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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첫 번째 편지 - 2010년 4월 13일        

100년 편지

할머니의 이야기,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되어 -김선현-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께 손녀가 띄우는 편지]

여느 아이들이 할머니의 품에서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저는 임시정부와 그 어르신들의 크고 작은 옛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다들 책에서 배우던 걸 직접 할머니 말씀으로 들을 수 있었으니 커다란 행운이었지요. 할머니는 저를 품에 안고 34년을 보듬어 주셨지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한없이 아늑한 할머니 냄새를 느낄 수 있어요.

▲ 김의한, 정정화 선생과 아들 자동

할머니, 오늘은 임정 생일이에요. 할머니가 늘 말씀하시던 그날이 에요. 그래서 4월이면 넉넉하고 따뜻하던 할머니 품이 더욱 그립고 임정과 독립운동 이야기들이 어제 들은 양 새록새록 떠올라요. 스무 살 때 증조부님이 계신 상해까지 홀로 찾아 나선 일이며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경을 넘나들던 그 아슬아슬한 고비들, 그리고 안살림을 맡으며 임정과 함께한 만리장정... 그 숱한 이야기 속에 할아버지만은 나오지 않았지요. 왜 그런지 그때는 정말 알지 못했어요.

네 해 전 재북 애국지사 후손 성묘단의 일원으로 북쪽에 계신 할아버지 묘소에 분단 이후 첫 성묘를 갈 수 있었어요. 평양으로 향하는 제 호주머니에는 할머니 묘소에서 떠온 한줌 흙이 들어 있었어요. 온가족이 함께 재북 인사 묘역에 누워 계시는 할아버지께 절을 올린 뒤 할머니 영정을 할아버지 사진이 담긴 비석 옆에 나란히 세우고 흙을 뿌렸어요. 남과 북의 흙이 합쳐지고 두 분의 한 맺힌 세월이 만나는 순간이었지요. 우리 모두 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어요.

열한 살에 혼인해서 소꿉동무로 연인으로 동지로 40년을 함께 하셨던 할아버지와 분단으로 헤어지고, 홀로 지내신 40년 세월이 어떠했을지 저는 할머니 곁에 있던 34년 동안 미처 헤아리지 못했어요. 그 긴 세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얼마나 그립고 애가 탔을지, 얼마나 많은 날을 문풍지 스치는 바람에도 가슴을 쓸어 내렸을 지 그때는 정말 몰랐어요.

할머니, 해방된 조국에서 홀로 감당해야 했던 오히려 더 모질었던 그 세월을 할아버지와 겨우 한 줌 흙으로라도 만나 위로를 나누셨을까요. 할머니 평소대로라면 평양에서 할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를 저에게 또 조근조근 들려 주셨겠지요. 40년간 차마 말 할 수 없던 이야기를...

평양을 다녀온 후로 내내 제 마음 한켠을 떠나지 않는 건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에요. ‘아이가 태어나 첫울음을 울 때 그 아이의 일생을 누가 알겠는가.’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되었지요. 귀한 집 딸로 태어나 부귀영화는커녕 독립운동 자금 품어 안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기를 몇 번이었던가요. 가끔씩 제가 그 일기장을 꺼내 보곤 했다는 걸 할머니는 모르셨지요. 어느 봄날 할머니가 오래도록 써온 일기장을 태우시는 걸 본 제가 깜짝 놀라 말리던 걸 기억하실 거예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이런 것을 남긴들 뭘 하겠느냐. 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굳이 다 태워버리셨죠. 연기가 되어 날아가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저는 그저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어요. 고작 열다섯 살 어린아이였던 제가 할머니의 신산스런 마음 한 자락이라도 어찌 헤아릴 수 있었겠어요.

할머니는 말씀하셨죠. ‘요즈음 세상에는 원칙이 없다’고. 할머니가 반평생을 바쳐 그토록 갈망하던 해방된 조국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믿고 있어요. 강물은 절대로 거꾸로 흐르는 법이 없듯이 언젠가는 임시정부가 꿈꾸던, 할머니가 꿈꾸던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아니 만들어야 한다고....

할머니, 오늘, 임정 생일을 맞아 할머니께서 남긴 책 “장강일기”를 펼쳐 들어요. 다시금 읽어도 할머니 품에 안겨 처음 만났던 생동하는 독립운동 이야기들이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어요. 할머니의 이야기는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오랫동안 그치지 않는 젖줄로 흐를 것이라고 저는 믿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이 되기 전에 꼭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을 한 자리에 모시고 싶어요.그날까지 평안하세요.

끝없는 그리움과 존경을 담아 손녀 선현이 보냅니다.

             김선현

  독립유공자 김의한, 정정화 선생의 손녀

  現 OTO 대표이사

양쯔강의 다른 이름은 장강(長江)입니다. 그 이름처럼 아시아에서 제일 긴 강이기도 하지요. 장강은 중국 땅 동서를 흐릅니다. 그 긴 강줄기의 역사는 우리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멀리 중국에 망명정부를 세우면서 그 강줄기를 따라 임시정부의 역사도 같이 흘렀으니까요. 그리고 그 역사의 흐름에 정정화 선생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강 이야기를 늘 들려주셨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살아 숨쉬고 있었지요. 손녀는 지금도 할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할머니 이야기 속에는 이름도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살아있습니다.


4월 13일에 첫 편지를 쓰는 까닭은?


이 날이 대한민국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달포 남짓 지나서 애국지사들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습니다. 1919년 4월 13일이었습니다.

나라(대한제국)를 잃은 뒤 이 날로 우리 겨레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대한민국 100년을 맞으러 가기로는 4월 13일이 맞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 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copyright src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3/08/26 16:09 2013/08/2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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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쉰 여덟 번째 편지 - 2011년 5월 17일        

100년 편지

두 여인의 책을 읽고 -조영숙-


   한국에 있는 독립운동관계 동지이자 선배인 리학효씨로부터 두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와 ‘장강일기’이다. 일본에서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며 많이도 울었고 고국생각을 많이도 했다. 100년 전 내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우리민족의 수난을 짊어진 그 고생 앞에 눈물 외에는 말이 없었다. 이럴 수 있느냐고, 말 좀 하시라고 땅을 치고 하늘을 쳐다보며 펑펑 울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인내와 투쟁으로 극복해야할 현실을 생각하며 넘쳐나는 울음을 삼키고 삼키면서, 다지고 다지면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며 이렇게 밑줄 친 책들도 없다.

   책 전체가 눈물덩어리지만 지면관계상 몇 부분을 추려 다시 새겨보고 싶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독립투사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 회고록)

▲ 허 은 여사

   “신의주 역사를 빠져나오니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앞으로의 험난한 여정을 미리 일러주는 듯 낯선 국경 역에서 비바람만이 우리를 맞이했다.”, “어떤 때는 일이 죽나 내가 죽나 둘 중에 하나란 생각으로 날을 보낸다.”, “우리 때문에 어린네가 이렇게 고생한다 하셨다. 손이 시릴 때라 마주 쥐어주시는 손길이 무척 따뜻하고도 고마웠다.”, “심지어는 석주어른 3년 상에 제문까지 검열하며 자기네 마음대로 지우기도 했다. 그때 그 짓했던 일본 놈 앞잡이 형사가 나중에 참의원선거에 후보로 나왔다 . 참 한심한 일이다.”, “학령기에 아이들 하나도 학교에 못 보내고 또 여러 가지가 뜻대로 되지 않아 울적해하던 남편은 늘 속병을 앓았다. 속이 답답하고 거북하다면서 괴로워했다. 내가 헝겊으로 주머니를 기워갖고 소금을 볶아서 뜨겁게 해주면 그걸 늘 배에 안고 살았다.”, “그놈 좀 뚝 잘라서 우리 애 좀 나눠 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형제분 아버지 보니까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어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강단으로는 전 조선과 전 만주에서 제일간다던 아버님의 눈에서도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장강일기 (양자강 푸른 물결 위에 실린 한 여성독립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 정정화 여사

   “저라도 아버님 뒷바라지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 허락도 없이 찾아뵈었습니다. 아버님”, “별로 배운 것도 없고 나라가 망하기 전에 세도가나 집권자들의 압제를 받으며 억눌려 지내오기만 했던 사람이 자신에게 해를 끼쳤다면 모를까 이렇다 할 혜택이나 은덕을 베풀어주지 못했던 조국이 이미 숨통이 끈긴 마당에도 그 조국을 찾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일제에 항거하는 모습을 볼 때 진정한 애국자가 따로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아주머니 레더구나. 귀골로 곱게 산 사람이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했시다. 독립 운동하는 유명한 사람들이레 하나같이 다 이런 험악한 일을 하는 건 아니디요. 기렇디요. 나 같은 놈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거든”, “백범 같은 분은 여기저기 다니기를 잘하니까 그 헝겁신의 바닥이 남아날 날이 없다. 바닥은 다 닳아 너덜거리니 명색만 신발바닥이고 신발목부분만 성한채로 매달려 있는 꼴이었다.”, “내가 만약 국내에 있다가 독립 운동을 한다는 상해의 독립 운동지사를 찾아갔다고 치자. 내가 아무개입니다 하고 내 소개를 했을 때 그들도 나를 보고 누구시더라 하고 나설 것인가 아니다.”, “서신 연락조차 닿지 못했던 중원대륙에 흙바람이 휘몰아칠 때 손가락같이 굵은 빗줄기가 천형인 듯 쏟아져 내려와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을 때 그래서 서글프고 그래서 쓸쓸할 때마다 늘 생각이 사무치던 곳 그곳이 내 나라였다 내 조국이었다.”, “중원대륙을 헤매며 20여년을 보냈어도 그 사흘만큼 지루하고 딱한 신세는 아니었다. 그렇다 비록 제나라 잃고 남의 나라에 가서 유랑생활을 했을망정 부산 앞바다의 사흘만큼 딱한 신세는 결코 아니었다.”, “우리 집은 셋방살이나마 다행으로 여기며 살아야 했다.”


   이 두 책의 저자는 다 여성이다. 독립운동의 제일 밑바닥에서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살아왔던 그 심경이 읽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사로잡았다. 두 분께서 공통으로 말씀하시고 계신 것은 서간도에서 중원대륙에서 가시밭길을 걸은 그 아픔보다 더 참기 어려운 고통은 고국의 배신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외세와 친일파가 장악한 고국이었다. 그 거꾸로 된 고국에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가슴을 앓았고 그 아내와 어머니들은 자식의 교육과 먹을거리를 걱정하는 세월을 보내야했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은 이들에게 얼토당토않은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 아직도 우리사회에 남아있는 ‘빨갱이’라는 분탕질이다.

   나는 일본에서 역사문화운동을 한답시고 때론 힘에 버거워서, 때론 외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많다. 그러나 두 분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힘을 얻었다. 두 선배님처럼 나 역시 내 아이들(재일 3세들)에게 우리 민족문화와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갖도록 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눈물과 생명을 바쳐 서간도를 개척하듯, 또는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의 ‘거지같은’ 살림을 목숨 바쳐 꾸려나갔듯이, 나도 열심히 우리네 살림살이를 꾸려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또 통일을 소원한 선열님들 뜻을 이어 미력이라도 통일에 기여해 나가겠다고 그분들의 뼈아픈 고생 앞에 내 외로움과 눈물을 제물로 올리고 다짐을 드린다.

   100년 편지가 끝나는 2019년엔 우리국민들 모두가 큰 함성으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싶다. 그리고 하루라도 속히 우리민족 남·북·해외 전 구성원이 진정으로 선열님들께 큰 위령제를 올려드리고 싶다.




 조영숙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남. 재일동포 2세와 결혼하여 도일.
  1995년 오오타구 국제교류단체 아리랑회(뒤에 무지개회로 개칭) 설립.
  일본역사왜곡교과서 반대운동. 민문연 도쿄지회 창립 등 역사문화운동을
  하고 있다.

copyright src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1/05/16 16:01 2011/05/1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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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열 네 번째 편지 - 2010년 7월 13일        

100년 편지

맵고 당찬 조선여인의 혼 -원영애-

[연극인 원영애씨가 정정화 여사에게 쓰는 편지]

   하늘에 계시는 정정화 할머니.

   어느덧 할머니께서 가신 지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할머니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에 뜨거움이 차오릅니다. 할머니를 생전에 뵌 적도 없고 아무런 개인적 연고도 없지만, 마치 혈연으로 이어진 가까운 어른처럼 느껴집니다.

   할머니의 삶은 여러 부분에서 모자란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가치 판단이 혼란스러울 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시는 스승으로,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는 절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극기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 정정화 여사

   충남 예산에서 할머니가 태어나신 해가 1900년이니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때는 나이 열한 살이었겠지요.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시아버지 김가진 선생님과 남편 김의한 선생님이 있는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가 그 때부터 해방 이후까지 25년 동안 어려운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아 ‘임정의 며느리’ 역할을 하셨지요.

   폭탄을 던지고, 총칼로 적을 죽이는 것만이 독립투쟁이 아니라 제 2선에서 활동자금을 마련하고 안전한 잠자리와 식사를 뒷바라지하는 일 역시 투쟁일진대, 할머님은 그 어려운 일을 성심성의껏 다 해 내셨습니다.

   길고도 험난한 망명과 유랑생활에서 한 치의 흔들림이 없이 임시정부의 어른들을 모시고 끼니도 잇기 어려운 임정의 살림을 챙기는 모습에서는 ‘조선여인의 심성’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여섯차례나 국내에 잠입하여 왜경과 밀정의 눈을 피해가며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모금한 뒤 이를 상해 임시정부에 전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할머니의 모습에서는 맵고 당차게 절망과 맞서는 ‘조 여인의 혼’을 느끼게 됩니다.

   너나없이 궁핍한 망명객들로 채워진 임정의 어려운 살림을 알뜰히 돌보는 맏며느리인가 하면,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여섯 차례나 목숨을 걸고 국내에 잠입해 자금을 모금하러 다닌 투쟁가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사람은 이런저런 고통을 겪고 힘겨운 노력을 쏟게 마련이겠지요. 그러나 온 국민이 망국의 노예로 전락한 일제 36년의 암흑기에 비하면,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혼란이나 어려움은 훨씬 이겨내기 쉬운 것들일 것입니다. 할머님은 생애를 일관한 독립운동의 업적만으로도 길이 추앙받아 마땅하지만, 버거운 역사의 짐을 지고도 늘 온화하고 올곧은 자세를 유지하신 점이 더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할머니..

   인연이란 꼭 혈연이나 직접적인 만남으로 이뤄지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분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알게 되고 삶의 진정한 방향을 찾게 되는 것, 이것이 시공을 초월하는 더 깊은 인연이 아닐까 싶습니다. 할머니와 독립극장의 인연도 그러합니다. 할머니의 삶이 녹아있는 녹두꽃(장강일기)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던 그날, 할머니의 삶을 무대공연으로 올려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으로 할머니께서 그렇게 아끼시던 김자동선생님과 1997년11월 임시정부의 흔적을 따라 상해,가흥,중경으로 비애와 비감을 느끼며 다녔던 기억, 상해근처에 할머니께서 잠시 거쳐하셨던 애인리에도 가보았답니다. 그곳을 보면서 어떻게 여기서 지내셨을까! 가슴만 아려왔었지요.

   중국에서 돌아온 후 1998년에 아!정정화, 2001년엔 치마로 2002년 일본 동경,오사카 공연에 이여 2005년 세미뮤지컬‘장강일기’로 할머니와 인연은 깊어만 갑니다. 이 소중한 인연을 얼마나 잘 살렸는지 두렵기도 하였지만, 할머니의 넋이 많은 관객들의 가슴에 들어가 불이 되고 꽃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었지요.

   할머니..

   이제 일경의 눈을 피해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너던 때로부터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의 역사는 많은 걸 바꿔 놓았지요. 지금 우리는 자신을 지킬 힘을 지니고 경제적으로도 썩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토를 빼앗기고 백성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 백성의 절반 이상이 문맹이던 시절에 비하면 오늘 세상은 상전벽해나 다름없습니다.

   이차대전 이후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한 1백40여 국가 가운데, 대한민국만큼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가 없다고들 합니다. 가슴 뿌듯한 일이지요. 왜정시대의 궁핍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해방 후에도, 한국전쟁 후에도, 외국의 원조물자에 의존하여 겨우겨우 생활을 지탱하던 나라가 이제는 거꾸로 아프리카,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를 원조하고 산업화의 경험을 전수해주는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오늘의 성취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저희들의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저희는 오늘의 편안한 삶을 향유하고 있지만 정작 오늘을 있게 만든 분들은 어려운 시대를 힘들게 살다가 노년에 이르고 하늘나라로 가신 전 세대, 그리고 전전 세대 들입니다.

▲ 중국 가흥시절 임시정부 요인들.(아랫줄 왼쪽 두 번째가 정정화 여사)

임시정부요인이라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중국식 의복을 입고 있다.


   할머니.

   저희 세대에게도 저희가 마땅히 해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분단의 벽을 해소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큰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복지를 실현하는 일도 큰 과제입니다. 품격 있는 문화를 향유하고 아름다운 국토, 깨끗한 환경을 지키는 일도 과제이겠지요.

   이처럼 할 일이 많기에 우리에게 책임이 있고 살맛이 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일이면 목숨을 돌보지 않고 나섰던 선열들의 삶을 교범으로 삼는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에 있을까 싶습니다. 하늘에서 지켜보시다가 저희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따끔히 회초리를 내려주십시오. 엎드려 존경과 사모의 마음을 올리며 늘 편안하시길 두손 모아 간절히 빕니다.

   원영애 올림.

연극인. 현 독립극장 대표      

수당 정정화(鄭靖和 : 1900~1991)

   여성독립운동가로 시아버지 동농 김가진 선생과 남편 김의한 선생을 따라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았다. 1932년 윤봉길 의사 폭탄 투척 사건으로 임정요인들과 함께 상해를 떠나 망명정부를 10년 동안 뒷바라지 했으며, 중경에서 광복을 맞이 했다. 광복 후 미군정의 홀대 속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남편 김의한 선생이 납북됐고, 가족이 흐트러지는 와중에 부역죄로 투옥됐다. 그녀의 생을 <장강일기>에 정리하고 1991년 생을 마감했다.

 

정정화 여사는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여섯차례 국경을 넘나들었다. 한편으로는 26년간 임정의 이런저런 살림을 도맡았다. 조국 독립을 위해 궂은 일 마다하지 않은 '모두의 어머니'였다. 글쓴이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정정화 여사를 두고 "마치 혈연으로 이어진 어른 같다."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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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5 14:31 2010/07/1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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