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마흔 다섯 번째 편지 - 2011년 2월 15일        

100년 편지
 

나는 항일투쟁에 목숨 바친 윤세주(尹世胄)다 -유종현-


   나는 1901년 밀양에서 태어났다. 내가 18세 때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우리는 나라를 잃어버린 비통한 운명 앞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 없었다. 1919년 3월 1일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서 일제히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 석정 윤세주 선생

   그 무렵 나는 고향친척 연배인 윤치형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서 만세운동에 직접 가담하여 독립선언문을 구해들고 급히 고향 밀양으로 달려왔다. 3월 13일 밀양장날을 기해 은사이신 전홍표선생과 황상규선생의 지도아래, 19명의 동지들이 앞장서서 1천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이 주동자를 체포함에 나는 만주 연변으로 망명하였다.

   나는 궐석재판으로 1년6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된 채 그해 11월
길림성에 이르렀다. 먼저 이곳으로 망명한 고향 동지 약산 김원봉 등과 만나, 독립투사를 양성하는 신흥군관학교에 다니면서 항일투쟁의 결의를 굳게 가다듬었다. 우리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폭력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실제행동에 나섰다.

   의열단의 첫 임무는 다음 해인 1920년 6월 동지 15명이 국내로 잠입하여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과 밀양을 비롯하여 주요도시의 경찰서 등 주요기관을 폭파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불행이도 사전에 발각되어 전원이 미수범으로 체포되었다. 나는 재판결과 7년형이 언도되었고, 지난 날 밀양 만세사건 주동으로 궐석재판으로 징역형 1년6개월을 가산하여 긴 세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나는 투옥 된지 6년 7개월이 지난 1927년 2월에 출감하였다. 그 후 고향에서 밀양신문사 사장으로 있으면서는 이시기에 서울에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의 밀양지회의 총무간사를 맡는 등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에 열중하였다.

   내가 다시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 것은 1932년이었다. 일단 남경으로 가서 약산 김원봉과 만나 의열단에 합류하였다. 또다시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수료 후에는 그 학교의 교관으로 봉사하였다. 당시 임시정부 산하의 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조직을 통합하기 위하여 1935년 남경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였으며 나는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16명)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한편 1938년에는 무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군이 중국대륙 깊숙이 쳐들어왔을 때 중국정부는 중경으로 이전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중경으로 이동함에 따라 조선의용대 역시 본거지를 중경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무한에서 창설된 조선의용군은 중국의 국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항일투쟁의 연합전선을 펴나갔다. 조선의용대는 회북지대를 편성, 중국 팔로군에 합류하여 일본군과 맞싸우기로 하여 1941년 중경을 떠났다. 나는 화북지대 제3지대를 인솔하였으며 먼저 출발한 제1지대와 제2지대를 뒤따라 황하 맹진나루터를 건너 장장 4개월의 행군으로 팔로군의 총사령부가 있는 태항산(太行山)으로 이동하였다. 나는 여기서 조선의용대가 일본군 및 화북지방 거주 10만명의 우리동포를 대상으로 라디오 방송과 선전 전단 살포 등 후방심리전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일역을 맡았으며, 한편 후진 양성을 위해 조직한 ‘화북조선청년간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

   일본군은 1942년초부터 팔로군을 소탕하기위해 태항산을 총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팔로군과 조선의용대는 이에 대항하는 소위 ‘반소탕작전’으로 맞싸우게 되었다. 그해 5월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左權) 장군과 더불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942년 5월 27일었다. 조선의용대도 함께 공격을 받아 전사자가 속출하였고 내가 인솔하던 소대는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결국 나와 진광화 동지가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나는 중경을 출발할 때 조선의용대가 태항산을 넘어 더 나아가 만주와 한반도까지 동진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조국의 독립을 기어코 되찾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국광복 3년을 앞두고 40대초반의 젊은 나이에 한 맺힌 생을 먼 이국땅에서 마감하였다. 내 유해는 좌권장군의 묘소와 함께 지금도 중국 하북성 한단시에 있는 진기로예열사능원에
묻혀있다.

  
7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나라는 광복과 독립을 되찾아 눈부신 발전을 하여 이제 세계의 중심국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중국과도 국교를 재개한지 20년이 지나면서 한중 양국의 우호협력관계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를 하늘나라에서 보고 있는 나는 대단히 만족하며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보람을 느낀다. 앞으로도 계속 무궁한 발전을 거듭하여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힘을 합쳐 나가자.



 
유종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외교부에 입부하여 주 니제르대사, 주 세네갈 
  대사, 주 일본국요코하마 총영사를 역임했다. 현재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이며, (사)석정윤세주열사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윤세주 [尹世胄, 1901.6.24~1942.6.3]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밀양에서의 3.1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신문밀양지국을 운영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중국 지린[]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김원봉()·황상규()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고, 1920년 황상규 등과 함께 총독부 및 주요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국내로 폭탄을 들여오다가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 다시 난징[]으로 망명,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면서 1938년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조직, 1942년 화북 타이항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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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4 12:05 2011/02/1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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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아홉 번째 편지 - 2011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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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께 올리는 편지 -임동석-



   2011년 새해 대한민국의 날씨는 매우 차갑습니다.

   장군님. 장군님이 계시던 1920년의 만주는 여기보다 더 추우셨겠죠?

▲ 홍범도 장군

   장군님께서 대한민국에 계셨다면 그렇게 춥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아니 만주에 계시더라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보셨다면 따뜻하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장군님께서 독립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신지 100여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장군님께서 일생을 바쳐서 독립운동을 해주신 덕분에 너무나 편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중국 유학시절, 우연히 독립군에 관한 유적지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에서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봐야함에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고, 내 나라가 아닌 외국에서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운 우리의 조상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날 듯 했습니다. 또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았던 수많은 독립군 용사들에게 절로 감사함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다 보니 2000만 대한민국의 국민들의 삶의 무게를 다 짊어지고 독립투쟁을 하셨을 장군님 모습에 제 가슴이 벅차올라 뜨거워집니다.

   장군님.

   조국의 산하가 아닌 외국에서 수많은 일제의 군사들과 맞닥드리고, 그들의 총칼아래 우리의 청년들이 죽어갈 때 얼마나 두려우셨습니까?

   죽음보다 더 깊은 두려움을 이겨내시고 장군님께서는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온몸을 불살라 우리나라의 이름을 일제 앞에 드높여 주셨습니다. 장군님과 많은 무명의 독립군의 노력에 우리는 1945년 독립을 할 수 있었지만 장군님께서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우리나라가 아닌 타국에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눈 감으시는 그 순간까지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원하셨을 장군님의 모습에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집니다.

   장군님과 많은 독립군의 노력을 알기에 항상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는 모습에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럽습니다.

   장군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행복과 평화를 더 많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제 개인이 더욱 노력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평생을 밟고자 했던 이곳 대한민국.

   우리 후손들이 더 행복하게 아름답게 가꾸어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천도(天道)가 순환하고 민심이 응합하야, 아(我) 대한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후 상(上)으로 임시정부가 유하야 군국대사를 주하며, 하(下)로 민중이 단결하야 만세를 제창할 새 어시호 (於是乎) 아(我)의 공전절후(空前絶後)한 독립군이 출동되엿도다. (중략)

   당당한 독립군으로 신(身)을 탄연포우(彈煙砲雨) 중에 투하야 반만년 역사를 광영케 하며, 국토를 회복하야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라.”

   대한독립군 대장님으로 계실 때 이런 유고문을 말씀하셨었죠?

  선생님 말씀 가슴에 새기고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자랑으로 알며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동석



  (주) 멕그로우 컨설팅 근무

홍범도 [洪範圖, 1868~1943.10.25]

   한말의 독립운동가. 만주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군이 되어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 최대의 승전을 기록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그 후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가 되었으며,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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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4 11:46 2011/01/0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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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일곱 번째 편지 - 2010년 12월 21일        

100년 편지

단재(丹齋) 선생님께 올립니다.  -양진호-



   어젯밤 꿈속에서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캄캄한 밤, 눈보라치는 벌판에서 흰 저고리를 입고 단아 하면서도 결기에 찬 모습으로 눈보라를 헤치고 걸어오시는 모습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눈빛은 흰 눈보다 더 빛나고 있었고 오산학교에서의 침묵 강연이 오버랩 되면서 꿈에서 깨었습니다. 선생님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丹齋 신채호 선생

   당신께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배움을 써야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성균관 박사로서 얻을 수 있는 벼슬을 내던지고 찢기고 찢겨 누더기가 된 산하와 일제에 고통받는 민족을 구하고자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고 오직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만이 조국 광복과 나아가 한민족이 인류 평화의 주체세력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시고, 광활한 만주 벌판을 말달리던 선조들의 모습을 살려내어 사대에 찌든 거짓 역사의 장막을 찢어 버리고 우리가 자랑스러운 배달겨레의 자손임을 일깨워 주신 참된 역사가요, 언론인이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께서 가신지 어언 70여년이 지난 지금,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아직까지도 역사를 제대로 찾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으며 지금의 현실은 100년 전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에서 나와 하나로 돌아간다는 우리의 천부경 사상, 사람뿐만이 아니라 세상만물 모두를 이롭게 하자는 그 찬란했던 고조선의 홍익정신이 썩어빠진 사대주의자,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맥이 끊긴 지금 민족은 민족대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종교는 종교대로 이념은 이념대로 사상은 사상대로 서로 갈라지고 찢어져 단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정신은 퇴색되어지고 오직 돈만 아는 무서운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땅은 광복이 되었다하나 우리 스스로가 누구의 자손인지 누가 우리의 국조인지도 모른체 아직까지도 제 정신이 아닌 노예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조상님들 뵙기가 너무 두렵습니다.

   이에, 선생님께 다짐합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은 새들의 길이 있고,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은 물고기들의 길이 있듯이 인간은 인간의 길이 있습니다.

   저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바른 길을 가겠습니다. 당신께서 그토록 염원 하셨던 우리의 바른 역사를 전하여 민족혼을 깨우고 이 땅에 다시는 나라 잃은 설움,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런 단군의 자손으로서 지구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홍익인간이 되겠습니다.

   바른 역사의 깨침을 주신 선생님께 영원한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단기 4343년 11월 30일
 
   후손 양 진호 올림





  양 진 호


  우리은행 연세세브란스 지점 차장.

신채호(申采浩, 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 사학자이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견해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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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1 16:05 2010/12/2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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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여섯 번째 편지 - 2010년 9월 28일        

100년 편지

어린이들을 잘 부탁하오  -최종호-


   그대들아.

방정환(方定煥, 1899~1931)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의 아동문화운동가이며, 사회운동가, 아동문학가이다.

   올해는 내가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쓴 지 90년이 되는 해이지만 그대들을 차마 ‘어린이’라고 부를 수 없는 내 심정부터 이해해다오. ‘어린이’라는 말은 적어도 어른의 인권만큼, 아니 그보다 더 소중히 다뤄져야 할 인권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만든 말이건만, 지금 그대들의 현실을 보니 그런 내 의도가 민망해져서 그렇다네. 그 말을 만들고 퍼뜨린 사람으로서 마땅히 느껴야 할 책임감과 자괴감을 느끼려는 것이니, 그대들을 ‘그대들’이라 부른다고 너무 뭐라 하들 말게나.

   그대들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대한제국에서 태어나 일제의 식민지에서 삶을 마감했다네. ‘인권’ 얘기를 꺼내긴 했지만 사실 내 나이가 그대들과 비슷했던 시절에는 요즘 말하는 ‘인권’ 같은 것은 없었다네. 어린 사람들은 아직 사람이 덜 된 존재로 보던 시절이었지. 그러니 그 시절을 살았던 내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가르침에 빠져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 가르침에서 말하는 ‘사람’이 어린 사람들까지 아우르는 개념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던 것뿐일세. 그리고 그래야만 그 말이 가르침으로 남는다고 생각했지.

   왜냐하면 내가 살던 당시, 말하자면 일제치하에서 가장 상처 받았던 사람들은 어린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네. 물론 어른들도 각자 크고 작은 상처들을 받았겠지만, 어른들에게는 가장 작은 상처도 어린 사람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상처로 남는 법이니까 말일세.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네. 무엇보다 독립을 이루어야겠다고. 번듯한 양복 차려입고 책상 앞에 앉아 동시 몇 줄 꺼적거린다고 찾아오는 어린이들의 세상이 아닐 바에야 독립을 위해 애쓰자고. 1919년 3월 1일 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다가 일본 순사에 잡혀 그로부터 총독부의 감시를 받기도 했지만 말이지.

   그렇게 된 것일세. 내가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동시를 쓰고, 처음으로 순수 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창간한 것도 다 일제치하를 사는 우리의 어린이들을 위해서였다네. 그 일들이 주로 문학과 관련된 일들이었던 이유는 일본의 어린이들과는 달리 우리의 어린이들에겐 그들만의 읽을거리가 없었기 때문인 것이고. 일제치하에서 짓밟힌 동심을 위로해줄, 어린이들만의 읽을거리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지. 자네들은 아직 모를 테지만 한 사람의 정서나 가치관은 대개 어린 시절에 만들어지는 법이거든. 그래서 따뜻한 정서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어른이 되기 이전의 자네들을 나라의 미래라 부르는 것이고, 나는 내가 살던 시대의 어린이들이 그러한 나라의 미래로 자라나길 바란 것이란다.

   그러나 오늘, 일제가 물러나면 어린이들의 세상이 오겠거니 했던 나의 생각은 순진한 망상이 되었고, 나라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구나. 지금 그대들은 차라리 옛날 내가 살던 시절을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일제치하에서 어린이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들의 자유를 구속했던 사람들은 일본의 못된 순사들이나 교사들, 가끔씩 시비를 걸던 일본 학생들이었지 어린이들의 부모는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대들에게 그대들의 동무를 밟고 넘어가야할 존재로 가르치고, 국영수가 아닌 그대들의 모든 관심은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 학교, 학원, 다른 학원, 또 다른 학원으로 이어지는 일정을 내밀어 그대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람들. 기록만 좋으면 선수의 인간성은 상관 안하는 코치처럼, 따뜻한 정서나 올바른 가치관 대신 성적만 따지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대들의 부모니까.

   그래서 나는 그대들을 차마 ‘어린이’라고 부르지 못하겠구나. 제 부모로부터도 인권을 보호받지 못하는 그대들을 ‘어린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한 그대들의 날인 ‘어린이날’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제 ‘어린이날’은 노동자의 권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동절이 단지 고단한 삶에 지친 노동자들이 하루 쉬는 날이 되어버린 것처럼, 국영수에 치인 고단한 그대들이 하루 쉬는 날이 되어버렸구나.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그대들, 따뜻한 정서나 올바른 가치관 대신 명문대 졸업장을 갖게 될 그대들이 만들어낼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될까. 그 세상이 끔찍할지라도 그것은 그대들의 잘못이 아니다. 명문대가 요구하는 논술을 위해 전태일의 전기를 사서 읽히지만 그대들이 전태일처럼 살기는 바라지 않는, 정신분열증을 겪고 있는 그대들의 부모와 그대들의 부모의 가르침에 동의한 모든 어른들의 잘못이다.

   “이 땅의 어린이들을 잘 부탁하오.”. 내 유언은 이미 무색해졌다. 그 유언처럼 무색해진 내가 그대들에게 말한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최종호


예비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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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9 10:55 2010/09/2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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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다섯 번째 편지 - 2010년 9월 21일        

100년 편지

두엄자리에 망국의 한을 품의신 조경환 의병장  -조세현-

[조세현 선생이 조부님께 올리는 편지]

광주광역시 서쪽에 위치한 어등산(338.4m) 전경

   어등산은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김동수, 김원국, 김원범, 김율, 김준, 박경식, 박봉석, 박용식, 박처인, 신덕균, 양상기, 양진여, 오성술, 윤영기, 이기손, 전해산, 정사천, 조경환 등 20여명의 의병장(이상 가나다순)이 전투를 벌이거나 전사한 매우 유서 깊은 곳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07년(정미년)을 기점으로 이른바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을 전개, 1909년 의병들을 무력화시키고, 이듬해인 1910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했다.

   광주광역시는 1997년 7월 ‘어등산 한말의병 활동조사 및 기념지구 조성계획’을 수립했으나 현재까지 방치되고 있다.

1895년(을미년) 왜놈 낭인들의 손에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시자 유림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창의(倡義)의 깃발아래 의병들이 봉기하는 등 이른바 을미사변이 있었으나, 왜놈들의 침략의 마수는 점점 강화되어만 갔으며,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국운은 종말을 고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05년(을사년) 왜놈들은 드디어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미명 아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그들의 속국으로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때도 역시 전국의 많은 의병들이 항거하였으나, 열악한 무기와 훈련받지 못한 의병들은 엄청난 희생자를 낼뿐 ‘속수무책’ 이었습니다.

또다시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07년(정미년) 왜놈들은 고종 황제를 협박하여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자, 의병들은 이번에도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싸움에 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이치였습니다.

특히 이 당시 왜놈들은 호남지방에 몰린 전국의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타 지역의 헌병과 경찰까지 이곳에 투입하여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펼쳐 ‘호남의 산하는 피로 물들었다’할 정도로 많은 의병들은 쓰러져만 갔습니다. 이를 서양 기자들은 ‘genocide(대학살)’라고 기술하였습니다.

저의 조부님이신 대천(大川) 조경환(曺京煥) 의병장의 순국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1909년 12월 설날을 앞두고 추위에 떠는 의병들을 일시 해산하여 구정 후 다시 규합하기로 하고, 조부께서는 막료 다수와 더불어 광주 광산군 소지면 어등산(사진) 토굴에 은신하고 있던 중 왜놈들에게 포위당하여 격전 끝에 왼쪽 가슴에 두 발의 총탄을 맞았습니다. 이때 자신의 품안에 간직하였던 의병들의 명단이 왜놈의 수중에 들어가면, 이들을 모두 찾아 참살을 할까 우려한 나머지 오른손으로 이를 꺼내어 입으로 물고 뜯다가 마침내 성냥(당시 洋火라고 일컬음)을 그어 다 태운 다음 초인적 모습으로 운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장군의 순국은 당시 시가아동(市街兒童)들에게 널리 회자(膾炙)되었다고 합니다.

조장군을 잡기 위하여 왜놈 헌병들이 992발의 총알을 소진하였다고 자신들의 보고서(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보고서')에 밝혔다고 하니, 얼마나 치열한 전투였겠습니까?

조부님의 시신은 후원군에 업혀 동네 마을의 두엄자리에 숨겨졌다고 합니다. 뒤늦게 도착한 왜놈들이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조 장군의 시신은 찾지 못하고 퇴각하자, 뜻있는 마을사람들이 시신을 인근마을 뒷산에 평장(平葬:묘의 봉분을 짓지 아니하고 평평하게 매장함)했습니다. 이후 남자 자식들은 지게를 지고 나무꾼으로 가장하여 먼발치에서 인사를 드리고, 여자 자식은 나물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역시 먼발치에서 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상 이야기 중 일부는 가족을 통해 구전(口傳)되어온 것으로 정사(正史)에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엄청난 희생이 어찌 조 장군 한 분뿐이겠습니까?

대천 조경환 의병장(왼쪽)과 부인 이동임 여사

‘독립운동’이란 이와같이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이 비참한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익히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이라는 네 글자를 놓고 반감이 교차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난 세기 50년 동안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기고, 항쟁한 50년 동안(1895~1945)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물산장려운동, 국어보급운동 등 비교적 온건한 항쟁도 있었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벌어진 의병전쟁, 독립군전쟁, 삼일만세항쟁, 6?10만세항쟁, 광주학생항쟁, 조선혁명군, 조선의용군, 광복군 등 목숨을 건 적극적인 항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칭하여 ‘독립운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할진대 과연 '독립운동'이라는 용어가 목숨을 건 항쟁을 온당히 표현하고 있는지 부끄럽습니다. 당시 나라는 탐관오리들이 들끓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지라 드디어 국권을 완전히 빼앗긴 지 무려 35년 후에 겨우 나라를 되찾았습니다만, 허리가 두동강 난 상태로 동족상잔의 가슴 아픈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할아버지의 전사로 청상과부가 되신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는 홀로 어린 자식들을 어렵게 키워 오다가 할아버지 전사하신 이후 할아버지 생가인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안동 693번지(28반)<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고 함>에서 화순군 북면 노기리 백아산 밑 깊은 산골짜기로 자식들과 같이 피신해 살아오시던 중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은 아무 죄도 없는 74세의 할머니를 무참히 살해한 이야기는 너무 끔찍하여 이를 필설로 형언하기 어렵습니다. 참으로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제가 다섯살이 되던 해, 홍역으로 크게 앓았습니다. 그때 할머니께서는 칭얼대는 저를 등에 업고 백설기 떡을 주면서 달래주시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1973년 10월 16일 저는 서울 동작동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할아버지의 묘를 이장할 때 두 분을 같이 합장하여 드리면서 영혼만이라도 해후하시길 간절히 빌었습니다.
   

선열들이시여, 이 겨레를 굽어 살피소서!

조경환 의병장의 유언과 한편의 만장(輓章)이 다음과 같이 전하여 옵니다.


- 조경환 의병장이 남긴 유서 -

天月重蒼(천월중창):하늘이 거듭 푸르고 달빛 다시 밝으리
?鬼殲賊(려귀섬적):못된 귀신 되어서라도 왜적을 섬멸하리라
不滅島夷(불멸도이):섬나라 왜놈 멸망치 않으면
惟魂不復(유혼불부):내 죽어 혼백도 돌아오지 않으리


-고광순 의병장 장례식에서 조경환 의병장이 쓴 만장(輓章)
(고광순 의병장 장례식에서)(註1)

白首丹心建義旗(백수단심건의기):흰머리 휘날리며 충성된 마음으로 의병깃발 세웠건만.
?風吹落槿花時(정풍취락근화시):홀연 부는 바람에 무궁화꽃 떨어질제.
光山有約人何去(광산유약인하거):광산모임(註2) 약속두고 그대 어딜 가셨소.
不寢燈前獨自悲(불침등전독자비):등불 앞에 잠 못들고 나홀로 슬펐네
千秋許遠復吾東(천추허원부오동):천년 전 허원 장수(註3)가 우리나라에 태어나
義鼓聲高燕谷中(의고성고연곡중):의로운 북소리가 연곡 골자기에 높았건만
國運否耶能未捷(국운부야능미첩):국운이 비색하여 능히 승전하지 못하니
西風題輓淚盈瞳(서풍제만누영동):서쪽 바람을 지고 만장을 쓸 제 눈물 만이 가득하네


(註1) 이글은 1907. 10. 16 鹿川 高光洵 義兵將이 全南 求禮郡 燕谷寺에서 倭軍과 戰鬪 中 戰死하자 수많은 儒林과 義兵들이 그를 哀悼하는 ‘輓章’을 썼는데 그 中 大川 曺京煥 義兵將이 18年 先輩 高光洵 將軍을 追慕하면서 쓴 輓章임.

(註2) “光山모임”이라함은 湖南義兵 集結地인 光山郡(現 光州廣域市 光山區) 魚登山을 지칭하는 듯함.

(註3) 唐代의 정종황제의 증손자인 장수로서 遠征길에 戰死함

(註4) 曺京煥 義兵將은 學術的으로는 華西 李恒老(1792~1868)와 勉庵 崔益鉉(1833~1906)의 衛正斥邪思想을 이어받은 勉庵의 弟子들중 數많은 學者나 義兵將들이 誕生하였으나 그중 湖南 義兵將 가운데 鹿川 高光洵 義兵將과 大川 曺京煥 義兵將 두분은 恪別한 사이었던 것으로 알려짐.



           조세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

  대천 조경환 의병장 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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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9 10:52 2010/09/2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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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열 아홉 번째 편지 - 2010년 8월 15일        

100년 편지

기노시타 쇼조와 이봉창 의사  -편집자-



 


   1932년 1월 8일 일본 육군 관병식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의 마차 앞에 수류탄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수류탄은 제대로 터지지 못했습니다. 수류탄을 던진 청년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고, 같은 해 10월 10일 아침에 처형됐습니다. 사진 속의 사람이 바로 이 청년입니다.


   청년은 조선인이었습니다. 이름은 기노시타 쇼조였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스물다섯 살에 일본으로 건너간 후부터 쓰기 시작한 이름이었습니다. 국세조사위원 등으로 일하며 잘 나가는 듯 했으나, 결국 그는 외판원, 석탄 짐꾼 등 일본 사회 밑바닥을 전전합니다. 조선을 떠나온 지 5년 만에 그는 다시 중국 상해로 떠납니다. 1년여 후 그는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이 청년을 이봉창 의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기노시타 쇼조와 이봉창 의사. 이 두 이름 사이에 청년 내면에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학자들의 연구 주제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가 뼛속부터 중무장된 독립투사가 아니라, 본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이름을 바꿔가며 일본으로 건너간 청년, 하지만 지독한 조선인 차별 앞에 분노한 청년.


   그는 자신의 이익을 좆으며, 성공하기도하고, 좌절하기도 한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를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남긴 영웅 이봉창 의사로 기억합니다. 이봉창 의사이기 이전에 '기노시타 쇼조'로서의 삶은 좀처럼 회자되지 않습니다.


   꼭 이봉창 의사뿐만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모두가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백범 김구는 한 여인의 남편이었고, 홍커우 공원에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 의사는 시를 좋아하던 학생이었습니다.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압록강을 여섯 번이나 건넜던 정정화 여사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고, 이름자도 남지 않은 숱한 독립군들은 농부였고, 목수였고, 장사꾼이었습니다.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어떤 논리로 목숨을 버려가며 조국 광복을 찾았는지 생각해 것이 광복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작은 책임은 아닐런지요.


   기노시타 쇼조와 이봉창 의사. 두 이름 사이에 어떤 뜻이 있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2010년 8월 15일

   '100年 편지를 쓰는 사람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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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7 14:21 2010/08/1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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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열 일곱 번째 편지 - 2010년 8월 3일        

100년 편지

부강하기보다는 아름다운 나라를... -김별아-

[소설가 김별아씨가 쓴 ‘후손들에게 보내온 백범의 편지’]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 백범 김구(1876.8.29~1949.6.26)

독립운동가. 정치사상가.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내가 머무르는 이곳 하늘의 집에 들어온 지도 벌써 반백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생전에 간절히 꿈꾸었던 것처럼 자유와 평등과 평화가 있고 구속과 착취와 폭력이 없는 이곳에서 나는 깨끗이 마당을 쓸고 열심히 창문을 닦는 문지기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신명을 모다 바쳤던 동지들의 영혼이 함께 있어 외롭거나 적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아름다운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집을 지상에 짓고자 했던 소망을 못다 이루고 홀연히 떠나온 것이 그대들에게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 못난 늙은이의 소망을 그대들이 꼭 실현하시리라는 것을 믿기에 안타까운 마음은 접어둡니다.

   오늘 뜰 안에서 휴지를 줍다가 문득 헤아려보니 올해가 바로 극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의 마수에 국권과 인권을 빼앗긴지 꼬박 100년이 되는 해더군요. 불평등한 강화도조약 이후 이십여 년을 야금야금 뜯어 먹히다가 마침내 합병이라는 가증스런 이름으로 호랑이 아가리에 통째로 삼켜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를 ‘썩어진 민족’이라고 자탄하는 사람들 속에서 얼마나 큰 분노와 통한을 느꼈는지요! 하지만 그대로 비탄 속에 주저앉아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찬바람이 휘부는 늦가을 밤에 뜨거운 심장을 지닌 동지들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광복전쟁을 벌일 채비를 했습니다. 아무리 길고 지난한 싸움이라도 끝끝내 포기할 수는 없다고 다짐했습니다.

   새로운 백성의 나라, 한두 영웅이 아닌 인민 전체의 나라를 만들자는 우리의 결의는 마침내 1919년 3.1 만세운동의 피와 눈물을 거름삼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우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통치에 ‘감읍’해 ‘박멸’된 줄만 알았던 민족정신이 펄떡펄떡 숨 쉬며 살아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목이 베어지고 팔이 떨어져나가고 혀가 뽑히면서도 만세를 불렀습니다. 젊은이와 늙은이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조선의 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만세의 목청을 돋웠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온전히 그것입니다. 무엇으로도 훼손시키거나 능멸할 수 없는 우리의 자존입니다.

   비록 우리 손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광복군의 참전을 준비하던 중에 일제의 항복에 의해 벼락같은 해방을 맞게 되었지만, 그리하여 국제질서를 명분으로 내세운 강대국들의 이전투구에 조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또 다른 비극을 겪게 되었지만, 나는 목숨이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가 영웅이 되고 주인이 되는 나라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가 지상을 떠나온 후 오십여 년 동안 전쟁과 독재 등 숱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후손들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그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확고부동해져만 갔습니다.

1945년 11월 23일 김포비행장을 통해 귀국하는 백범 김구. 뒤로 흐릿하게 당시 하지 미군정 사령관이 보내온 C-47 수송기가 보인다. 당시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김구 일행은 임시정부 주석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후손들이여, 나는 오직 그대들이 행복하기만을 바랍니다. 부강하기보다는 아름다운 나라, 스스로를 지키고 드높이는 동시에 남들까지도 행복하게 하는 나라를 만들 때까지 아무러한 고통이 그대들의 현실을 곤고하게 할지라도 결코 희망과 투지를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큼만 공부하고 싸우고 꿈꾸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현명함과 우둔함, 귀함과 천함, 가난함과 부유함, 강함과 약함을 다 떠나 나만큼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이자 가장 평범한 사내인 범부를 자청하였기에, 그대들 중의 어느 누구도 나보다 못할 리 없습니다. 아니, 그대들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을 더욱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후손들이여, 나는 이곳에서 항상 그대들을 지켜볼 것입니다. 그대들도 아주 가끔씩은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는 나를 기억해 주세요. 그 순간 우리는 백 년이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만나는 것입니다.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소설가 김별아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3년 실천문학에 중편소설 <힌 문 밖의 바람소리>로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미실>, <영영이별 영이별>, <백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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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3 17:27 2010/08/0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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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열 세 번째 편지 - 2010년 7월 6일        

100년 편지

약산 김원봉 선생께 -편집자-

[현재를 살아가는 대학생이 약산 김원봉 선생께 띄우는 편지]

제가 살아온 20여 년 간 남과 북이 하나였던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당시 이미 남과 북은 분단된 지 수 십 년이 지났고 여전히 남과 북은 갈라져 있습니다.

▲ 약산 김원봉

최근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악화되고 있으며, 남북의 전쟁 가능성까지 이슈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과연 남과 북이 하나의 민족이 정말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혼란스러움 속에서 문득 남과 북이 나뉘지 하나였던 시대를 살았고, 해방 공간에서 남과 북의 이념적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겪어냈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우리 역사 중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살아갔던 당신의 눈과 신념 속에서 우리의 현재를 올바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현명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역사를 선택과목으로 전환하자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 만연한 것이 우리 교육 현실이고, 당신이라는 존재는 사실상 교과서에 ‘의열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몇 줄 소개된 것이 전부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당신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 때는 당신이 그저 당당하게 일제에 맞서 총을 겨누고 그들을 처단한 멋진 민족투사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 광복 직후의 역사를 공부해 나가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당신의 발자취에서 무언가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미치도록 원하고 원하던 광복을 손에 쥐고 한반도로 귀국한 당신의 눈 앞에 펼쳐진 당시의 현실은 얼마나 실망스러웠을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당신이 남한을 떠나 북행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우리 앞에서는 새로운 현실로써 펼쳐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남과 북이 단순한 이념의 차이를 넘어, 서로 ‘다르다’는 생각, 즉 정신까지 두 동강 나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늘에서 보기에 작은 땅덩어리에 줄 하나를 그어 놓고 왕래는커녕 총 들고 맞서고만 있는 이 상황이 어떻게 보이는 지요? 우습지는 않으십니까? 당신이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 부탁하여 문서화한 <조선 혁명 선언>의 큰 테두리는 ‘민중 직접 폭력 혁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분명 빼앗긴 우리 조국을 되찾는 과정에서의 폭력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는데, 현재 우리는 왜 같은 민족끼리 각자 만의 존립을 위해 폭력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폭력이 과연 올바르고 정당한 폭력인지 참으로 의심스럽습니다.


▲ 제34차 임시의정원 위원의 모습

   사진 첫줄의 가장 오른쪽에 약산 김원봉의 모습이 보인다.

어떤 이들은 북행을 택한 당신을 그저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역사를 읽는 바른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남한에 돌아와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담했던 당신이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겪었던 그 고초는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일생을 광복에 헌신한 당신이 해방조국에서 그런 모욕을 당했으니 그 충격과 울분은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민족 해방의 입장에서 신념을 가지고 이념을 채택한 당신을 그 누가 욕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입니까?

벌써 6·25 60주년입니다. 60년 전 이념의 대립 속에서 많은 동족이 죽었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갈등은 커져만 갑니다.

남북분단이란 민족사의 질곡으로 남한에서 외면당하고, 북한에서는 숙청 당한 비운의 영웅이었던 김원봉, 당신의 정당한 폭력을 되새기며, 부당한 폭력 속에서 목숨을 잃은 6·25 전사자와 천안함 사건의 희생자들께 명복을 비는 것으로 이 글을 이만 줄이겠습니다.


약산 김원봉(金元鳳 : 1898~1958)

   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가. 의열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하였다. 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의원 및 군무부장을 지냈으며,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하여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김일성(金日成) 비판을 제기한 옌안파[延安派] 제거작업 때 숙청되었다.

자료보기 src

   김원봉선생이 선택한 독립운동방법은 '폭렬투쟁(暴烈鬪爭)'이다. '자유는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판단에서다. 이를 통해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제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약탈하지 못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셨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우리는 같은 민족을 향해 안으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정당한 폭력을 행하신 김원봉 선생과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 보게 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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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6 19:11 2010/07/0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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