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 허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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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산 허위 선생 |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의 즈음입니다. 저는 해방둥이로 구미 장터에서 태어난 작가‘박도’입니다. 어린 시절 저희 집 마당에서 보면 남녘으로 금오산이 빤히 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저에게 늘 금오산이 낳은 충신열사를 들려주셨습니다.
고려 말 길재(吉再) 선생을 필두로, 사육신 하위지(河緯地), 생육신 이맹전(李孟專), 그리고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등의 훌륭한 어르신 행장을 말씀하시면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一善: 선산의 옛 지명)에 있다 한다. 그런 까닭으로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았다(朝鮮人才半在嶺南 嶺南人才半在一善 故舊多文士)”라는 이중환의《택리지》를 일러주셨습니다. 그런 탓인지 어린 시절 저는 우리 고을을‘충절과 학문의 고장’으로 알면서 대단한 긍지와 자랑으로 여겨 왔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부터 서울에서 다녔는데 철이 들면서 의문은 왜 근현대사에는 우리 고장에 충신열사가 없을까 매우 궁금했고, 친지들이 선산 구미를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으로만 알아 속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새천년을 앞둔 1999년 여름, 선생의 외손 임시정부 이상룡 국무령 증손 이항증 선생과 함께 중국 대륙에 흩어진 항일전적지 답사 길에 올랐습니다. 그때 헤이룽장 성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선생 당질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 허형식(許亨植1909-1942) 장군을 만나, 이 선생으로부터 왕산가의 빛나는 항일투쟁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한없이 기뻤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게 쥐구멍을 찾도록 부끄러웠습니다. 그 기쁨과 부끄러움이 한 평범한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현대사 탐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의롭게 사신 어르신들의 자취를 찾아 틈틈이 전국방방곡곡은 물론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등지를 누비면서 <사진으로 보는 한국독립운동사>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영웅 안중근> <일제강점기> 등 항일유적답사기와 현대사 사진집들을 펴냈습니다. 부족한 제가 감히 이러한 책을 펴낼 수 있었던 그 원천은 고향 어르신 왕산 선생님을 만난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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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9월 28일 왕산기념관 개관식 당시 필자가 찍은 사진. |
이 글월 마무리로 사진 한 장을 바칩니다. 제가 1999년 중국에서 돌아온 뒤 선생의 생가에 가보니까 폐허였습니다. 당시 김관용 구미시장에게 독립운동가문을 이렇게 대접할 수가 있느냐고 항의 글을 보냈더니 곧 왕산기념관을 짓겠다는 회답을 보내왔습니다. 2009년 9월 28일 마침내 선생의 생가는‘왕산공원’이 되고, 생가 건너편 기슭에 왕산기념관이 준공되었습니다. 이날을 맞아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진 선생의 후손들이‘100년 만에 귀향’을 하여 단상에서 소개될 때 제가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모두 선생의 핏줄을 이은 친손과 외손들입니다. 후손 모두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어 좌우 두 분씩만 소개합니다. 왼편 첫째가 선생의 장손‘경성’입니다. 다음이 손녀‘로자’입니다. 지금 우즈베키스탄에서 사는데 여태 처녀랍니다. 맨 오른편은 증손‘윤’이고, 그 다음이 현손‘홍’인데, 지금 막 군에서 제대하여 서울대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날 미국에 사는‘도성’손자는 가족들 소개한다고 마이크를 잡았기에 보이지 않습니다.
천하의 왕산 후손이 ‘게오르기’, ‘블라디슬라브’, ‘나타샤’, ‘따마라’, ‘슈라’가 되고, 장차‘벤허’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허도성 선생의 말씀에 웃음보다는 눈물이 왈칵했습니다. 경술국치 100년이 지난 조국은 아직도 국토가 분단된 채, 한 세기 전과는 또 다른 아픔에 남북 겨레들이 살고 있습니다. 다음‘100년 편지’는 조국 통일 소식과 선생의 후손들이 고국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는 얘기를 후손 누군가가 선생께 띄웠으면 좋겠습니다.
왕산 선생님! 하늘에서 불쌍한 이 겨레들을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2010년 12월 24일.
박도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