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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18 관리자 [100年 편지.41] 벽초 선생님께.. -신복룡-
100년 편지

마흔 한 번째 편지 - 2011년 1월 18일        

100년 편지
 

벽초(碧初) 선생님께 -신복룡-


   먼저 양해의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후학이 선학(先學)을 호칭할 때 호(號)를 쓰지 않는 것이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홍명희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벽초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한때 선생님의 함자(銜字)를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반공법에 저촉되던 어두운 시절이 있었고, 그래서 감히 함자를 쓰지 못하고, 아는 사람들끼리만 알도록 “벽초”라는 호를 쓰던 시절이 있었기에 거기에 익숙했던 탓으로 저도 그냥 벽초 선생님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 벽초 홍명희

   저는 스스로 좌우익의 논쟁의 어느 편에 설 입장도 아니고 또 그렇게 강단(剛斷)있게 살 용기도 없습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분위기가 우익적인 우리 사회에서 이제까지 모든 필자들이 우파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 칼럼을 써오던 관례를 벗어나서, 북한 부수상까지 지낸 분을 주제로 쓴다는 것이 그리 마음 편한 것은 아니지만, 임시정부기념사업회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저는 고심하다가 벽초 선생님께 편지를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왜 빨갱이에게 ‘선생님’의 칭호를 쓰느냐?”고 항의하지나 않을까 하는 착잡한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먼저 사사로운 고백의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충북 괴산 출신으로서 선생님께서 사시던 곳과 아래 윗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어려서부터 옛날 어른 중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그리고 현대사의 인물로는 벽초 선생님의 얘기를 전설처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3.1운동 때는 누구의 독립선언서가 마음에 차지 않아 괴산에 내려오셔서 독립선언서를 직접 지어 돌렸다는 얘기며, 왜놈들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자제분인 홍기문(洪起文) 선생을 직접 가르쳤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낙질(落帙)된 [임꺽정전]을 몰래 빌려 읽으면서, 괴산 지방에서만 쓰는 사투리의 문체에 가슴 찡한 추억도 있었습니다.

   그 후 재주도 없이 대학에 남아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저는 선생님의 기록을 접하게 되었고, 남다른 감회와 함께, “책상물림 사학”이 아닌 “현장 사학”을 바탕으로 선생님의 행적을 글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해방정국에서의 선생님의 활동을 설명하면서, 당시 대부분의 좌파들은 순수한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고, 특히 선생님께서 1948년 4월에 월북하여 북한에 잔류한 사실에 대해서는 그것이 이념에 따른 선택이었다기보다는 혈육, 즉 이미 맑시스트가 되어 먼저 북한에 가 있던 아들과 따님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고 해석함으로써 학회의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와 같은 해석을 한 것은 선생님의 이념적 확신을 과소평가하고자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선생님께서 순수한 공산주의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선생님은 아들과 15살 차이로서 형제처럼 지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명문의 양반 댁에서 자제분과 맞담배를 피웠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민족주의자였던 선생님께서는 맑시스트였던 아드님과 이념 논쟁을 많이 하셨다더군요. 그런데 한창 논쟁이 무르익을 무렵이면 자제분인 홍기문 선생이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논쟁의 맥이 끊어지는 일이 빈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드님이 논쟁을 하다가 말고 왜 밖으로 나가는가를 알아 봤더니 논쟁에 과열되어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고, 그것을 알고 선생님께서 논쟁할 때는 담배를 피워도 좋다고 허락하셔서 결국은 그토록 대단한 양반 가문에서 부자가 맞담배를 피웠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선생님께서 평양에 가셨다가 그곳에 남으신 것은 혈육의 정 때문이었으리라는 저의 해석은 학계에서 작은 논쟁이 되었고, 언제인가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이정식(李庭植) 교수님께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수긍하시더군요. 제가 이런 논리를 편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즉 해방 정국에서 소위 좌파라는 지도자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이미 대부분 북한으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을 포함하여 허헌(許憲), 박헌영(朴憲永), 여운형(呂運亨)--, 이 분들의 아내와 자녀가 대부분 북한에 가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나는 죽어도 가족은 살리겠다는 뜻이었을까요? 나도 곧 올라갈 터이니 가족이 먼저가 있으라는 뜻이었을까요? 아니면 인질이었을까요? 저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떤 이념도 혈육을 뛰어넘지는 못했다고...

▲ 벽초 홍명희 생가

   가끔 명절에 고향에 가면 저는 제월리(霽月里)의 선생님의 유택을 찾아봅니다. 구거(舊居)의 뒷뜰에 있는 선영(先塋)들은 잘 보존되어 있고, 집에는 종손되는 분이 사는데, 본채만 남아 있고,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 국군이 북진하면서 남은 식솔(머슴과 하인, 그리고 족친)들이 죽거나 박해를 받은 후로부터 고향 사람들의 입에서 생님에 대한 얘기가 금기로 되어버린 후 이제 젊은이들은 모르는 얘기가 되었지만 괴산 사람들은 이념의 선악이나 호오(好惡)를 떠나 선생님에 대하 회상을 많이 합니다. 부덕한 얘기가 되어 비교가 송구스럽습니다만, 이기붕(李起鵬) 씨가 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괴산 사람들은 “남북한 부통령이 모두 괴산 사람이군...” 하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 괴산의 수안보에 북한의 남조선전투지휘부가 설치되어 있었을 때 선생님께서 괴산을 다녀가셨다는 얘기를 어른들께서 두런두런 말씀하시던 것을 잠결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즐겨 찾으시던 짚 앞 제월대(霽月臺)의 풍광은 여전한데, 느티울(槐灘)의 물은 많이 줄어 쓸쓸합니다. 그 제월대 입구에 선생님을 추모하는 후학들이 문학비를 세우면서 “빨갱이의 비석을 세울 수 없다”는 우익 단체 사람들과 오랜 실랑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작은 문학비가 서 있어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얼마 전에 성묘하러 괴산에 내려갔더니 선생님께서 사시던 인산리의 옛집자리에 한옥이 잘 복원되었는데 안내문에는 "홍명희선생의 구거"라는 말을 못하고 "한옥 마을"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며 시대의 아픔을 혼자서 쓰다듬으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 충북 괴산 제월대 앞에 세워진 벽초 홍명희 문학비

   글을 마치려니 말끝이 이어지지 않고 쓸쓸함이 가슴을 누릅니다. 이별의 아픔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통일이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 때문입니다. 요즘 중학생들에게 “반드시 통일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는 학생이 40%를 넘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나는 선생님이 한국전쟁의 개전 책임을 져야 할 입장에 있었던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때의 전쟁은 참으로 지혜롭지 못했고, 그 업장은 60년의 상처로 아직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어째야 하나? 가슴이 저려 더 글을 잇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

   복지유체 후학(伏地流涕後學) 씀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정치외교학)

홍명희 [洪命熹, 1888. 5. 23 ~ 1968. 3. 5]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독립운동가, 정치가 이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여 북한의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생존 당시 일제강점기 시대 동안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다. 호는 벽초(碧初)이다. 일생동안 소설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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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8 11:21 2011/01/1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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