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해당되는 글 23건

  1. 2013/08/26 관리자 [100년 편지.1] 할머니의 이야기,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되어 - 김선현 -
  2. 2011/07/04 관리자 [100년 편지.65]100년의 길을 앞서가신 김구 선생님께-김영환-
  3. 2011/06/07 관리자 [100년 편지.61] 백범 김구 선생님께 -임진택-
  4. 2011/06/01 관리자 [100년 편지.60]독립운동 우국지사님께 -이용범-
  5. 2011/05/09 관리자 [100년 편지.57] 곽태영 선생 의거비에 쓰인 ‘아드흐’를 아십니까? -김영조-
  6. 2011/04/18 관리자 [100년 편지.54] 아저씨, 아저씨, 용헌식 아저씨께... -용환신-
  7. 2011/04/11 관리자 [100년 편지.53] 상옥 형! 미안하고 고마워 -배재우-
  8. 2011/03/14 관리자 [100년 편지.49] 현하의 웅변으로 민족혼을 일깨운 여운형(呂運亨) 선생 -강대욱-
  9. 2011/01/25 관리자 [100年 편지.42] 夢寐에도 그리는 내 아버지 夢牛 權泰錫선생께 -권영관-
  10. 2010/12/21 관리자 [100年 편지.37] 丹齋 선생님께 올립니다. -양진호-
  11. 2010/12/16 관리자 [100年 편지. 36] 백범 김구 선생님 -이종호-
  12. 2010/11/23 관리자 [100年 편지.33] 진정한 독립을 생각하며 -송정선-
  13. 2010/11/17 관리자 [100年 편지.32] 그리운 아버지 -윤경자-
  14. 2010/11/10 관리자 [100年 편지.31] 참 언론의 사표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 -정동익-
  15. 2010/11/04 관리자 [100年 편지. 30] 가지 않은 길을 가신 증조부님께 -양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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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첫 번째 편지 - 2010년 4월 13일        

100년 편지

할머니의 이야기,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되어 -김선현-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께 손녀가 띄우는 편지]

여느 아이들이 할머니의 품에서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저는 임시정부와 그 어르신들의 크고 작은 옛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다들 책에서 배우던 걸 직접 할머니 말씀으로 들을 수 있었으니 커다란 행운이었지요. 할머니는 저를 품에 안고 34년을 보듬어 주셨지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한없이 아늑한 할머니 냄새를 느낄 수 있어요.

▲ 김의한, 정정화 선생과 아들 자동

할머니, 오늘은 임정 생일이에요. 할머니가 늘 말씀하시던 그날이 에요. 그래서 4월이면 넉넉하고 따뜻하던 할머니 품이 더욱 그립고 임정과 독립운동 이야기들이 어제 들은 양 새록새록 떠올라요. 스무 살 때 증조부님이 계신 상해까지 홀로 찾아 나선 일이며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경을 넘나들던 그 아슬아슬한 고비들, 그리고 안살림을 맡으며 임정과 함께한 만리장정... 그 숱한 이야기 속에 할아버지만은 나오지 않았지요. 왜 그런지 그때는 정말 알지 못했어요.

네 해 전 재북 애국지사 후손 성묘단의 일원으로 북쪽에 계신 할아버지 묘소에 분단 이후 첫 성묘를 갈 수 있었어요. 평양으로 향하는 제 호주머니에는 할머니 묘소에서 떠온 한줌 흙이 들어 있었어요. 온가족이 함께 재북 인사 묘역에 누워 계시는 할아버지께 절을 올린 뒤 할머니 영정을 할아버지 사진이 담긴 비석 옆에 나란히 세우고 흙을 뿌렸어요. 남과 북의 흙이 합쳐지고 두 분의 한 맺힌 세월이 만나는 순간이었지요. 우리 모두 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어요.

열한 살에 혼인해서 소꿉동무로 연인으로 동지로 40년을 함께 하셨던 할아버지와 분단으로 헤어지고, 홀로 지내신 40년 세월이 어떠했을지 저는 할머니 곁에 있던 34년 동안 미처 헤아리지 못했어요. 그 긴 세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얼마나 그립고 애가 탔을지, 얼마나 많은 날을 문풍지 스치는 바람에도 가슴을 쓸어 내렸을 지 그때는 정말 몰랐어요.

할머니, 해방된 조국에서 홀로 감당해야 했던 오히려 더 모질었던 그 세월을 할아버지와 겨우 한 줌 흙으로라도 만나 위로를 나누셨을까요. 할머니 평소대로라면 평양에서 할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를 저에게 또 조근조근 들려 주셨겠지요. 40년간 차마 말 할 수 없던 이야기를...

평양을 다녀온 후로 내내 제 마음 한켠을 떠나지 않는 건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에요. ‘아이가 태어나 첫울음을 울 때 그 아이의 일생을 누가 알겠는가.’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되었지요. 귀한 집 딸로 태어나 부귀영화는커녕 독립운동 자금 품어 안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기를 몇 번이었던가요. 가끔씩 제가 그 일기장을 꺼내 보곤 했다는 걸 할머니는 모르셨지요. 어느 봄날 할머니가 오래도록 써온 일기장을 태우시는 걸 본 제가 깜짝 놀라 말리던 걸 기억하실 거예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이런 것을 남긴들 뭘 하겠느냐. 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굳이 다 태워버리셨죠. 연기가 되어 날아가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저는 그저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어요. 고작 열다섯 살 어린아이였던 제가 할머니의 신산스런 마음 한 자락이라도 어찌 헤아릴 수 있었겠어요.

할머니는 말씀하셨죠. ‘요즈음 세상에는 원칙이 없다’고. 할머니가 반평생을 바쳐 그토록 갈망하던 해방된 조국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믿고 있어요. 강물은 절대로 거꾸로 흐르는 법이 없듯이 언젠가는 임시정부가 꿈꾸던, 할머니가 꿈꾸던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아니 만들어야 한다고....

할머니, 오늘, 임정 생일을 맞아 할머니께서 남긴 책 “장강일기”를 펼쳐 들어요. 다시금 읽어도 할머니 품에 안겨 처음 만났던 생동하는 독립운동 이야기들이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어요. 할머니의 이야기는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오랫동안 그치지 않는 젖줄로 흐를 것이라고 저는 믿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이 되기 전에 꼭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을 한 자리에 모시고 싶어요.그날까지 평안하세요.

끝없는 그리움과 존경을 담아 손녀 선현이 보냅니다.

             김선현

  독립유공자 김의한, 정정화 선생의 손녀

  現 OTO 대표이사

양쯔강의 다른 이름은 장강(長江)입니다. 그 이름처럼 아시아에서 제일 긴 강이기도 하지요. 장강은 중국 땅 동서를 흐릅니다. 그 긴 강줄기의 역사는 우리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멀리 중국에 망명정부를 세우면서 그 강줄기를 따라 임시정부의 역사도 같이 흘렀으니까요. 그리고 그 역사의 흐름에 정정화 선생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강 이야기를 늘 들려주셨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살아 숨쉬고 있었지요. 손녀는 지금도 할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할머니 이야기 속에는 이름도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살아있습니다.


4월 13일에 첫 편지를 쓰는 까닭은?


이 날이 대한민국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달포 남짓 지나서 애국지사들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습니다. 1919년 4월 13일이었습니다.

나라(대한제국)를 잃은 뒤 이 날로 우리 겨레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대한민국 100년을 맞으러 가기로는 4월 13일이 맞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 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copyright src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3/08/26 16:09 2013/08/2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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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예순 다섯 번째 편지 - 2011년 7월 5일        

100년 편지

100년의 길을 앞서가신 김구 선생님께 -김영환-


김구 선생님!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인사드리기는 처음입니다. 어디선가 선생님께서 이 편지를 읽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니 떨리고 울컥한 마음이 듭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떠나신지 벌써 62년이 흘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시대의 한 복판에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 동안 더 혼란스러운 일도 있었고 선생님이 직접 보셨다면 통곡하실 일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희망의 씨앗을 일구신 이 한반도 땅 위에서 우리는 이렇게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 백범 김구 선생

저는 부족한 사람이지만 세 번의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국가의 미래를 고민하는 자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가야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김구 선생님의 말씀을 읽고 또 읽게 됩니다.


저는 선생님의 혜안에 놀라웠습니다. 해방 60년 역사 속에 가장 뛰어난 전략가, 가장 놀라운 국가 전략과 비전에 대한 식견을 가진 분이 단연 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감동 있게 읽은 글은 선생님이 나의 소원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선생님은 외세에 침탈당하고 식민지에 아픈 역사를 몸으로 체험하신 분이면서도 강한 군대가 아니라 ‘강한 문화의 힘’을 역설하는 선견지명을 보이셨습니다. 1947년 해방되고 건국하기도 전입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신지식을 접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의 조언은 마치 진리처럼 21세기 지식경제 사회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의 젊은이들의 세계 대중문화를 이끌고 있습니다. 제가 과학기술부 장관시절 일본에 문화를 개방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앞선 일본 문화산업과 영상산업이 우리 문화를 잠식할 것이라는 우려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문화개방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 우리는 아시아의 10년 한류 열풍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 드라마, 영화, 가요가 아시아를 넘어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문화가 가진 힘입니다.


저희는 이제야 깨달고 실천하는 부분들을 김구 선생님께서는 허허벌판에서 깊은 고민과 성찰을 통해 이미 오래 전에 이것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21세기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길을,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겠습니다. 저 역시 선생님의 뜻에 따라 문화를 창조하고 지켜가는 데에 힘을 다하겠습니다.


오는 6월 26일이면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62년이 되는 해입니다. 벌써 반세기가 흘렀지만, 선생님의 가르침은 메아리처럼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한번도 뵌 적은 없지만, 그립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김영환
 

 제18대 국회의원(민주당)


copyright src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1/07/04 18:35 2011/07/0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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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예순 한 번째 편지 - 2011년 6월 6일        

100년 편지

백범 김구 선생님께  -임진택-


   백범 김구 선생님!

   선생님께 편지를 쓰기 전에 우선 저에 대한 인사소개를 드려야겠군요. 저는 임진택이라고 합니다. 작년(2010년)에 선생님의 일생을 담아 판소리로 공연한바 있는 자칭 광대이지요. 외람되게 저도 호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한목’이라는 호를 쓰고 있습니다. 한목 임진택, 백범 김구 선생님께 정중히 인사말씀 올립니다.

▲ 백범 김구 선생

   선생님의 서거 60주년을 맞은 2009년, 선생님의 일생을 판소리에 담아내겠다는 생각을 처음 가진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경교장을 답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강북삼성병원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는 그 곳에서 늦게나마 선생님의 체취를 맡아보고 안타까운 서거의 현장을 목도하자는 뜻에서였지요. 그날 차를 타고 막 경교장에 도착하려는 시각에 제 핸드폰(선생님이 인천감옥에서 사형집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서울-인천간에 가설되었다는 전화가 발달 진화하여 지금은 국민 각자가 지니고 있는 무선 이동전화)이 급히 울렸습니다. 집사람이 전한 내용은 뜻밖에도 정치검찰의 압박을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경교장 2층 거실 남쪽 창문에 그대로 남아있는 60년전의 흉탄 자국을 바라보면서 이 우연한 겹침이 제가 만들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가 지나간 역사가 아닌 바로 오늘의 역사를 담지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단과 폭압의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며, 선생님이 그토록 원하시던 우리나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저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를 만들기 위해 저는 선생님이 남기신 ‘백범일지’를 여러차례 숙독하였습니다. 예전에 젊은 시절에도 선생님의 일지와 어록을 접한 기억이 있습니다만, 사실 그때는 주석이 명확치 않은데다 인쇄기술도 좋지 않은 편이어서 그냥 건성으로 읽고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을 때는 돌베개출판사나 나남출판사, 학민사 등에서 나온 책의 주석들이 쉽고 명확하여 선생님의 생애와 생각이 빠짐없이 머릿속 깊이 새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자서전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저는 책에 담긴 역사성은 물론이요, 흥미진진한 문학성에 있어서도 그 수준이 벽초 홍명희 선생의 소설 <임꺽정>에 못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어, 판소리 사설을 선생님이 다 써놓으셨네!” 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다만 선생님이 겪으신 내용을 판소리로 다 담아내자면 10시간 20시간짜리가 될 것 같아 제가 3시간짜리로 단축하여 사설을 정리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제가 갖고 있던 선생님에 대한 인상은 ‘범’ 즉 호랑이입니다. 선생님의 호에 들어있는 ‘범’짜는 평범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받은 선생님에 대한 느낌은 평범이 아니라 비범이며, 호랑이와 같은 분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직접 만나뵌 어른들 중에 과연 비범하며 호랑이같은 분이 딱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은 백기완 선생이십니다. 선생님과 같이 황해도가 고향인 백기완 선생은 어린 시절 해방 직후 월남하여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있다고 하며, 그 후 선생님을 존경하여 한동안 ‘백범사상연구소’를 차려 꾸리시기도 하였지요. 저는 백기완 선생으로부터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가끔 들었고, 또 범의 기상을 가진 백선생을 통해 선생님의 성정과 인품, 용맹과 기개를 가늠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얼마전 작고하신 리영희 선생께서도 어느 글에 자신이 목격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었지요. “해방 직후 테러가 횡행하던 살벌한 시기, 정관계 요인들이 모인 어떤 만찬이 있었는데, 전력 사정이 좋지 않던 때라 만찬장에 갑자기 불이 나갔다. 만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불이 들어왔다. 모두들 어둠 속에서 피신하느라 상밑으로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이 환히 드러났는데, 단 한 사람 백범만이 미동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있었다.”는 일화 말입니다. 선생님의 범같은 기상이 그대로 드러난 일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1949년 6월 26일 극우세력의 사주를 받은 한 군인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셨고, 저는 그 다음해인 1950년 민족상잔의 전쟁이 터진 10월에 태어났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뵌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잠깐이라도 동시대를 살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한 제가 선생님의 일생을 담은 판소리를 창작하려고 하니 처음에는 좀 막막하더군요. 판소리는 풍자와 해학도 중요하지만 절규와 통곡이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지요. 제가 진심으로 절규하고 통곡하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더불어 선생님의 뜻과 생각에 저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은 과연 내가 존경할만한 분인가? 백범 선생님의 생각과 노선과 행동은 옳았는가?

   다행히 저의 전공과목이 (정치)외교학이었으므로 이번 기회에 한국현대사 관련 서적들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고, 그 결과 저는 선생님이야말로 사내 대장부로서 가장 존경할만한 분이며, 선생님의 생각과 노선과 행동은 오늘날 제가 지향하는 생각과 노선에 가장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서거하신 다음해(호랑이해)에 태어난 제가 조금이라도 선생님의 정기를 물려받았기를 염원하면서, 광주의 어느 후배 화가가 수묵으로 그린 무등산 호랑이 그림을 벽에 세워놓고 그 앞에서 소리수련을 하며 범의 기상을 체화하고자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 창작 판소리"백범 김구"공연 모습 - 본 공연은 창작판소리 12바탕 추진위원회의 첫 작품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1주년 기념공연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거의 1년만에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를 완성하여 작년에 대여섯차례 공연을 가졌습니다. 주로 역사적으로 기념이 될만한 의미있는 날을 잡아 공연을 기획하였지요. 3월 1일 삼일절에는 만세운동의 본고장 천안에서 공연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1일 전후해서는 경교장에서 가까운 서울 정동극장에서 공연하였고, 석가탄일인 초파일 즈음에는 선생님이 젊은 시절 잠시 머물렀던 공주 마곡사에서 공연하였으며, 선생님이 서거하신 6월 26일에는 효창동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공연도 하고 선생님 묘소에 참배도 드렸었지요. 또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8월 29일경에는 국회의사당 안에 있는 헌정기념관에서 공연을 가진바, 저희로서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헌정에 불참하신 선생님을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회안으로 모셔들이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천의 어느 언론사 초청으로 인천문예회관에서 공연을 가져 선생님이 젊은 시절 두 번이나 갇혀있던 인천감옥을 -인천과의 인연을- 추억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공연을 본 관객 청중들의 반응은 다행히도 매우 좋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판소리로 백범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음에 즐거워하기도 하고 감격스러워 하기도 하였습니다. 3시간이 넘는 대작이어서 저를 포함하여 3명의 소리꾼이 나누어 소리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최근 10년 넘게 판소리를 작파하고 있던 차라, 소리꾼으로 복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작심하고 추진한 창작판소리 12바탕 중 첫 작품이 바로 백범 선생님이었기에 그나마 범의 기상으로 소리기운을 되찾는 것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이처럼 판소리 창작을 통해 선생님을 깊이 만나뵐 수 있었음에 저로서는 참으로 기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판소리 사설을 쓰기 위해 현대사 관련 책들을 보다가 저는 선생님에 관련한 학자들의 평가, 기대와 비판에 있어 몇가지 논란점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편지를 쓰게 된 것도 사실은 이에 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저의 생각이 부족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학시절 한때 정치외교학도였던 저로서 선생님에 연관된 몇가지 논란에 대하여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선생님께서 가장 앞장서서 전개하셨던 ‘반탁운동’에 대한 평가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반탁운동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또는 언론의 오보로 인한 오류로 만약 그 때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그 일정대로 추진하였다면 5년 안에 통일독립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는 가설을 내세우는 이가 있더군요. 하지만 역사는 가정할 수도 없으려니와 과연 그럴까요? 신탁통치를 순순히 거쳤다면 강대국들이 약속한대로 한반도의 통일독립이 보장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너무 안이한 태도 아닌가요? 그러한 가정이 성립하려면 당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어떻게든 한반도 문제에 관한 협상안을 타결했어야 맞는 것이고, 또 유엔(UN) 총회가 결정한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소련이 거부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미국 역시 유엔 소총회에서 굳이 ‘가능지역에서의 총선거안’을 관철시킬 이유가 없었을 터이지요. 미소간 냉전이 시작되던 세계사적 상황에서 ‘한반도 통일독립정부 수립’은 신탁통치를 받든 안받든 결코 보장되어 있던 것이 아닐진대, 민족자주정신에 바탕한 신탁통치반대운동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그 정당성이 부인되어서는 안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해방정국에서 우리 민족이 휩쓸린 오류는 찬탁 또는 반탁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찬탁 하려면 모두가 찬탁하고, 반탁 하려면 모두가 반탁했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1945년 12월말 분명 거족적인 반탁운동이 일어났음에도 1946년 1월초 갑자기 공산진영이 찬탁으로 입장을 바꿈으로써 극렬하게 대립하게 된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 분열의 시발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둘째는 ‘1946년 3.1절에 평양역 광장에서 일어난 김일성 암살 음모의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는 설에 대하여 일부 진보적 학자들이 단정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김구 배후설’은 “김일성 암살 미수범들이 ‘백의사’라는 전문 테러단체 소속으로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들 범인들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발급된 승차편의 협조공문과 신임장을 지니고 있었다”는 북측의 발표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문건들이 피할 수 없는 증거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북측 최고 권력자를 암살하려는 어떤 세력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는 문건들을 테러범들로 하여금 소지케 하였다? 아무리 군사작전의 초보자라도 암살 테러를 사주하려는 자가 배후의 정체를 일부러 들키게 하여 공작을 벌일 리가 있습니까?

   김일성 암살 음모에 관련한 김구 배후설'은 누군가의 역공작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엇보다도 만약 선생님이 그 사건의 배후라면 1948년 4월 남북정치협상을 하기 위해 방북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했겠습니까? 북에서는 김구라는 이름을 지독히 비하하여 비난하고 있었고 곳곳에 ”김구와 이승만을 타도하자“는 격렬한 벽보들이 붙어있음을 아시면서도 선생님이 방북을 결심하신 것이야말로 김일성 암살 미수사건에 선생님은 전혀 관련없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셋째는 진보적 성향의 일부 학자들이 갖고 있는 ‘김구의 이념성향은 결국 우익이라는 한계가 있었다.’는 견해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한 판단은 아마도 해방정국에 활동한 여러 인물들을 비교하면서 추출한 결론인듯 한데,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여순반란사건이 나자 이승만과 한민당 등 우익 세력들에 의해 오히려 좌익으로 -적어도 좌익과 공모한 것으로- 몰리지 않았습니까? 좌우를 가르는 싸움은 해방 직후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바, 좌익이 아니면 우익이고 우익이 아니면 좌익이라는 그러한 공격적 구분은 자기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단순 이분법적 논리에서 나온 독단 아니던가요?

   또 어떤 이는 ‘백범이 좌우합작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하더군요. 물론 선생님이 좌우합작에 좀더 적극적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선생님은 오히려 중경 임시정부 시절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원봉과 좌우합작하여 획기적인 강령들을 채택한 바 있고, 해방정국에도 오로지 민족 분단을 막고자하는 일념으로 일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남북협상을 시도했던 것 아닙니까? 더구나 선생님은 극우파의 사주를 받은 저격범에게 끝내 피살당하고 마셨는데, 그러한 선생님을 두고 좌우로 갈라 평하는 따위야말로 매우 편향된 태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남기신 명문장 <나의 소원>은 물론이고, 1948년 4월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행한 연설 안에 이미 선생님의 생각과 주장이 고스란히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어디 있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가 존재할 수 있으리요. 현단계 우리 민족의 유일 최대 과업은 통일 독립의 전취이며, 고로 우리의 공동한 투쟁 목표는 단선 단정의 분쇄인즉, 이는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철저히 방지해야 할 것이오.”

   선생님은 애초부터 좌우 논리를 뛰어넘은 자리에 서 계셨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저는 선생님이 택하신 길을 중도(中道)라고는 표현하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앞서 걸어가신 길은 다만 정도(正道)일 뿐입니다.

▲ 임진택 선생의 공연 모습

   백범 김구선생님!

   저는 앞으로 제가 만든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를 좀더 압축하여 혼자서 완창 해보려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판소리로 선생님의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을 온 겨레의 가슴속에 깊이 새기고, 선생님 가신 그 발자국 따라 아름답고 힘찬 문화 상생의 길로 온국민이 함께 손 잡고 걸어갈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아울러 청소년들을 위한 판본을 별도로 축약 구성하여 초중등 각급 학교를 순회 공연하는 계획도 세워보려 합니다. 일찍이 선생님께서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세우시고 또 백범학원과 창암학원을 세우셨던 그 취지를 되살려 오늘날 우리의 청소년학생들이 진정 올바른 나라, 아름다운 나라를 꿈꿀 수 있도록 앞장서 나가겠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정기를 내려 주십시오.

   삼가 선생님의 명복(冥福)을 빕니다.

   2011. 6. 3. 광대 임진택 올림




  한목 임진택

 

   판소리 12바탕 추진위원회 연출가, 판소리꾼.

김구(金九, 1876. 8. 29. ~ 1949. 6. 26.)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백범일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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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7 17:25 2011/06/0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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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예순 번째 편지 - 2011년 5월 31일        

100년 편지

독립운동 우국지사님께 -이용범-


   지난 겨울에 우크라이나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미국에 온지 15년입니다만, 제 친구중에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아주 어렸을 때 미국에 온 친구와 함께 그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추운 나라의 겨울은 이곳 미국, 그중에서도 남가주 엘에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많은 분위기였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찬 침엽수림의 나무들이 차디찬 동토의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를 이겨내고자 이를 악물고 버티는 모습들이었습니다.

▲ 무장한 독립군의 모습

   수도 키에브에서 오뎃사로 가는 길을 찾다가 야간열차를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좁고,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불편한 밤 기차. 갑자기 제 친구가 조용히 이렇게 말하더군요. “예전에 우리조상 독립군들이 광복운동을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벌판을 오갈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 이 추운 겨울날에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겟다고 아는 이도 없고 맞는 음식도 없는 이 외국땅에서,

2011/06/01 11:36 2011/06/0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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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쉰 일곱 번째 편지 - 2011년  5월 10일        

100년 편지

곽태영 선생 의거비에 쓰인 ‘아드흐’를 아십니까? -김영조-



▲ 곽태영 선생 의거비

   백범 김구 살해범 안두희를 응징한 곽태영 선생의 의거비를 찾은 것은 4342년(2009) 10월 18일이었다. 이날 양구의 시민단체 대표들과 함께 했던 효창원을 사랑하는 사람들 김용삼(63살) 회장은 “곽 선생이 안두희를 응징한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김구 선생을 암살하고도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춤추듯 행동하던 자를 응징한 일이며, 해방 후 최초로 민족반역자를 응징함으로써 교훈을 남긴 큰 사건이다.”라고 강조했다. 당시 안두희를 응징했던 상황을 직접 곽태영 선생에게 들었던 김용삼 회장을 통해 들어보자.

   “1965년 12월 중순, 선생은 안두희 실물 사진을 품은 채 혼자 행상차림을 하고 강원도 양구로 향했다. 안두희가 운영하는 군납공장을 살필 수 있는 민가에 장사하러 온 사람이라고 속이고 하숙을 얻었다. 실제 장사꾼처럼 보이려고 민가에 물건을 팔면서, 안두희 공장에도 들러 노동자들에게 양말 장갑 등을 살 것을 권하는 척하면서 군납공장을 비롯하여 살고 있는 집 등의 정보를 얻어냈다.

   그렇게 여러 날 동태를 살피던 중 운명의 1965년 12월 22일 오전, 하숙집에서 군납공장을 내려다보니 안두희가 타고 온 것이 분명한 지프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온몸이 떨렸다. 동네 청년처럼 보이도록 흰 와이셔츠 차림을 하고, 주머니에 칼과 자백 받을 필기도구를 넣고 두부 공장으로 향했다.

   문 앞마당을 들어서서 우물가에 세수하러 나와 있던 안두희에게 ‘김구 선생님을 살해한 민족의 원수야!’라고 소리쳤고, 이내 격투가 벌어졌다. 엎치락뒤치락하던 중 선생은 그의 배에 올라타고 돌을 집어 얼굴을 내려치고 칼로 찔렀다. 마당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공장 직공들이 몰려 와 나를 사정없이 때리기에 ‘너희 사장이 누구인지 아느냐, 김구 선생을 살해한 민족의 원수다. 나를 때리지 말고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였다.”

   이때는 선생의 나이 29살, 백범 선생 묘소에서 암살자 응징을 약속한 10년의 마지막 해였다고 한다. 이 사건은 온 나라에서 60만 명이 넘는 국민이 곽태영 애국 청년을 석방하라는 서명에 참여하는 등 폭발적인 반향이 일었고 선생의 아버지는 아들이 장한 일을 했다는 1만여 통의 격려편지를 받았으며, 아들의 자랑스러운 일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하며 기뻐했다.

   이러한 국민의 열화와 같은 노력으로 선생은 사건 8달 만인 1966년 7월 3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다.

   당시 아무도 응징하지 않던 김구 저격범을 처단하는 민족혼을 보여준 곽태영 선생을 추모해 남궁경(76살, 원주 거주)이란 분이 의거비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 의거비를 세울 무렵엔 전두환 군사정권의 살벌한 분위기 탓에 남궁경 선생은 큰 결심을 해야만 했다.

▲ 곽태영 선생 의거비에는 안두희의 이름을 원래 ‘아드흐’라고 새겨 놓았었다. 그것을 어떤 이가 잘못 쓴 것인줄 알고 ‘안두희’로 고쳤다.

▲ 곽태영 선생 의거비를 세운 남궁경 씨는 비석 옆에 백범 선생 서거 33돌에 33자의 글씨로 3월 3일 21시에 세웠다고 새겼다.(왼쪽) 또 다른 쪽 옆에는 남궁경 선생의 이름 아래 받침 ‘???’과 세울 립(立)자의 받침 ‘?’이 새겨져 있다.(오른쪽)


   곽태영 선생을 기리는 양구 의거 비석에는 음각으로 ‘아드흐’라는 글씨가 새겨 있다. 무슨 뜻일까? 알아본즉 의거비를 세운 남궁경 선생이 안두희가 천추에 씻지 못할 대역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이름을 제대로 써줄 수 없다며, 일부러 받침을 뺐다고 한다. 그 뒤 어떤 이가 안두희 이름을 잘못 썼다며 받침을 새겨서 지금은 서툰 글씨의 안두희로 바뀌어 보인다.

   또 비석 옆면에는 첩보전 암호 같은 ‘33-33-3. 3-21’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지 33년(1982) 되는 해에 글자 33자로 3월 3일 21시에 비석을 세웠다는 뜻이다. 반대편 옆에는 또 다른 암호 같은 글자 ‘ㅁㅇㅇㅂ’가 새겨 있는데 이것은 남궁경 선생의 이름 아래 받침 ‘ㅁ ㅇ ㅇ’과 세울 립(立) 자의 받침 ‘ㅂ’을 새긴 것이다.

   여기 곽태영 선생 양구 의거비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날 모임에 함께 한 이들로 김영진(65) 전 양구주민연대 대표를 중심으로 김창현(76, 농업) 양구주민연대 회원, 조인선(37) 공무원노조 양구비상대책위원장, 한명희(43) 양구여성농업인센터 대표가 그들이다. 그들을 중심으로 해마다 8월 15일 20여 명이 의거비에 모여 김구, 곽태영 선생을 기리며 민족에 대해 생각을 한다. 여기에는 양구주민연대와 양구공무원노조를 중심으로 양구농민회, 전교조 양구지회가 힘을 보태고 있다고 전한다.

▲ 양구군청은 박정희가 제5사단장 시절 관사로 썼다는 집을 전시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 박정희 관사 전시장 앞에 세운 비석


   의거비를 둘러 본 후 의거비 가까이에 관광 상품화되어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제5사단장 시절 관사로 쓰던 집을 둘러보았는데 김영진, 김창현 씨 등은 귀한 양구군 예산을 ‘박정희 세우기’에 쓰고 있다며 개탄하기도 했다. 또 이 자리엔 '곽태영 선생' 의거비를 세울 때 땅을 내주었던 홍주범(98살) 선생이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자리를 함께해 참석한 이들의 마음을 다잡게 해주었다.

   김구 선생은 남의 땅 중국에서 온몸을 불살라 조국독립을 실현하고자 몸부림을 쳤다. 무려 27년간이나 일본군의 눈을 피해가며, 이봉창 열사 등을 통해 일본을 응징해왔고 겨레의 숨결을 보듬으려고 몸부림쳤다. 그런 우리 겨레의 위대한 지도자를 암살한 안두희를 응징했던 곽태영 선생을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를 기념하는 의거비는 우리가 소중히 아껴야 할 유산이다.


 김영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날마다 쓰는 인터넷 한국문화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를 집필하고 있으며 (2,084회, www.koya.kr) 그간 어렵고 딱딱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는 글쓰기를 통해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김영조의 민족문화 바로알기>를 오마이뉴스에 800여 편 연재한 바 있으며 KBS, 국악방송 등 언론매체와 서울시립대, 상명대, 서울시지원 “다시 쓰는 서울문화” 강좌 등을 통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한국문화의 아름다운 속살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곽태영[1936 ~ 2008]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고려대

2011/05/09 14:59 2011/05/0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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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쉰 네 번째 편지 - 2011년 4월 19일        

100년 편지

아저씨, 아저씨, 용헌식 아저씨께...  -용환신-



   모습은 전혀 알 수 없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서만 살아 만나 뵙는, 그래서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아저씨, 그런 당신께 편지를 띄운다는 것이 얼마나 송구스러운 짓인지, 그 죄스런 마음이 이 편지 쓰기를 작정할 때부터 가위눌리듯 한시도 떠남 없이 저를 옥죄고 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도 아닌,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할 이야기들을 그 동안 쉬쉬하며 엿들어야만 했던 아저씨 생전의 짧은 삶에 대해 확인하듯 하나하나 짚어야 된다는 것 또한 얼마나 슬픈 일인지 생각할수록 아무 저항 없이 심연의 늪으로 빠져드는 그 자괴감을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저씨, 먼저 고백할게 있습니다. 그래야 편지 쓰는 동안 조금이나마 마음 편할 것 같아서입니다. 아직도 아저씨에 대한 붉은 편견이 집안 내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조작되기도 하고 과대포장 되기도 한 그 몹쓸 병에 갇혀 가슴 닫은 채 지금도 소통하려 하지 않는 집안 내 아저씨에 대한 그 고질적 편견을 말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아저씨를 비호하거나, 그 편견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 이념, 그 무엇보다도 소중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 아저씨의 짧은 삶, 그것도 어둡고 어둡던 시절, 자신을 버리고 단 하나의 꿈을 위해 깜깜한 절망의 언덕에 홀로 서 계셨던 당신의 외로움, 그 막막함에서도 빛을 찾았을 당신의 칼 빛 의로움의 희망을 지금, 조금이나마 공유하고픈 저의 갈증 때문에 그 낙차 큰 생각들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세상을 뜨셨는지 아무도 모르는 아저씨의 최후, 중간 중간 동강난 삶보다 더한 아저씨의 마지막 길에 대해 아무도 알려 하지 않는 이 비겁한 현실에서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요?
   슬픈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로는 당신께서는 해방된 뒤 한 동안 고향땅, 지금은 수원실내체육관자리 대유평 그늘진 언덕 아래 움막 짓고 한 무산아동의 시중을 받으며 사셨다지요.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처럼. 그러다가 6.25 그 비극의 전쟁 중에 영원히 사라지셨고.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사셨더라면, 아주 평범한 가정의 가장으로 그 누구보다 편안한 삶을 누리셨을 텐데, 모든 호조건들을 다 포기하고 오로지 해방된 조국, 공평한 세상을 위해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하셨던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지 않으셨습니까, 아저씨!

   아저씨는 1915년 11월 초하루, 경기도 화성군 일왕면 송죽리 408번지(지금은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408번지)에서 꽤나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느 집 어느 가정보다 더한 행복함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뒤, 아저씨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서울 경복중학교로 유학 가십니다.
   졸업 뒤 오랫동안 교원생활을 하셨다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갑자기가 아니라 오랜 기간 생각의 생각 끝이겠지만) 중국 천진으로 건너가 노동계에 투신하십니다. 그 때가 1940년 봄이었으니까, 일제의 폭압이 극으로 치닫고 있을 때지요. 그러나 병을 얻어 그곳에서의 짧은 활동을 접고 맙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뒷일로 짐작하건대 빈부귀천의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셨던 그 꿈의 첫발을 그곳에서 실천해 옮기기 위해 가신 길이 아니었나 보입니다.

   어쨌든 그해 겨울 고향땅으로 돌아오신 아저씨는 다음해인 1941년 최용범 선생님 등과 함께 양축업을 공동경영하며 무산아동들을 수용해, 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펼치는 동시에 수원 팔달산, 연무대, 그리고 멀리 함안, 당진 등지에서 국내 및 만주와 동경의 독립운동단체와 연계해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실현을 위한 회합과 비밀결사운동을 하셨던 것으로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이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에게 올리는 보고문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집안 내에서의 그 붉은 편견은 바로 이즈음 공산화의 실천에 관한 혐의로 자주 체포, 조사받은 사실에 의한 것이 아니었는지요. 더구나 그 무렵부터 아저씨의 부모님은 물론 형제들, 그리고 친척들까지도 아저씨를 버린 자식으로, 완전 기피인물로 취급했다니까, 남 다른 그 고초를 어떻게 감내하셨습니까? 

   앞서 언급했듯이 1941년 경기도 경찰부장이 경성지방법원에 올린 문서에는 「조선독립을 기도하는 불온계획사건」 외에 용헌식, 최용범, 차준철, 김길준, 맹승재, 강성문, 홍순철 선생님이 함께 참여하신 「불경죄와 조언비어(造言蜚語)사건」 및 「조선인차별대우 및 치안유지법위반」등의 죄목이 나열되어 있는데, 결국 1942년 7월 27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치안유지법위반」죄를 적용받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셨지요.
   출감하신 뒤, 수원지역을 중심으로 벽보(대자보)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시다 해방을 맞이하는데, 그 후 말년의 삶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기록에 의한 것보다 풍문에 의한 것이 대부분으로 비참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저씨, 지금 어디에 말없이 누워계십니까? 그 한 많은 삶을 간직하신 채.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우신 그 뜻이 반쪽짜리 조국, 불공평한 세상이 아닌 것을 알면서 걱정 말고 편히 쉬시라고 쉽게 말씀드릴 수 없음을 용서 하십시오! 아저씨, 슬퍼하지 마십시오. 뒤따르는 발길들이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끝으로, 반가우면서도 한편 안타까운 소식 전해드리면서 부끄러운 이 편지 쓰기를 끝내야겠습니다. 아저씨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던 일곱 동지들 중 맹승재(1923~1969) 선생님께 2006년 독립유공자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2011년 4월 13일

   못난 조카 용환신 올림




 용환신
 

 
  1949년 수원에서 태어남. 서울대 농과대학 졸업
  한국작가회의, 한국문학평화포럼 이사
  시집으로 「우리 다시 시작해 가자」, 「겨울꽃」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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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8 19:20 2011/04/1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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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쉰 세 번째 편지 - 2011년 4월 12일        

100년 편지
 

상옥 형! 미안하고 고마워...  -배재우-


   상옥 형!

   형, E.H.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유명한 말을 했지. 하지만 내 어린 시절, 역사는 ‘먼 일’이었어. 이순신 장군이 배 열 두 척으로 일본의 대 선단을 격파했다거나 강감찬, 을지문덕 장군이 거둔 경이적인 승전보는 재미있는 이야기였을 뿐이지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어
.

▲ 김상옥 의사

   사람들이 ‘서울의 봄’이라 불렀던 1980년에 나는 대학생활을 시작했지. 개강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학도호국단을 학생회로 바꾸는 선거에 참여했고, 4.19를 맞아서는 학생회관에서 무기한 철야농성을 시작했지. 학생회가 채 꾸려지지 않아서 건물 창문을 가리던 빈약한 커튼을 덮고 4월의 차가운 밤을 지새우면서 역사는 점차 내게 구체적인 것으로 다가왔어. 그때 세상은 무난하게 민주주의로 넘어갈 듯 보였지. 그러나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등장과 민주세력의 분열로 허망하게 스러졌고, 거리에는 모질고 시린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어. 군사정권의 이름만 들어도 나는 분한 마음에 눈물이 가슴을 타고 흐르곤 했지. 역사는 내 삶에 진하고 독하게 다가왔어. 시간이 흘러 결국 우리 국민은 민주정부를 이루어냈고 거리에 감돌던 살벌한 풍경은 우리의 일상 밖으로 걷어져 사라졌지. 생살을 긁는 것처럼 생생했던 역사도 더불어 내게서 조금씩 멀어져갔어. 상옥 형은 사담 같은 이런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펼치는 내 속내를 읽을 수 있을까?

   1923년에 형은 의열단과 손을 잡고 장쾌한 의거를 꿈꾸고 있었지. 바로 문화통치를 통해 조선을 회유하려던 일본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는 계획이었어. 그러나 이 거사는 사전에 그 낌새를 포착한 일본 경찰에 의해 은신처가 발각돼 결국 좌절되고 말았지. 어찌 보면 이 계획은 낙타를 바늘귀로 들여보내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하는 것 같은 무모함이 내포된 것이었어. 그러나 형은 역사의 모순이 중첩된 시대에 오직 민족해방에 모든 것을 걸고 집중했어. 바늘구멍처럼 작은 가능성이었지만, 형은 그걸 보고 또 바라보면서 그 바늘구멍의 가능성을 사과의 크기로, 수박의 크기로 확장시켜 갔겠지. 그리고 그 구멍에 온 몸을 던졌다가 산화한 거야. 형이 권총 두 정을 양손에 쥐고 형을 생포하기 위해 겹겹이 둘러싼 일본 경찰들을 뿌리치고 멧돼지처럼 산 속을 향해 달려가 1차 도피에 성공한 것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놀랍고 흥분되는 사건이었어. 그러나 중과부적. 형은 토끼 몰이하듯 달려들던 일본군의 총탄에 결국 벌집처럼 몸이 찢겨나가면서 숨을 거뒀지. 그런데 형이 장렬하게 산화하던 나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렸던 그 나이와 같다니 이것도 의미 있는 일치가 아닐까?

   지난해는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해였지. 나도 이때를 계기로 역사를 바라보는 감성을 다시 벼려보리라 생각했어. 그러나 중년의 일상은 결국 무뎌진 역사의식의 날을 세우지 못했지. 이런 걸 소시민 의식이라는 구차한 말로 변명해야할까. 나는 역사가 날 것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던 형의 시대가 그리울 때가 있어.

▲ 김상옥 동상(마로니에 공원)

   상상컨대 형이 바라본 역사의 끝에는 의로움이 있었겠지.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의로움을 알고 살라는 뜻 일거야. 이제 우리는 형의 분노와 그 분노에 정직하게 답한 형의 삶을 다시 이야기해야 돼. 형이 일본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최후의 도피를 시도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내뱉던 절망적인 숨소리를 다시 들어야 할 거야. 형은 일본제국을 향해 날 선 탄환을 겨누었지만,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의 문화통치에 말려들어 점점 무뎌져가던 우리의 민족의식을 다시 깨우려는 총열이었을 거야. 이제 형이 일본 총독을 향해 겨누었던 탄환은 물신에 물들어 역사의식에 둔감해진 이 시대를 향해 날아와야 해. 형의 분노와 좌절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메마른 가슴에 눈물이 되어 흘러야 할 것이고.... 지금은 상옥 형이 그렇게 소망했던 독립은 되었지만,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의 속에 함께 품었어야 할 역사의 정의까지 획득한 것은 아닐지 몰라. 우리 시대는 여전히 왜곡된 것들이 많아.

   상옥 형, 죽었더라도 잠들지 마. 그리고 일제에 산 채로 잡히지 않으려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형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던 그 손가락을 이젠 우리에게 돌려줘. 형, 미안하고 고마워...



  배재우

   영동CBS 본부장

김상옥(1890-1923)

   구한말 구식군대의 포수로 일하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열 네 살 되던 해에 대장간 일을 배워서 스물 세 살 되던 해에 영덕철물상회라는 공장을 세우며 자수성가했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동대문교회의 야학을 다니면서 항일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일화배척운동에도 앞장섰으며 3.1만세운동 때는 자신이 운영하는 공장의 직원 50명을 이끌고 만세시위에 합류했다. 이후 동대문교회의 청년들과 항일단체인 혁신단을 조직해 지하신문을 발행했으며 이로 인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운동에 한계를 느낀 뒤에는 무력투쟁 노선을 택하고 암살단을 구성해서 일본의 사이토 총독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돼 쫓기다가 자결하였다.

(이 편지는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의 내용에 의거해서 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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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1 15:39 2011/04/1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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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마흔 아홉 번째 편지 - 2011년 3월 15일        

100년 편지
 

현하의 웅변으로 민족혼을 일깨운 여운형(呂運亨) 선생 -강대욱-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마을 생가터에서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걸었고 격동의 해방정국에서는 민족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소용돌이치는 격랑에 몸을 던져 통일된 한국을 실현하려했던 근대역사 인물, 몽양 여운형 선생의 생애를 조명하는 국토기행의 여정이다.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앞에는 기나긴 민족사의 여울목마다 도도한 대서사시를 노래했던 한강의 푸른 줄기가 시원하게 펼쳐졌고 뒤에는 청화산의 지맥이 서쪽으로 흐르다가 불끈 한 봉우리를 만들어 한강을 굽어보는 부용산을 만든 곳. 이곳이 몽양 여운형 선생이 태어난 묘골마을이다. 묘골마을, 생활권내에 필자의 초등학교 양서 초등학교가 있다. 1950년 13세에 졸업을 한 노병이다. 기행문으로 편지에 대신한다.


▲ 묘골마을 여운형선생 기념관 건립현장

   여운형 선생은 이곳에서 1886년 4월 22일 여정현(呂鼎鉉)의 아들로 태어난다. 임신 중 꿈에 해를 안았다는 며느리의 말에 조부는 손자의 아호를 몽양(夢陽)으로 지어준다.

   태어난 무렵은 안팎으로 도전에 직면해 있던 시기다. 봉건체제의 내부 모순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직면하였음에도 이를 주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지 못한 채 풍전등화의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있었던 이른바 한말의 격동기였다.

   여운형 선생의 조부 여규신(呂圭信)은 한학과 수리(數理)에 밝은 청렴 강직한 야인이었다. 여운형의 소년시절은 강개지사로 이름이 나있던 조부의 감화로 자라면서 호방 담대한 기상을 익혔지 싶다.

   묘골의 집은 동대문 밖 영동방면 국도에서 손님을 잘 치르기로 이름 난 집이기도 했다. 가계는 넉넉하지 않았으나 손님 접대는 잘해야 하는 것이 당대 양반대가의 풍습이기도 했던 시기. 이러한 가풍에서 남다른 금도(襟度)를 키운 몽양선생은 청운의 뜻을 펼치고자 서울로 올라와 배제학당에 입학했다가 민영환(閔泳煥)이 설립한 흥화학교(興化學校)에 전학한다. 이것이 1901년인 16세 때다.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상실한 때인 1907년 여운형 선생은 고향의 사랑방에 인근 청년들을 모아놓고 역사, 지리, 산술 등 이른바 신학문을 가르치다가 정식으로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 근대 신학문학교의 효시를 이룬다.

   이 무렵 여운형 선생은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 높았던 이강년(李康年)과 긴밀한 왕래를 하면서 기독교계의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주축으로 하여 우국지사와 애국청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 때는 이들과 항일구국 투쟁을 전개하였고, 비밀결사 조직체인 신민회(新民會)를 통해 애국계몽운동에 열정을 기울이기도 한다.

   여운형 선생의 청년시절은 일제 강점으로 인한 암흑기, 1913년 서간도 각지와 신흥무관학교를 순방하면서 조국광복의 웅지를 키운다. 29세에 중국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 수업을 쌓은 후 33세 상해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 당수에 취임함으로서 독립운동의 거보를 내디디게 된다.

   여운형 생이 혜성과 같이 동아정국의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독립지사로 동경제국 호텔에서의 사자후에 있었던 것.


     ▲  몽양 여운형

 “지난 3월 1일 우리는 독립만세를 절규하여 대한민족이 전부 각성하였다.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은 한국인의 긍정하는 바이요, 한민족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한 바이다. 일본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이 세계는 약소 민족해방, 여성해방, 노동자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이하 생략>”


   1919년 11월 27일 저녁 일본정부 초청으로 동경제국호텔에서 세계 각국 특파원 기자와 각계각층 저명인사 5백여 명 앞에서 행한 여운형 선생의 명쾌한 조선독립 당위성 개진 요지다. 

   다음날 각 신문에 경시청 특별 승낙으로 요약된 연설내용이 번역되어 사진과 함께 보도되자 일본 조야(朝野)는 발칵 뒤집힌다. 일본의회인 귀족원(貴族院)과 중의원(衆議院) 의원들은 여운형 선생에게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독립을 부르짖게 한 책임문제로 정부에 대한 논란과 물의가 일어나 수일간 일대공방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세기의 사자후에서 민족의 호담, 명쾌, 응변, 제압의 웅대한 기상을 내외에 유감없이 선양했던 몽양 여운형선생의 헌걸찬 인간상을 본다.

   험난했던 근대사의 역사무대에서 타고난 역량으로 종횡무진 활약했던 독립지사의 생애는 일제에 의한 투옥과 회유로 점철, 파란으로 이어지지만 그의 족적은 여명기의 어둠을 헤치는 고독한 발걸음이기도 했다.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세계제패를 조선, 중앙일보는 “이 위대한 환희의 폭풍은 적막한 삼천리강산을 범람하고 진감(震?)시킴에 충분하였다”라고 써 민족의 울분을 말끔히 씻어주었고 끝내는 손기정 선수 사진의 일장기를 말살하여 폐간되는 비운을 겪음으로서 그의 중앙일보 사장시절은 신문의 운명과 함께 종말을 고한다.

   어쨌든 어두운 시기에 국내에서 또는 해외에서 국권회복과 민족통일을 위해 노심초사 뛰어난 활동을 펼침으로써 시대가 요구하는 혁명가, 정치가, 언론인으로서 일신을 희생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생애는 이 땅의 역사,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늘 푸르게 살아있는 헌앙한 기상이다.

    해방직후 급박한 전환기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민족통일의 경륜을 펼치려던 조국애에서 수난의 역사를 희망의 역사로 만들어 가려고 노력한 열정과 실천의 지도자상을 본다. 당당한 풍모, 탁월한 식견, 현하(懸河)의 웅변을 겸비한 합리주의 민족운동가가 걸어온 근대역사의 장(章)에서 통일의 염원이 강물 되어 흐르고 있다.



  강대욱


   전 경기도박물관장.
   저서인 <이화우 흩날릴제>, <발길에 세월을 묻고>에 수록된 내용을
   ‘100년편지’로 정리해 주셨다.



여운형 [呂運亨, 1886.5.25 ~ 1947.7.19]
 
  1886년 경기도 양평(楊平)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집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우고, 강릉에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국권이 피탈되고 학교가 폐쇄되자,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8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발기하여 김규식(金奎植)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이 되었는데, 일본정부는 이를 자치운동(自治運動)으로 회유하고자 그 해 11월 그를 도쿄[東京]로 초청하였으나 오히려 장덕수(張德秀)를 통역관으로 삼아 일본의 조야(朝野) 인사들에게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1920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하였고, 1929년 제령(制令)위반죄로 3년간 복역하고, 1933년 출옥,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1936년 신문이 일제에 의하여 정간되자 사임한 후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8·15광복을 맞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년 암살되었다.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된 데 이어 2008년 2월 2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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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15:42 2011/03/1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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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마흔 두 번째 편지 - 2011년 1월 25일        

100년 편지
 

夢寐에도 그리는 내 아버지 夢牛 權泰錫선생께 -권영관-


   꿈속에서라도 한번 만나 보고픈 아버지!

   제 기억 속에서 그려지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불행하게도 저에게는 없습니다.

▲ 권태석 선생

   제가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나이도 되기 전에 아버지께서는 저희들만을 남겨 두시고 저 머나먼 하늘나라로 훌쩍 떠나가 버리셨기 때문이지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것 때문에 겪는 고통의 의미를 아마 아버지께서는 모르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스스로 선택하여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을 걸으셨으니까요. 그것도 대감급의 벼슬을 사신 댁의 자제로 태어나시어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방식을 빌어 그토록 힘든 세상을 사셨으니까요. 그러한 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처럼 보통의 평범한 삶을 사셨다면 아버지께서는 험난한 세상을 잘 모르신채 호의호식하며 사실 수 있었을텐데요.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시어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라셨을 텐데 어찌하여 나라의 은혜를 입고 또한 온갖 것 다 누리고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본을 따르지 않으셨는지요. 지난 역사에서 보면 이 나라에서는 언제나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면 가진 자들과 지배층은 가족들 챙겨 피난가고 민초들만 변변치 않은 무기로 목숨바친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았는지요. 그랬더라면 우리 남매들 잘 살았을 텐데요. 이것이 당신께서 생각하신 노블레스 오블레쥬 였는지요.

   당신께서 지나신 길이 대한민국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주의자의 운동권(?)에 속하신 까닭에 저희들은 혹여 누군가 우리를 알아볼까 숨죽이며 살았다면 지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실런지요.

   늦게나마 2006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이라도 추서받으시어 작은 한풀이라도 하셨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것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아버지께서 생전에 이룩하신 업적이 저희들로서는 너무나도 컸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식이기 때문에 느끼는 저희들만의 생각일까요! 아버지를 원망하기 앞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는 안목과 그들의 잣대가 새삼 의심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은 비단 저만의 생각은 아닐 듯합니다.

   스물다섯 풋풋한 나이에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시어 적지 않은 돈을 흔쾌히 쾌척함으로써 이를 운동자금으로 삼아 여러 계획을 추진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획하신 거사를 이루지도 못 하신 채 영어의 몸이 되어 버린 점은 너무나 아쉬운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할아버지께서 김천에서 일가를 이끌고 서울로 이사하셨다는 사실을 공적조서를 작성하기 위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왜 일가친척들이 어린 저희들에게 당신으로 인하여 일가친척 모두가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원망하는 얘기를 했었는지 그 연유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학창시절 생활이 어려워 고초를 겪으며 지냈고 등록금 못 냈다고 학교에서 쫓기는 일을 겪으면서 자랐지만 그래도 저희들 남매들은 항상 자랑스런 아버지를 가졌다고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 왔습니다. 제가 대학시절 데모주동자로 붙잡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형사가 “우리는 너희들의 아주 비밀스런 내력도 다 알고있다”고 겁박을 할 때는 솔직히 겁도 났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신간회 간부로 활동하시다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일제 검거시 다시 감옥살이의 고통을 겪으시며 왜놈들의 온갖 고문을 받은 것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이 전기고문이었다고 말씀하셨다는 얘기를 듣고는 어린 제가 무얼 안다고 눈물을 흘리며 애태웠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이 일로 인해 또다시 영어생활을 하시자 우리 일가친척들은 충청도 옥천으로 또 이사를 하게 되었다지요. 제가 듣기에는 당시로서는 이렇게 옮겨 다니는 것이 아주 드문 일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해방 후 몽양선생과 함께 건준활동을 하시고 통합 한독당을 만들 때 애쓰신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만 아버지께서 보여 주신 이후의 정치적 이념과 그에 따른 행동을 젊은 시절에는 저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물며 제3자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저도 정치학을 전공하여 조금은 알거든요.

   그러나 이제 세상이 달라지고 저도 성장하여 나이를 먹고 난 후에야 아버지께서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어려운 처지에 처할 것을 알면서도 모스크바 3상회의를 찬성하시어 한독당으로부터 제명까지 당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의 행태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으나 원래부터 갖고 계시던 민족주의 신념을 이루고자 하신 결단이었다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아버지!

   이것만이 민족분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길이라는 신념에서 하신 행동이었다고 믿어도 되겠는지요? 아버지.

   사실 저는 아버지가 가지신 이념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오늘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꿈속에서라도 뵙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반의반도 못 따라가는 못난 아들 영관이가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버지의 평생소원이었던 통일을 꼭 이룰 수 있도록 지하에서라도 생전에 하셨듯이 애써 주십사 하고...




  권영관



  권태석 선생 子

권태석 [權泰錫, 1895. 8. 18~1948. 8. 23 ]

   독립운동가.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서울청년회, 조선공산당, 신간회 등의 단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조선민족대동단에 참여하여 활동했으며, 이로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에도 꾸준히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가담했고, 조선민흥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한 신간회의 서무부장 및 총무간사로 활동했으며,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6년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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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5 11:08 2011/01/2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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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서른 일곱 번째 편지 - 2010년 12월 21일        

100년 편지

단재(丹齋) 선생님께 올립니다.  -양진호-



   어젯밤 꿈속에서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캄캄한 밤, 눈보라치는 벌판에서 흰 저고리를 입고 단아 하면서도 결기에 찬 모습으로 눈보라를 헤치고 걸어오시는 모습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눈빛은 흰 눈보다 더 빛나고 있었고 오산학교에서의 침묵 강연이 오버랩 되면서 꿈에서 깨었습니다. 선생님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丹齋 신채호 선생

   당신께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배움을 써야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성균관 박사로서 얻을 수 있는 벼슬을 내던지고 찢기고 찢겨 누더기가 된 산하와 일제에 고통받는 민족을 구하고자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고 오직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만이 조국 광복과 나아가 한민족이 인류 평화의 주체세력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시고, 광활한 만주 벌판을 말달리던 선조들의 모습을 살려내어 사대에 찌든 거짓 역사의 장막을 찢어 버리고 우리가 자랑스러운 배달겨레의 자손임을 일깨워 주신 참된 역사가요, 언론인이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께서 가신지 어언 70여년이 지난 지금,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아직까지도 역사를 제대로 찾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으며 지금의 현실은 100년 전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에서 나와 하나로 돌아간다는 우리의 천부경 사상, 사람뿐만이 아니라 세상만물 모두를 이롭게 하자는 그 찬란했던 고조선의 홍익정신이 썩어빠진 사대주의자,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맥이 끊긴 지금 민족은 민족대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종교는 종교대로 이념은 이념대로 사상은 사상대로 서로 갈라지고 찢어져 단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정신은 퇴색되어지고 오직 돈만 아는 무서운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땅은 광복이 되었다하나 우리 스스로가 누구의 자손인지 누가 우리의 국조인지도 모른체 아직까지도 제 정신이 아닌 노예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조상님들 뵙기가 너무 두렵습니다.

   이에, 선생님께 다짐합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은 새들의 길이 있고,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은 물고기들의 길이 있듯이 인간은 인간의 길이 있습니다.

   저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바른 길을 가겠습니다. 당신께서 그토록 염원 하셨던 우리의 바른 역사를 전하여 민족혼을 깨우고 이 땅에 다시는 나라 잃은 설움,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런 단군의 자손으로서 지구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홍익인간이 되겠습니다.

   바른 역사의 깨침을 주신 선생님께 영원한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단기 4343년 11월 30일
 
   후손 양 진호 올림





  양 진 호


  우리은행 연세세브란스 지점 차장.

신채호(申采浩, 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 사학자이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견해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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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1 16:05 2010/12/2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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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서른 여섯 번째 편지 - 2010년 12월 14일        

100년 편지

백범 김구 선생님  -이종호-


   백범 김구 선생님.

   <독립정신 답사단> 제1차(2005년) 및 제6차(2010년)에 참가하였던 이종호입니다.

▲  경교장 앞에서 김구 선생이 둘째 아들 신과
손녀 효자와 함께 찍은 사진(1948년)

   상해부터 1945년 8월 당시 임정 본부였던 중경까지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임정 요인들이 그야말로 극심한 고초와 불편을 겪으면서도 조선의 해방이란 한 가지 일념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해방 직후부터 남북이 갈라진 상태가 현금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아마도 예상치 못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백범 선생님이 더욱 놀라실 것은 친일파 청산이 2010년이 된 상금까지도 마무리되지 않아 이들 처리를 놓고 계속 응어리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독일의 나치 통치를 겪었던 유럽의 각 국에서는 한국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독일에 점령되었던 각 국이 독일의 치하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치 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처리했습니다.
   더구나 가해국인 독일조차도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 등을 통해 나치지도부를 숙청했습니다. 서독이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서방국의 대열에 성공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도 각 국에 큰 피해를 준 나치전범을 철저히 사법 처리하여 후유증을 최소한으로 줄였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나치부역자 청산에 대해 말씀드리면 영국에서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이끌던 드골은 1944년 8월 25일 폰 콜티츠 독일군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자 개선장군으로 입성한 후 나치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정리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의 반역자, 나치협력자들의 숙청방침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나치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腫瘍)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드골의 주장은 매우 단순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나치협력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이 만든 썩은 종양들이 종국에는 나라를 모두 부패시켜 프랑스를 망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드골은 초반부에 유명 언론인과 지식인들, 그리고 비시 정권의 최고지도부를 심판해 가혹할 정도로 엄벌을 내린 후 비시정권 공직자들, 지방공무원들, 사법부와 군부, 교육계와 경제계, 출판인과 연극인 및 영화계, 미술계, 석학집단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나치협력자들을 차례로 숙청했습니다. 이와 같이 철저하게 나치부역자들을 숙청했는데 프랑스의 숙청 논리는 다음 말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나치전체주의에 ’민족의 혼과 정신‘을 팔아먹은 민족반역자는 프랑스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나 마찬가지다.’

   드골은 프랑스를 팔아먹은 사람은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프랑스는 매국노가 아닌 프랑스인에 의해서 건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프랑스점령기간 동안에 프랑스를 위해 싸운 레지스탕스들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보상과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점이 바로 프랑스가 해방된 후 다른 나라와 같이 좌파와 우파가 분리되었음에도 극심한 혼란을 겪지 않고 국민 전체가 나치협력자 색출과 조국 건설에 앞장 설 수 있게 된 요인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합니다.

   한국에서 프랑스처럼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프랑스와 한국의 상황이 똑같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는 친일부역자의 청산 방법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차후에 이런 상황이 또 다시 벌어졌을 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나치부역자 청산은 귀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00년을 맞이하여 백범 선생님이 돌아오실 때 이런 어정쩡한 상황이 어떤 방법으로든 말끔하게 해결되어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편지를 드립니다.

   이종호 드림




 이 종 호


 
한국과학기술원(KIST) 박사.

김구(金九, 1876. 8. 29. ~ 1949. 6. 26.)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백범일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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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6 15:52 2010/12/1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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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서른 세 번째 편지 - 2010년 11월 23일        

100년 편지

진정한 독립을 생각하며  -송정선-


 

   1945년 8월. 일왕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게 되고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36년간의 어둠의 세월을 뒤로한 채, 우리 민족에게는 밝은 빛과 같은 미래의 희망이 다가올 것만 같았습니다.


▲ 중경에서 귀환 직전의 임정요인들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임시정부요인들은 미군정의 요구로 개인자격으로 조국땅을 밟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것도 아니였지만 일제에게 갓 해방된 우리는 이념을 달리한 더 강한 군대의 통치를 받게 되고, 그 속에서 서로 다른 이념으로 물들어 가게 됩니다. 분명 우리는 일본이라는 거대한 적에 맞서 투쟁했었지만 이념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무언가를 등에 업고 같은 민족끼리 싸우게 됩니다.

   전쟁이 나고, 수백만명이 죽고, 우리는 형제이지만 이제는 강대국의 등 뒤에 숨어서 서로를 욕을 하며 비난 하며, 겉으로는 자주를 외쳤지만 실상은 온실 속의 화초보다도 못한 상황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내 나라가 없던 시절 외치던 자주 독립은 이제 어디에도 없고, 반쪽으로 갈라진 남한, 북한만 남게됩니다. 이 시기의 기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기회만을 엿보며 남쪽에서는 조선말하는 일본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자신의 허물을 덮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두 번 죽였으며, 북쪽 또한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세력들은 사회주의 이념을 보기 좋게 포장하여 자신들의 견제세력을 숙청합니다.

   이념만 다를 뿐이었지, 다른 행동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이념 속에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기회만 엿 본 기회주의자들일 뿐이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한쪽에서는 3대 째 권력을 세습한다고 난리법석을 떨고 있고, 한쪽에서는 민주화는 이뤘는데 사람들은 독재정권시절을 더 그리워하는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순국선열님들이시여...

   두 쪽으로 갈라진 조국을 바라보고 계신 순국선열들이시여..

   분단된 조국을 얻으려 여러분들은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분들이 가졌던 꿈과 이상과는 다르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전쟁이 무언지도 일본에게 나라를 어떻게 빼앗겼는지도 젊은 세대들은 잘 모릅니다. 아니 그냥 시간의 흐름 속에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자주적인 힘을 갖자고 외치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남쪽에서는 '좌빨'이라고 부르는 웃지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친일 조상의 재산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걸고 또 법원은 친일후손의 손을 들어주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찾으려 했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습니까?

   광복절이 되면 성조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고 분단된 채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으르렁대는 나라였습니까?

   오늘도 순국선열님들께 죄스러운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조국을 지켜주세요.

 




 송정선


 충북대학교 대학원 임상심리전공. 제3기 독립정신 답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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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3 15:48 2010/11/23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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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서른 두 번째 편지 - 2010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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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아버지  -윤경자-


 
 

▲ 윤기섭

[尹琦燮, 1881~1950] 

  1911년 간도에서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등과 군관양성을 위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신흥학교의 교사로 10여년간을 재직했다.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1923년 6월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군사교육서인《보병조전 步兵操典》을 발간했으며, 1926년 김구(金九) 내각에 이규홍(李圭洪)·김철(金澈) 등과 입각하여 선전을 책임지고 활동하였으며, 1927년에는 개헌안 기초위원, 1930년 군사위원회 위원장, 1933년 군무차장을 역임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중책을 맡았으며, 광복 직전인 1944년에는 김원봉(金元鳳)이 주임을 맡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학편찬위원 부주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8·15광복 뒤 귀국하여 1946년 좌익세력의 연합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부의장·상임위원을 지냈으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선출되어 부의장을 맡았으나, 6·25전쟁 때 북한에 납북되었다. 그 뒤 1959년 북한 정권은 그를 반혁명분자로 몰아 숙청했다. 한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윤경자


  윤기섭 선생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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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7 10:05 2010/11/1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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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서른 한 번째 편지 - 2010년 11월 9일        

100년 편지

참 언론의 사표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  -정동익-


 

   단재 신채호 선생님.

   요즘 우리나라 언론이 돌아가는 꼴을 보노라면 울화가 치밀 때가 많습니다.

   북녘 동포들이 끔찍한 수해를 입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는데도 대부분의 언론들이 외면하고 있고 한술 더 떠 방해 여론까지 조작하고 있습니다.

▲ 단재 신채호 [1880.12.8~1936.2.21]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사학자·언론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활약하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천안함 사태의 진실을 캐기 위한 노력도 찾기 힘듭니다.


   이러한 때 불의한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참 언론인의 길을 걸으신 선생님이 더욱 그립습니다.

   선생님의 삶은 한점 흐트러짐 없는 치열한 혁명가의 삶, 그 자체였고 참 지식인의 전형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일제의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직접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며 서릿발같은 자세로 글을 쓰고 일제와는 터럭만큼도 타협하지 않았던 불굴의 애국언론지사셨습니다.


   그리고 사학자로서 <조선상고사>, <조선혁명선언>등 수많은 노작들을 집필하여 민족혼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서셨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제국의 연호를 쓰는 국내신문에는 글을 쓸 수 없다고 연재를 거부했습니다.

   이같은 선생의 기개와 선비정신은 역대 독재정권에 부역하고 민중을 배반하고도 조금도 부끄러운줄 모르는 한국의 많은 언론인들에게 귀감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제 때 내선일체를 부르짖고 청년들을 징용으로 내몰던 언론인들, 5.16쿠데타를 올 것이 왔다고 미화하고 광주 민주항쟁을 폭동으로 매도하던 언론인들이 한번도 국민 앞에 사죄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권력의 주변에 내노라하는 언론인들이 몰려들고 언론탄압에 가세하는 모습들을 볼 때 선생님 같은 기개 있고 올곧은 언론인이 새삼 그리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사로서의 언론인, 민족사적 과제를 안고 고민하고 실천하는 언론인을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 언론계에 선생님의 참 언론인 정신을 따라 배우게 할 필요가 절실합니다.


   진실보도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언론인, 사회적인 약자들 편에 서서 정의를 실현하는 언론인,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언론인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단재선생님을 따라 배우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역사를 연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힘 있는 글을 쓰고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희생된 선생님의 일생이야말로 언론인 정신을 잊고 사는 요즘 언론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사표가 돼야 마땅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언론자유가 위협받고 있으며 남북관계가 얼어붙어 통일의 길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단재선생님의 언론정신을 일깨워 우리 언론의 나아갈 길을 분명히 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높은 뜻이 이 땅에 꽃 필 수 있도록 굽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정동익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전 동아투위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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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0 15:41 2010/11/1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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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서른 번째 편지 - 2010년 11월 2일        

100년 편지

가지 않은 길을 가신 증조부님께  -양인선-

[발안 독립만세향쟁을 이끌다 순국하신 탄운 이정근님께 증손부가 띄우는 편지]

 

   이른 아침 서둘러 동네 뒷동산에 올라 봅니다. 지난번에 남겨 놓았던 남들이 잘 가지 않는 산길을 따라 걸어봅니다.

▲ 탄운 이정근 의사

   사람이 많이 다닌 큰길이 아닌 저 작은 사잇길을 따라가 보면 어디에 다다를까? 어떤 흙냄새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이골 저 골을 오르내려봅니다. 금방 괴한이 불쑥 나타날 것 같기도 하고, 어째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져 서둘러 돌아 나왔습니다. 멋쩍게 뻗은 리키다소나무들 사이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조선소나무 ‘적송’의 기품이 느껴집니다. 그저 복에 겨운 낭만의 길이지요.

   문득 시증조부님이 가신 길을 생각해봅니다. 그 시절 대부분의 민중들이 서슬 퍼런 일제치하에서 숨죽이며 하루하루를 견디어 내고 있을 시기에, 증조부님이 가신 길은 죽음을 각오한 외롭고, 두렵고 그러나 치열한 삶의 길이었습니다.

   대한제국 궁내부에 봉직하면서 열강 침략의 국제정세를 목도하고 황실이 주도하는 광무개혁의 중심에서 국정에 참여하셨습니다. 1905년 치욕스러운 을사늑약 체결로 국권을 강탈당하자, 사직하시고 고향에 내려와 고향 7개 면을 두루 다니시며 후학을 가르치고 힘을 길러 독립투쟁을 위한 지하조직을 구축하시며 언젠가는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분투하셨습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의 승하 소식이 전해지자, 주민을 이끌고 매일 밤마다 산에 올라 횃불을 들고 망곡제(望哭祭)를 올리고 저항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드디어 서울에서 3?1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동지들과 결사적인 독립투쟁을 결의하였습니다. 3월30일 발안 장터에 운집한 천여 명의 제자, 동지, 군중들을 이끌고 ‘독립 만세’와 ‘독립가’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였습니다.

   맨 앞에서 일경에 맞서신 증조부님의 그 죽음의 길을 생각해봅니다. 일 헌병의 총칼에 복부를 난자당하여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도 ‘독립 만세’를 외치셨다지요. 지금도 그 자리에 무심히 자리 잡은 발안파출소 앞에 서면 그날의 뜨거웠던 민중의 함성이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증조부님! 십여 년 전 일본의 민간단체에서 일제 때 화성 일대에서 자행된 잔학한 수탈과 만행에 대해 사죄하러온 일본인들이 있었어요. 그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저의 시할머님(증조부님의 며느리)과 할머님의 친동생 동막골 할아버지로부터 그날의 흰 두루마기를 적신 붉은 피를 회상하며 몸서리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자리에서 “다 지난일인데 이제 무슨 사죄를 청하냐”며 용서한다고 편히 앉으라고 하시던 시할머님의 소박하고 너그러우셨던 사랑이 그립습니다.

   할머님의 말씀처럼 정말 과거역사를 쉽게 잊고 용서 할 수 있을까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하는 데요.

   증조부님! 지난 여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 독립정신 답사단의 일원으로 옛 독립군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 중원 지역을 답사하였습니다. 답사 마지막 날 이만열 단장님의 강의에서 하신 말씀 “역사를 오늘로 산다.”는 문구가 저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화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역사를 오늘로 살 수 있을까?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 많은 독립투사들! 그분들이 조국을 떠나 이국땅을 떠돌며 갖은 고생과 수모를 겪으며 이루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혹독한 식민치하의 감시와 핍박 속에서도 죽음을 무릅쓴 저항이 쌓이고 쌓여 ‘민족 독립’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일제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은 올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그분들의 희생에 힘입어 되찾은 나라이지만 지금 진정 일제 식민잔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나 한 것인가?

   아직 길은 멀고 무언가 자꾸 꼬여가는 느낌입니다. 오천년을 이어온 우리의 소중한 역사와 문화유산이 일제36년에 의해 얼마나 많이 왜곡되고 단절되고 사라졌는지. 한번 잃은 나라를 되찾고 정상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하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올해 3월, 여러 독립운동단체와 그 후손들과 많은 주민들이 참석해 증조부님의 91주기 추모행사를 가졌습니다.

   오늘도 증조부 탄운 이정근의사 창의탑에 탐스럽게 핀 국화분을 놓으며 순국선열집안의 며느리로서 독립투쟁의 역사를 오늘로 살 것을 다짐합니다.

2010년 11월 탄운 이정근 의사의 증손며느리 양인선 올림

   

양인선

탄운 이정근의사 증손부. 제6기 독립정신 답사단 참여.

이정근[1856~1919]

   대한제국 궁내부에 근무하던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강탈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 1919년 순국하기 전까지 15년간 청년들을 가르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투쟁을 위한 비밀조직을 구축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결사적 독립투쟁을 위해 제자와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30일 발안 장날에 맞춰 수천의 주민들을 이끌고 발안 장터 횃불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현장에서 일제 헌병의 총칼에 순국했다. 이후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고 1994년 대전국립현충원 제2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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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4 13:30 2010/11/0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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