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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이백아흔 번째 편지 - 2018년 5월 29일      

100년 편지

죽산 선생님에게 드리는 편지 -조회환-


  경애하는 죽산 조봉암(曺奉岩: 1899-1959) 선생님, 제가 먼 발치에서 선생님을 처음이자 마지막 뵌 지가 1958년 어느 날 대법원 법정에서 였으니 어언 60년이 되었군요. 독재권력에 의하여 억울하게 돌아가셨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선생님께서는 태생지인 강화도 신원면과 인천 동구 도화동에서 지독히 빈곤한 청소년기를 보내시다 1919년 3·1독립투쟁에 참가하여 1년간 옥고를 치르면서부터   애국심에 불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구국투쟁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적도 알고 나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는 각성에서 2년 남짓 일본  유학과 그 곳 생활에서 사회주의에 흥미를 가지셨고, 러시아의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는 1년 반 동안 러시아 혁명사 등을 공부하셨으며, 귀국 후에는 조선공산당 창당 등 여러 가지 독립운동 조직에 적극 참여하셨고, 중국에서는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자연맹) 극동국 조선위원(대표)이 되시는 등 독립투쟁에 힘이 되거나 득이 될 듯한 각종 활동에  동분서주 하시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에서 7년간 옥살이를 하셨고, 출감 후에 또 체포되어 인천에 수감되셨다가 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한 뒤 비로소 출옥하셨지요. 그 사이 여운형, 안창호, 이동녕, 김찬, 조동우, 홍남표, 이극노, 김성숙, 홍진, 조완구 등 수 많은 애국지사들과 풍찬노숙을 같이 하셨지요.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축출된 우리나라는 당장 해방된 것이 아니고 미군의 점령지가 되어 3년간 미 군정시기를 지냈는데 이 때 미국의 발탁을 받은 이승만 박사는 당연히 독보적이고 주도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셨습니다. 이 박사는 1946년 6월 북한을 제외한 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많은 애국지사들을 실망시켰고, 미국이 주장한 ‘반공’논리를 한층 가열시켜 정치적 협의의 상대가 될 만 한 지도자들을 ‘빨갱이’라고 혐오하면서 암살을 교사했고, 47년 4월 이후, 특히 48년 4월에 절정에 달했던 제주 4·3사태 때는 3만명 가량의 주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는 참극이 있었고, 48년 10월 여수주둔 국군 14연대가 제주 동포 학살을 반대하여 제주 파견을 거부하자 이승만 정부는 대규모 군경을 동원하여 그들을 토벌하였는데 피살자 약 12,000명중 대부분이 여수와 순천의 민간인 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불상사들에 미 군정과 이 대통령의 책임은 절대적으로 컸던 것입니다.

  미 군정시절, 죽산 선생님은 공산당이 하는 일에 직접 참여해보았으나 자체 내적인 독재와 분열이 심했고, 또 그들이 하는 일들이 조국의 자주독립과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소련의 이익과 정책을 추종하는 것이어서 공산당을 탈당하셨습니다. 따라서 선생님은 선택의 여지없이 분단정권에 참여하여 초대와 2대 국회의원이 되셨으며 그 사이 초대 농림부 장관과 두 번에 걸친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권력욕과 정치적 음해를 일삼더군요. 이 대통령은 48년 9월에 설치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조사활동을 방해하더니 49년 8월에는 아예 ‘반민특위’와 유관 특별검찰위원회 및 특별재판위원회를 강제로 해산시켜서 결과적으로 친일파를 구제·보강 시켰습니다. 11월에는 지금까지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했고, 6·25 동란 발발 직후에는 사상적으로 전향했거나 아예 순수했던 양민 20만 내지 30만명을 학살한 소위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자행했으며, 그해 12월 전란중에 서울에서 17세 이상 40세 까지의 남자 무려 50만명의 국군방위군(단장 김 윤근)을 모집하여 대구와 부산으로 걸어서 이동하던 100일 동안 5만여 명이 춥고 배고파 사망했던 한심한 일이 발생했었지요. 이 대통령이 임명한 단장이란 자와 간부들이 양식과 피복을 팔아먹고 횡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또 자기 주변의 ‘협의’ 상대자들을 모두 멸시·배격하여 정치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이시영 부통령의 사퇴(51.5,1), 김성수 부통령의 사퇴(52.5) 그리고 56년9월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등이 모두 이 대통령의 유아독존적 악질정치 때문이었습니다. 52년 5월 부산에서의 야당 의원 납치 폭행 등을 통한 발췌개헌안 통과도 독단정치의 부산물이었습니다.

  54년 11월에는 국회에서 의원 찬성표 1표가 부족하자 사사오입 계산으로 통과시켜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습니다. 56년 5.15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 504만여 표, 조봉암 216만여 표를 얻었는데 사회에서는 “조봉암이 투표에서 이겼지만 개표에서 졌다”는 설이 분분했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거나 증언했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자유당의 각종 불법과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득표수가 이렇게 많았으니 이승만의 간담이 서늘했을 것입니다. 58년 12월에는 무술경관 300명을 동원하여 반대농성중인 야당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하고 자유당 단독으로 독재에 편리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드디어 선생님께서는 이승만의 지나친 종미(從美)주의와 호가호위적 무법독재에 항거하여 조국의 자주와 민주화를 위해 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 하셨습니다 :

  “그 시대, 그 사회, 그 인정에 맞도록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고침으로써 사람이 사람을 착취함이 없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말하자면 우리들의 이상인 복지사회를 거설하자”면서 “독립 후에도 일부 사람만이 권력을 쥐고 잘살고 호사하는 그런 독립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잘살고 호사할 수 있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겠다” 고 하셨는데 이것이 선생님께서 생각하신 사회민주주의 였습니다.

  선생님은 또 남북문제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하셨습니다. 이유는, 국민감정이 외세에 의한 분단을 용인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남한은 농업우위조건이고, 북한은 지하자원이 많아 공업우위조건이니 남북이 합쳐서 서로 보완해야 경제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고, 또 남과 북이 따로 미·소 양대 진영에 속해있기 때문에 장래에도 편을 갈라 세계적인 전쟁이 일어날 위험성이 있다면서 “정치적·평화적 남북통일”을 주장하셨습니다. 당시 이 대통령은 국민의 대량살상 쯤은 안중에 없이 ‘북진통일’밖에 몰랐기  때문에 평화통일론은 가당치 않았을 것입니다. 58년 1월에는 야당지였던 ‘경향신문’  마저 폐간 시켰으니 이제 죽산선생님 ‘제거’만 남았던 셈입니다.  

  1958년 1월 이승만 정권은 국가변란 혐의를 조작하여 죽산과 진보당의 간부들을 체포하고 2월에는 진보당을 해산시켰습니다. 그런데 한때 중국에서 독립운동도 했고 일제 축출이후에는 한동안 남북을 오가며 장사를 하던 양명산(梁明山)을 간첩으로 몰아 “그 간첩이 북한의 정치자금을 죽산에게 조달했다”고 조작하여 죽산 선생님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드디어 59년 7월 31일 사형을 시켰던 것입니다.

  사형 전에는 선생님의 유년시절 친구들과 재일, 재미 동포들이 구명운동을 전개했고, 1980년대 말부터는 신원(伸?)운동이 시작되더니 1991년에는 국회에서 ‘죽산 조봉암 사면복권청원’운동으로 발전하여, 여야 각 정당의 현역최고위원, 국회의장과 부의장 등 90명에 가까운 국회의원들이 동참하였고, 2009년에도 죽산선생 서거 50주년을 계기로 여야 현역의원 100여명과 각계 지도자들 다수가 성명서를 발표하여 선생님의 명예회복과 조속한 재심을 촉구했었지요.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신부)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200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진보당의 민의원 총선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정권의 의도가 작용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판정했습니다.

  드디어 대법원은 죽산 선생의 유족이 신청한 재심청구를 받아드려 이용훈 대법원장과 주심을 맡은 박시환 대법관을 비롯한 13명의 대법관이 전원 일치하여 죽산이 범했다는 국가변란혐의 무죄, 간첩혐의 무죄를 선언하였고 나아가 “국가권력이 조직적으로 불법수사와 재판을 자행했고 유족들도 사회 불순세력으로 몰려 오랜 기간 사회적 냉대와 신분상의 불이익을 겪었다”며 위자료도 지불할 것을 판결하였습니다. 지난날 비인도적이고 반국가적이며 반인륜적인 악정으로 인해 왜곡된 한국현대정치사의 일부를 다행히 이 사법부가 말끔히 바로잡아 놓았던 것입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 묘역 연보비

  서울 북동부 낮으막한 망우산 (용마산 북록) 공동묘지에 묻힌 선생님의 분묘에 당초에는 비석도 없다가 지금은 어엿한 비석이 서있는데 이는 2011년 선생님이 무죄로 판명 되고 명예가 회복된 뒤의 일입니다. 묘 밑 산길 가의 입석에는 죽산 선생님 어록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읍니다 :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필자는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퇴출된 뒤 잠시나마 민주화된 시대여서 망우리 공동묘지로 참배하려 갔으나 관리인이 그 산위까지 안내하기는 싫어해서 그냥 돌아왔으나 2000년대 초부터는 산책(트레킹)하다 가끔 참배를 했는데, 다른 분들도 더러 참배하는 모습을 보고 그분들에게 저도 감사하게 느꼈습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용단에 의하여, 선생님의 소원이었던 ‘평화통일’의 기미가 보입니다. 선생님께서도 갸륵한 후생들의 노력을 응원하시면서 차분히 지켜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조 회 환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중국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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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8 15:47 2018/05/2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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