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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04 관리자 [100년 편지.52] 오광심 선생님께 -박지희-
100년 편지

쉰 두 번째 편지 - 2011년 4월 5일        

100년 편지

오광심 선생님께      -박지희-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연천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이제 막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새내기 교사 박지희입니다. 우연히 글을 통해 선생님을 뵙고,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어 이렇게 짧은 편지글을 올립니다.

▲ 오광심, 김학규 부부

   어려운 시기에 여자의 몸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선생님은 같은 여자이자 교사인 저에게 큰 감동을 주셨습니다. 불과 20세의 나이에 민족교육에 전념하시다 독립운동에 투신하신 선생님의 숭고한 결심은 지금의 저를 한없이 작아지게 합니다. 조국의 소중함을 잊은 채, 일상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제가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오광심 선생님께서 아이들이 가득한 허름한 교실 한 편에서 아이들에게 민족과 헌신, 그리고 바른 역사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또렷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씀 하나 하나에 귀 기울이며 조국 광복의 꿈을 키워갔겠지요.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길은 아마 아이들의 꿈이자, 동시에 모두의 소망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내 아이들에게 민족 교육을 하는 '나'를 상상해 봅니다. 선생님께서 감내하셔야했던 그 시대 속으로 잠시 돌아가 생각해보면, 과연 나는 내 아이들에게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라고 가르칠 수 있을 까 고민이 됩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것과 자신의 신체를 보전하는 것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하는 것을 가르쳐야한다면, 저는 선뜻 내 아이들에게 조국의 광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 아이들만은 잘 살기 바라는 어쩔 수 없는 욕심 때문이겠지요. 민족을 위한 길은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이들의 평안과 민족의 해방이라는 큰 갈림길에서 선생님께서는 수많은 밤을 얼마나 하얗게 지새워야 했을까요. 하지만 결국 선생님의 결심은 아이들의 평안과 민족의 해방이 결코 분리된 길이 아닌 '한 길'이었음을 간파하신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천안함 용사들이 산화한지 1주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대한의 젊은이들이 조국수호의 사명을 다하다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단순히 조국을 지킨 용사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민족에 대한 우리의 특별한 정신 - 즉, 잊혀져가는 민족정신을 다시 일깨우는 고귀한 희생이었습니다. 혼탁하고 각박한 세상이지만, 선생님 시절의 독립운동의 명맥이 후손들의 마음속에서도 ‘희생’과 ‘민족정신’으로 남아 혈관 속 깊이 흐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행사 차 국립현충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무명용사의 묘비 앞에 묵념을 하며,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이 있었기에, 지금의 평안(平安)이 있는 것이라고...

   짧은 묵념이 끝나고, 제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사로 서서, 앞으로 아이들에게 바른 역사와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겠습니다. 민족의 얼을 생각하게 하겠습니다. 시대의 정치 파벌에 따라 잦게 변하는 교육과정으로 연표식 역사 교육도 이제는 쉽지가 않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겠습니다.

   민족교육을 위해 힘쓰셨던 오광심 선생님!

   이제는 이 후배가 미약하나마 선생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먼 곳에서 든든하게 응원해 주세요.

   존경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연천의 작은 학교에서 박지희 올림



 박지희
 

 
제6기 독립정신답사단원
  現 궁평초등학교 교사

  오광심(吳光心 1910~1976)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던 해인 1910년 3월 15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신부면(新府面) 용건동(龍建洞)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선생은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이주하였다. 남만주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에 있는 화흥중학(化興中學) 부설 사범과에 입학하였다. 화흥학교는 1927년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 의해 설립된 학교로 학생들에게 철저한 민족주의교육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 학교에서 남다른 민족의식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남만주에서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혁명사령부에서 근무했다. 김학규가 유동열(柳東說)·최동오(崔東旿)와 함께 조선혁명당 대표로 난징[南京]에 갈 때 동행했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5당 통일로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립되자 부녀부차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김정숙(金貞淑)·조순옥(趙順玉) 등과 함께 여군으로 한국광복군 창립식에 참여했으며, 11월에 시안[西安]에 본부가 설치되자 총사령부에 소속되어 복무했다. 그 뒤 광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와 함께 광복군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1944년 광복군 초모공작이 전개되자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을 통해 여성들의 광복군 참여를 촉구했다.

   8·15해방 후에도 중국에 머물면서 1947년 선양[瀋陽]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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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4 17:11 2011/04/0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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