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아홉 번째 편지 - 2010년 6월 11일        

100년 편지

내 마음속의 독립운동가  -오지혜-

[영화배우 오지혜가 외할아버지께 띄우는 편지]

   할아버지, 저 지혜에요.

▲ 영화배우 오지혜씨

현재는 MBC 표준 FM에서<문화야 놀자>를 진행하고 있다.

   할아버지 셋째 딸 태봉이의 맏딸 지혜요.^^ 윤태봉이라는 엄마의 본명, 정말 오랜만에 말해보네요. 사람들은 윤소정이라고 해야 알거에요. 어렸을 때 엄마의 원래 이름을 듣고 촌스럽다고 놀렸던 생각이 나네요. 아...우리 엄마....할아버지가 제일 예뻐하셨던 우리 엄마, 이제는 슬슬 문화계에서 ‘원로’소리를 듣기 시작한 할머니가 됐어요. 하긴 제가 사십이 넘었으니까요. 그런 엄마가 아직도 할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수도꼭지에서 물 나오듯이 눈물을 흘리세요. 이번에도 ‘내 마음 속의 독립운동가’에게 편지를 쓰라 하길래 난 외할아버지한테 쓴다고 했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글쎄, 그 말만 듣고도 우시는 거 있죠. 대체 할아버진 우리 엄마에게 어떤 아버지셨길래 돌아가신지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저렇게 엄마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되시는 건가요?

   할아버지는 이 땅의 영화사에 큰 뿌리 역할을 하신 한국현대영화 초기 감독님이기도 하시지만 제가 어릴 적 들었던 할아버지 얘긴 독립운동을 하시다 일본 순사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하셔서 손가락도 부러지시고 척추가 휘어서 항상 약간 기울어진 자세로 다니셨기에 별명이 ‘6시5분전’이었다는거, 영화도 결국 대중을 선동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 판단하셔서 독립운동 전략의 일환으로 하신 거라는, 그런 이야기들 뿐이었답니다. (언젠가 할아버지 묘가 기독교인 묘지에서 독립유공자 묘지로 이장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어릴 때 산소에 성묘하러 갔던 게 생각나요. 외할머니는 할아버지 산소에 가실 때 마다 할아버지 앞에 앉으셔서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으신지 아주 오랫동안 할아버지랑 대화를 나누셨더랬죠. 그리고 자꾸 자꾸 우셨구요.

   맘 같아선 할아버지가 진짜 이 편질 보실 수 있다 생각하고 우리 가족들 근황만 적고 싶지만 이 글은 여러 사람들이 봐야하는 글이니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를 얘기해야겠네요.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울 엄마의 할아버지 윤득주 선생은 평양의 주전 기술자이셨는데 동학혁명에 가담하신 말하자면 동학운동가시죠. 할아버지 얘길 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분, 영화<아리랑>을 만드신 나운규 감독님과는 요새 말로 ‘절친’사이셨구요. 나운규 선생의 아버님 역시 두 분의 고향인 회령에서 독립투사를 기르는 시민학교를 만드신 분이니 두 분의 성장과정이 어땠을지 눈에 보이는 듯 해요.

▲ 윤봉춘 선생의 칠순잔치 때의 모습.
 독립운동가이가도 한 선생은 광복 후 이른바 '광복영화'를 제작하였다.

   그렇게 빼앗긴 조국에 대한 한과 열정으로 뭉친 두 청년은 북간도에 있는 명동 중학교에서 본격적인 독립군으로 성장하셨어요. 육십만 교포가 살고 있던 그곳의 학교인 명동 중학교는 교과서 공부보다는 군사훈련을 더 많이 시킨 학교로 유명했다죠? 그곳에서 훈련을 받은 두 분은 독립군들이 두만강을 건너 회령 경찰서 수비대를 공격한 소위 도판부 사건에서 회령과 청진 사이에 있는 무산령 터널을 폭파하고 전신, 전화 시설을 끊는 일을 맡게 됩니다. 훗날 두 분이 서울의 연희전문 학교를 다니시다가 이 일로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히셨죠. 이때의 옥고로 돌아가실 뻔할 정도로 오래 앓으셨단 얘기 들었어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젊음과 자유를 유린당하고 목숨까지 바친 얘길 들었지만 그 중의 한 분이 나의 외할아버지라는 사실이 역사를 그저 흘러간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의 일’로 느껴지게 했더랬죠. 제 인생의 커다란 자부심이 되기도 했구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영화같은 연애담도 알고 있어요. 할아버진 가난한 독립운동가로 그야말로 일제세상에서 ‘찍힌 청년’이었고 외할머니는 부잣집 친일지주의 딸로서 두 분이서 비밀연애를 하셨다구요.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외할머니가 담을 넘어 야반도주를 해서 할아버지께 달려갔고 두 분이서 그길로 도망을 가셔서 어느 허름한 중국집에서 냉수 한 그릇 떠놓고 외로운 결혼식을 올린 이야기... 엄마로부터 하도 들어서 이제는 제가 마치 영화로 본 것처럼 눈앞에 그려져요.^^

   1940년 대 조선총독부는 조선 영화령과 조선 영화주식회사, 조선 영화인 협회를 만들어서 이 땅의 영화인들의 창작의 자유를 억압했고 할 수 없이 생계 때문에 많은 영화인들이 어용단체에 협조하는 자세를 취했었다죠. 하지만 할아버진 끝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고 그 어려운 시절에도 할머니와 함께 경기도 양주에 은둔하면서 산곡학원이란 것을 차려 남몰래 학생들에게 우리글을 가르치셨습니다.

   아... 이 대목에서 전 목에 큰 가시가 하나 걸린 거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할아버지! 이 땅이 광폭한 현대사를 써나가면서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 하지 못해 아직도 나라꼴이 그닥 자랑스럽지 못한 형국이 됐지만, 그래도 그나마 할아버지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요.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구요. 허면, 그렇게 ‘생각’했다면, 할아버지 같은 선배 지식인들의 삶의 천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이라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하건만, 제 삶은 참 후져요. 이 땅의 역사가 억압과 수탈의 회오리 바람 속에 처해 있을 때 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며 문화지식인으로서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내신 많은 분들... 저는 그 분들의 삶을 도저히 흉내낼 수 없을 거 같아요.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누구보다도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저로선 다른 예술가들 보다 더 제대로 살아야 하지만 할아버지 같은 용기가 제겐 없어요. 기껏해야 글 몇 줄 쓰고 어줍잖은 시위 몇 번 한 거 밖에 없을 뿐, 제 삶을 걸 자신은 없네요. 그런 삶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텨내셨는지, 어떤 신념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할아버지가 지금 살아계신다면 꼭 여쭤보고 싶네요.

   그래서 어쩔 땐 할아버지가 제 할아버지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 제가 가끔 참다못해 작은 시위라도 할라치면 주위에서 밥 줄 끊긴다고 걱정을 하세요. 그럴 때면 엄마는 할아버지 얘길 해주시면서 격려를 해주세요. 할아버지가 그러셨다면서요?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예술가는 예술가가 아니다.”라구요. 그런 말씀을 하신 할아버지도 자랑스럽지만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자식에게도 그게 맞다고 격려해주시는 우리 엄마도 대단하신 거죠.^^ 참, 평상시에 많이 보수적이셔서 저랑 많이 부딪히셨던 우리 아버지, 그러니깐 할아버지의 셋 째 사위 오현경 선생도요 이번에 정부가 국립극단을 민영화 하겠다 하고 예술감독을 외국사람으로 하겠다 발표한 거에 화가 나셔서 원로대표로 문화부에 일침을 가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어때요. 이만하면 할아버지 후손들로서 많이 부끄럽진 않은 거겠죠?^^;;;

▲ 왼쪽이 여섯 살 오지혜. 오른쪽은 오지혜씨의 모친이자 윤봉춘 선생의 딸인 영화배우 윤소정씨. 엄마가 늘 그리워했던 아버지 윤봉춘 선생은 이제 손녀가 그리워하는 독립운동가로 남았다.

   제가 열 살 때쯤에 돌아가셨으니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것들이지만 그래도 다행히 제가 온전히 직접 기억하는 장면이 하나 있네요. 돌아가실 즈음 외할아버지 댁이 마침 이사를 하고 공사를 하는 바람에 몇 달을 저희 집에 계셨드랬죠.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셋째 외손녀인 저와 시간을 많이 보내셨을 거에요. 부엌의 식탁쯤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말랐지만 키가 크고 약간 외국사람처럼 생긴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신지 말씀을 아주 작게 천천히 하셨더랬는데 열 살이 체 안 된 저에게 태양과 지구의 공전 자전 원리를 가르쳐 주셨어요. 두 손을 주먹 쥐시고 “지혜야, 이게 태양이라면 지구가 이렇게 혼자 천천히 돌면서 태양 주위를 도는 거야.”라는 설명과 함께 주먹 쥔 손을 열심히 돌리시며 제게 우주의 운행원리를 이해시켜 주시려 애쓰시던 모습말예요. 통증으로 많이 힘드셨을 텐데도 손녀에게 하나라도 가르쳐 주시려고 애쓰시던 그 모습... 아... 이십대 때도 삼십대 때도 가끔 할아버지 얘기 하면 이 장면 얘길 했는데 그 땐 그저 덤덤히 웃으며 얘길 했더랬어요. 그런데 사십이 넘고 내 아이가 그 때 제 나이만해 진 지금은... 눈물이 나네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영화를 만드셨던 시절에서 정말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이지만, 아직도 영화인들 사이에선 영화 <유관순>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걸 만드신 분이 나의 외할아버지라고 하면 다들 저에게 할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영화인이셨는지를 얘기해줘요. 시골 마을에서 강렬하긴 했지만 아주 짧은 시기에 스러져간 유관순을 할아버지가 영화로 불러내셔서 온 나라에 알리는 역할을 하셨잖아요. 그야말로 동시대의 예술가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작업을 통해 보여주신 거죠.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같은 작품을 세 번씩이나 만드셨어요. 전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할아버지 시나리오를 공부했어요. 그 때 느꼈던 그 자부심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구요. 나중에 영화행정일을 하셨을 때도 지금의 스크린 쿼터의 전신이 된 외화수입규제방안, 한국영화인세인하, 촬영기자제 수입인세인하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도 많이 해결해놓으셔서 60년대의 우리 영화가 황금기를 누리는 데에 큰 역할을 해주셨다고 들었어요. 참, 제 남편도 영화감독이에요. 할아버지의 까마득한 후배네요. 요즘 한국 영화가 아주 힘들어요. 할아버지 같은 영화인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별로 신통치 않네요.

   할아버지, 우리 부부의 평생 소원은 ‘멋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는 거에요. 별거 아닌 소리 같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늙어가는 선배들을 보면서 느끼게 되요. 젊을 때 멋있는 소린 누가 못하겠어요. 늙어서도 젊은 생각 젊은 행동을 놓치지 않고 살아간다는 건 정말 힘들지만 멋진 일 같아요. 할아버지처럼 말예요. 할아버지 손녀 지혜가 그렇게 늙어갈 수 있도록 하늘에서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세요. 할아버지는 제 마음 속의 독립운동가이시기도 하지만 제 마음 속의 선배 예술가이시니까요. 할아버지... 사랑해요... 모두 함께 만나는 그 날까지 평안하세요.

   2010년 5월 셋째 외손녀 지혜드림.

* 이 글은 영화 평론가 변인식 님의 글 ‘나운규와 윤봉춘’에서 도움을 받았음을 밝힙니다.

오지혜 영화배우

영화배우로 <초록물고기>, <와이키키 브라더스>, <번지점프를 하다> 등에서 연기했다.  
현재는 MBC 표준 FM에서 <문화야 놀자>를 진행하고 있다.


 

오지혜 씨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인희’로 연기했던 것을 기억한다. 인희는 가수가 되겠다는 순수한 꿈을 품고 살았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리움에 찬 인희 눈빛에서는 애절함보다는 되레 의연함이 느껴졌다. 어린 시절이 부끄러웠다면 가질 수 없는 의연함이었다. 외조부에게 쓴 편지에서도 그러한 의연함이 묻어나 반가웠다. 그녀의 외조부가 걸어온 길에서 느껴지는 당당함이 만들어 낸 의연함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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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1 10:45 2010/06/1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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