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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이백 예순 다섯번째 편지 - 2017년 5월 16일      

100년 편지

나의 정신적 스승! 항일혁명 시인 이육사 -하성환-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망국의 순간! 자결한 우국지사들이 18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벼슬한 선비로서 치욕과 통분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지요. 나라가 망하는 순간! 벼슬 한 번 하지 않고 글공부에만 매달린 전라도 산골의 매천 선생도 치욕과 통분 끝에 자결합니다. 절명시(絶命詩)와 함께 자제들을 모아 놓고 매천 황현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셨지요.

"조선 왕조가 선비의 나라인데 선비를 길러낸 지 5백년 나라가 망하는 순간 선비 한 명도 죽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는가!"

이육사

마찬가지로 이육사 당신의 친척 이만도, 이중직 등 안동의 선비들도 나라가 망하는 때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분들은 당신의 할아버지 이중직과 함께 개화기 계몽운동을 펼쳤던 안동의 선각자들이셨지요. 당신은 6살 때 할아버지 이중직에게 소학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열두 살 즈음엔 새벽 1시가 되도록 중용, 대학을 읽으며 유교의 전통규범을 배웠습니다. 당신은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자 안동 선비 마을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지요. 엄격한 선비정신이 인격 속에 내면화된 모습은 당신이 쓴 수필 『계절의 오행』 속에 이런 구절로 나옵니다. '마을의 무서운 규모가 우리를 키워주었다'고 술회한 대목이지요. 지조와 절개를 목숨처럼 중요시했던 당신의 삶은 그대로 독립운동 과정에서 17번의 투옥과 고문을 이겨내는 정신적 근원으로 작용했습니다. 다음 일화는 그것을 명증하게 보여주지요.

이원조(육사의 동생)

1927년 10월 대구에서 '장진홍 의거'가 발생합니다. 조선 민중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데 앞장 선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져 일본경찰을 놀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의 첨병! 조선은행을 응징한 사건이었지요. 당시 당신과 형제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에도 일본 경찰의 극악한 고문을 받습니다. 매일같이 대나무로 훑듯이 고문으로 피에 젖은 옷가지를 받아내는 수형생활을 이원기, 이원조 등 당신의 형제들은 감당합니다. 고문을 받을 처지로 몰릴 때면 형제애가 두터워 서로 자신이 받겠다고 나섰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유명한 일화는 수형생활 동안 당신의 수인번호 '二六四 이육사'가 필명이 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허형식 장군

안동 마을의 엄격한 분위기와 선비정신이 일제의 극악한 고문과 형벌을 이겨내는 정신적 근원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와 더불어 당신의 외할아버지가 의병장 범산 허형 선생입니다. 서대문형무소 1호로 처형된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과 종형제이셨지요. 당신의 외숙부 허규를 비롯한 친척들 역시 모두 항일 독립 운동가집안이었습니다. 당신이 만주 전투지구에서 잠깐 조우한 허형식 장군은 당신의 대서사시 『광야』에 나오는 바로 그분을 노래한 것이지요. '다시 천고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바로 당신이 그토록 흠모했던 허형식 장군을 묘사한 대목입니다. 1930년대 일제와 치열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독립운동단체 동북항일연군! 바로 그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참모장 및 군장이 당신의 외가 친척 허형식 장군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이중직 선생은 나라가 망하자 집안 노비를 풀어주고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립니다. 그리고 신학문을 가르치는 보문의숙(도산공립보통학교의 전신)을 세웁니다. 그곳에서 물리와 화학 등 서양학문을 접하면서 '그야말로 살풍경한 10년이 지나갔다'고 당신은 수필 『연인기』에서 고백했지요. 유교의 엄격한 전통적 질서와 규범이 해체되면서 근대 학문에 눈 뜨게 된 당시의 혼란한 풍경을 그렇게 소회한 것으로 읽히는 대목이지요. 당신이 15살 되던 해 3?1운동이 일어납니다. 20살이 되던 1924년에 일본 유학을 떠나지요. 일본 유학생활 동안 당신은 아나키즘 운동 「흑우회」에 가입하면서 사회의식에 눈 뜨게 됩니다. 더불어 같은 안동 고향 출신이자 의열단원 김지섭의 일본 왕궁 폭탄 투척 사건(1924. 1)을 통해 민족의식에 크게 눈 뜨게 되지요. 의열단원 김지섭의 의거는 불과 몇 개월 전 관동대학살(1923. 9) 당시 조선인 학살 만행에 대한 응징이었기 때문입니다. 1년이 채 안 된 짧은 일본 유학생활에서 돌아온 당신은 1925년 귀국 직후 비밀결사조직에 가입합니다. 당신이 1925년 귀국 직후 형제들과 함께 가입한 비밀결사조직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국내에 거주한 당신의 친한 문우 신석초, 이병각에게도 비밀로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지하공작활동을 다물단 또는 의열단으로 추정할 뿐이지요.

분명한 것은 한 때 중외일보 동료기자이자 독립운동 전선에서 깊은 우정을 나눈 극친한 친구 윤세주를 생각할 때 의열단으로 기울어집니다. 석정 윤세주는 의열단 창단 멤버이자 핵심 단원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북경을 오가는 도중 만주 봉천에서 윤세주를 만나 그분의 입교 권유로 당신은 윤세주와 함께 의열단 군관학교에 들어가 훈련을 받습니다. 의열단장 김원봉이 1932년 장제스 국민당 지원을 받아 세운 의열단 군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 졸업생이 됩니다. 6개월 훈련과정을 통해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 군사학을 배웠지요. 특히 군사학은 통신법, 선전법, 연락법, 탄약, 뇌관, 도화선 등 폭발물 취급 및 투척법, 요인 암살, 사격술, 위장 및 변장술, 무기운반법, 철로폭파법, 서류은닉법 등인데 사격술에서 당신은 백발백중 명사수였습니다. 졸업 후 국내에 침투하여 노동자, 농민의 항일의식화와 의열단 군관학교 인재 발굴 공작 임무를 띠고 지하운동을 전개하지요.  

1932년 「자오선」 동인지에 발표한 『노정기』는 지하공작활동으로 정크선을 타고 밀항하는 항일독립운동가의 신산한 삶이 잘 묘사된 작품이지요. 비밀결사와 지하항일운동, 일경의 첩보망에 걸려들지 않으려는 치열함 속에서 긴장과 불안 그리고 신산한 삶이 녹아든 빼어난 작품입니다. 항일혁명가로서의 삶과 문학이 그대로 일치된 수작이자 항일혁명시인 이육사 당신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절친 신석초의 표현대로 상냥하고 맑은 외모와 예지가 깃든 외모와 품격을 지닌 신사였습니다. 절친한 문우 이병각 부부가 폐렴에 걸리자 친척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이병각의 집과 병원에 기거하면서 성심으로 병간호를 다한 당신의 모습에서 따스한 인간애를 느끼게 합니다. 친구 병간호로 폐렴에 걸려 요양 중임에도 당신은 지하공작과 항일독립운동을 멈추질 않았지요. 결국 당신은 폐질환이 낫지 않은 상태에서 1943년 10월 서울에서 일본 헌병대에 피검돼 북경으로 압송됩니다. 「스무 살 된 벗에게」와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란 작품을 발표하며 28살 서정주가 조선 청년들을 향해 전쟁으로 나갈 것을 부추기던 1943년 10월에 당신은 전격 체포된 것이지요. 3개월 뒤 일경의 잔혹한 고문 끝에 1944년 1월 16일 당신은 순국합니다. 북경 일본 영사관 경찰서 감옥에서 온몸이 피로 낭자하여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말이지요.

당신은 절대 다수 문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타협하여 친일적인 글쓰기를 하던 혹독한 시절! 매화 향기 홀로 피워내며 일제 암흑기 어두운 밤하늘 저항의 별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진정 '겨레의 큰 시인'이자 삶과 문학이 일치된 나의 영원한 정신적 스승이십니다.

             하 성 환

 

현재 여의도교 교사

저서 : <사회철학 에스프레소>, 

평론 : <망국의 순간, 조선사회 두 얼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아나키스트 항일 혁명가 이회영>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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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5 15:09 2017/05/15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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