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짜리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여느 때와 같이 로스터를 돌려 커피를 볶습니다. 학교 가기 싫다고 툴툴대는 제 아이의 나이에 당신께서는 군왕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어리광 대신 한 나라를 어깨에 걸머지고 외로운 길을 가셨던 당신만을 위해 오늘은 커피를 볶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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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식 의복차림의 고종황제 고종(1852~1919)은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재위기간(1863~1907) 동안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간섭을 받았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광무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 되었으며,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은 일본에 병탄된다. |
당신에게 커피는 어떤 의미였습니까? 검고도 영롱한 커피 한 사발에 당신은 온갖 시름을 잊었던 것입니까? 커피가 끊임없는 일제의 침입에 나라를 지키고자 고뇌한 당신의 피눈물을 닮았더이까? 아버지 대원군과 아내 중전 사이에서 주체성을 세우기 위해 흘린 당신의 눈물이 고여 한 잔의 커피로 승화한 것은 아닐런지요.
독일여인 손탁이 당신에게 내민 첫 커피의 맛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들 순종과 함께 덕수궁 정관헌에서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마셨을 커피는 또 얼마나 향기롭고 이국적 이었을까요. 신분차별을 없애고 서구의 기술과 군사제도를 받아들여 나라의 힘을 기르고자 했던 당신에게 커피는 개화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총칼을 들이대며 강제로 요구된 단발령. 신하 정병하가 당신의 머리카락을 잘랐을 때 떨어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커피향기가 배어 나왔을 테지요. 일제는 이를 두고 고종과 순종이 솔선수범해서 머리를 잘랐다고 선포했습니다. 결국 을미의병이 일어났지요. 일제의 이러한 행동에 대항하여 연합의병단에 전달할 비밀조서를 꾸밀 때도 당신 옆에는 한 잔의 커피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김흥륙은 흑산도 유배를 당하게 된 데 앙심을 품고 당신을 독살할 요량으로 커피에 독약을 탔습니다. 그토록 당신은 커피를 좋아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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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황제의 가족사진(왼쪽부터 영친왕.순종.고종.귀비엄씨.덕혜옹주) 1918년 1월22일 매일신보에 실린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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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커피는 개인을 세상으로 나가게 하는 길이자 통로였습니다. 커피를 사이에 두고 담론이, 혁명이 촛불을 밝혔습니다.
오늘 진심을 다해 볶은 커피를 점점이 융으로 내려 당신과 마주앉겠습니다. 그 자리에 손가락 불뚝거리며 노동에 몸을 누이는 우리네 민중도 초대하겠습니다. 아직도 여자라서 차별 받는 아줌마들도 함께 합시다. 그렇게 모여 진짜로 맛난 커피 한 잔을 드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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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정관헌. 고종이 평소 커피를 즐겨 마시던 곳이다. |
왕 노릇하기 더럽다는 당신의 걸진 입담을 안주 삼아 독약 아닌 보약 같은 커피 한 잔 건배하며 들이킵시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커피 한 잔으로 모든 사람을 왕 대접 하듯 그렇게 오늘도 거룩한 일상이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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