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열 여덟 번째 편지 - 2010년 8월 10일        

100년 편지

‘마지막 독립운동가’ 조문기 지사님께  -이봉원-


선생님! 조문기 선생님!


지난 7월 24일은 선생님께서 한민족 독립운동의 마지막 거사를 일제에 빼앗긴 땅 서울 한복판에서 하신 지 예순다섯 번째 해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 저는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과 함께 서울시의회 건물에 모여 선생님의 의거를 기리고 선생님을 추모했습니다.

▲ 조문기(1927.5.19~2008.2.5)

독립운동가.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서 조선인 노무자들이 일으킨 대규모 폭동을 주도해 수배되었다. 귀국한 뒤 1945년 5월 대한애국청년당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1945년 7월 24일 경성부의 부민관에서 일제 어용 행사를 겨냥해 폭발물을 터뜨렸다. 광복후에는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 중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을 1999년부터 맡아 친일파 청산 문제에 힘을 쏟았다.


선생님께서는 일제가 이 땅을 지배한 지 35년 그리고 그것이 종식되기 20일 전에, 열아홉 살 어린 나이로, 유만수(23), 강윤국(20) 두 동지와 함께, 친일파 박춘금과 그 추종자들이 한민족 말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경성부 부민관 (현재 서울시의회 건물) 집회장에 들어가서 폭탄 2개를 터뜨려 놈들의 책동을 무산시켰습니다.


선생님께선 이미 3년 전에도 일본에서 소년 노동자로 일하시던 중에 일본강관주식회사 파업을 주도해 지명수배가 되셨었지요. 그러다가 좀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실 요량으로 귀국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 세운 목표가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서, 그 곳에 계신 지사님들을 모시고 말석에서나마 독립운동을 하시는 거였지요. ‘한국에서 그냥 임시정부를 찾아가 어린애들이 독립운동하러 왔습니다 하면, 임시정부 어른들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겠나. 철없는 애들이 독립운동 하러 왔다고 하면 어떻게 대하시겠나. 그러니 이렇게 그냥 갈 게 아니라 국내에서 떠들썩하게 거사 하나라도 일으켜 가지고, 그 공을 등에 짊어지고 가면, 우리가 비록 나이가 어려도 임시정부는 우리를 믿고 중요한 일을 시킬 것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으로, 선생님께선 부민관 폭탄 의거를 일으키셨습니다.


해방 뒤에는 단정 반대 투쟁으로 옥고를 치르셨고, 동족상잔이 일어난 뒤엔 제 정신으로 하늘을 볼 수가 없어서 얼굴에 분칠하고 극단의 배우 생활도 잠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선생님을 가만 놔두질 않았지요. 대통령 암살과 정부 전복 음모 사건를 조작해서 투옥하고 고문을 가했지요.


그 뒤로는 오랫동안 시골에 묻혀 조용히 농사에만 전념하셨는데, 어느 날 한 일간신문이 부민관 의거를 지휘한 자가 따로 있다는 황당한 기사를 내보내는 바람에, 선생님께선 어쩔 수 없이 다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셔야 했지요. 일제강점기 때 공주 지방에서 부면장을 했고 해방 뒤엔 대형 사기 사건으로 4년이나 징역을 치른 김ㅇ극이란 자가 나타나선, 백범의 지시로 자신이 관련한 대일 첩보 조직에서 선생님 같은 청년들을 시켜 부민관 의거를 일으킨 것이라고, 거짓 정보를 제공했고, 그 신문사는 확인도 않고 그대로 활자화했지요. 그뿐이 아니지요. 국회의원도 했던 김ㅇ한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폭탄 제조에 쓸 다이너마이트를 자신이 청년들에게 제공해 부민관 의거가 성사됐노라고 썼지요. 부민관 의거가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도 몰랐던 이 사람의 역사 왜곡은 그 뒤 국내 방송사의 유명 드라마에서 그대로 극화됐었습니다. 그러잖아도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싫어 고향에 은거 중이셨던 선생님은 가짜 독립운동가들이 나타나고 독립운동의 참 역사가 왜곡되는 현실을 더는 좌시할 수 없으셔서, 그때부터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1999년, 선생님께선 친일인명사전 발간 사업을 추진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2대 이사장 직에 취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겨레의 숙원 사업이기도 한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이 온전히 진행되게끔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때로는 채찍도 드셨습니다. 마침내 역사적인 친일인명사전은 2009년 11월 세상에 나왔고, 현재 수천 질이 인쇄돼 국민 속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부왜역적들을 옹호하거나 스스로 신종 친일파임을 자처하는 세력들이 더는 함부로 떠들거나 설치지 못하게끔 하는 데 아주 강력한 제어 장치로서 제 구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선생님께선 부민관 의거에 이어 또 하나의 거룩한 의거이자 독립운동을 돌아가실 때까지 하셨습니다.

 서울 중구 태평로에 있었던 경성부민회관. 현재는 서울시의회.

경성전기의 2차년도 기부금 50만원을 재원으로 하여 건립됐다. 종합 공연장 역할을 했던 이곳은 군국주의 시절에 숱한 동원 예술과 정치 집회의 본거지였다. 조문기 선생등이 폭발물을 터뜨리던 날은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라는 어용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아 애통합니다. 이 사전이 나오기 두 해 전 선생님께선 그만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무엇이 그리 급해 그 몇백 일을 더 참지 못하시고 영면의 길로 가셨습니까? 대전 현충원에 모셔 있는 선생님의 무덤 비석에는 선생님의 어록 가운데서 뽑은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지요.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선생님께선 돌아가신 뒤까지도 저희를 부끄럽게 만드십니다. 아니 정신이 번쩍 들도록 커다란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 친일인명사전

2001년 조문기 선생이 몸담았던 민족문제연구소와 120여 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노력으로 2009년 11월에 발간됐다. 한때 편찬 예산이 국회에서 전액 삭감되기도 했지만 누리꾼 모금 운동 등으로 편찬할 수 있었다. 조문기 선생은 발간 두 해 전에 별세했다.


선생님, 지금은 분단과 미움이 없을 하늘나라에서 먼저 가신 독립운동 선열님들과 함께 편히 계십니까? 그래도 저희가 이따금 졸거나 한눈을 팔거들랑 두 눈 부릅 뜨시고 일갈해 주십시오. “친일파 청산이 끝났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 혼란스런 시대에 참으로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을 한 분 모시고 있었던 저희는 참 행복했습니다.


2010년 8월 2일

(사)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위원장 이봉원 올립니다

 

이봉원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얄라성 프로덕션의 대표와 '대한민국임시정부사적지연구회'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바로알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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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0 19:03 2010/08/10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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