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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이백 여든 여섯번째 편지 - 2018년 3월 27일      

100년 편지

이윤철 민영애.

       그리움으로 새긴 아버지 어머니의 이름입니다. 사랑합니다.-이원표-


 서랍을 엽니다. 침대 옆 작은 거울 장 첫 번째 서랍, 안쪽 왼편 구석에 놓인 아버지의 검은 가죽 손지갑. 작은 비닐봉지로 말린 목도장 하나, 2015년도 서울시가 발행한 독립유공자 진료카드, 독립유공자협회의 아버지 명함 한 장, 마켓의 포인트 카드 한 장과 천 원짜리 여섯 장.

아버지의 홀쭉한 지갑을 더듬는 제 손끝이 저려옵니다.  

군모를 쓴 이윤철지사의 공군 소령시절(사진제공_공군본부 공간지)

 아직도 맞은편 아버지 침실 열려진 방문 사이로 "원표야!" 절 부르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립니다. 잠이 들다가도 부르시는 소리에 소스라쳐 아버지 침실의 불을 켜면 누워계셨던 침대만 보입니다.  생전에 잘 모시지 못한 세월이 후회와 아쉬움으로 가득 채워지는 밤, 부족했던 제가 용서되지 않습니다.

 제 나이 만 예순일곱, 그 짧지 않은 오랜 시간을 저와 제 동생들을 기르시느라 염려하셨던 아버지, 어머니.  이 글을 올리는 이 시간에도 너무 그립습니다. 뵙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 한국인인 것을 숨기며 살아오시면서 반려자 되신 어머니를 만나셨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에도 유교의 전통적 윤리관에 자유롭지 못했던 선남선녀는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로 시작된 만남이, 8년간의 동지로, 숨겨진 연인으로, 겹사돈이라는 양가의  극심한 반대에도 맺어져 저희 남매들을 낳으시고  기르시었습니다. 그 어려운 시절,  조국을 향한 일심으로 견디고 이겨내신 아버지와 어머님이 고맙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이윤장, 윤철 형제 중국군시절.(오른쪽_이윤장 중국 육군중위, 왼쪽_이윤철 중국 공군중위)

 조국의 품에 안긴지 두어 달 만에 다시 또 전장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생애는 참으로 모질고 고된 삶이셨습니다.

 아버진 중국 항공군관학교 5기로 통신특기 수료 후 생도장교 준위*(1)로 중국군을 지원하는 미 공군 B29기지에 배속되어 일본군에 맞섰습니다. 폭격기의 통신장비 설비와 지역을 탐색하여 정확히 계산된 목표를 폭격기에 제공하는 임무를 수행하셨고 일제의 항복 후 중국의 내전으로 중국 공산군에 대항한 전쟁을 치루셨습니다.  

  중국 공군 대위, 그러나 귀국 후의 아버지는 우리말이 서툴다며 자신을 낮춰 대한민국 공군 소위로 자원하셨습니다.

 6.25 사변으로 발발된 남침이 계속되자 견디지 못한 우리공군은 건국 기 열대, 비행사 십 수 명과 정비병력 소수만 남기고 해체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돈 십만 원에서 이십만 원씩 차등지급으로 6월 월급과 함께 나누어 주고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지시에 아버진 비로 질척한 여의도 비행장으로 향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돌아보기 위한 걸음에 발견하신 것은 텅 빈 여의도 비행장에 돌아갈 고향을 잃은 이북출신들과 강화도 출신의 병사 32명이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모여 있는 병사들을 진정시킨 후, 겨우 찾은 나라를 다시 또 잃을 수 없다며  우리라도 유격대를 만들어 싸우자는 아버지의 서툰 우리말 설명에 모두가 호응하여 남아있던 칼빈 소총 네 자루와 기관총 한 자루를 트럭에 싣고 할아버님이 계신 청주로 가셨습니다. 무기와 탄약이 필요했고 병사들의 식량이 필요하였습니다. 도움을 청할 곳은 할아버님이 유일하셨습니다.  다행이 얼마 지나지 않아 UN군의 참전으로 우리공군의 긴급소집명령이 있었고 32명의 병력과 함께 아버진 다시 공군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미 공군이 주둔한 진해로 홀로 합류하시게 되었습니다.

 혈연 지연 학연을 막론하고 가까운 벗이라곤 사랑하는 아내뿐, 우리말까지 어눌하셨던 아버진 전쟁 중에도 따돌림을 받으셨습니다.

 대부분이 일본군 출신이거나 일제의 소비*(2) 출신들로 채워진 대한민국 공군에서 아버진 '짱꼴라'라는 비웃음과 따돌림의 대상이셨습니다.

 잃었던 나라를 찾았고 독립된 나라를 지키려 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질시와 미움 그리고  비웃음이었습니다. 왜 일까요? 오랜 망명생활로 국내에 기반은 물론 재산까지도 빈털터리인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이 왜 그리 미웠을까요? 광복군이 왜 그토록  싫었을까요?

 해방 후 '반민특위'의 와해로 이승만정권의 구심점이 된 친일의 잔재로 인한 폐해는 임시정부 출신과 그 가족을 견제와 멸시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더구나 우리말이 서툰 2세들은 그저 '짱꼴라'로 내몰리기 일쑤였습니다.

이윤철 지사가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통신타워_제주기지(사진제공_공군본부 공간지)

 예정치 못한 전쟁을 맞은 한국공군은 보유했던 건국기로 전투가 불가능하여 급조된 전투기 조종사들로 일본에 있던 열대의 P50 무스탕을 지원 받게 되었고 미 공군의 무스탕 전투기 부대가 한국전에 투입 되었습니다.  쉴 사이 없이 뜨고 내리는 전투기로 탑재통신장비의 계속되는 점검과 정비가 필요하였으나 이를 수행할 전문인원이 대부분 일본군 출신이었기에 미 공군 통신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미공군기지의 통신시스템을 경험하고 영어가 우리말보다 편했던 아버지는 한국공군에서 지원 나온 통신특기 자들을 교육시켜가며 정비현장에 투입, 미 공군의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때마다 진급에서 제외되고 따돌림으로 공훈과는 거리가 멀었던 광복군 출신 공군 소위 이윤철. 그러나 젊은 시절 선택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밑거름으로 조국의 위기에 나설 수 있었고, 미 공군의 후원(?)으로 10개월 만에 중위와 대위를 거쳐 소령에 이르렀습니다. 온갖 멸시 속에서도 아버지의 신념은 건재하셨습니다. 한국군이 아닌 미 공군의 의지로 진급하셨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던 저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슬퍼할 일인지 다행한 일인지가 지금에도 가늠되지 않습니다.

 미국 현지 공군기지에서 1953년 3월부터 시작된 16개월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신 아버지는 소령에서 중령으로 승진명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상사였으며 아버지의 교육까지 담당하셨던 분이 소령계급으로 같은 부서에 있게 되었습니다. 곤란을 느낀 아버진 부서장께 부탁하여 소령계급장으로 근무하셨습니다. 얼마 후 선임중령이셨던 아버지는 소령계급의 군복으로 신임 중령들의 진급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나던 참모총장이 보고 말았습니다. 중령계급의 장교들이 일열 횡대로 소령에게 경례를 붙이며 진급신고를 하는 웃지 못 할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이 때문에 군 계급에도 없었던 임시중령이라는 벌칙을 오랜 기간 받으셔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감히 누가 흉내 낼 수조차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항일이 무엇인지, 파벌간의 싸움과 부정부패로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전쟁 속에 지쳐 살던 중국인들에게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롯한 대한국민의 항일의 투지가 중국정부와 중국인들에게 꼭 필요했습니다. 임시정부 산하의 모든 남녀노소가 힘쓴 독립운동은 31절 기념행사를 위한 가두행진에 참석한 대한의 어린 소년소녀들로 부터 '한국광복진선공작대'의 젊은이와 임시정부의 요인들에 이르기까지 대한의 남녀노소로 결성된 대민 선전선무 활동 등으로 중국인에겐 항일의 당위성을 계몽 고취하며 자신들에겐 항일독립의 확신을 쌓아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찾지 못한 반쪽의 조국은 동강나 있었고 625사변으로 피폐한 조국의 휴전 후 세태는 더욱 혼란하였습니다. 군대에선 병사들에게 갈 부식과 각종 군수보급품이 부패한 장교들과 수하들에 의해 착복되는 일이 당연시 되었고, 일본인에게서 접수한 적산가옥을 자신의 재산인양 사고팔아 상납하며 처세와 이재(理財)에 밝은 자칭 애국자들이 만들어지고 원조 받은 물자를 빼돌려 재산을 불리는 사람들로 차고 넘쳐나, 망국의 세월을 이겨 나라를 찾고 지킨, 뜻있는 이들에겐 실망과 낙심의 연속이었습니다.

 419의거 후 참의원 민의원 선거에 나가 낙선하신 할아버지는 빚을 지셨고 엄청난 가난의 고통은 우리 가족의 몫이 되어 이자 갚기에도 부족한 아버지의 월급으로 공군 대령의 아내는 봄에는 이웃집 텃밭을 솎아주며 얻은 채소로 국을 끓이고 여름엔 양파를 팔며 가을엔 참기름을 짜 팔았고 한 겨울엔 서울 역 가까운 동자동 찻길 인도에서 두 사람이 들어서기에도 좁은 ‘센터’로 불리는 판매소에서 전차표와 담배를 팔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16으로 이어진 군부 쿠데타는 친일의 본색이 완연하여 집안의 부채와 함께 별을 달고 싶었던 광복군 출신 군인의 꿈을 앗아갔습니다. 군 생활을 마감한 아버지의 결벽증은 뇌물을 받지 않으면 모함에 빠지는 사회풍토에서 살아남아 생계와 가족을 지키고자 부정한 돈을 대할 때마다 익명으로 자선단체에 헌납하며 반드시 영수증을 챙겨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살얼음 같은 세상을 사셨습니다.

 전쟁 속에 태어나 전장을 누비며 빼앗긴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비록 반쪽이나마 소중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거듭되는 전쟁 속에서도 지켜온 ‘독립정신’이, 전후(戰後)의 내 땅에서 적응되고 동화되지 못하여 이방인 같이 살아온 삶의 시행착오로, 지켜왔던 ‘독립정신’은 꾸겨지고 찢어져 이제는 그 형체마저 불분명한 채, 책 속의 이바구로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생전의 이윤철 지사와 부인 민영애

 다시금 아버지의 빈 지갑을 만져봅니다.

 일제침탈의 감시를 피해 숨어살며 생명을 담보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던 삶을 오직 ‘독립정신'에 기대어 지탱한 그 고단했던 여정을 이기고 나라를 찾은 부모님의 사진 앞에, 아버지의 빈 지갑을 대하는 자식의 마음은 시리고 저리기만 합니다.   

아리고, 쓰라린 아리랑 고개를 넘는 우리의 가슴 저린 노래가, 십리도 못가 발병이 나서 반드시 다시 돌아올, '독립정신'으로,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필설로는 다 못할 조각난 기억을 더듬어, 지금은 하늘나라의 별이 되신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생전의 뜻을 이어가리라 새삼 다짐 드리며 이 편지를 올립니다.

                                 2018년 3월 이른 봄에     장남 원표 올립니다.

 

 

*(1)생도장교 준위 : 중국군은 소위 임관 전 생도장교 준위로 과정을 마친 후 소위로 임관됨.

*(2)소비 : 일제의 ‘소년비행학교’를 당시 줄여 부름.

             이 원 표

 



*전 KBS 교양국 프로듀서.

*전 국립 방송통신대 부설 OUN 방송국 설립위원, 초대국장.

*전 국정홍보처 K-TV 방송주간.

*전 광명시청 기간제 주차원.


copyright src 100년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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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18:46 2018/03/2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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