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쉰 번째 편지 - 2011년 3월 22일        

100년 편지
 

나의 소원을 언제 이루려나? -박인배-


기자 : 안녕하세요, 백범선생님. 인터넷 블로그 기자 박인배입니다.

백범 : 반갑소. 블로그 기자 인터뷰는 처음이외다.

▲ 김구 선생과 나의 소원

기자 : 그동안 언론 환경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누구나 기사를 쓸 수 있고, 그 글을 읽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면 곧 바로 널리 퍼지게 됩니다.

백범 : 내가 바라마지 않았던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백 퍼센트)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가 하루 빨리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가 생깁니다.


기자
: 요즈음 우리나라 정치에 가장 바라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백범 : 나의 소원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기자 : 어떤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에 대한 주장은 지금과 같은 세계화의 시대에 별로 설득력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백범 : 근래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고 하니,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 할밖에.


기자 : 세계무역이 공정하지 못하게 이루어지는 사례들이 많기는 하지만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국경을 넘어서 확대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백범 :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요.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 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자 : 그 완전한 자주독립에는 예전에 주장하신 바와 마찬가지로 통일된 민족국가가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까?

백범 : 예전이나 지금이나. 철학도 변하고 정치 ?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지만 민족의 혈통은 영구합니다. 일찍이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서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게 됩니다.


기자 : 쏘련이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학설로 여러 민족이 합친 나라를 만들었지만 백 년도 못가서 각기 원래의 민족국가로 돌아갈 것을 예견하셨다고도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남북분단도 위와 같이 전망할 수 있겠습니까?

백범 :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기자 : 마지막 질문 하나 드리고 끝맺겠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셨으니 전직 대통령님에 해당하시는데요, 차기 대통령 후보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은요?

백범 :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는 것이외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의 국민을 움직여야 합니다.



  박인배

   공연연출가.
   1999년 백범서거 50주기 특별공연 "못다한 사랑 - 백범김구" 연출.

   김구(金九, 1876. 8. 29. ~ 1949. 6. 26.)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백범일지〉가 있다.

※ 위 글에서 백범의 대사는 『백범일지』하권 마지막 장 「나의 소원」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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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17:50 2011/03/2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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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여섯 번째 편지 - 2010년 12월 14일        

100년 편지

백범 김구 선생님  -이종호-


   백범 김구 선생님.

   <독립정신 답사단> 제1차(2005년) 및 제6차(2010년)에 참가하였던 이종호입니다.

▲  경교장 앞에서 김구 선생이 둘째 아들 신과
손녀 효자와 함께 찍은 사진(1948년)

   상해부터 1945년 8월 당시 임정 본부였던 중경까지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임정 요인들이 그야말로 극심한 고초와 불편을 겪으면서도 조선의 해방이란 한 가지 일념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해방 직후부터 남북이 갈라진 상태가 현금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아마도 예상치 못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백범 선생님이 더욱 놀라실 것은 친일파 청산이 2010년이 된 상금까지도 마무리되지 않아 이들 처리를 놓고 계속 응어리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독일의 나치 통치를 겪었던 유럽의 각 국에서는 한국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독일에 점령되었던 각 국이 독일의 치하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치 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처리했습니다.
   더구나 가해국인 독일조차도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 등을 통해 나치지도부를 숙청했습니다. 서독이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서방국의 대열에 성공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도 각 국에 큰 피해를 준 나치전범을 철저히 사법 처리하여 후유증을 최소한으로 줄였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나치부역자 청산에 대해 말씀드리면 영국에서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이끌던 드골은 1944년 8월 25일 폰 콜티츠 독일군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자 개선장군으로 입성한 후 나치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정리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의 반역자, 나치협력자들의 숙청방침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나치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腫瘍)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드골의 주장은 매우 단순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나치협력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이 만든 썩은 종양들이 종국에는 나라를 모두 부패시켜 프랑스를 망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드골은 초반부에 유명 언론인과 지식인들, 그리고 비시 정권의 최고지도부를 심판해 가혹할 정도로 엄벌을 내린 후 비시정권 공직자들, 지방공무원들, 사법부와 군부, 교육계와 경제계, 출판인과 연극인 및 영화계, 미술계, 석학집단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나치협력자들을 차례로 숙청했습니다. 이와 같이 철저하게 나치부역자들을 숙청했는데 프랑스의 숙청 논리는 다음 말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나치전체주의에 ’민족의 혼과 정신‘을 팔아먹은 민족반역자는 프랑스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나 마찬가지다.’

   드골은 프랑스를 팔아먹은 사람은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프랑스는 매국노가 아닌 프랑스인에 의해서 건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프랑스점령기간 동안에 프랑스를 위해 싸운 레지스탕스들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보상과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점이 바로 프랑스가 해방된 후 다른 나라와 같이 좌파와 우파가 분리되었음에도 극심한 혼란을 겪지 않고 국민 전체가 나치협력자 색출과 조국 건설에 앞장 설 수 있게 된 요인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합니다.

   한국에서 프랑스처럼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프랑스와 한국의 상황이 똑같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는 친일부역자의 청산 방법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차후에 이런 상황이 또 다시 벌어졌을 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나치부역자 청산은 귀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00년을 맞이하여 백범 선생님이 돌아오실 때 이런 어정쩡한 상황이 어떤 방법으로든 말끔하게 해결되어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편지를 드립니다.

   이종호 드림




 이 종 호


 
한국과학기술원(KIST) 박사.

김구(金九, 1876. 8. 29. ~ 1949. 6. 26.)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백범일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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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6 15:52 2010/12/1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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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일곱 번째 편지 - 2010년 8월 3일        

100년 편지

부강하기보다는 아름다운 나라를... -김별아-

[소설가 김별아씨가 쓴 ‘후손들에게 보내온 백범의 편지’]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 백범 김구(1876.8.29~1949.6.26)

독립운동가. 정치사상가.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내가 머무르는 이곳 하늘의 집에 들어온 지도 벌써 반백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생전에 간절히 꿈꾸었던 것처럼 자유와 평등과 평화가 있고 구속과 착취와 폭력이 없는 이곳에서 나는 깨끗이 마당을 쓸고 열심히 창문을 닦는 문지기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신명을 모다 바쳤던 동지들의 영혼이 함께 있어 외롭거나 적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아름다운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집을 지상에 짓고자 했던 소망을 못다 이루고 홀연히 떠나온 것이 그대들에게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 못난 늙은이의 소망을 그대들이 꼭 실현하시리라는 것을 믿기에 안타까운 마음은 접어둡니다.

   오늘 뜰 안에서 휴지를 줍다가 문득 헤아려보니 올해가 바로 극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의 마수에 국권과 인권을 빼앗긴지 꼬박 100년이 되는 해더군요. 불평등한 강화도조약 이후 이십여 년을 야금야금 뜯어 먹히다가 마침내 합병이라는 가증스런 이름으로 호랑이 아가리에 통째로 삼켜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를 ‘썩어진 민족’이라고 자탄하는 사람들 속에서 얼마나 큰 분노와 통한을 느꼈는지요! 하지만 그대로 비탄 속에 주저앉아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찬바람이 휘부는 늦가을 밤에 뜨거운 심장을 지닌 동지들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광복전쟁을 벌일 채비를 했습니다. 아무리 길고 지난한 싸움이라도 끝끝내 포기할 수는 없다고 다짐했습니다.

   새로운 백성의 나라, 한두 영웅이 아닌 인민 전체의 나라를 만들자는 우리의 결의는 마침내 1919년 3.1 만세운동의 피와 눈물을 거름삼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우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통치에 ‘감읍’해 ‘박멸’된 줄만 알았던 민족정신이 펄떡펄떡 숨 쉬며 살아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목이 베어지고 팔이 떨어져나가고 혀가 뽑히면서도 만세를 불렀습니다. 젊은이와 늙은이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조선의 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만세의 목청을 돋웠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온전히 그것입니다. 무엇으로도 훼손시키거나 능멸할 수 없는 우리의 자존입니다.

   비록 우리 손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광복군의 참전을 준비하던 중에 일제의 항복에 의해 벼락같은 해방을 맞게 되었지만, 그리하여 국제질서를 명분으로 내세운 강대국들의 이전투구에 조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또 다른 비극을 겪게 되었지만, 나는 목숨이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가 영웅이 되고 주인이 되는 나라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가 지상을 떠나온 후 오십여 년 동안 전쟁과 독재 등 숱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후손들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그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확고부동해져만 갔습니다.

1945년 11월 23일 김포비행장을 통해 귀국하는 백범 김구. 뒤로 흐릿하게 당시 하지 미군정 사령관이 보내온 C-47 수송기가 보인다. 당시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김구 일행은 임시정부 주석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후손들이여, 나는 오직 그대들이 행복하기만을 바랍니다. 부강하기보다는 아름다운 나라, 스스로를 지키고 드높이는 동시에 남들까지도 행복하게 하는 나라를 만들 때까지 아무러한 고통이 그대들의 현실을 곤고하게 할지라도 결코 희망과 투지를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큼만 공부하고 싸우고 꿈꾸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현명함과 우둔함, 귀함과 천함, 가난함과 부유함, 강함과 약함을 다 떠나 나만큼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이자 가장 평범한 사내인 범부를 자청하였기에, 그대들 중의 어느 누구도 나보다 못할 리 없습니다. 아니, 그대들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을 더욱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후손들이여, 나는 이곳에서 항상 그대들을 지켜볼 것입니다. 그대들도 아주 가끔씩은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는 나를 기억해 주세요. 그 순간 우리는 백 년이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만나는 것입니다.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소설가 김별아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3년 실천문학에 중편소설 <힌 문 밖의 바람소리>로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미실>, <영영이별 영이별>, <백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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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3 17:27 2010/08/0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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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편지 - 2010년 4월 24일        

100년 편지

백범 김구 선생님께  -이영후-

[MBC 정치드라마에서 백범 역을 맡았던 이형후가 올리는 편지]


   선생님,

   올해는 우리 임시정부가 탄생한지 91주년 되는 해이고 앞으로 2019년이면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 갈 때 마구 헤 짚고 다니지 아니 하고 거룩한 발자국만 남기신 그 마지막 끝 날도 이제는 61 주년이 되었습니다. 저희들이 마음을 모아 이렇게 굳이 날 수를 헤아려 보는 뜻은 평생에 방략<方略>을 가지고 살아가신 선생님의 큰 뜻의 날 수들이 이미 오늘을 사는 저희들에게 그 어느 것 보다도 소중하고 정확한 나침반이 되어 있기에 다시 짚어 보는 것입니다.
 

▲ 백범 김구

   1896년 2월, 나라는 있으되 방략이 없었고, 허울만 있으되, 그야말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왕권 대신, 21살의 젊은 나이로 혼신의 용기를 가지고 국가의 책무를 스스로 짊어 지셨던 안악군 치하포의 방략, 1906년 학교<해서교육회>를 세워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힘이 없는 권력은 허상이다>라는 방략으로 평생을 노도처럼 살아오신 생님의 행적이 이 시대에도 변함없는 표준이 되어 계시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요즘에 말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셨습니다. 모두가 다 아전인수 격으로 선생님을 농락하고 이용 했을 뿐, 소위 말하는 전투적인 사상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먼, 예언자의 가시 밭 길, 고난의 험한 역정이셨던 걸 저희들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안두희가 선생님 가슴에 총을 겨누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을 때, <쏘아라, 이놈!> 하시면서 호통 치시던 선생님께서는 이미 그 모든 걸 소상하게 짐작하고 계셨던 걸 저는 압니다. 이 세상에서, 정녕 말로 만 되는 것이 있었더냐?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행동만이 그 소임을 다 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 나를 굽히고, 나를 누이는 희생, 그 절망처럼 보이는 거룩한 희생이야말로 그 어느 누구라도 설득할 수 있다는 영원한 진리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 말입니다. 요괴 인간의 총뿌리 앞에 가슴을 헤쳐 보였던 백범, 독살스런 군중 앞에 몸을 드러내었던 간디, <다 이루었다>로 예언을 실천한 구원자의 그 치열한 사명만이 오늘도 우리의 변함없는 표준이며, 이것 말고, 어디서, 누구에게, 또, 그 무엇을 가지고 이 지고지선의 덕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그렇게 우려하시고 반대 하셨던 분단과 반목, 정파적 이익이나 권력의 무자비한 전횡뿐만 아니라, 그 어느 것 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인간 타락의 근원적인 문제가 오히려 더 두렵고 어렵다는 사실을 먼저 보셨기 때문이라는 걸 지금의 저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반상관념에 찌든 우리들 의식 속에서, 백정보다도 낮은 천민을 자처하신 백범선생님, 저희가 지금, 비록 반대와 대결로 자중지란의 곤죽을 쑤고 있기는 합니다마는 위대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위대한 적도 있다는 선생님의 표준이 오늘도 저희들의 무모한 삶 속에 명철한 잣대가 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는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실현되기를 원한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를 낙으로 삼기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쏟을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몸소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과거가 아닌 미래 속에 살고 계시면서, 죽어도 썩지 않을 예언자의 표상으로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생생하게 살고 계십니다.이제 비록 30년 보다 좀 늦기는 하였지만 선생님이 소원을 다시 기리며<꿈을 따르는 자에게 월계관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놀라운 꿈을 향하여 다시 또 한번, 마음을 크게 고쳐 먹겠아오니 심려 놓으시옵소서.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바라보면서, 종종 뵈올 것을 기약드리며 오늘은 여기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영후

전통공연예술기능재단 이사장

 

김구(金九, 1876.8.29. ~ 1949.6.26.)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백범일지〉가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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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0 14:35 2010/05/2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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