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서른 일곱 번째 편지 - 2010년 12월 21일        

100년 편지

단재(丹齋) 선생님께 올립니다.  -양진호-



   어젯밤 꿈속에서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캄캄한 밤, 눈보라치는 벌판에서 흰 저고리를 입고 단아 하면서도 결기에 찬 모습으로 눈보라를 헤치고 걸어오시는 모습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눈빛은 흰 눈보다 더 빛나고 있었고 오산학교에서의 침묵 강연이 오버랩 되면서 꿈에서 깨었습니다. 선생님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丹齋 신채호 선생

   당신께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배움을 써야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성균관 박사로서 얻을 수 있는 벼슬을 내던지고 찢기고 찢겨 누더기가 된 산하와 일제에 고통받는 민족을 구하고자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고 오직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만이 조국 광복과 나아가 한민족이 인류 평화의 주체세력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시고, 광활한 만주 벌판을 말달리던 선조들의 모습을 살려내어 사대에 찌든 거짓 역사의 장막을 찢어 버리고 우리가 자랑스러운 배달겨레의 자손임을 일깨워 주신 참된 역사가요, 언론인이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께서 가신지 어언 70여년이 지난 지금,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아직까지도 역사를 제대로 찾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으며 지금의 현실은 100년 전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에서 나와 하나로 돌아간다는 우리의 천부경 사상, 사람뿐만이 아니라 세상만물 모두를 이롭게 하자는 그 찬란했던 고조선의 홍익정신이 썩어빠진 사대주의자,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맥이 끊긴 지금 민족은 민족대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종교는 종교대로 이념은 이념대로 사상은 사상대로 서로 갈라지고 찢어져 단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정신은 퇴색되어지고 오직 돈만 아는 무서운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땅은 광복이 되었다하나 우리 스스로가 누구의 자손인지 누가 우리의 국조인지도 모른체 아직까지도 제 정신이 아닌 노예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조상님들 뵙기가 너무 두렵습니다.

   이에, 선생님께 다짐합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은 새들의 길이 있고,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은 물고기들의 길이 있듯이 인간은 인간의 길이 있습니다.

   저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바른 길을 가겠습니다. 당신께서 그토록 염원 하셨던 우리의 바른 역사를 전하여 민족혼을 깨우고 이 땅에 다시는 나라 잃은 설움,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런 단군의 자손으로서 지구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홍익인간이 되겠습니다.

   바른 역사의 깨침을 주신 선생님께 영원한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단기 4343년 11월 30일
 
   후손 양 진호 올림





  양 진 호


  우리은행 연세세브란스 지점 차장.

신채호(申采浩, 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 사학자이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견해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copyright src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0/12/21 16:05 2010/12/21 16:05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42

100년 편지

서른 네 번째 편지 - 2010년 11월 30일        

100년 편지

丹齋 선생님께  -김진한-


 

   2007년 한여름, 중국 여순감옥에는 빛바랜 흑백사진 하나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 사진 속에는 죄수복을 입고 꼿꼿이 앞을 응시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지요. 저는 그 자리에 멈춰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申采浩’ 뚜렷하게 새겨진 이름 석 자가 제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1936년 2월 21일, 선생님은 두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고 이곳에서 이승과 작별하셨습니다. 그로부터 74년이 흐른 오늘, 선생님께 편지 한 장 올리려 합니다.

▲ 단재 신채호 [1880.12.8~1936.2.21] 

조선 혁명투쟁을 통하여 직접폭력을 통한 민중직접투쟁을 주장하였던 선생은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먼저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한국고대사를 전공하고 있는 김진한이라고 합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게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니 벌써 16년전이네요.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선생님에 관한 전기(傳記)를 빌려 보았는데 그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독립투사이자 역사가로서 그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사신 선생님을 마음속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고 앞으로 역사를 공부하리라 다짐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삶은 우리 겨레가 겪었던 고난의 가시밭길 그대로였지요. 선생님은 문필(文筆)의 힘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실천하셨던 몇 안되는 분이셨습니다. 어린 시절 한학교육을 받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지만 관직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접으셨지요. 당시 선생님이 마주한 조선은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불안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손 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었죠. 그래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주필로 활동하며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친일파들을 통렬하게 꾸짖었으며 우리 겨레의 독립을 향한 열망에 불을 지피셨습니다.

   그러나 총칼로 무장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길 상황에 놓이자, 안창호ㆍ이갑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셨습니다. 연해주에서는 권업회(勸業會)의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로서, 만주로 자리를 옮겨서는 역사학자로서 조선사(朝鮮史)를 집필하셨지요. 더욱이 그토록 보기를 염원하셨던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고 ‘집안현을 한 번 둘러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단언하셨지요. 저 또한 고구려왕릉을 답사하고 광개토왕비를 가까이서 대할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선생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1919년 3ㆍ1운동의 영향으로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규탄하는 성토문(聲討文)을 기초하면서 임시정부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당시는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었지요. 그런 가운데 1923년 의열단(義烈團)의 요청을 받고 쓰신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들끓게 합니다. 이는 우리 겨레가 겪었던 아픔을 손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셨기 때문일 겁니다. 선생님은 강도 일본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민중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혁명임을 힘주어 말씀하셨지요. 아마 일인(日人)들이 이 글을 읽었다면 머리털이 쭈뼛해지며 두려워 온 몸을 떨었을 겁니다. 그 옛날 당(唐)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황소(黃巢)가 최치원이 보낸 격문을 읽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고 하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에 필적하는 명문이라고 하겠습니다.

▲ 대련 여순감옥 모습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등 많은 독립운동가들께서 숨을 거두었던 대련 여순감옥 모습이다. 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2007년 제3기 독립정신 답사 때 이곳을 답사하였다.

   이후 선생님은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던 중 대만에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복역하며 순국하실 때까지 붓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평생토록 불의(不義)에 맞섰으며,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여 혁신을 꾀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시대를 꿰뚫는 눈을 가졌습니다. 또 하나 변치않는 사실은 우리 겨레를 정말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선생님이 가시고 난 오늘, 우리 앞에는 새로운 과제가 놓여있습니다. 선생님이 겨레의 독립을 마음속으로 그렸듯이, 우리는 남북이 두 손을 맞잡고 하나가 되도록, 빈부로ㆍ학력으로ㆍ인종으로ㆍ성별로ㆍ나이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열리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우리가 어떻게 잘 헤쳐 나갈지 지켜봐 주세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진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한국고대사와 관련한 글을 쓰고 있다.


 
copyright src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0/11/30 11:25 2010/11/30 11:25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39

100년 편지

서른 한 번째 편지 - 2010년 11월 9일        

100년 편지

참 언론의 사표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  -정동익-


 

   단재 신채호 선생님.

   요즘 우리나라 언론이 돌아가는 꼴을 보노라면 울화가 치밀 때가 많습니다.

   북녘 동포들이 끔찍한 수해를 입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는데도 대부분의 언론들이 외면하고 있고 한술 더 떠 방해 여론까지 조작하고 있습니다.

▲ 단재 신채호 [1880.12.8~1936.2.21]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사학자·언론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활약하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천안함 사태의 진실을 캐기 위한 노력도 찾기 힘듭니다.


   이러한 때 불의한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참 언론인의 길을 걸으신 선생님이 더욱 그립습니다.

   선생님의 삶은 한점 흐트러짐 없는 치열한 혁명가의 삶, 그 자체였고 참 지식인의 전형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일제의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직접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며 서릿발같은 자세로 글을 쓰고 일제와는 터럭만큼도 타협하지 않았던 불굴의 애국언론지사셨습니다.


   그리고 사학자로서 <조선상고사>, <조선혁명선언>등 수많은 노작들을 집필하여 민족혼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서셨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제국의 연호를 쓰는 국내신문에는 글을 쓸 수 없다고 연재를 거부했습니다.

   이같은 선생의 기개와 선비정신은 역대 독재정권에 부역하고 민중을 배반하고도 조금도 부끄러운줄 모르는 한국의 많은 언론인들에게 귀감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제 때 내선일체를 부르짖고 청년들을 징용으로 내몰던 언론인들, 5.16쿠데타를 올 것이 왔다고 미화하고 광주 민주항쟁을 폭동으로 매도하던 언론인들이 한번도 국민 앞에 사죄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권력의 주변에 내노라하는 언론인들이 몰려들고 언론탄압에 가세하는 모습들을 볼 때 선생님 같은 기개 있고 올곧은 언론인이 새삼 그리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사로서의 언론인, 민족사적 과제를 안고 고민하고 실천하는 언론인을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 언론계에 선생님의 참 언론인 정신을 따라 배우게 할 필요가 절실합니다.


   진실보도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언론인, 사회적인 약자들 편에 서서 정의를 실현하는 언론인,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언론인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단재선생님을 따라 배우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역사를 연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힘 있는 글을 쓰고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희생된 선생님의 일생이야말로 언론인 정신을 잊고 사는 요즘 언론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사표가 돼야 마땅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언론자유가 위협받고 있으며 남북관계가 얼어붙어 통일의 길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단재선생님의 언론정신을 일깨워 우리 언론의 나아갈 길을 분명히 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높은 뜻이 이 땅에 꽃 필 수 있도록 굽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정동익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전 동아투위 위원장.

copyright src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0/11/10 15:41 2010/11/10 15:41

트랙백 주소 :: http://korea100.kr/tc/?/trackback/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