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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삼백 서른일곱번째 편지 - 2019년 4월 12일        

100년 편지

검은 눈의 볼셰비키 김알렉산드라 님에게 드리는 편지 -김혜진-

 

19189월 러시아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을 서른세 살의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 님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은 곧 러시아혁명을 무너뜨리려는 백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아무르강에 던져질 운명이겠지요. 1917년 러시아 반혁명 백군이 기세등등하던 하바로프스크시를 탈출하는 마지막 배에서 백군에게 발각되던 순간부터 죽음을 각오했을 것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당신을 스쳐지나간 기억들은 어떤 것일까요? 볼셰비키 당원으로서 1917년 세계의 역사를 바꾼 러시아혁명을 경험하고, 볼셰비키 하바로프스크시당 비서,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장이며,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이력까지···. 어찌 보면 매우 화려해보이기도 하고 매우 치열하기도 했던 삶일 텐데, 아무래도 당신의 마지막에 떠오른 것은 당신과 함께 싸웠던 우랄산맥의 벌목공들, ‘우랄노동자동맹의 동지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당신이 만난 우랄산맥의 노동자들을 생각해봅니다. 생존을 위해 조선을 떠나 그 먼 곳까지 일하러 가야 했던 조선의 백성들 말입니다. 일제의 수탈 때문에도 고통을 받았겠지만, 지주의 횡포 때문에 혹은 농토를 잃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이들이 그 먼 곳까지 일하러 왔겠지요. 그런데 그곳 벌목장은 심한 감시와 매질이 일상이고, 임금도 체불되던 현장이었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알렉산드라

그곳에서 김알렉산드라 님이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우리 5천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은 더 이상 제정러시아의 노예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함께 일어서서 대중 집회를 조직하고 불공정한 계약의 이행을 거부하며 싸우는 수천의 노동자들을 만난 것이 당신에게 정말로 큰 기쁨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지만, 그분들이 바라는 세상의 모습은 모두 달랐겠지요. 누군가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주적인 나라가 되면 좋은 세상이라고 믿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서방 세계처럼 산업이 발전하고 민주주의 제도가 만들어진 나라를 꿈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김알렉산드라 님은 일관되게 조선의 인민이 러시아의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진정한 독립이다라고 이야기를 하셨더군요.

아마도 조선시대 무너져가는 농민의 삶, 새롭게 형성되는 노동자들의 고된 삶을 보며 일본에서 벗어나더라도 그것만으로 조선인들의 삶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주적인 나라의 주인이 되는 그런 독립을 원했던 것이겠지요. 그런 바람을 가진 당신이 그 뜻을 더 잘 펴지 못한 채 내전의 와중에 희생된 것이 아쉽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랄산맥에서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 일본인이 나뉘고 위계화되어 있던 것처럼, 지금 한국의 노동자들도 위계화되어 어떤 노동자들은 심각한 차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사회 절반에 가까운 비정규직 노동자 이야기입니다. 우랄산맥의 벌목공들처럼 매질과 살해 위협을 받지는 않지만,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용이 불안하고 일터괴롭힘에 시달리며,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해고의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노동조합을 만들기가 어렵다 보니 비정규직의 노조 조직률은 2%밖에 되지 않고 비정규직의 목소리는 사회적으로도 매우 약합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조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면서 굴뚝에 올라가 1년을 넘는 시간을 보내고,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면서 40일 가까운 날들을 굶으며, 복직을 요구하며 겨울 거리에서 오체투지를 합니다. 꿈을 꾸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위해서 온몸을 바쳐야 하는 퇴행의 시대입니다.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라고 하고,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넘어섰다고 하는데, 그 화려한 수사 뒤에 감춰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한국은 독립했으되, 비정규직 노자들은 아직 주인으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니 진정으로 독립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더욱 기억하고 싶습니다.

잠시 후면 반혁명 백군이 당신의 머리에 총을 쏘겠지요. 그 당시 조선의 많은 노동자들에게는 희망이고 용기였을 김알렉산드라, 아마도 많은 이들이 당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 뜻을 기억하고자 하겠지요. 그런데 100년 후 우리에게는 당신의 뜻과 의지가 잘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하듯이 당신의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낯섭니다. 지금 우리는 당신의 부재를 아쉬워할 만큼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절망은 그런 단절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죽지 않고 그 의지와 실천이 계속 이어졌다면, 단지 일본의 식민지에서 주권을 되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와 농민들이 스스로 주인임을 선언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새로운 사회체제의 가능성을 열었다면 지금 노동자들의 삶은 조금은 달라졌겠지요.

김알렉산드라가 처형당한 아무르강변에 세워진 추모비

그런데 당신이 꿈꾸던 사회주의는 이상만 남긴 채 현실에서는 스러져버렸습니다. 볼셰비키들이 죽음으로 지킨 사회주의는 관료들의 국가가 되었고, 자본주의에 굴복했습니다. 노인들의 옛 기억처럼 낡은 풍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습니다. 돈의 노예가 된 지금의 삶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대체 어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지 알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꿈꾸던 세상은 단지 사회주의라고 이름붙인 어떤 붙박이 사상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수동적이고 무기력했던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어서서 자신을 주체로 선언하며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힘을 믿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계속 꿈을 꾸려고 합니다. 100년 전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당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꿈은 오랫동안 아무르강 속에 잠겨있었을지 모르겠지만, 100년 후 이곳 한국 땅에서 돈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주인으로 선언하며, 지금의 체제가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 이들의 꿈으로 다시 나타나리라 믿습니다. 지금은 비록 해고를 하지 말아라”, “최저임금을 올려라”, “약속을 지켜라라고 요구하지만, 이것이 체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이들과 함께하는 꿈, 각자도생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함께 살기를 선택하며 단결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꿈으로 말입니다. 그 이름도 낯선 김알렉산드라, 당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저는 다시 당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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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알렉산드라(金─, 1885~1918)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약 110km 위에 있는 우스리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두서는 함북 북청이 고향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친구인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했다. 이때 스탄케비치라는 성을 얻었으나 1914년 이혼하고, 1915년부터 우랄산맥 벌목장에서 조선인 통역으로 일했다. 1917년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하바로프스크시당 비서,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장을 맡았다. 한인 최초의 볼셰비키로서, 1918년 이동휘 등이 결성한 한인사회동맹에 가담했다. 내전 와중에 반혁명 백군에게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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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혜 진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전국노동단체연합 편집실장을 거쳐, 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 정책팀장으로 일했다.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노동권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비정규사회>, <비정규직 없는 세상>(공저), <모든 노동에 바칩니다>(공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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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1 14:30 2019/04/1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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