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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31 관리자 [100年 편지.43] 독립을 염원하신 김혁 조부님께 -김진모-
100년 편지

마흔 세 번째 편지 - 2011년 2월 1일        

100년 편지
 

독립을 염원하신 김혁 조부님께 -김진모-


   김혁 조부님은 조선조 중기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증시조 김원립 선생의 11대손으로 대한제국 육군정위로 근무하다 1907년 군대해산 후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구국운동을 모색하였습니다.

▲ 김 혁 선생

   그러던 중 1910년, 강제 합방되자 대종교에 입문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국내 및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 한 후 만주지역으로 40세 중반에 단신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조부의 항일 투쟁은 젊은 혁명 투사를 양성하고 동포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학교를 설립하여 동포들에게 조국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고 1925년 북만주 독립운동단체를 총괄하는 신민부가 조직되자 최고책임자인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때에 조부는 나이와 격식을 타파하고 젊은 운동가들과도 깊은 유대를 가졌습니다.

   당시 신민부의 젊은 혁명가 였던 이강훈(전 광복회장)에게 '금후에는 혁명대열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 하고 물었고 이강훈이 ‘직접행동으로 적괴를 무찌르고 세상에 큰 충격을 줄만한 기회를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조부는 ‘젊은 혁명가로서 당연한 포석일 것이나 군은 교육자로서 많은 혁명투사를 배출시키고 마지막에 지금 말한 직접행동을 실천하도록 의지를 굳히고 있음이 어떤가?’하면서 그 자리에서 그에게 '청뢰靑雷'(청구반도의 우뢰 또는 청천백일하의 우뢰라는 뜻)라는 호를 지어 주었습니다.

   이같이 조부는 혁명투사 양성과 동포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928년 1월 일본순사와 만주순사의 습격으로 신민부 최고 책임자인 조부를 포함한 간부 12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되어 유치장에 있을 때 애국청년한명이 체포되어 자신의 감방에 들어오게 되자 조부는 일본 경찰을 불러 '내가 아무리 붙잡혀 감금되어 있는 몸일지언정 애국지사도 아닌 청년과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천둥같이 꾸짖으니 일본경찰이 이 말을 곧이듣고 다시 조사한 후 며칠 후에 그를 석방시켰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조부의 부하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1929년 6월 검사구형보다 높은10년 형을 판결받고 신의주 평양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병환이 위독하여 1936년 가석방되었습니다.

   만주벌판에서 풍찬 노숙과 일제의 악형으로 건강을 잃은 조부는 1939년 4월 항일투쟁 30년 국권회복의 한을 남긴 채 순국하였습니다.

   조부님의 구국정신을 본받아 임시정부100년이 되는 2019년 안에는 조국이 통일되어 부국강국이 되어 있는 소식을 올리겠습니다.  

   손자 김진모 올림




  김진모



  유형섬유 대표, 김혁 선생 손

김혁 [權泰錫, 1875. 10. 6~1939. 8. 23 ]

   대한제국 육군정위(正尉)로 근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항일 투쟁을 결심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했다. 흥업단 부단장으로 활동했으며, 북로군정서에 참가하여 대일 항쟁에 전념했다. 1925년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했고, 성동사관학교의 교장에 임명되어 신민부 군인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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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15:33 2011/01/3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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