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예순 한 번째 편지 - 2011년 6월 6일        

100년 편지

백범 김구 선생님께  -임진택-


   백범 김구 선생님!

   선생님께 편지를 쓰기 전에 우선 저에 대한 인사소개를 드려야겠군요. 저는 임진택이라고 합니다. 작년(2010년)에 선생님의 일생을 담아 판소리로 공연한바 있는 자칭 광대이지요. 외람되게 저도 호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한목’이라는 호를 쓰고 있습니다. 한목 임진택, 백범 김구 선생님께 정중히 인사말씀 올립니다.

▲ 백범 김구 선생

   선생님의 서거 60주년을 맞은 2009년, 선생님의 일생을 판소리에 담아내겠다는 생각을 처음 가진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경교장을 답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강북삼성병원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는 그 곳에서 늦게나마 선생님의 체취를 맡아보고 안타까운 서거의 현장을 목도하자는 뜻에서였지요. 그날 차를 타고 막 경교장에 도착하려는 시각에 제 핸드폰(선생님이 인천감옥에서 사형집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서울-인천간에 가설되었다는 전화가 발달 진화하여 지금은 국민 각자가 지니고 있는 무선 이동전화)이 급히 울렸습니다. 집사람이 전한 내용은 뜻밖에도 정치검찰의 압박을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경교장 2층 거실 남쪽 창문에 그대로 남아있는 60년전의 흉탄 자국을 바라보면서 이 우연한 겹침이 제가 만들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가 지나간 역사가 아닌 바로 오늘의 역사를 담지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단과 폭압의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며, 선생님이 그토록 원하시던 우리나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저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를 만들기 위해 저는 선생님이 남기신 ‘백범일지’를 여러차례 숙독하였습니다. 예전에 젊은 시절에도 선생님의 일지와 어록을 접한 기억이 있습니다만, 사실 그때는 주석이 명확치 않은데다 인쇄기술도 좋지 않은 편이어서 그냥 건성으로 읽고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을 때는 돌베개출판사나 나남출판사, 학민사 등에서 나온 책의 주석들이 쉽고 명확하여 선생님의 생애와 생각이 빠짐없이 머릿속 깊이 새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자서전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저는 책에 담긴 역사성은 물론이요, 흥미진진한 문학성에 있어서도 그 수준이 벽초 홍명희 선생의 소설 <임꺽정>에 못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어, 판소리 사설을 선생님이 다 써놓으셨네!” 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다만 선생님이 겪으신 내용을 판소리로 다 담아내자면 10시간 20시간짜리가 될 것 같아 제가 3시간짜리로 단축하여 사설을 정리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제가 갖고 있던 선생님에 대한 인상은 ‘범’ 즉 호랑이입니다. 선생님의 호에 들어있는 ‘범’짜는 평범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받은 선생님에 대한 느낌은 평범이 아니라 비범이며, 호랑이와 같은 분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직접 만나뵌 어른들 중에 과연 비범하며 호랑이같은 분이 딱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은 백기완 선생이십니다. 선생님과 같이 황해도가 고향인 백기완 선생은 어린 시절 해방 직후 월남하여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있다고 하며, 그 후 선생님을 존경하여 한동안 ‘백범사상연구소’를 차려 꾸리시기도 하였지요. 저는 백기완 선생으로부터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가끔 들었고, 또 범의 기상을 가진 백선생을 통해 선생님의 성정과 인품, 용맹과 기개를 가늠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얼마전 작고하신 리영희 선생께서도 어느 글에 자신이 목격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었지요. “해방 직후 테러가 횡행하던 살벌한 시기, 정관계 요인들이 모인 어떤 만찬이 있었는데, 전력 사정이 좋지 않던 때라 만찬장에 갑자기 불이 나갔다. 만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불이 들어왔다. 모두들 어둠 속에서 피신하느라 상밑으로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이 환히 드러났는데, 단 한 사람 백범만이 미동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있었다.”는 일화 말입니다. 선생님의 범같은 기상이 그대로 드러난 일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1949년 6월 26일 극우세력의 사주를 받은 한 군인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셨고, 저는 그 다음해인 1950년 민족상잔의 전쟁이 터진 10월에 태어났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뵌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잠깐이라도 동시대를 살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한 제가 선생님의 일생을 담은 판소리를 창작하려고 하니 처음에는 좀 막막하더군요. 판소리는 풍자와 해학도 중요하지만 절규와 통곡이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지요. 제가 진심으로 절규하고 통곡하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더불어 선생님의 뜻과 생각에 저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은 과연 내가 존경할만한 분인가? 백범 선생님의 생각과 노선과 행동은 옳았는가?

   다행히 저의 전공과목이 (정치)외교학이었으므로 이번 기회에 한국현대사 관련 서적들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고, 그 결과 저는 선생님이야말로 사내 대장부로서 가장 존경할만한 분이며, 선생님의 생각과 노선과 행동은 오늘날 제가 지향하는 생각과 노선에 가장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서거하신 다음해(호랑이해)에 태어난 제가 조금이라도 선생님의 정기를 물려받았기를 염원하면서, 광주의 어느 후배 화가가 수묵으로 그린 무등산 호랑이 그림을 벽에 세워놓고 그 앞에서 소리수련을 하며 범의 기상을 체화하고자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 창작 판소리"백범 김구"공연 모습 - 본 공연은 창작판소리 12바탕 추진위원회의 첫 작품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1주년 기념공연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거의 1년만에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를 완성하여 작년에 대여섯차례 공연을 가졌습니다. 주로 역사적으로 기념이 될만한 의미있는 날을 잡아 공연을 기획하였지요. 3월 1일 삼일절에는 만세운동의 본고장 천안에서 공연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1일 전후해서는 경교장에서 가까운 서울 정동극장에서 공연하였고, 석가탄일인 초파일 즈음에는 선생님이 젊은 시절 잠시 머물렀던 공주 마곡사에서 공연하였으며, 선생님이 서거하신 6월 26일에는 효창동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공연도 하고 선생님 묘소에 참배도 드렸었지요. 또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8월 29일경에는 국회의사당 안에 있는 헌정기념관에서 공연을 가진바, 저희로서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헌정에 불참하신 선생님을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회안으로 모셔들이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천의 어느 언론사 초청으로 인천문예회관에서 공연을 가져 선생님이 젊은 시절 두 번이나 갇혀있던 인천감옥을 -인천과의 인연을- 추억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공연을 본 관객 청중들의 반응은 다행히도 매우 좋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판소리로 백범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음에 즐거워하기도 하고 감격스러워 하기도 하였습니다. 3시간이 넘는 대작이어서 저를 포함하여 3명의 소리꾼이 나누어 소리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최근 10년 넘게 판소리를 작파하고 있던 차라, 소리꾼으로 복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작심하고 추진한 창작판소리 12바탕 중 첫 작품이 바로 백범 선생님이었기에 그나마 범의 기상으로 소리기운을 되찾는 것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이처럼 판소리 창작을 통해 선생님을 깊이 만나뵐 수 있었음에 저로서는 참으로 기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판소리 사설을 쓰기 위해 현대사 관련 책들을 보다가 저는 선생님에 관련한 학자들의 평가, 기대와 비판에 있어 몇가지 논란점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편지를 쓰게 된 것도 사실은 이에 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저의 생각이 부족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학시절 한때 정치외교학도였던 저로서 선생님에 연관된 몇가지 논란에 대하여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선생님께서 가장 앞장서서 전개하셨던 ‘반탁운동’에 대한 평가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반탁운동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또는 언론의 오보로 인한 오류로 만약 그 때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그 일정대로 추진하였다면 5년 안에 통일독립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는 가설을 내세우는 이가 있더군요. 하지만 역사는 가정할 수도 없으려니와 과연 그럴까요? 신탁통치를 순순히 거쳤다면 강대국들이 약속한대로 한반도의 통일독립이 보장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너무 안이한 태도 아닌가요? 그러한 가정이 성립하려면 당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어떻게든 한반도 문제에 관한 협상안을 타결했어야 맞는 것이고, 또 유엔(UN) 총회가 결정한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소련이 거부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미국 역시 유엔 소총회에서 굳이 ‘가능지역에서의 총선거안’을 관철시킬 이유가 없었을 터이지요. 미소간 냉전이 시작되던 세계사적 상황에서 ‘한반도 통일독립정부 수립’은 신탁통치를 받든 안받든 결코 보장되어 있던 것이 아닐진대, 민족자주정신에 바탕한 신탁통치반대운동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그 정당성이 부인되어서는 안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해방정국에서 우리 민족이 휩쓸린 오류는 찬탁 또는 반탁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찬탁 하려면 모두가 찬탁하고, 반탁 하려면 모두가 반탁했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1945년 12월말 분명 거족적인 반탁운동이 일어났음에도 1946년 1월초 갑자기 공산진영이 찬탁으로 입장을 바꿈으로써 극렬하게 대립하게 된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 분열의 시발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둘째는 ‘1946년 3.1절에 평양역 광장에서 일어난 김일성 암살 음모의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는 설에 대하여 일부 진보적 학자들이 단정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김구 배후설’은 “김일성 암살 미수범들이 ‘백의사’라는 전문 테러단체 소속으로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들 범인들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발급된 승차편의 협조공문과 신임장을 지니고 있었다”는 북측의 발표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문건들이 피할 수 없는 증거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북측 최고 권력자를 암살하려는 어떤 세력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는 문건들을 테러범들로 하여금 소지케 하였다? 아무리 군사작전의 초보자라도 암살 테러를 사주하려는 자가 배후의 정체를 일부러 들키게 하여 공작을 벌일 리가 있습니까?

   김일성 암살 음모에 관련한 김구 배후설'은 누군가의 역공작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엇보다도 만약 선생님이 그 사건의 배후라면 1948년 4월 남북정치협상을 하기 위해 방북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했겠습니까? 북에서는 김구라는 이름을 지독히 비하하여 비난하고 있었고 곳곳에 ”김구와 이승만을 타도하자“는 격렬한 벽보들이 붙어있음을 아시면서도 선생님이 방북을 결심하신 것이야말로 김일성 암살 미수사건에 선생님은 전혀 관련없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셋째는 진보적 성향의 일부 학자들이 갖고 있는 ‘김구의 이념성향은 결국 우익이라는 한계가 있었다.’는 견해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한 판단은 아마도 해방정국에 활동한 여러 인물들을 비교하면서 추출한 결론인듯 한데,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여순반란사건이 나자 이승만과 한민당 등 우익 세력들에 의해 오히려 좌익으로 -적어도 좌익과 공모한 것으로- 몰리지 않았습니까? 좌우를 가르는 싸움은 해방 직후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바, 좌익이 아니면 우익이고 우익이 아니면 좌익이라는 그러한 공격적 구분은 자기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단순 이분법적 논리에서 나온 독단 아니던가요?

   또 어떤 이는 ‘백범이 좌우합작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하더군요. 물론 선생님이 좌우합작에 좀더 적극적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선생님은 오히려 중경 임시정부 시절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원봉과 좌우합작하여 획기적인 강령들을 채택한 바 있고, 해방정국에도 오로지 민족 분단을 막고자하는 일념으로 일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남북협상을 시도했던 것 아닙니까? 더구나 선생님은 극우파의 사주를 받은 저격범에게 끝내 피살당하고 마셨는데, 그러한 선생님을 두고 좌우로 갈라 평하는 따위야말로 매우 편향된 태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남기신 명문장 <나의 소원>은 물론이고, 1948년 4월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행한 연설 안에 이미 선생님의 생각과 주장이 고스란히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어디 있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가 존재할 수 있으리요. 현단계 우리 민족의 유일 최대 과업은 통일 독립의 전취이며, 고로 우리의 공동한 투쟁 목표는 단선 단정의 분쇄인즉, 이는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철저히 방지해야 할 것이오.”

   선생님은 애초부터 좌우 논리를 뛰어넘은 자리에 서 계셨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저는 선생님이 택하신 길을 중도(中道)라고는 표현하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앞서 걸어가신 길은 다만 정도(正道)일 뿐입니다.

▲ 임진택 선생의 공연 모습

   백범 김구선생님!

   저는 앞으로 제가 만든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를 좀더 압축하여 혼자서 완창 해보려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판소리로 선생님의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을 온 겨레의 가슴속에 깊이 새기고, 선생님 가신 그 발자국 따라 아름답고 힘찬 문화 상생의 길로 온국민이 함께 손 잡고 걸어갈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아울러 청소년들을 위한 판본을 별도로 축약 구성하여 초중등 각급 학교를 순회 공연하는 계획도 세워보려 합니다. 일찍이 선생님께서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세우시고 또 백범학원과 창암학원을 세우셨던 그 취지를 되살려 오늘날 우리의 청소년학생들이 진정 올바른 나라, 아름다운 나라를 꿈꿀 수 있도록 앞장서 나가겠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정기를 내려 주십시오.

   삼가 선생님의 명복(冥福)을 빕니다.

   2011. 6. 3. 광대 임진택 올림




  한목 임진택

 

   판소리 12바탕 추진위원회 연출가, 판소리꾼.

김구(金九, 1876. 8. 29. ~ 1949. 6. 26.)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백범일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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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7 17:25 2011/06/0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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