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스물 다섯 번째 편지 - 2010년 9월 21일        

100년 편지

두엄자리에 망국의 한을 품의신 조경환 의병장  -조세현-

[조세현 선생이 조부님께 올리는 편지]

광주광역시 서쪽에 위치한 어등산(338.4m) 전경

   어등산은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김동수, 김원국, 김원범, 김율, 김준, 박경식, 박봉석, 박용식, 박처인, 신덕균, 양상기, 양진여, 오성술, 윤영기, 이기손, 전해산, 정사천, 조경환 등 20여명의 의병장(이상 가나다순)이 전투를 벌이거나 전사한 매우 유서 깊은 곳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07년(정미년)을 기점으로 이른바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을 전개, 1909년 의병들을 무력화시키고, 이듬해인 1910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했다.

   광주광역시는 1997년 7월 ‘어등산 한말의병 활동조사 및 기념지구 조성계획’을 수립했으나 현재까지 방치되고 있다.

1895년(을미년) 왜놈 낭인들의 손에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시자 유림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창의(倡義)의 깃발아래 의병들이 봉기하는 등 이른바 을미사변이 있었으나, 왜놈들의 침략의 마수는 점점 강화되어만 갔으며,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국운은 종말을 고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05년(을사년) 왜놈들은 드디어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미명 아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그들의 속국으로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때도 역시 전국의 많은 의병들이 항거하였으나, 열악한 무기와 훈련받지 못한 의병들은 엄청난 희생자를 낼뿐 ‘속수무책’ 이었습니다.

또다시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07년(정미년) 왜놈들은 고종 황제를 협박하여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자, 의병들은 이번에도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싸움에 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이치였습니다.

특히 이 당시 왜놈들은 호남지방에 몰린 전국의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타 지역의 헌병과 경찰까지 이곳에 투입하여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펼쳐 ‘호남의 산하는 피로 물들었다’할 정도로 많은 의병들은 쓰러져만 갔습니다. 이를 서양 기자들은 ‘genocide(대학살)’라고 기술하였습니다.

저의 조부님이신 대천(大川) 조경환(曺京煥) 의병장의 순국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1909년 12월 설날을 앞두고 추위에 떠는 의병들을 일시 해산하여 구정 후 다시 규합하기로 하고, 조부께서는 막료 다수와 더불어 광주 광산군 소지면 어등산(사진) 토굴에 은신하고 있던 중 왜놈들에게 포위당하여 격전 끝에 왼쪽 가슴에 두 발의 총탄을 맞았습니다. 이때 자신의 품안에 간직하였던 의병들의 명단이 왜놈의 수중에 들어가면, 이들을 모두 찾아 참살을 할까 우려한 나머지 오른손으로 이를 꺼내어 입으로 물고 뜯다가 마침내 성냥(당시 洋火라고 일컬음)을 그어 다 태운 다음 초인적 모습으로 운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장군의 순국은 당시 시가아동(市街兒童)들에게 널리 회자(膾炙)되었다고 합니다.

조장군을 잡기 위하여 왜놈 헌병들이 992발의 총알을 소진하였다고 자신들의 보고서(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보고서')에 밝혔다고 하니, 얼마나 치열한 전투였겠습니까?

조부님의 시신은 후원군에 업혀 동네 마을의 두엄자리에 숨겨졌다고 합니다. 뒤늦게 도착한 왜놈들이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조 장군의 시신은 찾지 못하고 퇴각하자, 뜻있는 마을사람들이 시신을 인근마을 뒷산에 평장(平葬:묘의 봉분을 짓지 아니하고 평평하게 매장함)했습니다. 이후 남자 자식들은 지게를 지고 나무꾼으로 가장하여 먼발치에서 인사를 드리고, 여자 자식은 나물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역시 먼발치에서 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상 이야기 중 일부는 가족을 통해 구전(口傳)되어온 것으로 정사(正史)에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엄청난 희생이 어찌 조 장군 한 분뿐이겠습니까?

대천 조경환 의병장(왼쪽)과 부인 이동임 여사

‘독립운동’이란 이와같이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이 비참한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익히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이라는 네 글자를 놓고 반감이 교차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난 세기 50년 동안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기고, 항쟁한 50년 동안(1895~1945)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물산장려운동, 국어보급운동 등 비교적 온건한 항쟁도 있었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벌어진 의병전쟁, 독립군전쟁, 삼일만세항쟁, 6?10만세항쟁, 광주학생항쟁, 조선혁명군, 조선의용군, 광복군 등 목숨을 건 적극적인 항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칭하여 ‘독립운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할진대 과연 '독립운동'이라는 용어가 목숨을 건 항쟁을 온당히 표현하고 있는지 부끄럽습니다. 당시 나라는 탐관오리들이 들끓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지라 드디어 국권을 완전히 빼앗긴 지 무려 35년 후에 겨우 나라를 되찾았습니다만, 허리가 두동강 난 상태로 동족상잔의 가슴 아픈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할아버지의 전사로 청상과부가 되신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는 홀로 어린 자식들을 어렵게 키워 오다가 할아버지 전사하신 이후 할아버지 생가인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안동 693번지(28반)<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고 함>에서 화순군 북면 노기리 백아산 밑 깊은 산골짜기로 자식들과 같이 피신해 살아오시던 중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은 아무 죄도 없는 74세의 할머니를 무참히 살해한 이야기는 너무 끔찍하여 이를 필설로 형언하기 어렵습니다. 참으로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제가 다섯살이 되던 해, 홍역으로 크게 앓았습니다. 그때 할머니께서는 칭얼대는 저를 등에 업고 백설기 떡을 주면서 달래주시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1973년 10월 16일 저는 서울 동작동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할아버지의 묘를 이장할 때 두 분을 같이 합장하여 드리면서 영혼만이라도 해후하시길 간절히 빌었습니다.
   

선열들이시여, 이 겨레를 굽어 살피소서!

조경환 의병장의 유언과 한편의 만장(輓章)이 다음과 같이 전하여 옵니다.


- 조경환 의병장이 남긴 유서 -

天月重蒼(천월중창):하늘이 거듭 푸르고 달빛 다시 밝으리
?鬼殲賊(려귀섬적):못된 귀신 되어서라도 왜적을 섬멸하리라
不滅島夷(불멸도이):섬나라 왜놈 멸망치 않으면
惟魂不復(유혼불부):내 죽어 혼백도 돌아오지 않으리


-고광순 의병장 장례식에서 조경환 의병장이 쓴 만장(輓章)
(고광순 의병장 장례식에서)(註1)

白首丹心建義旗(백수단심건의기):흰머리 휘날리며 충성된 마음으로 의병깃발 세웠건만.
?風吹落槿花時(정풍취락근화시):홀연 부는 바람에 무궁화꽃 떨어질제.
光山有約人何去(광산유약인하거):광산모임(註2) 약속두고 그대 어딜 가셨소.
不寢燈前獨自悲(불침등전독자비):등불 앞에 잠 못들고 나홀로 슬펐네
千秋許遠復吾東(천추허원부오동):천년 전 허원 장수(註3)가 우리나라에 태어나
義鼓聲高燕谷中(의고성고연곡중):의로운 북소리가 연곡 골자기에 높았건만
國運否耶能未捷(국운부야능미첩):국운이 비색하여 능히 승전하지 못하니
西風題輓淚盈瞳(서풍제만누영동):서쪽 바람을 지고 만장을 쓸 제 눈물 만이 가득하네


(註1) 이글은 1907. 10. 16 鹿川 高光洵 義兵將이 全南 求禮郡 燕谷寺에서 倭軍과 戰鬪 中 戰死하자 수많은 儒林과 義兵들이 그를 哀悼하는 ‘輓章’을 썼는데 그 中 大川 曺京煥 義兵將이 18年 先輩 高光洵 將軍을 追慕하면서 쓴 輓章임.

(註2) “光山모임”이라함은 湖南義兵 集結地인 光山郡(現 光州廣域市 光山區) 魚登山을 지칭하는 듯함.

(註3) 唐代의 정종황제의 증손자인 장수로서 遠征길에 戰死함

(註4) 曺京煥 義兵將은 學術的으로는 華西 李恒老(1792~1868)와 勉庵 崔益鉉(1833~1906)의 衛正斥邪思想을 이어받은 勉庵의 弟子들중 數많은 學者나 義兵將들이 誕生하였으나 그중 湖南 義兵將 가운데 鹿川 高光洵 義兵將과 大川 曺京煥 義兵將 두분은 恪別한 사이었던 것으로 알려짐.



           조세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

  대천 조경환 의병장 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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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9 10:52 2010/09/2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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