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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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마흔 세 번째 편지 - 2011년 2월 1일        

100년 편지
 

독립을 염원하신 김혁 조부님께 -김진모-


   김혁 조부님은 조선조 중기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증시조 김원립 선생의 11대손으로 대한제국 육군정위로 근무하다 1907년 군대해산 후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구국운동을 모색하였습니다.

▲ 김 혁 선생

   그러던 중 1910년, 강제 합방되자 대종교에 입문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국내 및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 한 후 만주지역으로 40세 중반에 단신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조부의 항일 투쟁은 젊은 혁명 투사를 양성하고 동포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학교를 설립하여 동포들에게 조국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고 1925년 북만주 독립운동단체를 총괄하는 신민부가 조직되자 최고책임자인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때에 조부는 나이와 격식을 타파하고 젊은 운동가들과도 깊은 유대를 가졌습니다.

   당시 신민부의 젊은 혁명가 였던 이강훈(전 광복회장)에게 '금후에는 혁명대열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 하고 물었고 이강훈이 ‘직접행동으로 적괴를 무찌르고 세상에 큰 충격을 줄만한 기회를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조부는 ‘젊은 혁명가로서 당연한 포석일 것이나 군은 교육자로서 많은 혁명투사를 배출시키고 마지막에 지금 말한 직접행동을 실천하도록 의지를 굳히고 있음이 어떤가?’하면서 그 자리에서 그에게 '청뢰靑雷'(청구반도의 우뢰 또는 청천백일하의 우뢰라는 뜻)라는 호를 지어 주었습니다.

   이같이 조부는 혁명투사 양성과 동포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928년 1월 일본순사와 만주순사의 습격으로 신민부 최고 책임자인 조부를 포함한 간부 12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되어 유치장에 있을 때 애국청년한명이 체포되어 자신의 감방에 들어오게 되자 조부는 일본 경찰을 불러 '내가 아무리 붙잡혀 감금되어 있는 몸일지언정 애국지사도 아닌 청년과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천둥같이 꾸짖으니 일본경찰이 이 말을 곧이듣고 다시 조사한 후 며칠 후에 그를 석방시켰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조부의 부하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1929년 6월 검사구형보다 높은10년 형을 판결받고 신의주 평양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병환이 위독하여 1936년 가석방되었습니다.

   만주벌판에서 풍찬 노숙과 일제의 악형으로 건강을 잃은 조부는 1939년 4월 항일투쟁 30년 국권회복의 한을 남긴 채 순국하였습니다.

   조부님의 구국정신을 본받아 임시정부100년이 되는 2019년 안에는 조국이 통일되어 부국강국이 되어 있는 소식을 올리겠습니다.  

   손자 김진모 올림




  김진모



  유형섬유 대표, 김혁 선생 손

김혁 [權泰錫, 1875. 10. 6~1939. 8. 23 ]

   대한제국 육군정위(正尉)로 근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항일 투쟁을 결심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했다. 흥업단 부단장으로 활동했으며, 북로군정서에 참가하여 대일 항쟁에 전념했다. 1925년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했고, 성동사관학교의 교장에 임명되어 신민부 군인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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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15:33 2011/01/3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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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마흔 한 번째 편지 - 2011년 1월 18일        

100년 편지
 

벽초(碧初) 선생님께 -신복룡-


   먼저 양해의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후학이 선학(先學)을 호칭할 때 호(號)를 쓰지 않는 것이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홍명희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벽초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한때 선생님의 함자(銜字)를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반공법에 저촉되던 어두운 시절이 있었고, 그래서 감히 함자를 쓰지 못하고, 아는 사람들끼리만 알도록 “벽초”라는 호를 쓰던 시절이 있었기에 거기에 익숙했던 탓으로 저도 그냥 벽초 선생님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 벽초 홍명희

   저는 스스로 좌우익의 논쟁의 어느 편에 설 입장도 아니고 또 그렇게 강단(剛斷)있게 살 용기도 없습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분위기가 우익적인 우리 사회에서 이제까지 모든 필자들이 우파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 칼럼을 써오던 관례를 벗어나서, 북한 부수상까지 지낸 분을 주제로 쓴다는 것이 그리 마음 편한 것은 아니지만, 임시정부기념사업회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저는 고심하다가 벽초 선생님께 편지를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왜 빨갱이에게 ‘선생님’의 칭호를 쓰느냐?”고 항의하지나 않을까 하는 착잡한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먼저 사사로운 고백의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충북 괴산 출신으로서 선생님께서 사시던 곳과 아래 윗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어려서부터 옛날 어른 중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그리고 현대사의 인물로는 벽초 선생님의 얘기를 전설처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3.1운동 때는 누구의 독립선언서가 마음에 차지 않아 괴산에 내려오셔서 독립선언서를 직접 지어 돌렸다는 얘기며, 왜놈들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자제분인 홍기문(洪起文) 선생을 직접 가르쳤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낙질(落帙)된 [임꺽정전]을 몰래 빌려 읽으면서, 괴산 지방에서만 쓰는 사투리의 문체에 가슴 찡한 추억도 있었습니다.

   그 후 재주도 없이 대학에 남아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저는 선생님의 기록을 접하게 되었고, 남다른 감회와 함께, “책상물림 사학”이 아닌 “현장 사학”을 바탕으로 선생님의 행적을 글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해방정국에서의 선생님의 활동을 설명하면서, 당시 대부분의 좌파들은 순수한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고, 특히 선생님께서 1948년 4월에 월북하여 북한에 잔류한 사실에 대해서는 그것이 이념에 따른 선택이었다기보다는 혈육, 즉 이미 맑시스트가 되어 먼저 북한에 가 있던 아들과 따님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고 해석함으로써 학회의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와 같은 해석을 한 것은 선생님의 이념적 확신을 과소평가하고자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선생님께서 순수한 공산주의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선생님은 아들과 15살 차이로서 형제처럼 지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명문의 양반 댁에서 자제분과 맞담배를 피웠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민족주의자였던 선생님께서는 맑시스트였던 아드님과 이념 논쟁을 많이 하셨다더군요. 그런데 한창 논쟁이 무르익을 무렵이면 자제분인 홍기문 선생이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논쟁의 맥이 끊어지는 일이 빈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드님이 논쟁을 하다가 말고 왜 밖으로 나가는가를 알아 봤더니 논쟁에 과열되어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고, 그것을 알고 선생님께서 논쟁할 때는 담배를 피워도 좋다고 허락하셔서 결국은 그토록 대단한 양반 가문에서 부자가 맞담배를 피웠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선생님께서 평양에 가셨다가 그곳에 남으신 것은 혈육의 정 때문이었으리라는 저의 해석은 학계에서 작은 논쟁이 되었고, 언제인가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이정식(李庭植) 교수님께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수긍하시더군요. 제가 이런 논리를 편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즉 해방 정국에서 소위 좌파라는 지도자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이미 대부분 북한으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을 포함하여 허헌(許憲), 박헌영(朴憲永), 여운형(呂運亨)--, 이 분들의 아내와 자녀가 대부분 북한에 가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나는 죽어도 가족은 살리겠다는 뜻이었을까요? 나도 곧 올라갈 터이니 가족이 먼저가 있으라는 뜻이었을까요? 아니면 인질이었을까요? 저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떤 이념도 혈육을 뛰어넘지는 못했다고...

▲ 벽초 홍명희 생가

   가끔 명절에 고향에 가면 저는 제월리(霽月里)의 선생님의 유택을 찾아봅니다. 구거(舊居)의 뒷뜰에 있는 선영(先塋)들은 잘 보존되어 있고, 집에는 종손되는 분이 사는데, 본채만 남아 있고,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 국군이 북진하면서 남은 식솔(머슴과 하인, 그리고 족친)들이 죽거나 박해를 받은 후로부터 고향 사람들의 입에서 생님에 대한 얘기가 금기로 되어버린 후 이제 젊은이들은 모르는 얘기가 되었지만 괴산 사람들은 이념의 선악이나 호오(好惡)를 떠나 선생님에 대하 회상을 많이 합니다. 부덕한 얘기가 되어 비교가 송구스럽습니다만, 이기붕(李起鵬) 씨가 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괴산 사람들은 “남북한 부통령이 모두 괴산 사람이군...” 하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 괴산의 수안보에 북한의 남조선전투지휘부가 설치되어 있었을 때 선생님께서 괴산을 다녀가셨다는 얘기를 어른들께서 두런두런 말씀하시던 것을 잠결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즐겨 찾으시던 짚 앞 제월대(霽月臺)의 풍광은 여전한데, 느티울(槐灘)의 물은 많이 줄어 쓸쓸합니다. 그 제월대 입구에 선생님을 추모하는 후학들이 문학비를 세우면서 “빨갱이의 비석을 세울 수 없다”는 우익 단체 사람들과 오랜 실랑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작은 문학비가 서 있어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얼마 전에 성묘하러 괴산에 내려갔더니 선생님께서 사시던 인산리의 옛집자리에 한옥이 잘 복원되었는데 안내문에는 "홍명희선생의 구거"라는 말을 못하고 "한옥 마을"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며 시대의 아픔을 혼자서 쓰다듬으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 충북 괴산 제월대 앞에 세워진 벽초 홍명희 문학비

   글을 마치려니 말끝이 이어지지 않고 쓸쓸함이 가슴을 누릅니다. 이별의 아픔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통일이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 때문입니다. 요즘 중학생들에게 “반드시 통일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는 학생이 40%를 넘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나는 선생님이 한국전쟁의 개전 책임을 져야 할 입장에 있었던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때의 전쟁은 참으로 지혜롭지 못했고, 그 업장은 60년의 상처로 아직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어째야 하나? 가슴이 저려 더 글을 잇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

   복지유체 후학(伏地流涕後學) 씀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정치외교학)

홍명희 [洪命熹, 1888. 5. 23 ~ 1968. 3. 5]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독립운동가, 정치가 이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여 북한의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생존 당시 일제강점기 시대 동안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다. 호는 벽초(碧初)이다. 일생동안 소설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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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8 11:21 2011/01/1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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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서른 여덟 번째 편지 - 2010년 12월 28일        

100년 편지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님 전상서  -박도-


   왕산 허위 선생님!

▲ 왕산 허위 선생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의 즈음입니다. 저는 해방둥이로 구미 장터에서 태어난 작가‘박도’입니다. 어린 시절 저희 집 마당에서 보면 남녘으로 금오산이 빤히 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저에게 늘 금오산이 낳은 충신열사를 들려주셨습니다.

   고려 말 길재(吉再) 선생을 필두로, 사육신 하위지(河緯地),  생육신 이맹전(李孟專), 그리고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등의 훌륭한 어르신 행장을 말씀하시면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一善: 선산의 옛 지명)에 있다 한다. 그런 까닭으로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았다(朝鮮人才半在嶺南 嶺南人才半在一善 故舊多文士)”라는 이중환의《택리지》를 일러주셨습니다. 그런 탓인지 어린 시절 저는 우리 고을을‘충절과 학문의 고장’으로 알면서 대단한 긍지와 자랑으로 여겨 왔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부터 서울에서 다녔는데 철이 들면서 의문은 왜 근현대사에는 우리 고장에 충신열사가 없을까 매우 궁금했고, 친지들이 선산 구미를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으로만 알아 속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새천년을 앞둔 1999년 여름, 선생의 외손 임시정부 이상룡 국무령 증손 이항증 선생과 함께 중국 대륙에 흩어진 항일전적지 답사 길에 올랐습니다. 그때 헤이룽장 성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선생 당질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 허형식(許亨植1909-1942) 장군을 만나, 이 선생으로부터 왕산가의 빛나는 항일투쟁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한없이 기뻤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게 쥐구멍을 찾도록 부끄러웠습니다. 그 기쁨과 부끄러움이 한 평범한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현대사 탐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의롭게 사신 어르신들의 자취를 찾아 틈틈이 전국방방곡곡은 물론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등지를 누비면서 <사진으로 보는 한국독립운동사>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영웅 안중근> <일제강점기> 등 항일유적답사기와 현대사 사진집들을 펴냈습니다. 부족한 제가 감히 이러한 책을 펴낼 수 있었던 그 원천은 고향 어르신 왕산 선생님을 만난 덕분입니다.

2009년 9월 28일 왕산기념관 개관식 당시 필자가 찍은 사진.

   이 글월 마무리로 사진 한 장을 바칩니다. 제가 1999년 중국에서 돌아온 뒤 선생의 생가에 가보니까 폐허였습니다. 당시 김관용 구미시장에게 독립운동가문을 이렇게 대접할 수가 있느냐고 항의 글을 보냈더니 곧 왕산기념관을 짓겠다는 회답을 보내왔습니다. 2009년 9월 28일 마침내 선생의 생가는‘왕산공원’이 되고, 생가 건너편 기슭에 왕산기념관이 준공되었습니다. 이날을 맞아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진 선생의 후손들이‘100년 만에 귀향’을 하여 단상에서 소개될 때 제가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모두 선생의 핏줄을 이은 친손과 외손들입니다. 후손 모두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어 좌우 두 분씩만 소개합니다. 왼편 첫째가 선생의 장손‘경성’입니다. 다음이 손녀‘로자’입니다. 지금 우즈베키스탄에서 사는데 여태 처녀랍니다. 맨 오른편은 증손‘윤’이고, 그 다음이 현손‘홍’인데, 지금 막 군에서 제대하여 서울대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날 미국에 사는‘도성’손자는 가족들 소개한다고 마이크를 잡았기에 보이지 않습니다.

  
천하의 왕산 후손이 ‘게오르기’, ‘블라디슬라브’, ‘나타샤’, ‘따마라’, ‘슈라’가 되고, 장차‘벤허’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허도성 선생의 말씀에 웃음보다는 눈물이 왈칵했습니다. 경술국치 100년이 지난 조국은 아직도 국토가 분단된 채, 한 세기 전과는 또 다른 아픔에 남북 겨레들이 살고 있습니다. 다음‘100년 편지’는 조국 통일 소식과 선생의 후손들이 고국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는 얘기를 후손 누군가가 선생께 띄웠으면 좋겠습니다.

   왕산 선생님! 하늘에서 불쌍한 이 겨레들을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2010년 12월 24일.

   박도 올림


  박  도


  1945년 경북 구미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오산중,  중동고, 이대부고에서 33년간 교직에 있었으며,
  한국작가회 회원. <항일유적답사기>,<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영웅 안중근> 등의 작품이 있다.

허 위 [許蔿, 1854. 4. 1~1908. 9. 27]

   한말의 의병장.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거의(擧義)명령을 받고 의병을 모집, 수 차례 일본군을 격파했다. 의병대장들의 모임을 열고 이인영을 원수부 13도의병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군사장으로 일거에 서울에 진입, 일본군과 대치, 격전을 벌였다.
1908년 6월 11일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고 경기도 영평(永平)에서 체포되어 그 해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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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9 12:46 2010/12/29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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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서른 일곱 번째 편지 - 2010년 12월 21일        

100년 편지

단재(丹齋) 선생님께 올립니다.  -양진호-



   어젯밤 꿈속에서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캄캄한 밤, 눈보라치는 벌판에서 흰 저고리를 입고 단아 하면서도 결기에 찬 모습으로 눈보라를 헤치고 걸어오시는 모습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눈빛은 흰 눈보다 더 빛나고 있었고 오산학교에서의 침묵 강연이 오버랩 되면서 꿈에서 깨었습니다. 선생님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丹齋 신채호 선생

   당신께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배움을 써야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성균관 박사로서 얻을 수 있는 벼슬을 내던지고 찢기고 찢겨 누더기가 된 산하와 일제에 고통받는 민족을 구하고자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고 오직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만이 조국 광복과 나아가 한민족이 인류 평화의 주체세력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시고, 광활한 만주 벌판을 말달리던 선조들의 모습을 살려내어 사대에 찌든 거짓 역사의 장막을 찢어 버리고 우리가 자랑스러운 배달겨레의 자손임을 일깨워 주신 참된 역사가요, 언론인이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께서 가신지 어언 70여년이 지난 지금,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아직까지도 역사를 제대로 찾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으며 지금의 현실은 100년 전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에서 나와 하나로 돌아간다는 우리의 천부경 사상, 사람뿐만이 아니라 세상만물 모두를 이롭게 하자는 그 찬란했던 고조선의 홍익정신이 썩어빠진 사대주의자,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맥이 끊긴 지금 민족은 민족대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종교는 종교대로 이념은 이념대로 사상은 사상대로 서로 갈라지고 찢어져 단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정신은 퇴색되어지고 오직 돈만 아는 무서운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땅은 광복이 되었다하나 우리 스스로가 누구의 자손인지 누가 우리의 국조인지도 모른체 아직까지도 제 정신이 아닌 노예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조상님들 뵙기가 너무 두렵습니다.

   이에, 선생님께 다짐합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은 새들의 길이 있고,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은 물고기들의 길이 있듯이 인간은 인간의 길이 있습니다.

   저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바른 길을 가겠습니다. 당신께서 그토록 염원 하셨던 우리의 바른 역사를 전하여 민족혼을 깨우고 이 땅에 다시는 나라 잃은 설움,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런 단군의 자손으로서 지구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홍익인간이 되겠습니다.

   바른 역사의 깨침을 주신 선생님께 영원한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단기 4343년 11월 30일
 
   후손 양 진호 올림





  양 진 호


  우리은행 연세세브란스 지점 차장.

신채호(申采浩, 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 사학자이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견해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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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1 16:05 2010/12/2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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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서른 여섯 번째 편지 - 2010년 12월 14일        

100년 편지

백범 김구 선생님  -이종호-


   백범 김구 선생님.

   <독립정신 답사단> 제1차(2005년) 및 제6차(2010년)에 참가하였던 이종호입니다.

▲  경교장 앞에서 김구 선생이 둘째 아들 신과
손녀 효자와 함께 찍은 사진(1948년)

   상해부터 1945년 8월 당시 임정 본부였던 중경까지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임정 요인들이 그야말로 극심한 고초와 불편을 겪으면서도 조선의 해방이란 한 가지 일념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해방 직후부터 남북이 갈라진 상태가 현금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아마도 예상치 못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백범 선생님이 더욱 놀라실 것은 친일파 청산이 2010년이 된 상금까지도 마무리되지 않아 이들 처리를 놓고 계속 응어리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독일의 나치 통치를 겪었던 유럽의 각 국에서는 한국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독일에 점령되었던 각 국이 독일의 치하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치 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처리했습니다.
   더구나 가해국인 독일조차도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 등을 통해 나치지도부를 숙청했습니다. 서독이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서방국의 대열에 성공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도 각 국에 큰 피해를 준 나치전범을 철저히 사법 처리하여 후유증을 최소한으로 줄였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나치부역자 청산에 대해 말씀드리면 영국에서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이끌던 드골은 1944년 8월 25일 폰 콜티츠 독일군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자 개선장군으로 입성한 후 나치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정리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의 반역자, 나치협력자들의 숙청방침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나치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腫瘍)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드골의 주장은 매우 단순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나치협력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이 만든 썩은 종양들이 종국에는 나라를 모두 부패시켜 프랑스를 망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드골은 초반부에 유명 언론인과 지식인들, 그리고 비시 정권의 최고지도부를 심판해 가혹할 정도로 엄벌을 내린 후 비시정권 공직자들, 지방공무원들, 사법부와 군부, 교육계와 경제계, 출판인과 연극인 및 영화계, 미술계, 석학집단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나치협력자들을 차례로 숙청했습니다. 이와 같이 철저하게 나치부역자들을 숙청했는데 프랑스의 숙청 논리는 다음 말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나치전체주의에 ’민족의 혼과 정신‘을 팔아먹은 민족반역자는 프랑스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나 마찬가지다.’

   드골은 프랑스를 팔아먹은 사람은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프랑스는 매국노가 아닌 프랑스인에 의해서 건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프랑스점령기간 동안에 프랑스를 위해 싸운 레지스탕스들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보상과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점이 바로 프랑스가 해방된 후 다른 나라와 같이 좌파와 우파가 분리되었음에도 극심한 혼란을 겪지 않고 국민 전체가 나치협력자 색출과 조국 건설에 앞장 설 수 있게 된 요인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합니다.

   한국에서 프랑스처럼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프랑스와 한국의 상황이 똑같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는 친일부역자의 청산 방법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차후에 이런 상황이 또 다시 벌어졌을 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나치부역자 청산은 귀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00년을 맞이하여 백범 선생님이 돌아오실 때 이런 어정쩡한 상황이 어떤 방법으로든 말끔하게 해결되어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편지를 드립니다.

   이종호 드림




 이 종 호


 
한국과학기술원(KIST) 박사.

김구(金九, 1876. 8. 29. ~ 1949. 6. 26.)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백범일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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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6 15:52 2010/12/1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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