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서른 여섯 번째 편지 - 2010년 12월 14일        

100년 편지

백범 김구 선생님  -이종호-


   백범 김구 선생님.

   <독립정신 답사단> 제1차(2005년) 및 제6차(2010년)에 참가하였던 이종호입니다.

▲  경교장 앞에서 김구 선생이 둘째 아들 신과
손녀 효자와 함께 찍은 사진(1948년)

   상해부터 1945년 8월 당시 임정 본부였던 중경까지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임정 요인들이 그야말로 극심한 고초와 불편을 겪으면서도 조선의 해방이란 한 가지 일념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해방 직후부터 남북이 갈라진 상태가 현금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아마도 예상치 못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백범 선생님이 더욱 놀라실 것은 친일파 청산이 2010년이 된 상금까지도 마무리되지 않아 이들 처리를 놓고 계속 응어리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독일의 나치 통치를 겪었던 유럽의 각 국에서는 한국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독일에 점령되었던 각 국이 독일의 치하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치 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처리했습니다.
   더구나 가해국인 독일조차도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 등을 통해 나치지도부를 숙청했습니다. 서독이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서방국의 대열에 성공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도 각 국에 큰 피해를 준 나치전범을 철저히 사법 처리하여 후유증을 최소한으로 줄였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나치부역자 청산에 대해 말씀드리면 영국에서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이끌던 드골은 1944년 8월 25일 폰 콜티츠 독일군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자 개선장군으로 입성한 후 나치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정리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의 반역자, 나치협력자들의 숙청방침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나치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腫瘍)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드골의 주장은 매우 단순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나치협력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이 만든 썩은 종양들이 종국에는 나라를 모두 부패시켜 프랑스를 망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드골은 초반부에 유명 언론인과 지식인들, 그리고 비시 정권의 최고지도부를 심판해 가혹할 정도로 엄벌을 내린 후 비시정권 공직자들, 지방공무원들, 사법부와 군부, 교육계와 경제계, 출판인과 연극인 및 영화계, 미술계, 석학집단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나치협력자들을 차례로 숙청했습니다. 이와 같이 철저하게 나치부역자들을 숙청했는데 프랑스의 숙청 논리는 다음 말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나치전체주의에 ’민족의 혼과 정신‘을 팔아먹은 민족반역자는 프랑스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나 마찬가지다.’

   드골은 프랑스를 팔아먹은 사람은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프랑스는 매국노가 아닌 프랑스인에 의해서 건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프랑스점령기간 동안에 프랑스를 위해 싸운 레지스탕스들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보상과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점이 바로 프랑스가 해방된 후 다른 나라와 같이 좌파와 우파가 분리되었음에도 극심한 혼란을 겪지 않고 국민 전체가 나치협력자 색출과 조국 건설에 앞장 설 수 있게 된 요인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합니다.

   한국에서 프랑스처럼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프랑스와 한국의 상황이 똑같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는 친일부역자의 청산 방법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차후에 이런 상황이 또 다시 벌어졌을 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나치부역자 청산은 귀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00년을 맞이하여 백범 선생님이 돌아오실 때 이런 어정쩡한 상황이 어떤 방법으로든 말끔하게 해결되어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편지를 드립니다.

   이종호 드림




 이 종 호


 
한국과학기술원(KIST) 박사.

김구(金九, 1876. 8. 29. ~ 1949. 6. 26.)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백범일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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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6 15:52 2010/12/1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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