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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마흔아홉번째 편지 - 2019년 4월 30일      

100년 편지

오선지 위에 독립을 쓰다, 음악으로 한중(韓中)에 다리를 놓으신 정율성 선생님께 -김형석-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고향 빛고을에서 자란 김형석이라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왜군과 전투에 임하시며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즉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고 쓰신 충절의 땅.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맞서 끝까지 싸운 항일의병의 본산. 그리고 5·18민중항쟁으로 군사독재에 항거한 이 나라 민주주의의 성지(聖地). 선생님처럼 저도 남도(南道)의 아들입니다.

정율성

소리의 고장에서 태어나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된 제가 정작 고향의 대선배이신 선생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심했던 저를 꾸짖어주세요. 단절의 벽이 아무리 높다 한들 그 역시 사람이 쌓은 것이니, 허물지 못한 책임은 저희에게 있습니다. 재갈과 채찍이 아무리 모질다 한들 가락과 장단만큼은 가둘 수 없는 법이거늘, 한 명의 음악가로서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

그날이 20171214일이었습니다. 북경 인민대회당 소예당에서 한중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한중문화교류의 밤공연이 열렸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관람하셨어요. 제가 한국 측 예술감독으로 총연출을 맡았습니다. 제가 편곡한 중국 민요 모리화(末利華)가 연주되었고요. 그 공연에서 중국 측은 인민해방군가를 들려주었습니다. 사실상의 중국 국가로, 수십 년 동안 수억 명의 중국 인민이 애창한 노래라고 하더군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작곡한 분이 한국인이라는 거에요. 한국인이 중국 국가를? 우리로 치면 애국가를 외국인이 작곡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깜짝 놀랐어요. 대체 어떤 분이기에, 자존심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중국인들이 군말 않고 따라 불렀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그분은 무엇 때문에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을까? 뭐든지 물음표에서 시작하는 거잖아요. 파고 들어갔습니다. 독립운동, 망명, 의열단, 한국과 중국의 항일연대, 타이항산(太行山) 전투, 팔로군(八路軍)…. 우리가 잊고 지냈던 역사의 실마리가 풀려나왔고, 그렇게 저는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악은 지식보다는 지혜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거니까요. 하지만 배경과 맥락을 접하면 감동이 더 울린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확인하자 선생님의 음악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진짜 마음이 움직였어요. 아리랑을 듣고 자란 선생님이 머나먼 낯선 땅에서 조국의 해방을 꿈꾸며 이국의 형제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노래를 지으실 때 어떤 심정이셨을까? 무엇보다 애국가를 먼저 쓰고 싶으셨을 텐데….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랐어요.

요즘 세대가 들으면 더 깜짝 놀랄 사연도 찾았습니다. 선생님을 가르쳤던 스승님께서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라고 권하셨다면서요? 너는 재능이 있다, 모든 비용은 내가 다 대겠다고 말이지요. 음악가로서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제안인지 저는 압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선택은 망명이었습니다. 오로지 독립을 위해…. 어쩌면 음악가로서의 재능과 성공을 깡그리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그 험한 가시밭길을 자청하셨습니다. 가슴이 아렸어요.

선생님이 걸으신 길을 뒤쫓으면서, 과연 내가 작가로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게 무엇일까 곰곰이 되짚어보았습니다. 감성일까? 재능일까? 그것을 키워서 내가 음악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목적이란 단어가 예술을 수단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는 교훈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되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에게 음악이란 무엇이었나요? 일제와 대결하기 위한 무기였다고 단정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선생님의 음악을 무한한 이타심의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그 자세를 배우고 싶고, 그 뜻을 잊지 않고 싶어요.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한순간도 음악이라는 끈을 놓지 않은 정율성 선생님. ‘한류(韓流)’라는 말 못 들어보셨지요? 우리 젊은이들이 즐겨 듣는 한국의 가요들이 중국이나 동남아로 퍼져나가, 그쪽 젊은이들도 열광한답니다. 저도 한중문화교류사업에 몰두하면서, 한 달에 절반은 중국에서 지냅니다. 제가 정율성 선생님 고향 후배가 된다니까, 중국 친구들이 엄지를 척 내밀어요. 자기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마오쩌둥 주석이 정말 좋아했던 음악가라고요. 중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3대 작곡가 중 한 분이 선생님이랍니다.

어깨가 으쓱했어요. 선생님이야말로 한류의 개척자이셨네요. 따지고 보면, 광활한 대륙을 누비며 항일전의 선봉에 섰던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그러셨던 것 아닌가요. 선생님께서 팔로군과 함께 싸운 타이항산의 산골짝 마을에도 가보았습니다. 세상에, 이빨이 다 빠진 중국 할머니들께서 우리 독립군가를 기억하고 부르시는 거예요. 그 모습에서 진짜 인류애를 보았습니다. 그 어떤 이념으로도 문화교류는 막을 수 없어요. 그게 바로 평범한 개인들이 일상의 감정을 나누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분들에게 해방 후의 역사는 너무나 슬프고 비참했습니다. 조국에 돌아왔더니 친일파가 판을 치고, 분단을 막자고 했더니 빨갱이로 몰렸어요. 다른 분도 아닌 백범 김구 선생께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흉탄에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이 역사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아직도 선생님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돈은 중국에서 벌면서 중국이 한마음으로 존경하는 선생님을 손가락질하는 한국인을 중국인들이 친구라고 대접하겠습니까?

정율성 선생님, 제가 일을 하나 만들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고 해요. 전 세계 어디에 이런 드라마가 있겠어요. 영화의 무대는 선생님이 태어나신 광주와 중국이에요. 선생님의 삶이 한국과 중국을 잇는 단단한 다리가 되어주시기를, 선생님의 음악이 아시아에 평화를 선물하는 소통과 화합의 메시지로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시나리오 작업에 이미 들어갔고, 중국 친구들과도 힘을 합치고 있으니까, 조만간 기쁜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형석이 자신이 작곡한 원 드림 원 코리아를 소개하고 있다.

선생님, 지금 한반도에는 평화의 기운이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안팎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선생님께서 믿으시듯이, 우리 민족은 잘 해낼 것이라고 저도 믿어요. 지난번 남북정상회담 때 제가 작곡한 ‘One Dream One Korea’라는 곡을 우리 ‘K-pop’ 스타들이 합창했어요. 가사 첫 줄이 이거에요. “우린 다른 것이 없어요. , 남 다른 것이 없어요.” 최근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의 마음을 담아 ‘Korean Dream’이라는 노래를 만들었어요.

선생님 덕분입니다. 독립을 위해 애쓰시며 갖은 고초를 당하시면서도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 동포를 위해 당신이 가진 재능을 오선지 위에 남김없이 쏟아부으신 선생님.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저의 음악이 지향해야 할 게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서로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사람 사는 세상. 정의가 왜 필요할까요. 억울하고 헐벗은 사람이 없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겠어요? 선생님의 시대에는 독립이 그것이었겠지요.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광주항쟁을 목격했습니다. 어린 저는 몰랐습니다. 형들과 삼촌이 왜 목숨을 버려야 했는지…. 그저 몸서리만 쳤어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오랫동안 정치랑은 담을 쌓고 살았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비명에 가시고, 그 충격에 김대중 대통령마저 눈을 감으시고 나서, 분노가 일었어요. 두 분의 서거(逝去)는 망각의 저편에서 놓쳤던 저의 뿌리를 호출했습니다. 5월의 기억은 희석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은 율성(律成). 선율을 완성한다는 뜻이지요? 선율의 극치인 하모니란 나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상대를 빛나게 해줄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 조상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화이부동(和而不同)’처럼요. 음악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더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음악을 아름답게 듣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음악만으로도 서로의 진심을 알아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놀랍고 뭉클한 일인지요. 선생님께서는 그 고귀한 진리를 제게 가르쳐주셨어요.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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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鄭律成, 1918~1976)

전남 광주 출신. 형제들이 모두 독립운동가로 항일전선에 투신했다. 1933년 셋째형과 누나를 따라 중국 남경으로 망명, 의열단이 세운 조선혁명간부학교를 2기로 졸업하고 민족혁명당에 가담했다. 1937년 팔로군의 근거지 연안(延安)으로 가서, 노신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에서 음악을 전공한 뒤, 타이항산에서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 소속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3·1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등의 작품을 썼으며, 연안에 있을 때 작곡한 팔로군행진곡은 중국 정부가 인민해방군가로 공식지정했으며, 사실상의 중국 국가로 15억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 형 석

196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랐다. 대한민국의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대표적 작곡가. 신승훈, 김건모, 조성모, 박진영, 엄정화 등의 히트곡을 작곡했으며,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곡만 무려 1천 곡이 넘는다. 한국예술원 실용음악예술학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쓰고, MBC <나는 가수다>, <복면가왕>의 패널로도 활동했다. 키위미디어그룹 회장, 케이노트 대표. 케이팝 아카데미를 중국에 설립하고, 양국간 문화교류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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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30 14:33 2019/04/3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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