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스물 네 번째 편지 - 2010년 9월 14일        

100년 편지

이들이 성공했다면...  -조영빈-



"그러던 중 (1945년) 8월7일 시안에서는 전략정보국(OSS)의 특수작전 훈련을 받은 제1기생 50여명의 졸업식이 있었다. 이들은 광복군 국내 정진대라고 명명되었다. (...중략...) 그러나 광복군의 국내 정진대 파견과 더불어 임정의 이러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김자동) 중 -


1945년 4월 29일 아침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의 작은 앞마당에 스무 명 남짓한 젊은이들이 도열했습니다. 간단한 행사 후 이들은 중국 시안으로 향했습니다. 미국 전략정보국(OSS: CIA 전신)의 특수작전에 참가하기 위한 훈련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광복군에서는 이들을 '국내 정진대'라고 불렀습니다.

 

1945년 8월10일 시안(西安)에서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들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제2지대 본부가 있는 두취(杜曲)에서 지청천 총사령과 협의한 끝에 OSS 훈련을 받은 광복군 2지대원을 ‘국내 정진대’로 편성해 신속하게 국내로 진입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임정은 절박했습니다. 광복군이 국내 진입도 하기 전 상황에서 일제가 패망하면 국제사회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임정이 생각한 ‘국내 정진대’ 역할은 미군의 협조를 얻어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치안을 유지해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투항접수예비대’였습니다.

 

‘국내 정진대’가 처음 국내 진입을 시도한 날은 8월14일이었으나 일본군의 저항으로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8일 새벽 3시 30분 시안 비행장을 출발한 이범석 제2지대장과 김준엽, 장준하, 노태서 등 4명의 광복군과 미군 18명(이 중 1명은 한국인 정운수) 등 22명의 합동정진대 선발대가 드디어 같은 날 낮 12시에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습니다. 하지만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사령관 맥아더에게 일본의 패전에 대한 모든 권한이 넘어가는 바람에 광복군 국내 정진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조국은 냉전의 시작이라는 현실 앞에서 한숨을 쉬어야 했습니다. 연합국은 조선을 일본제국의 일부로 간주하고, 한반도 38선을 기점으로 북은 소련군이 남은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치안을 맡는 또 다른 역사의 질곡을 낳았습니다.

 

국내 정진대가 국내로 들어와 계획대로 작전을 수행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우리의 현대사가 조금은 달리 쓰였을 것입니다. 우리 광복군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공식적인 참전 기록을 남겼을 테고, 해방 후 국제 사회에서 임시정부의 정치적 입지도 그만큼 커졌을 것입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광복군은 일본 패망을 내다보고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준비했습니다. 외세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주도적으로 해방 정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입니다. 광복군의 '국내 정진대'가 그러한 염원의 주요한 포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당시 국제정세가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일제의 패전 분위기가 짙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일제 강점 하의 국내로 잠입한다는 것은 사실상 목숨을 내놓은 일이었지요. 그렇게 까지 해서 그들이 찾고 싶었던 조국은 외세에 의해 해방된 조국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앞날을 설계할 수 있는 자주 국가, 대한민국이었을 것입니다.

 

오는 9월 17일 광복군 창설 70주년을 맞아 사진 속 주인공들이 생각했던 조국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사진은 1945년 여름 중국 시안에서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오른쪽부터) 등 광복군 3총사가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받던 중 찍은 것입니다.

 

장준하는 귀국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1953년 종합교양지 '사상계'를 창간하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신민당)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 박정희 군사정권 독재에 맞섰고, 범민주세력의 통합에 힘썼으나 1975년 8월 17일 경기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사 했습니다.


김준엽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따라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학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1949년에야 귀국해 고려대학교 교수로 36년간 강단에 몸담으면서 아세아문제연구소장과 총장을 지냈습니다. 노능서는 장준하 선생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들어가 활동했습니다.  해방 이후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진 속 광복군 3인은 광복 후 조금씩 다른 삶을 살아갔지만, 이들이 원했던 해방 조국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이 그들이 꿈꿨던 조국과 얼마나 닮아있는지...

조영빈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제5기 '독립정신 답사단'에서 학생단장을 지냈음. '100년 편지를 쓰는 사람들' 편집위원. 더위를 많이 타서 땀을 많이 흘림. 본인 삶에 대한 열정때문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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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09:22 2010/09/15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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