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열 네 번째 편지 - 2010년 7월 13일        

100년 편지

맵고 당찬 조선여인의 혼 -원영애-

[연극인 원영애씨가 정정화 여사에게 쓰는 편지]

   하늘에 계시는 정정화 할머니.

   어느덧 할머니께서 가신 지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할머니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에 뜨거움이 차오릅니다. 할머니를 생전에 뵌 적도 없고 아무런 개인적 연고도 없지만, 마치 혈연으로 이어진 가까운 어른처럼 느껴집니다.

   할머니의 삶은 여러 부분에서 모자란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가치 판단이 혼란스러울 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시는 스승으로,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는 절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극기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 정정화 여사

   충남 예산에서 할머니가 태어나신 해가 1900년이니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때는 나이 열한 살이었겠지요.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시아버지 김가진 선생님과 남편 김의한 선생님이 있는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가 그 때부터 해방 이후까지 25년 동안 어려운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아 ‘임정의 며느리’ 역할을 하셨지요.

   폭탄을 던지고, 총칼로 적을 죽이는 것만이 독립투쟁이 아니라 제 2선에서 활동자금을 마련하고 안전한 잠자리와 식사를 뒷바라지하는 일 역시 투쟁일진대, 할머님은 그 어려운 일을 성심성의껏 다 해 내셨습니다.

   길고도 험난한 망명과 유랑생활에서 한 치의 흔들림이 없이 임시정부의 어른들을 모시고 끼니도 잇기 어려운 임정의 살림을 챙기는 모습에서는 ‘조선여인의 심성’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여섯차례나 국내에 잠입하여 왜경과 밀정의 눈을 피해가며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모금한 뒤 이를 상해 임시정부에 전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할머니의 모습에서는 맵고 당차게 절망과 맞서는 ‘조 여인의 혼’을 느끼게 됩니다.

   너나없이 궁핍한 망명객들로 채워진 임정의 어려운 살림을 알뜰히 돌보는 맏며느리인가 하면,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여섯 차례나 목숨을 걸고 국내에 잠입해 자금을 모금하러 다닌 투쟁가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사람은 이런저런 고통을 겪고 힘겨운 노력을 쏟게 마련이겠지요. 그러나 온 국민이 망국의 노예로 전락한 일제 36년의 암흑기에 비하면,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혼란이나 어려움은 훨씬 이겨내기 쉬운 것들일 것입니다. 할머님은 생애를 일관한 독립운동의 업적만으로도 길이 추앙받아 마땅하지만, 버거운 역사의 짐을 지고도 늘 온화하고 올곧은 자세를 유지하신 점이 더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할머니..

   인연이란 꼭 혈연이나 직접적인 만남으로 이뤄지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분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알게 되고 삶의 진정한 방향을 찾게 되는 것, 이것이 시공을 초월하는 더 깊은 인연이 아닐까 싶습니다. 할머니와 독립극장의 인연도 그러합니다. 할머니의 삶이 녹아있는 녹두꽃(장강일기)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던 그날, 할머니의 삶을 무대공연으로 올려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으로 할머니께서 그렇게 아끼시던 김자동선생님과 1997년11월 임시정부의 흔적을 따라 상해,가흥,중경으로 비애와 비감을 느끼며 다녔던 기억, 상해근처에 할머니께서 잠시 거쳐하셨던 애인리에도 가보았답니다. 그곳을 보면서 어떻게 여기서 지내셨을까! 가슴만 아려왔었지요.

   중국에서 돌아온 후 1998년에 아!정정화, 2001년엔 치마로 2002년 일본 동경,오사카 공연에 이여 2005년 세미뮤지컬‘장강일기’로 할머니와 인연은 깊어만 갑니다. 이 소중한 인연을 얼마나 잘 살렸는지 두렵기도 하였지만, 할머니의 넋이 많은 관객들의 가슴에 들어가 불이 되고 꽃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었지요.

   할머니..

   이제 일경의 눈을 피해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너던 때로부터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의 역사는 많은 걸 바꿔 놓았지요. 지금 우리는 자신을 지킬 힘을 지니고 경제적으로도 썩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토를 빼앗기고 백성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 백성의 절반 이상이 문맹이던 시절에 비하면 오늘 세상은 상전벽해나 다름없습니다.

   이차대전 이후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한 1백40여 국가 가운데, 대한민국만큼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가 없다고들 합니다. 가슴 뿌듯한 일이지요. 왜정시대의 궁핍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해방 후에도, 한국전쟁 후에도, 외국의 원조물자에 의존하여 겨우겨우 생활을 지탱하던 나라가 이제는 거꾸로 아프리카,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를 원조하고 산업화의 경험을 전수해주는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오늘의 성취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저희들의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저희는 오늘의 편안한 삶을 향유하고 있지만 정작 오늘을 있게 만든 분들은 어려운 시대를 힘들게 살다가 노년에 이르고 하늘나라로 가신 전 세대, 그리고 전전 세대 들입니다.

▲ 중국 가흥시절 임시정부 요인들.(아랫줄 왼쪽 두 번째가 정정화 여사)

임시정부요인이라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중국식 의복을 입고 있다.


   할머니.

   저희 세대에게도 저희가 마땅히 해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분단의 벽을 해소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큰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복지를 실현하는 일도 큰 과제입니다. 품격 있는 문화를 향유하고 아름다운 국토, 깨끗한 환경을 지키는 일도 과제이겠지요.

   이처럼 할 일이 많기에 우리에게 책임이 있고 살맛이 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일이면 목숨을 돌보지 않고 나섰던 선열들의 삶을 교범으로 삼는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에 있을까 싶습니다. 하늘에서 지켜보시다가 저희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따끔히 회초리를 내려주십시오. 엎드려 존경과 사모의 마음을 올리며 늘 편안하시길 두손 모아 간절히 빕니다.

   원영애 올림.

연극인. 현 독립극장 대표      

수당 정정화(鄭靖和 : 1900~1991)

   여성독립운동가로 시아버지 동농 김가진 선생과 남편 김의한 선생을 따라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았다. 1932년 윤봉길 의사 폭탄 투척 사건으로 임정요인들과 함께 상해를 떠나 망명정부를 10년 동안 뒷바라지 했으며, 중경에서 광복을 맞이 했다. 광복 후 미군정의 홀대 속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남편 김의한 선생이 납북됐고, 가족이 흐트러지는 와중에 부역죄로 투옥됐다. 그녀의 생을 <장강일기>에 정리하고 1991년 생을 마감했다.

 

정정화 여사는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여섯차례 국경을 넘나들었다. 한편으로는 26년간 임정의 이런저런 살림을 도맡았다. 조국 독립을 위해 궂은 일 마다하지 않은 '모두의 어머니'였다. 글쓴이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정정화 여사를 두고 "마치 혈연으로 이어진 어른 같다."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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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5 14:31 2010/07/1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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