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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다섯번째 편지 - 2019년 1월 8일      

100년 편지

몽양 여운형 선생께 -서중석-


  외람된 말씀을 드리지만, 저는 1929년 7월 10일  상해경마장에서 베이스볼  게임을 구경하다가 선생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것은 정말 우리에게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강의시간에도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무슨 망발이냐고 화를 낼 분들이 많겠습니다만, 제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긍을 할 것입니다.

  무릇 어느 지역이고 독립운동은 자기 나라 민중들과 함께 살면서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간디나 네루가 이란이나 이집트에서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잖아요. 우리는 워낙 강포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억압 통치에 놓이다보니까 국내에서 지속적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가 어려웠지요. 또 북간도건 서간도건 조선인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와 살았기 때문에 국외로 망명해 그들을 기반으로 독립군을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벌일 수 있었지요. 초대 상해교민회장을 한 분이 바로 선생입니다만, 상해는 교통이 편리하고 프랑스 조계처럼 일본 경찰이 들어오기가 어려운 조계가 있었고, 교민도 약간은 있어서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었지요.    

몽양 여운형

  선생이 체포된 것이 우리 민족에게 행운이었다는 것은 민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선생은 민중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탁월한 지도자여서 민중과 더불어 함께 활동하는 것이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타력에 의해서지만 선생이 국내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은 일찍이 이만규도 잘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만규는 <여운형투쟁사>에서 “몽양의 투옥은 혁명운동면에 있어서 커다란 과제를 만든 것이다. ‘몽양이 끝끝내 해외에 있어야 할 것인가? 국내에 있어야 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습니다. “사막이 된 이 땅에 샘물을 파내고 국혼國魂이 고목 같이 말라가는 그때에 생기生氣를 올리는 일은 오직 몽양이 아니고는 지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입국의 전제로 일어난 투옥 사건은 얼른 보아 불행한 듯하나 진정한 의미에서 꼭 필요하고 중대한 사실이었다.”

  선생은 약 3년 감옥 생활을 하고 출옥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되어 계몽 활동과 함께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지요. 일제의 통치가 워낙 지독해서 전국적인 대중적 활동은 신문을 통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교회 활동도 대중과 함께하는 좋은 기회였지요. 선생은 예수의 참된 정신을 이 땅에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진보 신학, 해방신학을 그 당시에 펼친 것이네요. 뜻있는 일을 할 만한 동량들의 주례를 선 것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선남선녀들이 선생의 주례사를 들으며 가슴에 깊은 뜻을 새길 수 있었지요.

  선생은 야구 구경을 하다 잡혀왔습니다만, 체육을 아주 즐겼는데, 국내에서는 체육 활동을 하면서 젊은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지요. 북간도에 가서도 체육을 통해 젊은이들을 격려했는데, 그곳에서 강원룡이란 젊은이를 만난 것은 뒷날 그 젊은이의 행보를 돌아볼 때 아주 잘 된 일이었습니다. 그는 해방 후 서울로 와 선생을 따르면서 진보적 활동에 평생을 바쳤잖아요.

  선생의 체육 활동으로 잊을 수 없는 것이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일입니다. 최초의 일장기 말소사건이었고, 그래서 조선중앙일보는 문을 닫았지요. 선생은 1934년부터 해산된 1937년까지 조선체육회장이었고, 손기정은 선생의 아들 홍구와 양정고보 동창이어서도 손기정과 여러 젊은이들이 베를린 올림픽에 나가는 것에 마음을 썼습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선수단 환영식에서 “여러분들은 비록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나서지만 등과 머리에는 조선반도를 짊어지고 나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격려했습니다.

  제가 역사학도여서 염치없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선생이 체포된 것은 풍부한 재판 기록을 남기게 했다는 점에서도 우리 역사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선생은 어디에서나 당당하였습니다. 재판을 받을 때도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주저하지 않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선생의 사상과 활동을 연구하는데도 더 없이 좋은 자료가 되었고, 1910년대 후반기나 1920년대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를 연구하는데도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되었지요. 이만규의 <여운형투쟁사> 등과 또 다르게 귀한 자료가 된 것이지요. 그러니 선생이 잡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귀중한 기록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일제도 선생과 도산 안창호처럼 한국인에게 영향력이 있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피력한 재판 기록은 귀중하다고 판단해 그것을 모아 <조선사상운동자료>로 내고 그랬지요.

  선생이 체포된 것은 정말 잘 된 일이다,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큰 행운이 되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1945년 8·15해방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이 동남아를 지배했던 것과 다르게 일제의 통치는 훨씬 악랄했습니다.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기본권에서 동남아와 많이 달랐지 않습니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독립운동이 국외에서 많이 벌어진 것도 일제의 탄압이 영국 등보다 훨씬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이 만주 연해주·시베리아, 중국 관내 등 여러 곳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일제가 패망했을 때 국외 독립운동세력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도 조국으로 빨리 달려올 수 없었습니다만, 연합국이 빨리 고국으로 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도 해방된 지 한참 후에야 환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제1진은 11월 23일에야 들어왔고, 연안 독립동맹 지도자들도 북에 12월이 되어서야 들어왔습니다. 해방 직전 직후에 미국은 우리나라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려고 했습니다. 만일 선생이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될 뻔 했습니까.

  선생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바빠졌고, 1941년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자 구체적으로 건국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YMCA 유도사범 장권으로 하여금 치안대를 조직하게 하는 등 여러 조직에 착수했고, 1944년에는 건국동맹을 조직하면서 국외 독립운동과 연락을 취했습니다. 일제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이틀후인 8월 11일 이만규 이여성 등으로 하여금 국기 국호 독립선언서 문제를 구체화하도록 했고, 8월 14일 아침 엔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만나 정치범을 석방하게 하고 치안을 우리가 맡겠다고 확언했습니다. 그날에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에 들어갔고, 16일에는 장권을 위원장으로 한 건준 중앙 치안대가 뜨면서 전국 각지에서 치안대 등이 조직돼 해방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맞았습니다. 일부 학자는 언론의 자유, 정치의 자유 등 자유를 미군이 준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이것도 해방된 날부터 우리가 쟁취했고, 미군은 나중에 들어와 확인을 했을 뿐입니다. 이러니 선생이 체포된 것은 우리의 민족적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서 중 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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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7 13:53 2019/01/07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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