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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18 관리자 [100년 편지.54] 아저씨, 아저씨, 용헌식 아저씨께... -용환신-
100년 편지

쉰 네 번째 편지 - 2011년 4월 19일        

100년 편지

아저씨, 아저씨, 용헌식 아저씨께...  -용환신-



   모습은 전혀 알 수 없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서만 살아 만나 뵙는, 그래서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아저씨, 그런 당신께 편지를 띄운다는 것이 얼마나 송구스러운 짓인지, 그 죄스런 마음이 이 편지 쓰기를 작정할 때부터 가위눌리듯 한시도 떠남 없이 저를 옥죄고 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도 아닌,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할 이야기들을 그 동안 쉬쉬하며 엿들어야만 했던 아저씨 생전의 짧은 삶에 대해 확인하듯 하나하나 짚어야 된다는 것 또한 얼마나 슬픈 일인지 생각할수록 아무 저항 없이 심연의 늪으로 빠져드는 그 자괴감을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저씨, 먼저 고백할게 있습니다. 그래야 편지 쓰는 동안 조금이나마 마음 편할 것 같아서입니다. 아직도 아저씨에 대한 붉은 편견이 집안 내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조작되기도 하고 과대포장 되기도 한 그 몹쓸 병에 갇혀 가슴 닫은 채 지금도 소통하려 하지 않는 집안 내 아저씨에 대한 그 고질적 편견을 말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아저씨를 비호하거나, 그 편견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 이념, 그 무엇보다도 소중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 아저씨의 짧은 삶, 그것도 어둡고 어둡던 시절, 자신을 버리고 단 하나의 꿈을 위해 깜깜한 절망의 언덕에 홀로 서 계셨던 당신의 외로움, 그 막막함에서도 빛을 찾았을 당신의 칼 빛 의로움의 희망을 지금, 조금이나마 공유하고픈 저의 갈증 때문에 그 낙차 큰 생각들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세상을 뜨셨는지 아무도 모르는 아저씨의 최후, 중간 중간 동강난 삶보다 더한 아저씨의 마지막 길에 대해 아무도 알려 하지 않는 이 비겁한 현실에서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요?
   슬픈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로는 당신께서는 해방된 뒤 한 동안 고향땅, 지금은 수원실내체육관자리 대유평 그늘진 언덕 아래 움막 짓고 한 무산아동의 시중을 받으며 사셨다지요.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처럼. 그러다가 6.25 그 비극의 전쟁 중에 영원히 사라지셨고.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사셨더라면, 아주 평범한 가정의 가장으로 그 누구보다 편안한 삶을 누리셨을 텐데, 모든 호조건들을 다 포기하고 오로지 해방된 조국, 공평한 세상을 위해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하셨던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지 않으셨습니까, 아저씨!

   아저씨는 1915년 11월 초하루, 경기도 화성군 일왕면 송죽리 408번지(지금은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408번지)에서 꽤나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느 집 어느 가정보다 더한 행복함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뒤, 아저씨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서울 경복중학교로 유학 가십니다.
   졸업 뒤 오랫동안 교원생활을 하셨다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갑자기가 아니라 오랜 기간 생각의 생각 끝이겠지만) 중국 천진으로 건너가 노동계에 투신하십니다. 그 때가 1940년 봄이었으니까, 일제의 폭압이 극으로 치닫고 있을 때지요. 그러나 병을 얻어 그곳에서의 짧은 활동을 접고 맙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뒷일로 짐작하건대 빈부귀천의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셨던 그 꿈의 첫발을 그곳에서 실천해 옮기기 위해 가신 길이 아니었나 보입니다.

   어쨌든 그해 겨울 고향땅으로 돌아오신 아저씨는 다음해인 1941년 최용범 선생님 등과 함께 양축업을 공동경영하며 무산아동들을 수용해, 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펼치는 동시에 수원 팔달산, 연무대, 그리고 멀리 함안, 당진 등지에서 국내 및 만주와 동경의 독립운동단체와 연계해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실현을 위한 회합과 비밀결사운동을 하셨던 것으로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이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에게 올리는 보고문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집안 내에서의 그 붉은 편견은 바로 이즈음 공산화의 실천에 관한 혐의로 자주 체포, 조사받은 사실에 의한 것이 아니었는지요. 더구나 그 무렵부터 아저씨의 부모님은 물론 형제들, 그리고 친척들까지도 아저씨를 버린 자식으로, 완전 기피인물로 취급했다니까, 남 다른 그 고초를 어떻게 감내하셨습니까? 

   앞서 언급했듯이 1941년 경기도 경찰부장이 경성지방법원에 올린 문서에는 「조선독립을 기도하는 불온계획사건」 외에 용헌식, 최용범, 차준철, 김길준, 맹승재, 강성문, 홍순철 선생님이 함께 참여하신 「불경죄와 조언비어(造言蜚語)사건」 및 「조선인차별대우 및 치안유지법위반」등의 죄목이 나열되어 있는데, 결국 1942년 7월 27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치안유지법위반」죄를 적용받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셨지요.
   출감하신 뒤, 수원지역을 중심으로 벽보(대자보)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시다 해방을 맞이하는데, 그 후 말년의 삶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기록에 의한 것보다 풍문에 의한 것이 대부분으로 비참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저씨, 지금 어디에 말없이 누워계십니까? 그 한 많은 삶을 간직하신 채.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우신 그 뜻이 반쪽짜리 조국, 불공평한 세상이 아닌 것을 알면서 걱정 말고 편히 쉬시라고 쉽게 말씀드릴 수 없음을 용서 하십시오! 아저씨, 슬퍼하지 마십시오. 뒤따르는 발길들이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끝으로, 반가우면서도 한편 안타까운 소식 전해드리면서 부끄러운 이 편지 쓰기를 끝내야겠습니다. 아저씨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던 일곱 동지들 중 맹승재(1923~1969) 선생님께 2006년 독립유공자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2011년 4월 13일

   못난 조카 용환신 올림




 용환신
 

 
  1949년 수원에서 태어남. 서울대 농과대학 졸업
  한국작가회의, 한국문학평화포럼 이사
  시집으로 「우리 다시 시작해 가자」, 「겨울꽃」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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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8 19:20 2011/04/1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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