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마흔 다섯 번째 편지 - 2011년 2월 15일        

100년 편지
 

나는 항일투쟁에 목숨 바친 윤세주(尹世胄)다 -유종현-


   나는 1901년 밀양에서 태어났다. 내가 18세 때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우리는 나라를 잃어버린 비통한 운명 앞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 없었다. 1919년 3월 1일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서 일제히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 석정 윤세주 선생

   그 무렵 나는 고향친척 연배인 윤치형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서 만세운동에 직접 가담하여 독립선언문을 구해들고 급히 고향 밀양으로 달려왔다. 3월 13일 밀양장날을 기해 은사이신 전홍표선생과 황상규선생의 지도아래, 19명의 동지들이 앞장서서 1천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이 주동자를 체포함에 나는 만주 연변으로 망명하였다.

   나는 궐석재판으로 1년6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된 채 그해 11월
길림성에 이르렀다. 먼저 이곳으로 망명한 고향 동지 약산 김원봉 등과 만나, 독립투사를 양성하는 신흥군관학교에 다니면서 항일투쟁의 결의를 굳게 가다듬었다. 우리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폭력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실제행동에 나섰다.

   의열단의 첫 임무는 다음 해인 1920년 6월 동지 15명이 국내로 잠입하여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과 밀양을 비롯하여 주요도시의 경찰서 등 주요기관을 폭파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불행이도 사전에 발각되어 전원이 미수범으로 체포되었다. 나는 재판결과 7년형이 언도되었고, 지난 날 밀양 만세사건 주동으로 궐석재판으로 징역형 1년6개월을 가산하여 긴 세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나는 투옥 된지 6년 7개월이 지난 1927년 2월에 출감하였다. 그 후 고향에서 밀양신문사 사장으로 있으면서는 이시기에 서울에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의 밀양지회의 총무간사를 맡는 등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에 열중하였다.

   내가 다시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 것은 1932년이었다. 일단 남경으로 가서 약산 김원봉과 만나 의열단에 합류하였다. 또다시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수료 후에는 그 학교의 교관으로 봉사하였다. 당시 임시정부 산하의 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조직을 통합하기 위하여 1935년 남경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였으며 나는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16명)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한편 1938년에는 무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군이 중국대륙 깊숙이 쳐들어왔을 때 중국정부는 중경으로 이전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중경으로 이동함에 따라 조선의용대 역시 본거지를 중경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무한에서 창설된 조선의용군은 중국의 국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항일투쟁의 연합전선을 펴나갔다. 조선의용대는 회북지대를 편성, 중국 팔로군에 합류하여 일본군과 맞싸우기로 하여 1941년 중경을 떠났다. 나는 화북지대 제3지대를 인솔하였으며 먼저 출발한 제1지대와 제2지대를 뒤따라 황하 맹진나루터를 건너 장장 4개월의 행군으로 팔로군의 총사령부가 있는 태항산(太行山)으로 이동하였다. 나는 여기서 조선의용대가 일본군 및 화북지방 거주 10만명의 우리동포를 대상으로 라디오 방송과 선전 전단 살포 등 후방심리전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일역을 맡았으며, 한편 후진 양성을 위해 조직한 ‘화북조선청년간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

   일본군은 1942년초부터 팔로군을 소탕하기위해 태항산을 총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팔로군과 조선의용대는 이에 대항하는 소위 ‘반소탕작전’으로 맞싸우게 되었다. 그해 5월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左權) 장군과 더불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942년 5월 27일었다. 조선의용대도 함께 공격을 받아 전사자가 속출하였고 내가 인솔하던 소대는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결국 나와 진광화 동지가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나는 중경을 출발할 때 조선의용대가 태항산을 넘어 더 나아가 만주와 한반도까지 동진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조국의 독립을 기어코 되찾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국광복 3년을 앞두고 40대초반의 젊은 나이에 한 맺힌 생을 먼 이국땅에서 마감하였다. 내 유해는 좌권장군의 묘소와 함께 지금도 중국 하북성 한단시에 있는 진기로예열사능원에
묻혀있다.

  
7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나라는 광복과 독립을 되찾아 눈부신 발전을 하여 이제 세계의 중심국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중국과도 국교를 재개한지 20년이 지나면서 한중 양국의 우호협력관계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를 하늘나라에서 보고 있는 나는 대단히 만족하며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보람을 느낀다. 앞으로도 계속 무궁한 발전을 거듭하여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힘을 합쳐 나가자.



 
유종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외교부에 입부하여 주 니제르대사, 주 세네갈 
  대사, 주 일본국요코하마 총영사를 역임했다. 현재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이며, (사)석정윤세주열사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윤세주 [尹世胄, 1901.6.24~1942.6.3]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밀양에서의 3.1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신문밀양지국을 운영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중국 지린[]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김원봉()·황상규()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고, 1920년 황상규 등과 함께 총독부 및 주요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국내로 폭탄을 들여오다가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 다시 난징[]으로 망명,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면서 1938년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조직, 1942년 화북 타이항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copyright src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1/02/14 12:05 2011/02/14 12:05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50

100년 편지

스물 세 번째 편지 - 2010년 9월 7일        

100년 편지

균등한 삶을 살자던 조소앙 선생님께  -임성진-


▲ 조소앙(1887~1958)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1919년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한국독립당 당수 등으로 지냈고,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이론 수립에 참여했다. 1945년 광복 후 귀국, 줄곧 임시정부 법통성 고수를 주장하며 활동하다가 1948년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으나 남북협상이 실패하자 노선을 바꾸어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언제인가 국사책에서 선생님의 이름을 봤습니다. 그때는 어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삼균주의라는 사상을 이해도 못하고 삼균주의라는 말만 외운 채 넘어갔었습니다. 하지만 늦게나마 선생님께 감사의 편지를 부치려 합니다.

   선생님!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명분 아래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간에 협력이나 연대보다는 경쟁이 미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라치면 사시 눈을 뜨는 세상입니다.

   민의를 대변해야 할 정치인들에게 대의정치는 안중에 없습니다. 자신이 속한 당의 이익과 정략에만 매달려 국민의 진정한 고충은 뒷전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인심도 매 한가지입니다. 창의력과 열정, 또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을 통해 사람을 평가하기 보다는 부모의 경제력이나 학력 등 소위 ‘사회적 스펙’에 의해 재단됩니다.

   물론 이 모든 변화를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런 모습이 옳다고 할 수 있는지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저도 한때 지금의 시류가 맞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내 친구가 산 장난감이니까 나도 가져야 된다’는 마음처럼 무슨 신념이 있기보단 ‘남이 그러니까 나도 그러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 사회가 점점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언뜻 선생님의 존함이 생각났고 선생님의 사상에 대해 찬찬히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사상이자 덕목이 아닐까요.

   대한민국은 너무나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해방 이후 그야말로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세계가 놀랄 만큼 압축적으로 성장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성장의 이면에는 그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키워가야 할 협력과 연대의 정신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같은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불균등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더 심화된다면 더 이상 우리사회는 유지되기 힘들 것입니다. 하루빨리 선생님이 주창하신 삼균주의로 제로섬 게임의 경쟁을 넘어 협력과 연대의 공동체를 되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의 많은 인물과 마찬가지로 선생님 역시 국사책에는 단 한 줄로 밖에는 표현 안 되어 있지만, 선생님의 생각은 수 백, 수 천 줄로도 표현 할 수 없는 그런 사상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고 풍요로운 세상이 되는 어느 훗날 선생님의 존함 역시 기억되길 바랍니다. 저에게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선생님께 늦게나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임성진씨

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 재학 중이며, 군 복무 중 휴가기간에 이 편지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학생으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관심 갖기를 바란다고 대한민국의 보통 대학생이다.




 
copyright src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0/09/08 09:52 2010/09/08 09:52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28

100년 편지

스무 번째 편지 - 2010년 8월 17일        

100년 편지

전하지 못한 청첩장 -최평순-

[빅토리아 공주가

2010/08/18 11:43 2010/08/18 11:43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