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쉰 다섯 번째 편지 - 2011년 4월 26일        

100년 편지

강우규(姜宇奎)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 -방영혁-



   한반도 전체가 만세를 외친 3·1운동 발발 후 불과 반년 만에 바뀌게 된 조선총독. 하지만 그 신임 총독 사이토가 서울에 도착해서 맞게 된 것은 선생님이 던진 폭탄이었습니다. 국내는 물론이고 외신 언론들까지도 주목했던 이 엄청난 사건. 하지만 그 대담한 의거의 주인공이 고령의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고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놀랬을까요.


   최초로 조선총독을 겨냥, 의거의 방법이 폭탄투척이라는 점, 65세라는 고령의 나이...


▲ LA TIMES에 실린 강우규 의사 의거 기사

   하나 같이 놀라운 사실들이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의거를 가슴 깊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사의 길을 가려는 제게 선생님의 삶은 또 다른 가르침으로 마음 깊이 와 닿아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어려웠던 시절, 한의학을 배워 환자를 돌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습니다. 또한 만주에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하셨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당신께서 결코 과격하다거나, 한때의 울분으로 폭탄을 던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날의 의거를 있게 한 것입니까. 저는 선생님의 마지막 유언에서 교육자로서 가진 고뇌와 결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왈우(曰愚) 강우규 의사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1920년 11월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


   어쩌면 당시 선생님께 중요한 것은 사이토라는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본인의 목숨과도 바꿔서 이루고 싶어 했던 그것. 저는 그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청년들의 깨우침이라고 느꼈습니다. 식민지라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가슴이 울리는 신선한 충격과 감회를 전해주고 싶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제게 선생님은 노인단의 일원으로 의열투쟁을 한 의사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평생을 걸어오신 길이, 마지막으로 택하신 의거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지도, 모두 훌륭한 교육자십니다.


   선생님!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아직 배울 것 많은 청년인 저에게 선생님의 삶은 커다란 사표가 됩니다. 아마 제가 목숨을 걸어가며 교육과 청년들을 위해 헌신할 일도 없을지 모릅니다. 다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미래의 주인공인 청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교육에 대한 열정은 가슴 깊이 새기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떤 가치관을 가진 교사로서 학생들 앞에 설 것인가 고민할 때면 선생님의 의거를 떠올리게 됩니다. 교사가 된 뒤에도 현실에 안주하거나 게을러지게 되면 선생님을 생각한 오늘의 이 편지를, 그리고 지금의 이 마음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하고 또 존경합니다, 선생님.




 방영혁
 

  명지대학교 사학과 졸업

  역사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인 예비선생님이다.

강우규[姜宇奎, 1859 ~ 1920]

   1859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 어려서는 한학과 한방의술을 익혔고 근대화 요구에 부응하여 개화사상을 수용,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885년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한 뒤에는 한방의술을 바탕으로 인술을 베풀고 재산을 모아 사립학교를 설립,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가 있자 만주로 건너가 1915년부터는 길림성 요하현에 한인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신한촌을 건설하고 이곳에 동광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가 3.1운동으로 고조된 조선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회유술책으로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워 총독을 교체할 때 새 총독인 사이토가 부임하는 날 서울에 잠입한 의사는 6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행사장인 서울역에서 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다. 비록 현장에서 총독 폭살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곳에 모인 일제관리 등 37명을 사상케 하여 3.1운동 이후 희망을 잃은 국내외 민중들에게 무장투쟁이라는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한인 순사 김태석에게 잡혀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형, 순국하시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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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6:25 2011/04/2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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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여덟 번째 편지 - 2011년 3월 8일        

100년 편지
 

'독립'과 '민주'의 공간에서 다시 만난 강우규 의사 -강성구-


   제가 선생님 성함을 처음 들은 것은 학교 다닐 때, 역사교과서를 통해서였습니다. '60대 백발 성성한 노인이 새로 부임하는 일본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다. 거사는 실패했지만, 교수형을 당하는 순간 까지도 당당하고 떳떳했다.' 이런 정도의 내용이 기억이 납니다. 머릿 속에 각인된 선생님의 형형한 눈빛이 선합니다.

▲ 강우규 의사

   선생님을 좀 더 자세히 알고자 자료를 검색해보니 의외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자료가 적음에 놀랐습니다. 다행히 기념사업회(www.1919kang.or.kr)도 발족하고, 평전도 두 권이 출판되었더군요. 기념사업회에 적힌 선생님께 대한 소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의사께서는 1859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하시어 (중략) 근대화 요구에 부응하여 개화사상을 수용, 기독교에 입교한 근대 지성이셨다. (중략) 1910년 경술국치가 있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1915년부터는 길림성 요하현에 한인 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신한촌을 건설하고 이곳에 동광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시기에는 신흥동에서 만세시위를 펼치었고 (중략) 그러던 중 일제가 3.1운동으로 고조된 조선 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회술책으로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워 총독을 교체할 때, 새 총독인 사이토가 부임하는 날 서울에 잠입한 의사는 6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행사장인 서울역에서 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시었다. 의사께서는 비록 현장에서 총독 폭살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곳에 모인 일제관리 등 37명을 사상케 하여 3.1운동 이후 희망을 잃은 국내외 민중들에게 무장투쟁이라는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한인 순사에게 잡힌 의사께서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형, 순국하시었고, 정부에서 1962년 의사의 위업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선생님의 의거에 대해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로 의의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선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진영에서 독립투쟁의 한 방략으로 정립된 의열(義烈)투쟁 노선을 실천하셨다는 점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뒤를 이어 처음부터 목표를 조선총독으로 삼아 거사를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선생님의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사상 최고령자의 폭탄투척의거로 이후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의 여러 청년애국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셨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제 가슴을 먹먹하게 한 것은 선생님의 청년사랑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순국하시기 직전인 11월 대한의 청년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 앞에 선하다."

   선생님께서 순국하신지 60년이 흘러 1970~80년대 조국이 군사독재의 폭압 앞에 신음할 때, 이에 맞서 싸운 젊은 청년학생들이 있었고 저 역시 그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갇혀 들어간 서대문형무소의 감방 안 마룻 바닥에 이곳 어딘가에 계셨을 선생님을 생각하며 '姜宇奎'라는 성함과 돌아가신 날짜 '1920. 11. 29.'를 작은 유리조각으로 새겨 넣어보았습니다. 선생님께는 '독립'의 공간이었던 곳이 후배들에겐 '민주'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지난해는 선생님의 순국 90주년이었습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순간까지 그토록 걱정하셨던 청년들은, 전태일에서 이한열까지 수많은 청년열사의 이름으로, 4.19에서 6.10까지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서, 감옥에서 치열하게 살아 우리 역사를 열어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어려움도 새로운 시대의 청년들이 기꺼이 극복해내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입니다.

   부디 편히 영면하소서.



  강성구(姜聖求)


  (사)사회책임투자포럼 이사
  국민권익위원회 청렴전문강사

강우규 [姜宇奎, 1859~1920 ]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호 왈우(曰愚). 30세 때 함경남도 홍원(洪原)으로 이사하여, 한의술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었고,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만주로 건너가 지린성[吉林省] 라오허현[饒河縣]에 정착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 광동중학을 세워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현지에서 만세운동을 하였고, 이 후 조국으로 돌아가 거사(擧事)할 뜻을 품고 영국제 폭탄을 가지고 서울에 잠입하였다.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폭살하기로 결심하고,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사이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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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7 16:08 2011/03/0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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