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마흔 두 번째 편지 - 2011년 1월 25일        

100년 편지
 

夢寐에도 그리는 내 아버지 夢牛 權泰錫선생께 -권영관-


   꿈속에서라도 한번 만나 보고픈 아버지!

   제 기억 속에서 그려지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불행하게도 저에게는 없습니다.

▲ 권태석 선생

   제가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나이도 되기 전에 아버지께서는 저희들만을 남겨 두시고 저 머나먼 하늘나라로 훌쩍 떠나가 버리셨기 때문이지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것 때문에 겪는 고통의 의미를 아마 아버지께서는 모르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스스로 선택하여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을 걸으셨으니까요. 그것도 대감급의 벼슬을 사신 댁의 자제로 태어나시어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방식을 빌어 그토록 힘든 세상을 사셨으니까요. 그러한 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처럼 보통의 평범한 삶을 사셨다면 아버지께서는 험난한 세상을 잘 모르신채 호의호식하며 사실 수 있었을텐데요.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시어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라셨을 텐데 어찌하여 나라의 은혜를 입고 또한 온갖 것 다 누리고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본을 따르지 않으셨는지요. 지난 역사에서 보면 이 나라에서는 언제나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면 가진 자들과 지배층은 가족들 챙겨 피난가고 민초들만 변변치 않은 무기로 목숨바친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았는지요. 그랬더라면 우리 남매들 잘 살았을 텐데요. 이것이 당신께서 생각하신 노블레스 오블레쥬 였는지요.

   당신께서 지나신 길이 대한민국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주의자의 운동권(?)에 속하신 까닭에 저희들은 혹여 누군가 우리를 알아볼까 숨죽이며 살았다면 지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실런지요.

   늦게나마 2006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이라도 추서받으시어 작은 한풀이라도 하셨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것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아버지께서 생전에 이룩하신 업적이 저희들로서는 너무나도 컸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식이기 때문에 느끼는 저희들만의 생각일까요! 아버지를 원망하기 앞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는 안목과 그들의 잣대가 새삼 의심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은 비단 저만의 생각은 아닐 듯합니다.

   스물다섯 풋풋한 나이에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시어 적지 않은 돈을 흔쾌히 쾌척함으로써 이를 운동자금으로 삼아 여러 계획을 추진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획하신 거사를 이루지도 못 하신 채 영어의 몸이 되어 버린 점은 너무나 아쉬운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할아버지께서 김천에서 일가를 이끌고 서울로 이사하셨다는 사실을 공적조서를 작성하기 위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왜 일가친척들이 어린 저희들에게 당신으로 인하여 일가친척 모두가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원망하는 얘기를 했었는지 그 연유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학창시절 생활이 어려워 고초를 겪으며 지냈고 등록금 못 냈다고 학교에서 쫓기는 일을 겪으면서 자랐지만 그래도 저희들 남매들은 항상 자랑스런 아버지를 가졌다고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 왔습니다. 제가 대학시절 데모주동자로 붙잡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형사가 “우리는 너희들의 아주 비밀스런 내력도 다 알고있다”고 겁박을 할 때는 솔직히 겁도 났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신간회 간부로 활동하시다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일제 검거시 다시 감옥살이의 고통을 겪으시며 왜놈들의 온갖 고문을 받은 것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이 전기고문이었다고 말씀하셨다는 얘기를 듣고는 어린 제가 무얼 안다고 눈물을 흘리며 애태웠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이 일로 인해 또다시 영어생활을 하시자 우리 일가친척들은 충청도 옥천으로 또 이사를 하게 되었다지요. 제가 듣기에는 당시로서는 이렇게 옮겨 다니는 것이 아주 드문 일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해방 후 몽양선생과 함께 건준활동을 하시고 통합 한독당을 만들 때 애쓰신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만 아버지께서 보여 주신 이후의 정치적 이념과 그에 따른 행동을 젊은 시절에는 저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물며 제3자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저도 정치학을 전공하여 조금은 알거든요.

   그러나 이제 세상이 달라지고 저도 성장하여 나이를 먹고 난 후에야 아버지께서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어려운 처지에 처할 것을 알면서도 모스크바 3상회의를 찬성하시어 한독당으로부터 제명까지 당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의 행태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으나 원래부터 갖고 계시던 민족주의 신념을 이루고자 하신 결단이었다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아버지!

   이것만이 민족분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길이라는 신념에서 하신 행동이었다고 믿어도 되겠는지요? 아버지.

   사실 저는 아버지가 가지신 이념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오늘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꿈속에서라도 뵙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반의반도 못 따라가는 못난 아들 영관이가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버지의 평생소원이었던 통일을 꼭 이룰 수 있도록 지하에서라도 생전에 하셨듯이 애써 주십사 하고...




  권영관



  권태석 선생 子

권태석 [權泰錫, 1895. 8. 18~1948. 8. 23 ]

   독립운동가.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서울청년회, 조선공산당, 신간회 등의 단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조선민족대동단에 참여하여 활동했으며, 이로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에도 꾸준히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가담했고, 조선민흥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한 신간회의 서무부장 및 총무간사로 활동했으며,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6년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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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5 11:08 2011/01/2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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