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쉰 세 번째 편지 - 2011년 4월 12일        

100년 편지
 

상옥 형! 미안하고 고마워...  -배재우-


   상옥 형!

   형, E.H.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유명한 말을 했지. 하지만 내 어린 시절, 역사는 ‘먼 일’이었어. 이순신 장군이 배 열 두 척으로 일본의 대 선단을 격파했다거나 강감찬, 을지문덕 장군이 거둔 경이적인 승전보는 재미있는 이야기였을 뿐이지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어
.

▲ 김상옥 의사

   사람들이 ‘서울의 봄’이라 불렀던 1980년에 나는 대학생활을 시작했지. 개강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학도호국단을 학생회로 바꾸는 선거에 참여했고, 4.19를 맞아서는 학생회관에서 무기한 철야농성을 시작했지. 학생회가 채 꾸려지지 않아서 건물 창문을 가리던 빈약한 커튼을 덮고 4월의 차가운 밤을 지새우면서 역사는 점차 내게 구체적인 것으로 다가왔어. 그때 세상은 무난하게 민주주의로 넘어갈 듯 보였지. 그러나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등장과 민주세력의 분열로 허망하게 스러졌고, 거리에는 모질고 시린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어. 군사정권의 이름만 들어도 나는 분한 마음에 눈물이 가슴을 타고 흐르곤 했지. 역사는 내 삶에 진하고 독하게 다가왔어. 시간이 흘러 결국 우리 국민은 민주정부를 이루어냈고 거리에 감돌던 살벌한 풍경은 우리의 일상 밖으로 걷어져 사라졌지. 생살을 긁는 것처럼 생생했던 역사도 더불어 내게서 조금씩 멀어져갔어. 상옥 형은 사담 같은 이런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펼치는 내 속내를 읽을 수 있을까?

   1923년에 형은 의열단과 손을 잡고 장쾌한 의거를 꿈꾸고 있었지. 바로 문화통치를 통해 조선을 회유하려던 일본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는 계획이었어. 그러나 이 거사는 사전에 그 낌새를 포착한 일본 경찰에 의해 은신처가 발각돼 결국 좌절되고 말았지. 어찌 보면 이 계획은 낙타를 바늘귀로 들여보내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하는 것 같은 무모함이 내포된 것이었어. 그러나 형은 역사의 모순이 중첩된 시대에 오직 민족해방에 모든 것을 걸고 집중했어. 바늘구멍처럼 작은 가능성이었지만, 형은 그걸 보고 또 바라보면서 그 바늘구멍의 가능성을 사과의 크기로, 수박의 크기로 확장시켜 갔겠지. 그리고 그 구멍에 온 몸을 던졌다가 산화한 거야. 형이 권총 두 정을 양손에 쥐고 형을 생포하기 위해 겹겹이 둘러싼 일본 경찰들을 뿌리치고 멧돼지처럼 산 속을 향해 달려가 1차 도피에 성공한 것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놀랍고 흥분되는 사건이었어. 그러나 중과부적. 형은 토끼 몰이하듯 달려들던 일본군의 총탄에 결국 벌집처럼 몸이 찢겨나가면서 숨을 거뒀지. 그런데 형이 장렬하게 산화하던 나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렸던 그 나이와 같다니 이것도 의미 있는 일치가 아닐까?

   지난해는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해였지. 나도 이때를 계기로 역사를 바라보는 감성을 다시 벼려보리라 생각했어. 그러나 중년의 일상은 결국 무뎌진 역사의식의 날을 세우지 못했지. 이런 걸 소시민 의식이라는 구차한 말로 변명해야할까. 나는 역사가 날 것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던 형의 시대가 그리울 때가 있어.

▲ 김상옥 동상(마로니에 공원)

   상상컨대 형이 바라본 역사의 끝에는 의로움이 있었겠지.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의로움을 알고 살라는 뜻 일거야. 이제 우리는 형의 분노와 그 분노에 정직하게 답한 형의 삶을 다시 이야기해야 돼. 형이 일본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최후의 도피를 시도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내뱉던 절망적인 숨소리를 다시 들어야 할 거야. 형은 일본제국을 향해 날 선 탄환을 겨누었지만,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의 문화통치에 말려들어 점점 무뎌져가던 우리의 민족의식을 다시 깨우려는 총열이었을 거야. 이제 형이 일본 총독을 향해 겨누었던 탄환은 물신에 물들어 역사의식에 둔감해진 이 시대를 향해 날아와야 해. 형의 분노와 좌절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메마른 가슴에 눈물이 되어 흘러야 할 것이고.... 지금은 상옥 형이 그렇게 소망했던 독립은 되었지만,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의 속에 함께 품었어야 할 역사의 정의까지 획득한 것은 아닐지 몰라. 우리 시대는 여전히 왜곡된 것들이 많아.

   상옥 형, 죽었더라도 잠들지 마. 그리고 일제에 산 채로 잡히지 않으려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형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던 그 손가락을 이젠 우리에게 돌려줘. 형, 미안하고 고마워...



  배재우

   영동CBS 본부장

김상옥(1890-1923)

   구한말 구식군대의 포수로 일하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열 네 살 되던 해에 대장간 일을 배워서 스물 세 살 되던 해에 영덕철물상회라는 공장을 세우며 자수성가했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동대문교회의 야학을 다니면서 항일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일화배척운동에도 앞장섰으며 3.1만세운동 때는 자신이 운영하는 공장의 직원 50명을 이끌고 만세시위에 합류했다. 이후 동대문교회의 청년들과 항일단체인 혁신단을 조직해 지하신문을 발행했으며 이로 인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운동에 한계를 느낀 뒤에는 무력투쟁 노선을 택하고 암살단을 구성해서 일본의 사이토 총독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돼 쫓기다가 자결하였다.

(이 편지는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의 내용에 의거해서 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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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1 15:39 2011/04/1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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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아홉 번째 편지 - 2010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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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시타 쇼조와 이봉창 의사  -편집자-



 


   1932년 1월 8일 일본 육군 관병식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의 마차 앞에 수류탄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수류탄은 제대로 터지지 못했습니다. 수류탄을 던진 청년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고, 같은 해 10월 10일 아침에 처형됐습니다. 사진 속의 사람이 바로 이 청년입니다.


   청년은 조선인이었습니다. 이름은 기노시타 쇼조였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스물다섯 살에 일본으로 건너간 후부터 쓰기 시작한 이름이었습니다. 국세조사위원 등으로 일하며 잘 나가는 듯 했으나, 결국 그는 외판원, 석탄 짐꾼 등 일본 사회 밑바닥을 전전합니다. 조선을 떠나온 지 5년 만에 그는 다시 중국 상해로 떠납니다. 1년여 후 그는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이 청년을 이봉창 의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기노시타 쇼조와 이봉창 의사. 이 두 이름 사이에 청년 내면에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학자들의 연구 주제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가 뼛속부터 중무장된 독립투사가 아니라, 본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이름을 바꿔가며 일본으로 건너간 청년, 하지만 지독한 조선인 차별 앞에 분노한 청년.


   그는 자신의 이익을 좆으며, 성공하기도하고, 좌절하기도 한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를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남긴 영웅 이봉창 의사로 기억합니다. 이봉창 의사이기 이전에 '기노시타 쇼조'로서의 삶은 좀처럼 회자되지 않습니다.


   꼭 이봉창 의사뿐만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모두가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백범 김구는 한 여인의 남편이었고, 홍커우 공원에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 의사는 시를 좋아하던 학생이었습니다.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압록강을 여섯 번이나 건넜던 정정화 여사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고, 이름자도 남지 않은 숱한 독립군들은 농부였고, 목수였고, 장사꾼이었습니다.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어떤 논리로 목숨을 버려가며 조국 광복을 찾았는지 생각해 것이 광복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작은 책임은 아닐런지요.


   기노시타 쇼조와 이봉창 의사. 두 이름 사이에 어떤 뜻이 있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2010년 8월 15일

   '100年 편지를 쓰는 사람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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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7 14:21 2010/08/1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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