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일곱 번째 편지 - 2010년 4월 22일        

100년 편지

고창고보 재학 중 강제징용 당한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  -서홍관-

[故 서정복 선생에게 올리는 아들 홍관의 글]

   아버지!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지 어느덧 6년이 되고 어머니 돌아가신 지도 3년이 되나 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기일이 되면 다같이 모악산 기슭의 부모님 산소에 모여 성묘를 하고 우리의 어린시절과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기도 하고 아쉬워 하기도 한답니다.


▲ 아버지 30대 모습이다.

   아버지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여 기승을 부리던 1922년에 태어나셨습니다. 고창고보를 다니시던 중 1942년 같은 나이의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다고 했지요. 그러나 고등학교에 다니던 아버지의 운명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습니다.
   일제는 1941년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지만 1942년 6월 5일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미군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부터 지원병제를 도입해서 조선 청년들을 전쟁으로 내몰던 일본은 궁지에 몰리자 1942년에는 강제징병령을 공포하였고, 뻔뻔스럽게도 조선인도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원래 1922년생이시던 아버지는 호적 신고가 2년 늦게 된 관계로 징병 대상으로 통고를 받으셨다고 하지요.


▲ 아버지는 1942년 동갑이신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결혼하여 아들 딸을 두고 있던 고등학생에게 나가면 다 죽는다는 태평양 낯선 곳으로 끌려가는 것은 말 그대로 죽으러 가는 길이었을 겁니다. 그 공포감은 지금 우리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한 도인을 만났다고 하셨지요. 그 도인은 술법을 공부해서 새로 변하면 일본 헌병이나 순사가 잡으러 와도 달아날 수 있다고 했다지요. 그래서 아버지와 같이 징병에 가게 된 사촌과 함께 골방에서 술법 공부를 하셨다고 했지요. 어머니가 두 분이 공부하던 방으로 밥을 해다가 주셨는데, 아직 술법이 통하지 않았는지 두분 다 계속 인간으로 남아서 끙끙대고 있었다지요. 이 대목을 들을 때면 우리는 웃기도 하고 그랬지만 당시 아버지 절박한 심정은 오죽했을까 싶습니다.
  아버지는 끝내 술법을 익히지 못하고 일본군에 끌려 가셨습니다. 이미 막바지에 이르른 전쟁에서 오끼나와가 함락되었고, 아버지는 본토 사수를 위해 일본군 사령부의 소위 ‘옥쇄(玉碎)’ 명령을 받은 채 규슈에서 방공호를 파면서 지내다가 해방을 맞았다고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 금융조합을 그만두시면서 직장 동료들과 찍은 사진인데 "성공을 빌면서"사진을 찍었지만 성공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을까요? 어머니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남편이 군에 나간 아낙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해방이 되어도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지요. 징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향병들에게 우리 민족은 인심이 후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밥을 해서 먹이곤 했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고, 일본에서 귀환하던 배 한척이 침몰되었다느니, 일본군들이 조선 군인들을 죽인다드라 하는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돌아서 어머니는 가슴 졸였다고 합니다. 늦게야 아버지는 나타나셨다지요.
그런데 아버지처럼 청춘을 빼앗긴 징병의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에 어떤 보상을 받을수 있었습니까? 이야기는 당시 만주지역으로 옮겨 갑니다.


  만주에서는 일본의 괴뢰군대인 만주군이 있었고 오까모도라는 이름을 쓰는 한국인 장교가 있었습니다. 동포들이 토지를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고 만주로 떠나고, 징병과 징용과 정신대의 이름으로 일본으로 태평양으로 중국으로 끌려갈 때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천황을 위해 중국독립군과 싸우던 그는 귀국해서 당당히 국군 장교가 되어 다시 출세의 길을 달리다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게 되자 이번에는 징병과 징용 피해자들의 피해보상금을 대신 받아갔습니다.
  징병과 징용, 정신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게 희생자들의 희생의 댓가를 요구했지만 일본 법원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의 한국정부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시 모두 받아갔기 때문에 한푼도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억울하게 목숨과 청춘을 바친 그분들의 피값을 가로챌 수 있었을까요?

  아버지!

▲ 아버지는 고창고보 재학 중 강제로 징병 당하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1년전 쯤 아버지는 저를 부르시더니 목소리까지 낮추시며 아버지 사진이 멋지게 박힌 증명서 한 장을 보여주신 적이 있으셨지요. 거기에는 태평양전쟁피해자협회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곧 보상이 나올 거라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신 뒤 신문 구석에 조그만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단체가 징병 징용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이 나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등록비를 받아먹은 사기조직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일본에 당하고, 한국정부에 당하고, 이번에는 보상금을 받기를 갈망하던 열망을 이용한 사기꾼들에게도 다시 한 번 당하고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한국정부가 징병,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에게 받아야할 피의 댓가 3억불을 경제개발에 썼다면, 경제개발에 성공한 뒤라도 보상을 했어야 합니다. 청구액수를 터무니없이 적게 받아낸 것도 잘못이지만 정신대 할머니들의 눈에서도 피눈물이 나게 한 한국정부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버지!
  우리는 해방이 된지 65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일제의 잔재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뒤 조의금 중 3백만원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 기탁했고 그 책이 드디어 발간되었습니다. 아버님의 뜻도 그러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와 민중들이 견뎌냈던 혹독한 세월을 제 위치로 되돌려놓기 위해 제가 이 백년편지를 씁니다. 현재 이명박정부는 우리 민족의 긍지가 되어 준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인정하지 못하는 못난이 정권입니다. 대한민국 건국은 분단된 남한정부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엄혹한 시절 우리 민족의 희망의 등불이 되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것을 다시 알려야 합니다.

  아버지!
  이제 하늘에서 새가 되셨나요? 이제 일본 헌병도 무섭지 않고, 일본군 사령부의 옥쇄 명령도 무섭지 않은가요? 이왕에 새가 되신다면 장수매가 되셔서 우리 민족에게 갈 길을 알려주시고 우리나라가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을 지켜봐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아들 홍관올림.


서홍관 의사, 시인

현 국립암센터 암예방 검진센터 의사 
저서 <전염병을 물리친 빠스뙤르>, 시집 <어여쁜 꽃씨 하나>  외

 

서정복(1922년-2004년)

 전북 완주 출생. 고창고보 재학중 태평양 전쟁에 강제동원되어 규슈에서 징병살이를 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군산 금융조합에서 근무하였고, 퇴직 후 비누장사 등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전북일보사 중역이사, 전북일보사 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82세가 되던 2004년에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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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3 19:48 2010/05/13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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